노년의 우울
정 성 천
일전에 문우인 한 친구가 나의 글이 너무 철학적이라서 가볍게 읽을 수가 없다.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나의 수필작품에 대한 평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은 내 수필이 다소 철학적이고 현학적으로 어려워서 보통의 사람들이 읽기를 꺼릴 것이다. 라는 진정성 어린 충고로 나는 받아 들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나의 글이 다소 철학적으로 흐르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 칠십을 넘기고 보니 삶과 죽음에 대한 내 나름의 확고한 정의라고 할까? 아니면 철학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내면적인 버팀목이 절실해졌다. 그런 버팀목 없이는 단 하루도 평온한 마음으로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사실 삶과 죽음이 나의 사고에 주된 주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6년 전 40대 후반에 겪어야만 했던 아들의 죽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들이 21살 꽃다운 나이에 죽었을 때 나는 세상을 원망하고, 아들 하나도 옆에 두지 못할 정도로 박복한 나를 원망하고, 아들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홀연히 떠난 아들놈도 원망하고, 유독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내가 믿는 종교의 신도 원망했었다. 나의 삶에 대한 원망의 시간이 얼마간 지나가자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자연스레 관심을 쏟게 되었고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명상과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나의 삶에 명상을 접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26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가졌던 세상에 대한 모든 원망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만든 것이며 아들놈은 제 갈 길을 갔을 뿐인데 내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도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남보다 좀 더 일찍 마음을 바라보는 명상을 삶에 접목하게 된 결과라고 판단할 때 아들놈은 불효자가 아니라 내 노년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 효자라는 생각도 이제는 가끔 하게 된다.
그렇다. 아들의 죽음은 상실의 아픔을 넘어서는 많은 유익한 것들을 나에게 남겨 주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또한 깊은 사고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그저 막연한 죽음 즉 누구나 철학 서적에서 흔히 만나는 삶과 죽음으로 지금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매일 자고 나면 육체의 쇠락을 내 몸으로 직접 느껴야만 하는 칠십 고개를 넘어서자 삶과 죽음이 나의 현실 문제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일시적인 행복으로 덧칠한 즐거운 마음 상태는 때때로 가질 수가 있고 남들과 어울려 모든 걸 잊고 잠시의 즐거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낯선 땅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풍물을 신기하게 여기며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그 끝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초조감도 잠시 잊을 수도 있는 게 우리 노년의 삶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초조감은 가을 안개처럼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이내 기분 나쁜 불만족으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장마철 눅눅한 습기처럼 삶의 갈피갈피 마다 배어들어 육체의 쇠락을 매 순간 느껴야 하는 노인들을 대책 없는 우울감에 젖게 만들어 버린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이 종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즉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신에 의지하여 굳건한 신앙심으로 죽음 후의 천국을 그리며 현실의 삶을 참아내며 살아가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인 것 같다. 아니면 어차피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게 죽음이라면 죽음에 대한 대답을 미루어 덮어두고 애써 외면한 채로 공허한 마음을 취미나 운동,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 그냥저냥 달래며 살아간다. 그러나 몸이 건강할 때는 그런 데로 평온함을 유지하겠지만 어느 부위라도 조금만 아프면 죽음과 연계된 불만족이라는 괴로움의 늪에 빠져 그만 우울해지는 게 우리 노년의 삶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몸이 망가져 가는 노인들이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가 있을까? 육체의 쇠락과 병환에도 불구하고 마음 본바탕에서부터 가득 차 저절로 흘러넘치는 산뜻한 평온함, 그 무엇에도 걸릴 것이 없는 자유스러운 평온함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가 있을까? 동서양의 모든 성인은 말한다. 우리의 외부로부터 즉 대상적인 경험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즉 진정한 행복을 찾아 밖으로만 헤매던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내면을 비추어 보라는 뜻이다. 나도 처음에는 외부에 존재하는 신에게 의존하는 경험 즉 대상적인 경험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평온함 즉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신앙심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신이 너무 멀리 있어서인지 신과의 접촉은 격식이 너무 번거롭고 권위가 너무 장엄해 종교활동으로는 마음 편히 신을 만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도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는 내세의 천국은 보장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 생활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은 얻을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세의 진정한 행복은 기도와 묵상으로 자기 내면의 하나님을 꾸준히 찾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예수님도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하나님 나라(진정한 행복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만인을 관장하시지만 진정한 행복은 내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 행복의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현대 뇌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뇌과학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편도체를 안정시키고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도록 인간 의식과 삶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진단한다. 편도체는 우리 머리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뇌 부위로서 위험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몸이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 편도체가 활성화될 때 우리의 몸은 맞서 싸우거나, 도망갈 수 있도록 무의식적으로 재빠르게 반응한다. 심장을 빨리 뛰게 하여 필요한 근육에 더 많은 혈액을 공급하고 더 많은 산소를 얻으려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몸속의 글리코겐을 분해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얻으려고 모든 장기를 비상 상태로 몰아간다. 이는 인류가 수십만 년 동안 수렵 생활을 거치면서 생존을 위해 갖추게 된 기재다.
현대인의 뇌 작동방식도 수만 년 전 수렵 생활할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현대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이런 상태가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되기에 현대인의 몸과 마음 건강에 많은 해를 끼친다고 뇌과학자들은 판단한다. 편도체와 역행적으로 작동하는 뇌 부위가 바로 전전두피질이다. 편도체가 안정화가 되어야만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고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전전두피질은 활동을 멈춘다. 전전두피질의 활성화는 차분하고도 고요하며 긍정 심리 상태 즉 명상에 심취한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전전두피질이 쉽게 활성화되는 사람은 편도체가 쉽게 안정화되어 항시 고요하고도 차분하며 긍정적인 마음의 소유자가 된다고 한다. 전전두피질의 활성화는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 들어가서 ‘내면의 하나님(불성, 본마음, 본래 면목, 진여, 부처 아니면 배경 자아, 우주 의식, 생명 의식, 순수의식, 등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을 만나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무엇무엇 때문에 행복한 행복은 가짜행복이고 무엇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면 그것이 진짜 행복이라고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정의한다. 육체의 노쇠함과 병환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진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 노인들은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첫댓글 삶의 철학을 담아낸 작품을 음미하며 읽었소.
아픔을 나는 짐짓 모르오. 오직 아픈 사람만이 가슴 아리고
애가 탈 뿐이라는 걸 !
아내가 갑상선앓이와 심부전증 허리와 다리의 쓰라림을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오. 내가 아둔해서도 아닌데~~~
미안하오
이미 알고 있네.
가슴 아리고 애를 태울 게 아니라 눈빛. 얼굴빛, 말빛으로 따뜻한 빛을 비추려고 애쓰시오.
내가, 내가슴이 즉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고 두 존재사이의 관계가 중요하외다.
업을 짓는자도 없고 없을 받는자도 없으나 업은 업보를 다 받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