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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개념
출전: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유혹자의 일기』, 강성위 옮김, 동서문화사, 1978년
제3장 죄의식이 없는 죄의 결과로서의 불안
개인의 삶에서 불안은 순간이다. (99)
그래서 순간은 이행의 일반 범주가 된다. (101, 각주3)
역사적 자유의 영역에서 이행은 하나의 현실적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새로운 것은 비약(현실적인 것의)에 의해 발생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02)
그런데 사람은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지만 동시에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종합이다. (103)
그러나 모든 시점도, 또 각 시점의 총계도 과정(지나가는 속성)이므로 어느 시점도 현재의 것이 아니며, 현재의 것이 아닌 한 시간 속에는 현재의 것도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잇는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현재를 정립하는 것이다. (103~104))
그런데 현재는 바로 무한하게 사라지는 한없이 공허한 것으로서만 시간의 개념이다. 이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현재의 것을 제아무리 신속하게 사라지게 했더라도 현재를 정립한 것이 되며, 일단 정립하면 그것은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이라는 규정 속에 존재시키는 것이 된다. (104)
이에 반해 영원은 현재의 것이다. 사유에서 영원은 지양된 연속이므로 현재의 것이다(시간이란 지나가는 것의 연속이다). 표상에게 영원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행이다. 영원이 표상에게는 무한히 내용이 풍부한 현재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은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에 대한 구별을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는 지양된 연속으로서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104)
그래서 시간은 무한의 연속이다. (104)
순간은, 모든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갖지 않는 현재의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 점에 바로 감성적인 생의 불완전함이 있다. 영원한 것도 모든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을 갖지 않는 현재의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것의 완전함이다. (104~105)
순간은 본디 시간의 원자가 아니라 영원의 원자인 것이다. 순간은 시간에게는 영원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비친 것이다. (106)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은 제2의 종합이 아니라, 인간은 정신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육체와 마음의 종합이라고 하는 첫 번째 종합의 표현이다. (106)
순간에서 비로소 역사가 시작된다. 인간의 감성은 죄로 인해 죄성으로 정립되며, 따라서 동물의 감성보다도 저급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좀 더 고급의 것이 시작되기 때문에 저급한 것이다. (107)
순간은 시간과 영원이 서로 접촉하는 양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시간성의 개념이 정립된다. 이 시간성에서는 시간이 계속 영원을 차단하고, 또 영원은 계속 시간 속을 침투한다. 여기에서 표상에 의해 현재의 시간, 과거의 시간, 미래의 시간 구분이 의의를 가지게 된다. (107)
이 구분에 즈음하여 곧 알게 되는 것은 미래의 것이 현재의 것이나 과거의 것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것이 그 일부를 이루는 전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의미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107)
순간과 미래는 이제 다시 과거의 것을 정립한다. (107)
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원한 것은 과거의 것으로서 배후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 순간이 정립되는 데 단순히 ‘경계’로서 정립될 경우, 미래의 것은 영원한 것이다. 순간이 정립될 때에 영원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미래의 것이므로 이 미래의 것은 과거의 것으로서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 시간이 찬다는 것은 영원한 것으로서의 순간을 말한다. 그러나 이 영원한 것은 동시에 미래의 것이며 과거의 것이기도 하다. (…) 과거의 것은 그 자체가 단독으로 포착되지 않고, 미래의 것과의 단순한 연속 안에 포착되는 것이다. 미래의 것은 그것 자체가 단독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것과의 단순한 연속에서 포착되는 것이다. (108)
정신은 영원의 것이다. 그것이 영원인 까닭은 정신이 제1의 종합과 동시에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인 제2의 종합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정립되지 않는 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단순한 경계로서만 존재한다. 이때 순진무구함의 정신은 오직 꿈꾸는 정신의 상태로서만 규정되므로 영원한 것은 미래의 것으로서 나타난다. (…) 만약 정신이 종합을 정립한다면 그때 개인에게서의 정신의(자유의) 가능성이 불안으로 나타났듯이, 마찬가지로 미래의 것은 여기에서도 개인에게서의 영원한 것의(자유의) 가능성 앞에 자유가 나타날 때 자유는 쓰러지고, 시간성은 이제 감성과 같은 방법으로 죄성의 의미를 지니고 모습을 나타낸다. (109)
가능한 것은 완전히 미래의 것에 대응하고 있다. 가능한 것이 자유에게는 미래의 것이고, 미래의 것이 시간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개인의 생활에서는 이 두 가지 점에 불안이 대응한다. (…) 내가 품고 있는 과거의 것에 대한 불안은 나에게 가능성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내가 과거의 불행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다면, 그것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불행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즉 미래의 것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과거의 잘못 때문에 불안을 품고 있다면, 그 잘못을 내가 과거의 것으로서 나 자신과의 본질적인 관계에서 정립하지 않고, 어떤 기만적인 방법으로 그것이 과거의 것이 되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만약 그 잘못이 정말로 과거의 것이라면, 나는 불안을 품기보다는 단순히 후회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음에 내가 잘못에 대한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만든 셈인데, 그 때문에 잘못 그 자체는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것이지 과거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형벌에 대해 불안을 품는다면 그것은 이 형벌이 범행에 대해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이기가 무섭게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나는 가능한 것과 미래에 대해 불안을 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109~110)
불안은 죄에 선행하는 심리상태이며, 그것은 되도록 죄 가까이에 접근해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 비약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죄를 설명할 수는 없다. (110)
죄가 정립되는 그 순간에 시간성은 죄성이 된다. 우리가 시간성을 죄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감성이 죄성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죄가 정립됨으로써 시간성은 죄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영원한 것에서 제거되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만을 사는 자는 죄를 범하게 된다. (…) 이에 반해 죄가 정립되자마자 감성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익한 것이며, 동시에 시간적인 것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110~111)
1. 무정신의 불안
불안이 마지막 심리학적 상태이며, 이 상태에서 죄가 질적 비약으로 출현한다. (111)
죄의식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야 비로소 정립되었음에 (…) (112)
그리스도교적 이교의 생활은 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디부터 현재의 것, 과거의 것, 미래의 것, 영원한 것의 구별을 모른다. (112)
하지만 여기에서 말한 것이 이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는 오직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만 볼 수 있다. (…) 무정신은 어느 정도까지 정신의 모든 내용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단, 그것은 정신으로서가 아니라 농담이나 잡담, 쓸데없는 이야기로 인해서이다. 무정신은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진리로서가 아니라 풍설이나 수다로서 진리를 손에 넣는 것이다. (…) 무정신은 가장 풍부한 정신이 말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오직 그것을 정신에 의해 말하지 않을 뿐이다. (…) 그러나 정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정신의 증명이 바로 그것이다. (113)
무정신에는 아무런 불안도 없다. 불안을 느끼기에는 그것은 지나치게 행복하고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나 무정신적이다. (…) 이교가 무정신과 다른 점은, 이교는 정신을 ‘향하는 방향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무정신은 정신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이교는 정신의 부재이며, 따라서 무정신과는 뚜렷하게 다른 것이다. (…) 무정신은 정신의 침체이며 이상성의 서투른 모방이다. 따라서 무정신이 기계적 반복을 하게 될 때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 말이 없는(그 특질을 잃은) 것이 된다. (…) 무정신은 (…) 모든 것을 더듬을 수는 있어도 어떤 것도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어떤 것도 과제로 포착하는 일이 없다는 데에 바로 무정신의 파괴가 있고, 또 그것의 안정성도 있는 것이다. (…) 무정신에는 어떤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113~114)
무정신에는 정신이 제거된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도 제거되어 있으므로 거기에는 불안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은 있다. 다만 그 불안이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 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불안은 무정신 속에도 존재하고 있으나 그것은 숨겨져 있고 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114)
2. 변증법적으로 운명으로 규정되어 있는 불안
대체로 사람들은 이교가 죄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아마 이것은 불안 속에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교는 감성인데, 그것은 정신에 관련을 갖는 감성이다. 그러나 이 정신이 깊은 의미에서는 정신으로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이런 가능성이 바로 불안인 것이다. (114~115)
불안과 무는 언제든지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자유의 현실성과 정신의 현실성이 정립되기가 바쁘게 불안을 해소한다. 그런데 이교에서의 무한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운명이다. (115)
운명이란 정신에 대한 하나의 외면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정신은 아니지만 정신과 일종의 정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것과 정신의 관계이다. 운명은 또한 정반대의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운명은 필연성과 우연성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갖지 못하는 필연성은 다음 순간이 되면 그 자신이 사실상 우연성이 된다. 운명은 이래서 불안 상태의 무이다. 그것은 무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정립되자마자 불안이 제거되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섭리도 정립되므로 운명 또한 제거되기 때문이다. (115)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죄라든지 죄의 개념이 이교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나타난다면 인간이 운명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는 모순에 부딪혀서 이교는 멸망해 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모순이므로 이 모순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교는 이 모순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포착하기에는 죄의 개념 규정을 너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116)
죄와 죄의 개념은 개인을 개인으로서 정립한다. (…) 그래서 그는 바로 운명에 의해, 즉 결과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모든 것에 의해 죄 있는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운명 때문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116)
불안의 가능성 속에서 자유는 운명에게 제압되어 좌절한다. 자유의 현실성이 일어서기는 하지만 그 자유는 죄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붙게 된다. 개인이 죄를 지게 된 것 같은 결정 상황에서도 아직 불안이 죄는 아니다. 따라서 죄란 필연성으로서 오는 일도 없거니와 우연성으로서 오는 일도 없다. 그래서 섭리야말로 죄에 대응하는 개념인 것이다. (116)
천재성이란 직접적으로 그 자체로서는 무엇보다도 주체성이다. (…) 직접적인 것으로서는 천재도 정신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 천재는 정신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자신의 외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정신에 대해 어떤 외면적인 관계에 서 있다. 이 때문에 천재는 줄곧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천재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점점 더 심오한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 (…) 천재는 운명을 발견함으로써 바로 그 본디 힘을 나타내지만, 그와 동시에 또 자신의 무력함도 드러낸다. 천재는 (…) 언제나 직접적인 정신이기에, (…) 운명은 그 한계이다. 죄에 이르러야 비로소 섭리가 정립된다. 그래서 천재에게는 섭리에 다다르기 위한 무서운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만약 천재가 섭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그는 운명의 연구를 위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116~117)
말하자면 천재는 일종의 즉자이므로, 그 자체로서 천재는 온 세계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천재와 함께 또 하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은 무無이다.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천재 자신이며, 천재가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더욱더 심오한 운명을 발견해낸다. (…) 그런데 천재가 오직 천재로서 밖을 향해 있는 한 놀라운 것을 수행하지만, 그러나 천재는 줄곧 운명 아래서 굴종을 강요당할 것이다. (…) 그래서 천재의 존재라는 것은 만약 그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자신의 내부로 향하지 않는 한, 늘 하나의 동화 같은 것이다. 천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모르는 사소한 것에 의지하고 있다. 사소한 것에 대해, 천재 자신의 전능함에 의해 전능적인 의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 그가 자신의 징후를 해석해야 하는 순간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는 불행하도다, 여자도 불행하도다, 무심한 아이는 불행하도다, 들의 짐승은 불행하도다, 그 순간에 나는 새는 불행하도다, 가지를 뻗어 앞을 막는 나무는 불행하도다. (117~118)
외면적인 것은 그것만으로는 천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운명 앞에서 외면적인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 천재는 그가 운명의 의지를 읽고 있는 보이지 않는 책에서 어떤 의심스러운 주석을 발견하지 않는 한, 자기가 온 세계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런데 그가 정보를 얻는 바로 그 순간에, 아마도 그 정보에는 한마디의 말이 울릴 것인데, 그 말의 의미는 그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하늘에 계신 하느님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천재는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118~119)
그렇기 때문에 천재는 일반적인 것의 범위 밖에 놓여 있다. 승리를 거두건 멸망하건, 그는 운명을 믿는다는 점 때문에 위대하다. (…) 보통은 그가 승리를 거둘 때만 그의 위대함이 찬미된다. 그러나 천재가 스스로의 힘으로 쓰러질 때만큼 위대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신념이 그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의 몰락은 그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전설이었다. (119)
그래서 천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때 불안에 빠진다. (…) 천재는 위험한 순간에 가장 힘이 강하다. 그의 불안은 오히려 그 전의 순간과 그 뒤의 순간, 즉 운명이라 불리는 그 어떤 위대한 미지의 것과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몸이 떨리는 그 순간에 생긴다. 아마도 그 천재의 불안은 그러한 순간이 지나간 뒤에 가장 큰 것 같다. (119)
천재 자신이 스스로를 종교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죄에도 섭리에도 이르지 못한다. 천재가 운명에 대해 불안의 관계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적인 천재를 겸하고 있지 않는 한 이 불안을 품지 않는 천재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다. (119)
천재란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자신에게 의의 있는 것이 되지 않는다. 천재가 미칠 수 있는 곳은 행운과 불행, 존경과 명예, 권력, 불후의 명성 같은 일시적인 것에 관련된 운명의 범위 이상으로 높아질 수 없다. (120)
오직 종교적인 자각을 통해서만이 천재성이나 재능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120)
3. 변증법적 가책으로서 규정된 불안
일반적으로 유대교는 율법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일컫는다. 이것을 또 유대교는 불안 속에 놓여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121)
유대교는 그리스 정신보다 한 걸음 진보했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불안의 관계 때문이었다. 유대교는 억지로 이 죄와 불안의 관계를 버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그리스 정신이 갖는 경박한 운명과 행운, 불행 등등 하는 표현을 손에 넣으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122)
유대교에서 볼 수 있는 불안은 죄에 대한 불안이다. 죄는 곳곳에 퍼져있는 하나의 힘으로서, 이 죄가 인생을 덮치고 있는데도 누구도 그것을 깊은 의미에서 이해할 수 없다. (…) 이교의 신탁에 대응하는 것은 유대교의 희생(산 제물)이다. (…) 유대교는 희생에서 그 도피처를 찾고 있지만, 그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이 점은 희생이 되풀이된다는 점에 나타나 있다. (…) 죄와 함께 비로소 속죄가 정립되는 것이므로 속죄의 희생은 되풀이되어야 한다 (…) 희생의 완전성은 죄의 현실적인 관계가 정립되어 있다는 데 대응한다. 죄의 현실적인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을 경우 희생이 되풀이되지 않으면 안 된다. (122~123)
인간 생활은 모두 종교적으로 계획되어 있다. 이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며, 개인이나 인류, 또는 불멸성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다. (123)
중세의 잘못은 종교적 반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성을 너무 일찍 끝내 버린 점에 있다. (…) 즉 종교적인 반성을 시작한 뒤, 개인이 자기 자신을 다시 완전히 되찾는 데 성공하느냐는 점이다. 중세에서는 이것이 도중에 단절되어 버렸다. (124)
천재는 내면으로 향하면서 자유를 발견한다. 그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의 자유는 자신이 자유라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알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개인이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가 모든 것에 대해서 치러야 할 대가도 커진다. 그리하여 그것과의 균형상 이 자유의 즉자(현상에서 독립한, 그 자체로서의 존재)와 함께 하나의 다른 형태의 것이 나온다. 이것이 죄다. (…) 이 죄는 그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앞의 경우에서 ‘죄가 있다고 간주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 그의 두려움은 ‘죄가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126)
그가 자유를 발견하는 그 강도에 따라 그것과 같을 정도로 그를 덮치는 것이 죄의 불안이다. 오직 죄만을 그는 두려워한다. 죄만이 그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 자유의 대립은 죄이므로, 자유의 가장 큰 역할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만 관련을 갖고 그 가능성에 의해 죄를 정립하며, 또 만약 죄가 현실에 정립될 때는 자기 자신에 의해 죄를 정립하는 것이다. (127)
자유가 죄를 두려워할 때 자유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죄가 정립되자마자 곧 뉘우침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가책에 대한 자유의 관계는 우선 하나의 가능성이다. (…) 자유는 스스로가 자유인지 아닌지, 또는 죄가 정립되어 있는지 없는지를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127)
죄에 대한 자유의 관계는 불안이다. 그것은 자유도 죄도 아직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27)
죄란 자유와 가능성의 관계에서 더욱더 가능한 것으로 되어 가는, 하나의 더 구체적인 표상이다. (128)
가능성과의 관계에서는 이 죄가 하나의 착각으로서 나타난다. 이에 반해 뉘우침이 현실적인 죄와 함께 나타나면, 그 뉘우침이 곧 현실적인 죄를 그 대상으로 갖게 된다. 자유의 가능성 안에서 죄의 발견이 깊으면 깊을수록 천재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128)
4장 죄의 불안, 또는 개별자와 관련된 죄의 결과로서의 불안
질적인 비약으로 죄는 이 세상에 들어왔다. 또 이렇게 해서 죄는 계속 이 세상에 들어오고 있다. (129)
죄가 질적인 비약에 의해 단독자, 즉 개인 속에서 정립될 때 선악 구별이 정립된다. (…) 죄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선행하는 무엇인가에 의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 자유는 무한이므로 어떤 것에서도 비롯되지 않는다. (130)
개인의 생의 역사는 상태에서 상태로 운동함으로써 전진한다. 각각의 상태는 비약을 통해 정립된다. 죄는 일찍이 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방해하는 것이 없으면 계속해서 들어온다. 그러나 죄의 반복은 하나하나가 단순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비약이다. 그러한 비약에는 어느 것이나 그 앞에는 심리학적 상태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선행한다. 이 상태가 심리학의 대상이다. 저마다의 상태에는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그런 한은 불안이 존재한다. 죄가 정립한 뒤도 마찬가지이다. (131)
1. 악에 대한 불안
a. 정립된 죄는 물론 폐기된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부당한 현실성이기도 하다. 그런 범위 안에서 불안은 죄와 관련을 가질 수 있다. 그 죄가 부당한 현실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이 일을 불안이 맡게 되는 것이다. (131)
b. 정립된 죄는 동시에 그것이 비록 자유와 아무 인연이 없는 결과라 할지라도 결과인 것은 변함없다. 이 결과는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고, 또 이때의 불안은 새로운 상태의 가능성, 즉 미래의 결과에 관련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깊이 빠져도 더 깊이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불안의 대상이다. (131)
여기에서 죄는 말할 것도 없이 구체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또는 보편적으로 죄를 범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불안은 죄의 현실성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131~132)
윤리적으로 말한다면 죄는 결코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상태라는 것은 늘 그 다음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심리학적 접근 단계, 즉 근사치이다. 그래서 불안은 새로운 상태의 가능성으로서 끊임없이 존재한다. (…) 윤리적으로 보면 불안은 죄를 범한다. 이때 불안의 운동은 순진무구함에서의 운동과 반대의 것이다. 순진무구함에서는 심리학적으로 말해 불안이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을 낳는 것이다. (132~133)
c. 정립된 죄는 부당한 현실성이다. 그것은 현실성이므로 개인에 의해 뉘우침 속에서 현실성으로서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뉘우침이 개인의 자유가 되지는 않는다. 뉘우침은 죄에 대한 관계에서 가능성으로 축소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뉘우침이 죄를 제거할 수는 없다. 뉘우침, 즉 회개는 오직 죄에 대해 슬퍼할 따름이다. 죄는 그 결과대로 전진하고 뉘우침은 한 걸음 한 걸음 그 뒤를 좇는다. 그러나 언제나 한순간 한순간 처지고 있다. 뉘우침은 굳이 무서운 것을 보려고 한다. (133)
죄의 궤변을 진실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앙이고, 상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죄임을 믿을 수 있는 용기이며, 불안 없이 그 불안을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뿐이다. 그러나 신앙이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젊음을 영원히 지킴으로써 불안이라는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으로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신앙에서만 종합은 영원하며 또 매 순간마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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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으로는 인간과 죄의 관계에서 인간을 제대로 연결시키는 것이 중심 문제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개인은 죄 속에서 뉘우친다. 그 순간에 그는 이념적으로 보면 교의학의 포로가 된다. 뉘우침은 최고의 윤리적인 모순이다. (135)
2. 선에 대한 불안(악마적인 것)
개인은 죄 속에 있으므로 그의 불안은 악에 대한 것이다. 이 형태가 더 높은 관점에서 보면 선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에 대해 불안을 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형태는 악마적인 것이다. 개인은 악 속에 있으면서 선에 대해 불안을 품는다.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악에 대한 부자유스러운 관계인데, 악마적인 것도 신에 대한 부자유러운 관계이다. (137)
그래서 악마적인 것은 선에 접촉되고서야 비로소 진정하게 밝혀진다. 그 선은 밖에서부터 악마적인 것의 경계쪽으로 접근해 온다. (137)
악마적인 것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죄되어 왔다. 얼마나 무섭게 악마적인 것이 추궁되고 폭로되고 처벌되어 왔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요즘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듣고 몸서리친다. (138)
악마적인 것은 선에 대한 불안이다. 순진무구함에서는 자유가 자유로운 것으로서 정립되어 있지 않고, 그 가능성이 개인에게 불안이 되었다. 악마적인 것에서는 이 관계가 반대이다. 자유가 부자유不自由한 결과로서 정립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가 상실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가능성은 이 경우도 또 불안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140~141)
악마적인 것은 자신 속에 들어앉으려는 부자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부자유는 늘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완전히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느껴질 경우라도 남아 있다. 그리하여 불안은 닿기가 무섭게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141)
악마적인 것은 ‘들어앉은’ 것이며, 동시에 부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141)
악마적인 것은 어떤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이처럼 부자유가 바로 제 자신을 갇힌 자로 만드는 점에 존재의 비밀스런 의미가 있다. 자유는 늘 ‘참여하는’ 것이고, 부자유는 더욱더 틀어박혀 어울리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 자유가 폐쇄성에 닿으면 그것은 불안이 된다. (141~142)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침묵을 견뎌내지 못한다. (…) 폐쇄성에게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더 위대한 악마이거나 또는 절대로 침묵을 지킬 수 있는 선이어야 한다. (142~143)
악마적인 것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또 선에 대한 불안이다. (144)
‘악마적인 것은 돌발적인 것이다.’ 돌발적인 것이란 폐쇄적인 것을 다른 면에서 본 새로운 표현이다. 악마적인 것은 그 내용에 반성이 가해질 때 폐쇄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그 시간에 반성이 가해질 때 돌발적인 것으로서 규정된다. 폐쇄적인 것은 개인이 자기와 부정적인 관련을 갖는 결과에 따르는 것이다. (147)
그러나 본디 돌발적인 것은 법칙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자연현상에 속하지 않고 심리현상에 속하므로 부자유의 나타남이다. 돌발적인 것은 악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선에 대한 불안이다. (148)
돌발적인 것은 언제나 선에 대한 불안에 그 근거를 갖는다. (…) 악에 대한 불안의 한 형태 중에서 돌발적인 것에 해당되는 것은 약함이다. (148)
악마적인 것이 각각의 개인에게 무서운 것을 의미하든 안 하든, 또는 그것이 태양의 흑점이나 물고기의 눈에 있는 작은 백점과 같은 것을 의미하든 하지 않든 간에, 전체로서의 악마적인 것과 부분으로서의 악마적인 것은 똑같은 자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주 사소한 부분의 악마적인 것도 전면적으로 악마적인 것과 똑같이 선에 대한 불안이다. 부자유 또한 죄의 노예이긴 하지만, 그 방향이 다르므로 그것은 악에 대한 불안이다. (153)
부자유나 악마적인 것은 그러므로 같은 상태이다. (153)
1) 육체적ㆍ심리적으로 잃어버린 자유
자유가 반항자들의 축으로 옮겨가지 않는 한, 혁명의 불안은 악에 대한 불안이지 선에 대한 불안이 아니다. (154)
2) 정신적으로 잃어버린 자유
a. ‘일반적 서술’
자유의 내용을 지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진리이고, 그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계속 진리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진리는 자유의 행위이다. (156)
행위에 의해서만, 그리고 행위로서만 이를 수 있는 확실성이나 내면성은, 그 사람이 악마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이 범주를 확실히 견지하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자의, 불신앙, 종교에 대한 조소 등은 흔히 믿는 것과는 달리,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신이나 노예근성이나 가짜 믿음 따위와 똑같이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에 확실성이 결여된 것은 그 현상이 내용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156~157)
미신도 불신도 모두 부자유의 형식이다. (…) 불신의 최고이자 보기에 가장 자유로운 표현은 비웃음이다. 그런데 비웃음에는 바로 이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불신앙은 비웃는 것이다. (158)
확실성과 내면성은 물론 주체성이다. (…) 추상적인 주관성은 추상적인 객관성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므로 똑같을 정도로 내면성이 결여되고 있다. 사람들이 주체성에 대해 추상적으로 말하는 한, 그 내면성의 결여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추상적 주관성엔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마땅하다. 만약 그 주체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 내용이 분명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159)
b. ‘내면성의 배제 또는 결여에 대한 도식’
내면성의 결여는 늘 반성의 범주에 해당되므로, 각각의 형태는 이중의 것이 된다. 직접성(외부와의 접촉)은 보통 반성(내면성)과의 대립을 통해서 정립되며, 그 다음으로 종합이라는 식으로 정립된다. 그러나 현실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거기서의 직접성은 또한 내면성의 직접성이기도 한다. 내면성의 결여는 그래서 반성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159~160)
내면성이란 이해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이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과, 그 이야기 속에 암시된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과, 그 한 말을 통해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의식 내용이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이해는 그만큼 구체적이 되므로, 그 이해가 의식에 결여되게 되면, 바로 자유와는 반대로, 자기를 닫으려는 부자유의 현상이 나타난다. (160)
의식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내용은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 개인 자신에 관한 의식이다. 그것은 순수한(추상적) 자기의식이 아니라 (…) 구체적인 의식인 것이다. 이런 자기의식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 이 자기의식은 행위이므로, 또 이 행위 또한 내면성이기도 하다. (160~161)
‘불신앙-미신’. 이것은 서로가 완전히 대응하므로 둘 다 내면성을 잃고 있다. 다만 불신 쪽은 능동성을 통하여 수동적이고, 미신은 수동성을 통하여 능동적이다. (…) 불신도 미신도 다 신앙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불신은 부자유(악마적ㆍ페쇄적인 것)의 능동성에서 시작되고, 미신은 부자유의 수동성에서 시작된다. (…) 그러나 뭐라고 해도 미신에는 늘 자기의 수동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능동성이 반드시 있다. 미신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과 같고, 불신은 자기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과 같다. 서로의 내용은 자기반성이다. (162)
‘위선-실패’. 이것들은 서로 대응한다. 위선은 능동(내적 발생)을 통해, 실패는 수동성(외적 영향)을 통해 시작된다. (…) 그래서 (능동적) 위선은 자기 자신에 부딪치는 실패이고, (수동적) 실패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선이다. 둘 다 내면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모든 위선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 고작이다. (162~163)
‘거만- 비겁’. 거만은 능동성을 통해, 비겁은 수동성을 통해 시작되나, 그밖의 점에서는 둘 다 같다. 왜냐하면 비겁은 선에 대한 불안이 유지될 만한 능동성을 그 밑바닥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거만은 뿌리 깊은 비겁이다. 왜냐하면 거만이란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을 만큼 비겁하기 때문이다. (…) 또한 비겁은 뿌리 깊은 거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해받고 있는 거만의 요구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을 만큼 비겁하지만, 그와 같이 물러나 있음과 동시에 자신의 거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63)
c. ‘확실성과 내면성이란 무엇인가?’
(로젠크란츠는 『심리학』에서) 심적 성향은 감정과 자기의식의 통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166)
그런데 진실함과 심적 성향은 진실함 쪽이 심적 성향보다 더 높은, 그리고 가장 깊은 표현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서로 대응한다. 심적 성향은 직접성에 대한 규정이다. 이에 반해 진실함은 심적 성향을 획득한 근원성이고, 자유의 책임 안에 보존되어 있는 심적 성향의 근원성이며, 크나큰 행복을 누리도록 허락받은 심적 성향의 근원성이다. 심적 성향의 근원성은 그 역사적 발전에서 진실함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나타내므로, 진실함은 결코 습관이라고 할 수 없다. (166)
그러나 진실함이 다시 똑같은 진실함으로 돌아와야 할 본디 자리란, 진실함 자체 말고는 있을 수 없다. (167)
어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말에 따르거나 인생에서 그를 진실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사람이란 심적 성향을 감추고 태어날 수는 있지만, 진실함을 감추고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인생에서 그를 진실하게 만드는 것)라는 표현은 물론 그 사람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진실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느냐 하는 정확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167)
내면성, 즉 확실성이 진실함이다. (…) 적어도 그것은 주체성, 순수한 주체성, ‘포용력이 있는’ 주체성이다. (…) 내면성이 결여되면 정신은 곧 유한한 것이 된다. 그래서 내면성은 영원성(본래성)이며, 또는 인간에게 있는 영원한 것의 구성 요소이다. (169)
영원한 것을 올바르게, 또는 완전히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내면성과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다. (169)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원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만 불안해한다. 그 불안은 수많은 곳에다 도피처를 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악마적인 것이다. (172)
제5장 신앙을 통한 구원으로서의 불안
불안에 떤다는 게 대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하나의 모험이라는 점이다. (…) 그래서 불안을 바르게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것이다. (173)
인간은 하나의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질 수 있으므로, 그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그러나 이것은 (…) 그 자신이 스스로 불안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173)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이므로, 이 의미에서의 불안만이 신앙의 도움을 입음으로써 절대적으로 교육적이다. (…) 불안은 피고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흥겹게 즐기고 있어도, 잡담하고 있어도, 일하고 있어도, 밤에도 낮에도 놓치지 않는다. (173~174)
불안에 의해 길러지는 것은 가능성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능성에 의해 길러지는 사람은 비로소 그의 무한성에 따라 성장한다. 따라서 가능성은 모든 범주 안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다. (174)
인간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육성되려면, 그는 가능성에 대해 성실하고 또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 가능성의 발견이 올바르게 관리된다면, 가능성은 모든 유한성을 발견하겠지만, 인간이 신앙의 선취에 의해 불안을 다시금 이겨내기 전까지는 유한성을 무한성이라는 가장 완전하다고 여기는 상태의 모습으로 바꿈으로써 인간을 불안으로 압도할 것이다. (175)
만약 개인인 자기를 육성해주고 있는 가능성을 배반한다면. 그는 결코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 (…) 단,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한 개인의 가능성이다. (175~176)
가능성에 의해 육성된 인간이라면, 한가지 이야기만으로 충분하다. (…) 그는 탈출을 위한 유한성의 도피처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신앙이 그를 이끌어 구제할 때까지 탈출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그를 미끼로 잡아둔다. 신앙 이외에서는 안식을 찾지 못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휴식처가 인간의 눈에는 비록 분별있는 곳으로 비쳐질지라도 그저 객쩍은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불행 속에서 가능성의 과제를 수료한 자는 모두, 현실에서는 누구도 잃어버릴 수 없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176)
그 사람이 만약 그에게 교훈을 주려고 하는 가능성을 배반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를 구제하려는 불안을 속이는 일만 없다면, 그는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록 10배나 더 돌려받은 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가능성 속에 빠진 자는 눈이 캄캄하고 눈알이 돌아갔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에게 던져 주는 구원의 지푸라기를 붙잡지 못했다. 그는 귀가 먹어버려서 그의 시대에는 인간의 시장 시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그리고 그가 그 밖의 숱한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빠졌지만, 그때서야 그 심연의 밑바닥으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번거로운 것, 무서운 것보다도 더 가볍게 다시 떠오를 수 있었다. (176~177)
그렇지만 가능성으로 육성되는 자는 (…) 어떤 하나의 극단적 타락이나 자살의 위험 앞에 놓여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육성되기 시작했을 때의 불안에 대한 그의 오해로 말미암아, 불안이 그를 신앙 쪽으로가 아니라 신앙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면,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이에 반해(가능성에 의해) 육성되는 자는 불안 아래에 머물면서도 숱한 가짜 불안에 속는 일 없이 지나간 일을 올바르게 기억한다. 이렇게 하여 불안의 습격은, 무섭긴 하지만 그가 도망가야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불안은 어디까지나 불안 스스로의 의지에 반하여 그 개인에게 봉사하는 종이 되고, 뜻밖에도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이렇게 되면, 불안이 얼굴을 내밀고 책략을 써서,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무섭고 새로운 위협 수단을 발견한 듯한 기척을 보이지만, 그래도 뒷걸음질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 불안을 내쫓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쫓기는커녕 그는 불안을 환영한다. (…) 그는 불안과 더불어 한 방에 들어앉는다. (…) 그는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불안은 그의 영혼 속에 들어가 샅샅이 수색하며, 유한적인 것이나 쓸데없는 것들을 불안에 떨게 해서 그로부터 내몰아 버리고, 마침내는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그를 데려다주는 것이다. (177)
인간이 불안에 의해 신앙으로 육성될 때, 불안은 스스로가 낳은 것을 뿌리 뽑아 버린다. 불안은 운명을 발견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이 운명을 신뢰하려고 한다면, 불안은 돌변해 운명을 제거해 버린다. (…) 개인이 운명에 대한 관계에서 이처럼 자기 스스로 불안에 의해 다시 육성되지 않을 경우, 그는 유한성에 의해서는 결코 근절되지 못하는 변증법적 찌꺼기를 늘 유지하게 될 것이다. (178)
가장 하찮은 일에 관계된 것일지라도, 인간이 몰래 무엇인가로부터 달아나려 하거나, 요행으로 무엇인가를 손에 넣으려고 하면, 그 즉시 불안은 가까이에 와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불안은 재빨리 처리해 버린다. 불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한성의 카드, 가능성이라는 범주의 카드를 내놓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것을 막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은 외적 의미에서의 운명을, 그 운명의 전환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내부에 있는 불안이 이미 운명을 형성하고 있어서, 운명이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그에게서 뺏어버렸기 때문이다. (178)
어떤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그가 무한하게 죄를 지고 있다는 것 (179~180)
불안해지는 것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유한성의 온갖 불안이 연주를 시작하여 유한성의 제자들이 자신의 정신과 용기를 잃게 할 때에도 춤추듯이 걸어갈 것이다. (180)
죄에 대해서 불안을 통해 교육받는 사람은 오직 속죄(신앙)만을 믿을 것이다. (180)
심리학이 불안으로 끝나는 순간, 이제 그 불안은 바로 교의학으로 넘어간다. (181)
첫댓글 훌륭한 초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