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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六回 楚昭王棄郢西奔 伍子胥掘墓鞭屍
제76회: 초소왕이 영도를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나고, 오자서가 평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매질하다.
話說,沈尹戍去後,吳楚夾漢水而軍,相持數日。武城黑欲獻媚於令尹,進言曰:「吳人舍舟從陸,違其所長,且又不識地理,司馬已策其必敗矣。今相持數日,不能渡江,其心已怠,宜速擊之。」瓦之愛將史皇亦曰:「楚人愛令尹者少,愛司馬者多,若司馬引兵焚吳舟,塞隘道,則破吳之功,彼為第一也。令尹官高名重,屢次失利,今又以第一之功,讓於司馬,何以立於百僚之上?司馬且代子為政矣。不如從武城將軍之計,渡江決一勝負為上。」囊瓦惑其言,遂傳令三軍,俱渡漢水,至小別山列成陣勢。
한편, 심윤수가 떠난 후에, 오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무성흑(武城黑)이 영윤인 낭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그들의 장기를 거스르고, 또 이곳의 지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마께서는 이미 그들이 틀림없이 패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지금 수일간 대치하면서 한수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해이해졌을 것입니다. 마땅히 빨리 공격해야 합니다.” 하니, 낭와가 총애하는 장수 사황(史皇)이 역시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들이 영윤보다는 심사마를 더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사마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의 배들을 불사르고 그들의 퇴로를 막으면 오나라를 깨뜨린 공은 모두 심사마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영윤께서는 관직이 높고 이름이 무거운데 여러 차례 싸움에 패하고 지금 다시 가장 큰 공을 사마에게 양보한다면 어떻게 백관의 윗자리에 서겠습니까? 심사마가 영윤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을 것입니다. 무성흑 장군의 계책을 따라 한수를 건너 승부를 겨루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낭와가 그 말에 혹하여 마침내 삼군에게 명령을 내려 모두 한수를 건너 소별산(小別山)에 이르러 진영을 세우게 했다.
史皇出兵挑戰,孫武使先鋒夫概迎之。夫概選勇士三百人,俱用堅木為大棒,一遇楚兵,沒頭沒腦亂打將去。楚兵從未見此軍形,措手不迭,被吳兵亂打一陣,史皇大敗而走。囊瓦曰:「子令我渡江,今纔交兵便敗,何面目來見我?」史皇曰:「戰不斬將,攻不擒王,非兵家大勇。今吳王大寨札在大別山之下,不如今夜出其不意,往劫之,以建大功。」囊瓦從之。遂挑選精兵萬人,披掛銜枚,從間道殺出大別山後。諸軍得令,依計而行。卻說,孫武聞夫概初戰得勝,眾皆相賀。武曰:「囊瓦乃斗筲之輩,貪功僥倖,令史皇小挫,未有虧損,今夜必來掩襲大寨,不可不備。」
사황이 출전하여 싸움을 거니, 손무는 선봉 부개(夫槪)를 시켜 맞이하게 했다. 부개가 용사 3백 명을 선발하여 모두 단단한 나무로 만든 큰 몽둥이를 써서 초나라 군사를 만나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는 달아나게 했다. 초나라 군사들은 일찍이 이런 싸움 형태를 본 적이 없어서, 손을 쓰지 못하고 오나라 군사들에게 한바탕 두들겨 맞았다. 사황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낭와가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강을 건너게 하고 지금 처음 싸워서 패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는가?” 하니, 사황이 말하기를, “싸워서 적장을 참하지 못하고, 공격해서 적의 임금을 사로잡지 못하면 이는 군대에서 말하는 아주 용감한 장수가 아닙니다. 지금 오왕의 본진이 대별산(大別山) 아래에 있으니 오늘 밤 예상치 못한 때에 가서 덮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했다. 낭와가 그 계책을 따라 즉시 정예병 만 명을 뽑아 군장을 갖추어 함매를 물리고 지름길을 이용하여 대별산 뒤로 달려갔다. 초나라의 모든 군사는 낭와의 군령에 따라 계획대로 대별산을 향해 진군했다. 한편, 손무는 부개가 초전에서 승리하여 모두 축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낭와는 변변치 못한 무리로 요행수나 바라보고 공을 탐하는 자이지만, 설령 사황이 첫 싸움에서 졌어도 아직 초나라 군사는 손상되지 않았소. 오늘 밤에 틀림없이 우리 본진을 습격하러 올 것이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오.” 했다.
乃令夫概專毅各引本部,伏於大別山之左右,但聽哨角為號,方許殺出。使唐蔡二君,分兩路接應。又令伍員引兵五千,抄出小別山,反劫囊瓦之寨,卻使伯嚭接應。孫武又使公子山,保護吳王,移屯於漢陰山,以避沖突。大寨虛設旌旗,留老弱數百守之。號令已畢,當時三鼓,囊瓦果引精兵,密從山後抄出。見大寨中寂然無備,發聲喊,殺入軍中,不見吳王,疑有埋伏,慌忙殺出。忽聽得哨角齊鳴,專毅夫概兩軍,左右突出夾攻,囊瓦且戰且走,三停兵士,折了一停。纔得走脫,又聞礮聲大震,右有蔡侯,左有唐侯,兩下截住。
이에 손무가 부개와 전의(專毅)에게 휘하 군사를 이끌고 대별산 좌우에 각각 매복하게 하고, 초병의 뿔피리 소리가 나면 그것을 신호로 돌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당성공과 채소후를 시켜 두 갈래로 지원하게 했다. 또 오원에게는 5천의 군사를 주어 소별산 쪽으로 나아가게 하여 낭와의 본진을 습격하게 하고, 백비를 시켜 지원하게 했다. 손무는 다시 공자 산(公子山)에게 오왕을 호위하게 하고 진영을 한음산(漢陰山)으로 옮겨 초나라군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채에는 겉으로만 깃발을 꽂고 노약자 수백 명을 남겨서 지키게 했다. 손무가 명령을 끝내니 삼경(자정)이 되었다. 과연 낭와가 정예병을 이끌고 비밀리에 대별산 뒤로 쏟아져 나왔다. 오나라 군사의 대채가 적막하여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 함성을 지르며 오나라 군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오왕을 보지 못하자 매복을 의심하여 황망히 달려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초병의 뿔피리 소리가 일제히 울리더니 전의와 부개의 군사들이 좌우에서 튀어나와 초군을 협공했다. 낭와는 싸우면서 달아났으나, 군사 중 삼 분의 일을 잃고 겨우 추격에서 벗어났다. 다시 대포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오른쪽에는 채소후가, 왼쪽에는 당성공이 양쪽으로 막았다.
唐侯大叫:「還我肅霜馬,免汝一死!」蔡侯又叫:「還我裘佩,饒汝一命!」囊瓦又羞又惱,又慌又怕。正在危急,卻得武城黑引兵來,大殺一陣,救出囊瓦。約行數里,一起守寨小軍來報:「本營已被吳將伍員所劫,史將軍大敗,不知下落。」囊瓦心膽俱裂,引著敗兵,連夜奔馳,直到柏舉,方纔駐足。良久,史皇亦引殘兵來到,餘兵漸集,復立營寨。囊瓦曰:「孫武用兵,果有機變!不如棄寨逃歸,請兵復戰。」史皇曰:「令尹率大兵拒吳,若棄寨而歸,吳兵一渡漢江,長驅入郢,令尹之罪何逃?不如盡力一戰,便死於陣上,也留個香名於後!」
당성공이 크게 소리치기를, “내 숙상마(驌驦馬)를 돌려주면 네 목숨은 살려주겠다.” 했다. 채소후도 역시 소리치기를, “내 갖옷과 패옥을 돌려주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니, 낭와는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황망하고 두려웠다. 아주 위급한 순간에 마침 무성흑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한바탕 크게 공격하여 낭와를 구출했다. 낭와와 무성흑이 몇 리를 도망쳐 나아가는데, 대채를 지키던 군졸 한 명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본영은 이미 오나라 장수 오원에게 점령당하고 사황 장군은 크게 패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했다. 낭와는 간담이 찢어져서 패잔병을 이끌고 밤새도록 달려 백거(柏擧)에 이르러 겨우 머물렀다. 한참 지나서 사황도 역시 패잔병을 이끌고 도착하고, 나머지 패잔병도 점차로 모여들자 다시 영채를 세웠다. 낭와가 말하기를, “손무의 용병이 과연 임기응변에 능하구나! 영채를 버리고 영도로 돌아가서 군사를 청하여 다시 싸워야겠다.” 하니, 사황이 말하기를, “영윤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 군사를 막다가, 만약 영채를 버리고 돌아가면 오나라 군사가 한강을 건너 곧바로 영도에 들어올 것입니다. 영윤께서는 그 죄를 어떻게 면하려고 그러십니까? 차라리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싸워 진중에서 죽는다면 아름다운 이름이나마 후세에 남기지 않겠습니까?” 했다.
囊瓦正在躊躇,忽報:「楚王又遣一軍來接應。」囊瓦出寨迎接,乃大將薳射也。射曰:「主上聞吳兵勢大,恐令尹不能取勝,特遣小將帶軍一萬,前來聽命。」因問從前交戰之事。囊瓦備細詳述了一遍,面有慚色。薳射曰:「若從沈司馬之言,何至如此。今日之計,惟有深溝高壘,勿與吳戰,等待司馬兵到,然後合擊。」囊瓦曰:「某因輕兵劫寨,所以反被其劫。若兩陣相當,楚兵豈遽弱於吳哉!今將軍初到,乘此銳氣,宜決一死敵。」薳射不從。遂與囊瓦各自立營,名雖互為犄角,相去有十餘里。
낭와가 주저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사가 보고하기를, “초소왕께서 한 무리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했다. 낭와가 영채를 나가 영접하니, 지원군의 대장은 곧 원사(薳射)였다. 원사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오나라 군사의 세력이 크다는 말을 듣고 영윤께서 이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저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명령을 듣도록 했습니다.” 하고, 지난번 싸움에 대해 물었다. 낭와가 두루 상세히 설명하면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원사가 말하기를, “만약 심사마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으리오.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계책은 오로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서 오나라 군사들과 싸우지 않고, 심사마의 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 힘을 합하여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니, 낭와가 말하기를, “내가 병사들을 가볍게 움직여 오나라의 영채를 습격하였으나 도리어 우리의 영채를 빼앗겼소. 만약에 장군의 군사와 내가 거느린 군사를 합한다면 초나라 군사가 어찌 오나라 군사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겠소! 지금 장군이 처음 도착하였으니 이 예기를 이용하여 마땅히 죽음을 무릅쓰고 적군과 결전을 해야 할 것이오!” 했다. 원사가 낭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즉시 낭와와 떨어져 각각 진영을 세웠다. 명분은 비록 서로 의각지세라고 했지만 서로의 거리가 10여 리였다.
囊瓦自恃爵高位尊,不敬薳射﹔薳射又欺囊瓦無能,不為之下,兩邊各懷異意,不肯和同商議。吳先鋒夫概,探知楚將不和,乃入見吳王曰:「囊瓦貪而不仁,素失人心﹔薳射雖來赴援,不遵約束。三軍皆無鬥志,若追而擊之,可必全勝。」闔閭不許。夫概退曰:「君行其令,臣行其志,吾將獨往,若幸破楚軍,郢都可入也。」晨起,率本部兵五千,竟奔囊瓦之營。孫武聞之,急調伍員引兵接應。卻說,夫概打入囊瓦大寨,瓦全不准備,營中大亂。武城黑捨命敵住。瓦不及乘車,步出寨後,左胛已中一箭,卻得史皇率本部兵到,以車載之。
낭와는 자기의 직위가 높은 것을 믿고 원사를 존중하지 않았고, 원사도 또한 낭와가 무능하다고 업신여겨서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갖고 함께 상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나라 선봉 부개가 초나라 장수들이 불화함을 탐지하고는 즉시 오왕 합려를 찾아와 말하기를, “낭와는 탐욕스럽고 인자하지 않아서 평소에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원사가 비록 지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아서, 삼군이 모두 싸우려는 뜻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쫓아가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습니다.” 했다. 그러나 합려는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가 물러 나오면서 말하기를, “군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신하는 군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니, 내가 장차 혼자 가서 만약 다행히 초나라 군사를 깨뜨린다면 영도(郢都)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새벽에 일어나 휘하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마침내 낭와의 진채를 향하여 달려갔다. 손무가 듣고 급히 오원에게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부개를 돕도록 했다. 한편, 부개가 낭와의 대채를 덮치자, 낭와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낭와의 진영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무성흑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을 막았다. 낭와는 수레에 오르지 못하고 걸어서 진영의 후문을 나가다가 왼쪽 어깨에 화살을 맞았다. 사황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여 낭와를 전차에 태웠다.
謂瓦曰:「令尹可自方便,小將當死於此!」囊瓦卸下袍甲,乘車疾走,不敢回郢,竟奔鄭國逃難去了。髯翁有詩云:「披裘佩玉駕名駒,只道千年住郢都﹔兵敗一身逃難去,好教萬口笑貪夫。」伍員兵到,史皇恐其追逐囊瓦,乃提戟引本部殺入吳軍,左衝右突,殺死吳兵將二百餘人。楚兵死傷,數亦相當。史皇身被重傷而死。武城黑戰夫概不退,亦被夫概斬之。薳射之子薳延,聞前營有失,報知其父,欲提兵往救。薳射不許,自立營前彈壓,令軍中:「亂動者斬!」囊瓦敗軍皆歸於薳射,點視尚有萬餘,合成一軍,軍勢復振。
사황이 낭와에게 말하기를, “영윤께서는 스스로 편한 대로 하십시오. 소장은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하니, 낭와가 전포와 갑옷을 벗어 버리고 전차에 올라서 질주하여 감히 영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정나라로 달아났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갖옷과 패옥을 두르고 명마가 끄는 수레를 타면서, 오로지 오래도록 영도에서 살고자 했는데, 싸움에서 한번 지니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만 사람들이 탐욕스런 사내를 비웃게 만들었다.” 했다. 오원의 군사가 도착하니, 사황은 그들이 낭와를 추격할까 걱정하여 즉시 휘하 군사를 이끌고 극을 휘두르며 오나라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는 좌충우돌하며 오나라의 장수와 병사 2백여 명을 찔러 죽였으나 초나라 군사의 사상자 수도 그와 비슷했다. 사황은 몸에 중상을 입고 죽었다. 무성흑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부개와 싸우다가 역시 부개에 의해 목이 잘렸다. 원사의 아들 원연(薳延)은 앞 영채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부친에게 알리고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고 하였다. 원사가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 진영 앞에 서서 억눌러 을러대며 군중에 명령하기를, “함부로 움직이는 자는 참한다.” 했다. 낭와의 패잔병들은 모두 원사의 진영으로 도망쳐 왔다. 점검해보니 아직 만여 명이나 남아 있어서 합하여 한 무리 부대를 이루니, 다시 군세를 떨쳤다.
薳射曰:「吳軍乘勝掩至,不可當也。及其未至,整隊而行,退至郢都,再作區處。」乃令大軍拔寨都起,薳延先行,薳射親自斷後。夫概探得薳射移營,尾其後追之,及於清發。楚兵方收集船隻,將謀渡江。吳兵便欲上前奮擊,夫概止之曰:「困獸猶鬥,況人乎?若逼之太急,將致死力。不如暫且駐兵,待其半渡,然後擊之。已渡者得免,未渡者爭先,誰肯死鬥?勝之必矣!」乃退二十里安營。中軍孫武等俱到,聞夫概之言,人人稱善。闔閭謂伍員曰:「寡人有弟如此,何患郢都不入。」伍員曰:「臣聞被離曾相夫概,言其毫毛倒生,必有背國叛主之事,雖則英勇,不可專任。」闔閭不以為然。
원사가 말하기를, “오군이 승세를 타고 엄습해오고 있으니 당할 수 없다. 오군이 이르기 전에 대오를 정비하여 영도로 퇴각하여 다시 변통하여 처리해야겠다.” 하고, 즉시 대군이 영채를 거두어 모두 일어서게 명령하고 원연이 앞서고 원사는 친히 뒤에서 추격군을 막고자 했다. 부개는 원사가 영채를 옮긴다는 것을 탐지하고, 그 뒤를 추격하여 청발(淸發)에 이르렀다. 초나라 군사들이 바야흐로 배들을 모아 강을 건너려고 하자, 오나라 군사들이 문득 앞으로 나가 공격하려고 했다. 부개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막다른 곳의 짐승도 오히려 싸우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만약 우리가 너무 급하게 초나라 군사를 몰아친다면 그들은 있는 죽을 힘을 다할 것이오. 잠시 병사들을 쉬게 했다가 그들이 강을 반쯤 건너기를 기다린 뒤에 공격하면 이미 강을 건넌 자들은 죽음을 면하겠지만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은 서로 먼저 건너기 위해 다투느라 누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겠는가? 그리되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오.” 하고, 즉시 군사들을 20여 리 뒤로 물러나게 하여 영채를 세우게 했다. 중군의 손무 등이 모두 도착하여 부개의 말을 듣고 사람마다 칭찬했다. 합려가 오원에게 말하기를, “과인에게 이 같은 동생이 있으니 어찌 영도에 입성하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일찍이 피리가 부개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부개의 몸에 난 털이 거꾸로 섰으니 반드시 나라를 배반하여 주군에 모반할 것이라 했습니다. 비록 부개가 비록 영특하고 용감하지만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했다. 합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再說,薳射聞吳兵來追,方欲列陣拒敵﹔又聞其復退,喜曰:「固知吳人怯,不敢窮追也。」乃下令五鼓飽食,一齊渡江。剛剛渡及十分之三,夫概兵到,楚軍爭渡大亂。薳射禁止不住,只得乘車疾走。軍士未渡者,都隨著主將亂竄。吳軍從後掩殺,掠取旗鼓戈甲無數。孫武命唐蔡二君,各引本國軍將,奪取渡江船隻,沿江一路接應。薳射奔至雍澨,將卒飢困,不能奔走。所喜追兵已遠,暫且停留,埋鍋造飯。飯纔熟,吳兵又到,楚兵將不及下咽,棄食而走。留下現成熟飯,反與吳兵受用。吳兵飽食,復儘力追逐。楚兵自相踐踏,死者更多。薳射車躓,被夫概一戟刺死。其子薳延亦被吳兵圍住,延奮勇沖突,不能得出。
한편, 원사는 오나라 군사가 추격한다는 말을 듣고 진영을 갖추어 적을 막으려고 했다. 그들이 다시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본래 알기를 오나라 사람들이 겁쟁이라 하더니 감히 끝까지 추격을 못하는구나.” 하고, 이에 명령을 내려 오경(새벽 4시경)에 배불리 먹고 일제히 강을 건너기로 했다. 초나라 군사가 막 십 분의 삼쯤 강을 건넜을 때, 부개의 군사가 도착했다. 초나라 군사는 먼저 강을 건너려고 크게 어지러워졌다. 원사가 통제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레를 타고 달아났다. 강을 건너지 못한 군사들은 모두 원사를 따라 어지러이 도망쳤다. 오나라 군사들이 뒤에서 무찔러서 군기와 북 및 무기와 갑옷을 무수히 약탈했다. 손무가 당성공과 채소후에게 명하여 각기 본국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가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한 배들을 빼앗아 강 연안을 따라 부개를 돕도록 했다. 원사가 달아나다가 옹서(雍澨)에 이르렀으나 장수와 군사들이 배가 고파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오나라의 추격병을 멀리 따 돌렸다고 생각한 원사는 군사들을 잠시 멈추게 하여 솥을 걸고 밥을 짓게 했다. 밥이 겨우 되었는데 오나라 군사들이 다시 도착했다. 초나라 군사들은 밥을 먹지도 못하고 버리고 달아났다. 남겨진 밥은 오히려 오나라 군사들이 배불리 먹고, 힘을 다하여 추격했다. 초나라가 군사들이 서로 밟아서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원사의 전차가 넘어지니, 부개가 극을 휘둘러 원사를 찔러 죽였다. 원사의 아들 원연도 역시 오나라 군사들에 포위되어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忽聞東北角喊聲大振,薳延曰:「吳又有兵到,吾命休矣!」原來那枝兵,卻是左司馬沈尹戍行至新息,得囊瓦兵敗之信,遂從舊路退回,卻好在雍澨遇著吳兵圍住薳延。戍遂將部下萬人,分作三路殺入。夫概恃其屢勝,不以為意。忽見楚三路進兵,正不知多少軍馬,沒抵敵一頭處,遂解圍而走。沈尹戍大殺一陣,吳兵死者千餘人。沈尹戍正欲追殺,吳王闔閭大軍已到,兩下札營相拒。沈尹戍謂其家臣吳句卑曰:「令尹貪功,使吾計不遂,天也!今敵患已深,明日吾當決一死戰。幸而勝,兵不乃郢,楚國之福。萬一戰敗,以首託汝,勿為吳人所得。」
갑자기 동북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나니, 원연이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다시 몰려오니 나의 목숨도 끝났구나!” 했다. 알고 보니 그 군사들은 다름이 아니라 좌사마 심윤수가 신식(新息)에 도착하였으나, 낭와의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오던 길을 따라 회군하다가 마침 옹서에서 오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된 원연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심윤수가 부하 만 명의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오나라 진영으로 돌진했다. 부개는 여러 번 승리한 것만 믿고, 반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갑자기 초나라의 군사들이 세 방향에서 돌진해 오는 것을 보자 적군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되지 않아서 대항하여 싸우지도 못하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 심윤수가 한바탕 크게 무찌르니 오나라 군사 중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심윤수가 오나라 군사를 추격하려 했으나, 오왕 합려의 대군이 이미 도착하여, 양쪽의 군사가 진영을 세우고 대치했다. 심윤수가 가신 오구비(吳句卑)에게 말하기를, “영윤이 공을 탐하여 내 계책을 이루지 못하게 했으니, 하늘의 뜻이다. 지금 적들은 이미 초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왔으니 내일 내가 마땅히 목숨을 걸고 결전을 벌여야겠다. 다행히 이기면 오나라 군사가 영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초나라의 복이고, 만일에 싸움에서 진다면 내 목을 너에게 맡길 것이니 오나라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라.” 했다.
又謂薳延曰:「汝父已歿於敵,汝不可以再死,宜亟歸,傳語子西,為保郢計。」薳延下拜曰:「願司馬驅除東寇,早建大功!」垂淚而別。明旦,兩下列陣交鋒。沈尹戍平昔撫士有方,軍卒用命,無不盡力死鬥。夫概雖勇,不能取勝,看看欲敗。孫武引大軍殺來,右有伍員蔡侯,左有伯嚭唐侯,強弓勁弩在前,短兵在後,直沖入楚軍,殺得七零八落。戍死命殺出重圍,身中數箭,僵臥車中,不能復戰,乃呼吳句卑曰:「吾無用矣!汝可速取吾首,去見楚王!」句卑猶不忍。戍儘力大喝一聲,遂瞑目不視。
심윤수가 다시 원연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부친이 이미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으니, 그대마저 싸움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대는 마땅히 빨리 영도로 돌아가 나의 말을 자서(子西 ; 공자 신)에게 전하여 영도를 지킬 계책을 마련하게 해라!” 하니, 원연이 절하며 말하기를, “부디 사마께서 동쪽의 도적들을 물리치시어 일찍 큰 공을 세우십시오.” 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별했다. 다음 날 아침, 두 나라의 진영이 전투를 시작했다. 심윤수는 평소에 군사들을 사랑하고 지휘하는 방법에 능숙하여 군사들은 명을 받들어 힘을 다하여 싸웠다. 부개가 비록 용맹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점점 패하게 되었다. 그때 손무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오른쪽에는 오원과 채소후가 있고, 왼쪽에는 백비와 당성공이 강궁과 쇠뇌를 앞세우고, 창칼을 든 군사가 뒤를 받쳐서 곧바로 초나라 군사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사들은 십 중 칠팔이 쓰러졌다. 심윤수가 죽을힘을 다하여 겹겹이 둘러친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몸에 몇 발의 화살을 맞아서 수레에 시체처럼 누워서 다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심윤수가 오구비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너는 빨리 나의 목을 베어서 초소왕에게 전하라.” 하니, 오구비가 차마 베지 못하자, 심윤수가 있는 힘을 다하여 큰 소리를 지르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
句卑不得已,用劍斷其首,解裳裹而懷之,復掘土掩蓋其屍,奔回郢都去了。吳兵遂長驅而進。史官有讚云:「楚謀不臧,賊賢升佞﹔伍族既捐,郤宗復盡。表表沈尹,一木支廈﹔操敵掌中,敗於貪瓦。功隳身亡,凌霜暴日﹔天佑忠臣,歸元於國。」話說,薳延先歸,見了昭王,哭訴囊瓦敗奔,其父被殺之事。昭王大驚,急召子西子期等商議,再欲出軍接應。隨後吳句卑亦到,呈上沈尹戍之首,備述兵敗之由:「皆因令尹不用司馬之計,以至如此。」昭王痛哭曰:「孤不能早用司馬,孤之罪也。」因大罵囊瓦:「誤國奸臣,偷生於世,犬豕不食其肉!」
오구비가 부득이 칼을 들어 심윤수의 목을 베고, 옷으로 싸서 가슴에 품고, 다시 시체를 묻은 후, 영도로 달려 돌아갔다. 오나라 군사들은 마침내 멀리 진격해 나아갔다.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초나라가 행한 짓은 옳지 않았으니, 어진 사람을 죽이고 간신을 취하였다. 오원(伍員)의 가족들은 몰살당하고, 다시 백극완(郤完)의 종족들은 씨를 말렸다. 심윤수 한 사람만 두드러져, 기둥 하나로 큰 집을 지탱했다. 적을 다룰 계책이 손바닥 안에 있었으나, 탐욕스러운 낭와로 인해 싸움에 지게 되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몸은 죽게 되었지만, 그 기상은 서리보다 차갑고 해보다 뜨거웠다! 하늘이 충신을 도와서, 그 목은 초나라에 돌아왔다.” 했다. 한편, 원연이 먼저 돌아와 초소왕을 뵙고, 울면서 낭와가 싸움에서 패하여 달아난 것과, 그의 아버지 원사가 피살된 것을 고했다. 초소왕이 크게 놀라 황급히 자서(공자 신)와 자기(子期)등을 불러 상의하여, 다시 군사를 내어 심윤수를 지원하려고 했다. 뒤따라 오구비도 돌아와 심윤수의 머리를 초소왕에게 바치고 싸움에서 패한 이유를 상세히 고하기를, “모두 영윤이 사마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했다. 초소왕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 사마를 쓰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다.” 하고, 크게 낭와를 욕하기를, “나라를 그르친 간신이 구차히 살아남았으니 개나 돼지도 그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했다.
句卑曰:「吳兵日逼,大王須早定保郢之計。」昭王一面召沈諸梁,領回父首,厚給葬具,封諸梁為葉公﹔一面議棄城西走。子西號哭諫曰:「社稷陵寢,盡在郢都,王若棄去,不可復入矣。」昭王曰:「所恃江漢為險,今已失其險。吳師旦夕將至,安能束手受擒乎?」子期奏曰:「城中壯丁,尚有數萬,王可悉出宮中粟帛,激勵將士,固守城堞。遣使四出,往漢東諸國,令合兵入援。吳人深入我境,糧餉不繼,豈能久哉?」昭王曰:「吳因糧於我,何患乏食?晉人一呼,頓胡皆往,吳兵東下,唐蔡為導,楚之宇下,盡已離心,不可恃也。」
오구비가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날마다 다가오니 대왕께서는 빨리 영도를 지킬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니, 초소왕이 한편으로는 심제량(沈諸梁)을 불러 부친의 수급을 전한 후에 장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후하게 내주고, 심제량을 섭공(葉公)으로 삼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의논하니, 자서가 듣고 목을 놓아 울면서 간하기를, “사직과 능침(陵寢)이 모두 영도에 있는데 만약 왕께서 버리고 간다면 다시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은 것은 장강과 한수의 천험(天險)인데, 지금 이미 그 천험을 잃었소! 오나라의 군사들이 머지않아 몰려올 것인데 어찌 꼼짝 못하고 사로잡히겠소?” 하니, 자기(子期)가 아뢰기를, “성중에는 아직 수만의 장정이 남아 있으니 대왕께서는 궁중의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과 천을 모두 꺼내어 장사들을 격려하여 성을 굳게 지키게 하고, 다시 사자를 한수 동쪽 여러 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모아 원조하라고 명령하십시오. 오나라 군사가 우리의 땅에 깊숙이 들어왔으니 양식과 보급품이 뒤를 잇지 못할 터인데 어찌 능히 오래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는 우리 땅에서 양식을 구할 것인데 어찌 식량을 걱정하겠소? 진(晉)나라가 한번 호령하니 돈(頓)과 호(胡)가 모두 그들에게 붙어 버렸고, 오나라 군사들이 동쪽으로 내려오니 당나라와 채나라가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소. 초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던 나라가 모두 초나라를 떠났으니, 믿을 수가 없소.” 했다.
子西又曰:「臣等悉師拒敵,戰而不勝,走猶未晚。」昭王曰:「國家存亡,皆在二兄,當行則行,寡人不能與謀矣。」言罷,含淚入宮。子西與子期計議,使大將鬥巢,引兵五千,助守麥城,以防北路﹔大將宋木,引兵五千,助守紀南城,以防西北路﹔子西自引精兵一萬,營於魯洑江,以扼東渡之路﹔惟西路川江,南路湘江,俱是楚地,地方險遠,非吳入楚之道,不必置備。子期督令王孫繇于、王孫圉、鍾建、申包胥等,在內巡城,十分嚴緊。再說,吳王闔閭聚集諸將,問入郢之期。
자서(공자 신)가 또 말하기를, “신 등이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싸우다가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그때 달아나도 오히려 늦지 않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모두 두 형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두 분께서 마땅히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저는 상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물을 머금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자서와 자기가 계책을 상의한 후에 대장 투소(鬪巢)를 시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맥성(麥城)을 지키면서 북쪽의 길을 방어하게 하고, 대장 송목(宋木)을 시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기남성(紀南城)을 지키면서 서북쪽의 길을 막도록 했다. 자서는 스스로 정예병 1만을 이끌고 노복강(魯濮江) 가에 진영을 세우고 동쪽에서 건너는 길을 지켰다. 다만 서쪽의 천강(川江)과 남쪽의 상강(湘江)은 모두가 초나라 땅이었으나 그쪽 지방은 모두가 멀고 길이 험하여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로 들어올 길이 아니어서 방비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子期)는 왕손요우(王孫繇于)와 왕손어(王孫圉), 종건(鐘建), 신포서(申包舒) 등을 거느리고 성안을 순시하면서 십분 긴장한 자세로 엄하게 지켰다. 한편 오왕 합려는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영도에 언제 들어갈 것인지 물었다.
伍員進曰:「楚雖屢敗,然郢都全盛,且三城聯絡,未易拔也。西去魯洑江,乃入楚之徑路,必有重兵把守。必須從北打大寬轉,分軍為三:一軍攻麥城,一軍攻紀南城,大王率大軍直擣郢都,彼疾雷不及掩耳,顧此失彼,二城若破,郢不守矣。」孫武曰:「子胥之計甚善!」乃使伍員同公子山引兵一萬,蔡侯以本國之師助之,去攻麥城﹔孫武同夫概引兵一萬,唐侯以本國之師助之,去攻紀南城﹔闔閭同伯嚭等,引大軍攻郢城。且說,伍員東行數日,諜者報:「此去麥城,止一舍之遠,有大將鬥巢引兵守把。」
오원이 나와 말하기를, “초나라가 비록 여러 번 패했지만 영도는 튼튼하고 또한 맥성과 기남성이 연락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쪽으로 노복강을 향해 진격하면 초나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기는 하나 틀림없이 많은 군사가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부터 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군사를 삼분하여 일군은 맥성을 공격하고, 다른 일군은 기남성을 공격하며, 대왕께서는 대군을 거느리고 영도를 곧바로 쳐서 빠른 번개에 귀를 막지 못하듯이 이곳을 돌아볼 때 저곳을 잃게 해야 합니다. 두 성이 만약 깨어지면 영도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자서의 계책이 아주 좋습니다.” 했다. 이에 합려는 오원과 공자 산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맥성을 공격하게 하고, 채소후가 본국 군사를 거느리고 돕도록 했다. 손무는 부개와 함께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기남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당성공에게 본국 군사를 이끌고 돕게 했다. 합려는 백비 등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영도성을 공격했다. 한편, 오원이 동쪽으로 며칠을 가는데, 첩자가 보고하기를, “이곳에서 맥성까지는 일사(하루에 갈 거리,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대장 투소가 군사를 끌고 와서 지키고 있습니다.” 했다.
員命屯住軍馬﹔換了微服,小卒二人跟隨,步出營外,相度地形。來至一村,見村人方牽驢磨麥,其人以棰擊驢,驢走磨轉,麥屑紛紛而下。員忽悟曰:「吾知所以破麥城矣!」當下回營,暗傳號令:「每軍士一名,要布袋一個,內皆盛土﹔又要草一束,明日五鼓交割。如無者斬!」至次日五更,又傳一令:「每車要帶亂石若干。如無者斬!」比及天明,分軍為二隊:蔡侯率一隊往麥城之東﹔公子乾率一隊往麥城之西。吩咐各將所帶石土草束,築成小城,以當營壘。員身自規度,督率軍士用力,須臾而就。
오원은 군마를 주둔시키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소졸 두 사람을 데리고 걸어서 영채 밖으로 나가서 지형을 살폈다. 오원의 일행이 어느 촌락에 이르니, 촌사람이 당나귀로 연자방아를 돌려서 보리를 빻고 있었다. 그 사람이 회초리로 당나귀를 때리자 당나귀가 달려서 연자방아가 돌며 보리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오원이 갑자기 깨달아 말하기를, “나는 맥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알았다.” 했다. 곧 막사로 돌아와서 조용히 명령을 내리기를, “모든 군사는 포대를 한 개씩을 준비하여 그 안에 흙을 가득 담고, 또 풀 한 다발과 함께 내일 새벽 오경(4시경)까지 바치도록 하라!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는 자는 참하겠다!” 하고, 다음날 오경이 되자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 “모든 수레에는 돌을 가득 실어라. 어기는 자는 참하겠다!” 했다. 날이 밝아오자 군사들을 두 대로 나누어 채후에게 일대를 이끌게 하여 맥성의 동쪽으로 가게하고, 공자건(公子乾)에게 다른 일대를 주어 맥성의 서쪽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각 장수에게 분부하여 군사들이 가져온 돌과 흙 포대 및 풀 다발로 작은 성을 쌓아 진영 보루로 삼게 했다. 오원 자신은 스스로 군사들이 힘을 쓰도록 지시 감독하고 독려하여 잠깐 사이에 성을 쌓았다.
東城狹長,以象驢形,名曰「驢城」﹔西城正圓,以象磨形,名曰「磨城」。蔡侯不解其意。員笑曰:「東驢西磨,何患『麥』之不下耶?」鬥巢在麥城聞知吳兵東西築城,急忙引兵來爭,誰知二城已立,屹如堅壘。鬥巢先至東城,城上旌旗布滿,鐸聲不絕。鬥巢大怒,便欲攻城。只見轅門開處,一員少年將軍引兵出戰。鬥巢問其姓名,答曰:「吾乃蔡侯少子姬乾也。」鬥巢曰:「孺子非吾敵手!伍子胥安在?」姬乾曰:「已取汝麥城去矣!」鬥巢愈怒,挺著長戟,直取姬乾。姬乾奮戈相迎,兩下交鋒,約二十餘合。
동쪽 성은 좁고 길어서 당나귀 모양과 비슷하므로 여성(驢城 ; 당나귀 성)이라 이름 짓고, 서쪽의 성은 동그란 모양이라 연자방아와 비슷하므로 마성(磨城 ; 연자방아 성)이라 불렀다. 채소후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오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동쪽의 당나귀와 서쪽의 연자방아가 어찌 보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투소가 맥성에 있다가 오나라 군사들이 동서 양쪽에다 성을 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싸움을 걸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으나, 누가 알았으리요, 그때는 이미 성이 완성되어 우뚝 솟은 견고한 보루와 같았다. 투소가 먼저 동쪽의 여성으로 달려가서 싸움을 걸었으나 성 위에는 깃발만 가득 펄럭이고 큰 방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투소가 크게 노하여 바로 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진영의 원문이 열리면서 한 소년 장군이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했다. 투소가 소년 장군에게 성명을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채소후의 작은아들 희건(姬乾)이다.” 했다. 투소가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내 적수는 아니다! 오자서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희건이 말하기를, “그는 이미 너의 맥성을 취하러 가셨다.” 했다. 투소가 더욱 화를 내며 자루가 긴 극을 들고 희건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희건도 과를 빼어들고 대항하여 두 사람이 어우러져 이십여 합을 싸웠다.
忽有哨馬飛報:「今有吳兵攻打麥城,望將軍速回!」鬥巢恐巢穴有失,急鳴金收軍,軍伍已亂。姬乾乘勢掩殺一陣,不敢窮追而返。鬥巢回至麥城,正遇伍員指揮軍馬圍城。鬥巢橫戈拱手曰:「子胥別來無恙?足下先世之冤,皆由無極,今讒人已誅,足下無冤可報矣。宗國三世之恩,足下豈忘之乎?」員對曰:「吾先人有大功於楚,楚王不念,冤殺父兄,又欲絕吾之命,幸蒙天祐,得脫於難。懷之十九年,乃有今日,子如相諒,速速遠避,勿攖吾鋒,可以相全。」鬥巢大罵:「背主之賊!避汝不算好漢。」便挺戟來戰伍員,員亦持戟相迎。
갑자기 정찰 기병이 급히 보고하기를, “지금 오나라 군사들이 맥성을 공격하고 있으니, 장군께서는 속히 돌아가기 바랍니다.” 했다. 투소가 근거지를 잃을까 걱정하여 급히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니 대열이 어지러워졌다. 희건이 그 틈을 타서 한바탕 무찔렀으나 끝까지 쫓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투소가 맥성으로 돌아와서, 군마를 지휘하여 맥성을 공격하는 오원을 만났다. 투소가 극을 옆으로 쥐고 두 손을 맞잡아 예를 차리며 말하기를, “오자서는 그동안 별고 없었는가? 그대 선조들의 원한은 모두가 비무극의 참소로 인한 일이었소. 지금은 참소한 자가 이미 주살되었으니 그대는 이제 갚아야 할 원한이 없어졌소. 종주국의 3대에 걸친 은혜를 그대는 어찌하여 잊어버렸소?”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우리 선조들은 초나라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초왕이 유념하지 않고 원통하게 부친과 형님을 죽이고, 또한 내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어려움에서 벗어났소. 원한을 품은 지 19년이 지나 이제 오늘이 있게 되었소. 그대는 내 처지를 이해하여 속히 멀리 피하여 나의 칼끝에 닿지 않으면 서로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오.” 했다. 투소가 큰소리로 꾸짖기를, “주인을 배신한 도적놈아! 너를 피해 도망가면 내가 사나이가 아니다.” 하고, 극을 꼬나쥐고 오원에게 달려드니, 오원도 역시 극을 잡고 맞이했다.
略戰數合,伍員曰:「汝已疲勞,放汝入城,明日再戰。」鬥巢曰:「來日決個死敵!」兩下各自收軍。城上看見自家人馬,開門接應入城去了。至夜半,忽然城上發起喊來,報道:「吳兵已入城矣!」原來伍員軍中多有楚國降卒,故意放鬥巢入城,卻教降卒數人,一樣妝束,雜在楚兵隊裏混入,伏於僻處,夜半,於城上放下長索,吊上吳軍。比及知覺,城上吳軍已有百餘,齊聲吶喊,城外大軍應之,守城軍士亂竄,鬥巢禁約不住,只得乘軺車出走。伍員也不追趕,得了麥城,遣人至吳王處報捷。潛淵有詩云:「西磨東驢下麥城,偶因觸目得功成﹔子胥智勇真無敵,立見荊蠻右臂傾。」
몇 합을 싸우다가 오원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피로하니, 그대를 성안으로 들어가게 놓아주겠다. 내일 다시 싸워보자.” 하니, 투소가 말하기를, “내일은 결단코 사생결단을 내겠다!” 했다. 양군이 각자 군사를 거두었다. 맥성 위의 군사들이 자기 편 인마를 보고 성문을 열어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성 위에서 함성 소리가 일어나더니 성을 지키던 초나라 군사가 투소에게 보고하기를, “오나라 군사가 이미 성안에 들어왔습니다!” 했다. 원래 오원의 군사 중에 초나라에서 항복한 군졸이 많이 있었는데, 일부러 투소를 맥성으로 들어가게 해줄 때 항복한 군졸 몇 명을 변장시켜 초나라 군사들 속에 섞이게 하여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이 으슥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중에 성 위로 올라가서 긴 밧줄을 성 아래로 내려뜨려서 오나라 군사들을 끌어올렸다. 그것을 알았을 때 성 위로 기어오른 오나라 군사들은 이미 백여 명이 넘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성 밖의 오나라 대군에 내응했다. 성을 지키던 초나라 군사들은 어지럽게 달아나고, 투소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투소도 작은 수레를 타고 성을 빠져나가 달아났다. 오원은 그를 쫓지 않고 맥성을 얻었으며, 사람을 오왕 합려에게 보내어 맥성을 점령했음을 알렸다. 잠연(潛淵)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서쪽에 연자방아 성과 동쪽에 당나귀 성을 쌓아 맥성을 점령하여, 우연히 본 것으로 공을 이루었다. 오자서의 지혜와 용기를 당할 수가 없었으니, 선 채로 초나라는 오른쪽 팔을 잃었도다.” 했다.
話說,孫武引兵過虎牙山,轉入當陽阪,望見漳江在北,水勢滔滔,紀南地勢低下,西有赤湖,湖水通紀南及郢都城下。武看在肚裏,心生一計,命軍士屯於高阜之處,各備畚鍤,限一夜之間,要掘開深壕一道,引漳江之水,通於赤湖,卻築起長堤,壩住江水。那水進無所洩,平地高起二三丈,又遇冬月,西風大發,即時灌入紀南城中。守將宋木,只道江漲,驅城中百姓奔郢都避水。那水勢浩大,連郢都城下,一望如江湖了。孫武使人於山上砍竹造筏,吳軍乘筏薄城。城中方知此水乃吳人決漳江所致,眾心惶懼,各自逃生。
한편, 손무도 군사를 이끌고 호아산(虎牙山)을 지나 당양판(當陽阪)에 들어와서 멀리 북쪽에 있는 장강(漳江)을 바라보니 물살이 매우 거세었다. 기남성은 지세가 낮았고, 서쪽에 적호(赤湖)가 있어 그 호수의 물이 기남성을 통하여 영도성 아래로 이르렀다. 손무가 지세를 살펴보고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군사들에게 높은 언덕에 진을 치게 명하고, 각각 삼태기와 가래를 준비하게 하여 그날 밤 안에 참호를 깊게 파서 장강(漳江)의 물을 끌어들여 적호와 통하게 하고, 긴 제방을 쌓아 강물을 가로지르게 했다. 그 강물이 흘러나갈 데가 없어 평지에서는 두세 길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철이라 서풍이 크게 일어나니 즉시 강물이 기남성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남성을 지키던 장수 송목(宋木)은 단지 강물이 넘친 줄만 알고 성중의 백성들을 모두 영도로 보내 홍수를 피하게 했다. 그 수세가 넓고 커서 영도성 아래까지 이어져 마치 강과 호수처럼 되었다. 손무가 사람들을 시켜 산 위에서 대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게 하고, 오나라 군사는 뗏목을 타고 영도성으로 나아가게 했다. 성중에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이 물이 오나라 군사가 장강(漳江)의 물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각자 목숨을 구해 달아났다.
楚王知郢都難守,急使箴尹固具舟西門,取其愛妹季羋,一同登舟。子期在城上,正欲督率軍士捍水,聞楚王已行,只得同百官出城保駕,單單走出一身,不復顧其家室矣。郢都無主,不攻自破。史官有詩云:「虎踞方城阻漢川,吳兵迅掃若飛煙﹔忠良棄盡讒貪售,不怕隆城高入天。」孫武遂奉闔閭入郢都城,即使人掘開水壩,放水歸江,合兵以守四郊。伍員亦自麥城來見。闔閭升楚王之殿,百官拜賀已畢,然後唐蔡二君,亦入朝致詞稱慶。闔閭大喜,置酒高會。是晚,闔閭宿於楚王之宮,左右得楚王夫人以進。闔閭欲使侍寢,意猶未決。
초소왕은 영도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보고, 급히 잠윤 고(箴尹固)를 시켜 배를 서문에 준비하게 하여 사랑하는 여동생 계미(季羋)와 함께 배를 타고 달아났다. 자기(子期)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을 막으려고 하다가 초소왕이 이미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백관들과 함께 성을 나와 초소왕을 호종했다. 단신으로 뛰어나왔으므로 집안사람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영도는 주인이 없게 되어 공격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무너졌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범처럼 네모난 성에 웅크리고 한수를 막더니, 오나라 군사가 연기처럼 빠르게 평정했도다. 충량한 신하들을 모두 버리고 아첨꾼과 탐관오리로 조정을 채웠으니, 높은 성벽이 하늘에 닿은들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했다. 손무가 합려를 모시고 영도에 입성한 후에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둑을 허물어 물을 장강(漳江)으로 돌리고 군사들을 모아서 영도성의 사방을 지키게 했다. 오원도 역시 맥성으로부터 와서 만났다. 합려가 초왕의 궁전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를 받은 후에, 당성공과 채소후도 역시 들어와 합려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합려가 크게 기뻐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날 밤에 합려는 초왕의 궁궐에서 묵으려고 하니, 좌우의 시종들이 초왕의 부인을 들였다. 합려가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려다가 뜻을 정하지 못했다.
伍員曰:「國尚有之,況其妻乎?」王乃留宿,淫其妾媵殆遍。左右或言:「楚王之母伯嬴,乃太子建之妻,平王以其美而奪之,今其齒尚少,色未衰也。」闔閭心動,使人召之,伯嬴不出。闔閭怒,命左右「牽來見寡人。」伯嬴閉戶,以劍擊戶而言曰:「妾聞諸侯者,一國之教也。禮,男女居不同席,食不共器,所以示別。今君王棄其表儀,以淫亂聞於國人,未亡人寧伏劍而死,不敢承命。」闔閭大慙,乃謝曰:「寡人敬慕夫人,願識顏色,敢及亂乎?夫人休矣。」使其舊侍為之守戶,誡從人不得妄入。伍員求楚昭王不得,乃使孫武伯嚭等,亦分據諸大夫之室,淫其妻妾以辱之。
오원이 말하기를, “나라를 이미 차지하셨는데 하물며 그 부인을 주저하십니까?” 하니, 합려가 궁궐에 유숙하면서 그 후궁들을 두루 불러서 음란함을 즐겼다. 좌우의 시종이 혹 말하기를, “초왕의 모친 백영(伯嬴)은 곧 태자 건의 부인으로 진(秦)나라에서 데려왔으나 평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가로챘습니다. 지금 나이가 아직 젊어서 그 미모가 시들지 않았습니다.” 하니, 합려가 마음이 움직여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니, 백영이 나오지 않았다. 합려가 노하여 좌우의 시종들에게 명하기를, “끌고 와서 과인에게 보여라.” 했다. 백영이 문을 닫고 칼로 문을 내리치며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제후는 한 나라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예절은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도 같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유별함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오늘 군왕이 그 모범을 버리고 음란한 소문이 백성들에게 들리니 미망인이 차라리 칼 위에 엎드려 죽을지언정 감히 왕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다.” 했다. 합려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곧 사과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부인을 존중하고 사모하여 얼굴을 보고자 했을 뿐이지, 어찌 감히 어지럽히려 했겠습니까? 부인은 안심하십시오.” 하고, 오래된 시종을 시켜 백영의 처소를 지키게 하여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오원은 초소왕을 잡지 못하여 손무, 백비 등으로 하여금 초나라의 여러 대부들의 집에 분산하여 기거하면서 그 처첩들을 범하여 욕보이게 했다.
唐侯蔡侯同公子山往搜囊瓦之家,裘佩尚依然在笥,肅霜馬亦在廄中。二君各取其物,俱轉獻於吳王。其他寶貨金帛,充牣室中,恣左右運取,狼籍道路。囊瓦一生貪賄,何曾受用?公子山欲取囊瓦夫人,夫概至,逐山而自取之。是時君臣宣淫,男女無別,郢都城中,幾於獸群而禽聚矣。髯翁有詩云:「行淫不避楚君臣,但快私心瀆大倫﹔只有伯嬴持晚節,清風一線未亡人。」伍員言於吳王,欲將楚宗廟盡行拆毀。孫武進曰:「兵以義動,方為有名。平王廢太子建而立秦女之子,任用讒貪,內戮忠良,而外行暴於諸侯,是以吳得至此。今楚都已破,宜召太子建之子羋勝,立之為君,使主宗廟,以更昭王之位。楚人憐故太子無辜,必然相安,而勝懷吳德,世世貢獻不絕。王雖赦楚,猶得楚也。如此,則名實俱全矣!」
당성공과 채소후가 공자 산과 함께 낭와의 집을 수색하여 상자에 그대로 든 갖옷과 패옥, 마구간에 매어 있는 숙상마를 찾았다. 두 군주는 각기 자기의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모두 오왕에게 바치고, 그 밖에 방안에 가득한 금은보화와 비단은 마음대로 그들의 좌우에게 명하여 모두 꺼내어 실어가느라 도로가 시끄러웠다. 낭와가 한평생 뇌물을 탐했으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공자 산이 낭와의 부인을 취하려고 했으나, 부개가 이르러 공자 산을 쫓아내고 자기가 차지했다. 이때 오나라의 군신들이 모두 공공연히 음행을 저질러 남녀가 구별이 없었고 영도 성 중에는 거의 짐승들이 난무하는 것 같았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음행을 행하는데 초나라 군신의 아내를 가리지 않으니, 다만 사심을 채웠지만 인륜을 어지럽혔다. 오직 백영이 늦게야 절개를 지켜, 한 미망인이 한 가닥 맑은 바람을 일으켰다.” 했다. 오원이 오왕 합려에게 말하여 초나라의 종묘를 헐어버리려고 했다. 손무가 나아가 말하기를, “군사는 의롭게 움직여야만 비로소 명분이 섭니다. 초평왕이 태자 건을 폐하고 진(秦)나라 여자의 아들을 세웠으며, 아첨배와 탐관을 임용하고, 안으로는 충량한 신하를 죽이고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포악한 짓을 저질러서 오나라가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 초나라 도성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마땅히 태자 건의 아들 미승(羋勝)을 불러들여 초나라의 왕위에 앉혀 그들의 종묘사직을 잇게 하고 지금의 초왕을 대신하게 한다면 초나라 백성들은 죄 없이 죽은 태자를 동정하여 틀림없이 초나라가 안정될 것입니다. 또한 미승이 오나라의 덕을 생각하여 대대로 끊이지 않고 조공을 올릴 것입니다. 대왕께서 비록 초나라를 용서하더라도 초나라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같이 하신다면 명분과 실리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했다.
闔閭貪於滅楚,遂不聽孫武之言,乃焚毀其宗廟。唐蔡二君,各辭歸本國去訖。闔閭復置酒章華之臺,大宴群臣,樂工奏樂,群臣皆喜,惟伍員痛哭不已。闔閭曰:「卿報楚之志已酬矣,又何悲乎?」員含淚而對曰:「平王已死,楚王復逃,臣父兄之仇,尚未報萬分之一也。」闔閭曰:「卿欲何如?」員對曰:「乞大王許臣掘平王之塚墓,開棺斬首,方可洩臣之恨。」闔閭曰:「卿為德於寡人多矣,寡人何愛於枯骨,不以慰卿之私耶?」遂許之。
그러나 합려는 초나라를 멸하고 싶은 마음에, 마침내 손무의 말을 듣지 않고 즉시 초나라의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당성공과 채소후는 각기 작별 인사를 고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합려가 다시 장화대에서 주연을 열고 악공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으나, 오직 오원이 통곡해 마지않았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은 초나라에 보복할 뜻을 이미 갚았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슬퍼하시오?” 하니, 오원이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초평왕은 이미 죽고 초소왕은 도망쳐 버렸으니, 신의 부친과 형의 원수는 아직 만분의 일도 갚지 못했습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은 어떻게 하고 싶소?”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대왕께 청하오니 신에게 초평왕의 무덤을 파서 관을 열어 참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면, 비로소 소신의 원한이 풀리겠습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웠는데 과인이 어찌 썩은 해골을 아까워하여 경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고, 즉시 허락했다.
伍員訪知平王之墓,在東門外地方室丙莊寥臺湖,乃引本部兵往。但見平原衰草,湖水茫茫,並不知墓之所在。使人四下搜覓,亦無蹤影。伍員乃搥胸向天而號曰:「天乎,天乎!不令我報父兄之怨乎?」忽有老父至前,揖而問曰:「將軍欲得平王之塚何故?」員曰:「平王棄子奪媳,殺忠任佞,滅吾宗族,吾生不能加兵其頸,死亦當戮其屍,以報父兄於地下。」老父曰:「平王自知多怨,恐人發掘其墓,故葬於湖中。將軍必欲得棺,須涸湖水而求之,乃可見也。」因登寥臺,指示其處。
오원이 평왕의 묘가 영성의 동문 밖 요대호(寥臺湖) 가의 실병장(室丙莊)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평원에는 풀만 시들었고 호수는 아득하여 무덤의 소재를 알 수가 없었다. 병사들을 시켜 사방으로 찾았으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원이 가슴을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하여 내가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하게 하십니까?” 했다.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읍을 하면서 묻기를, “장군께서 평왕의 무덤을 찾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초평왕은 아들을 버리고 며느리를 빼앗았으며 충신을 죽이고 간신을 임용하여 나의 종족을 멸하였소. 내가 군사를 얻지 못하여 그의 목을 취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었어도 마땅히 그 시체의 목을 베어 지하의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오.” 했다. 노인이 말하기를, “초평왕은 스스로 많은 원한을 샀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자기의 무덤을 팔 것을 걱정하여 호수 안의 물속에 장사지내게 했습니다. 장군께서 꼭 그의 관을 얻으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호수의 물을 퍼내어 그것을 구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인하여 요대(寥臺)에 올라가 평왕의 무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員使善沒之士,入水求之,於臺東果得石槨。乃令軍士各負沙一囊,堆積墓旁,壅住流水﹔然後鑿開石槨,得一棺甚重,發之,內惟衣冠及精鐵數百斤而已。老叟曰:「此疑棺也,真棺尚在其下。」更去石板下層,果然有一棺。員令毀棺,拽出其屍,驗之,果楚平王之身也。用水銀殮過,膚肉不變。員一見其屍,怨氣沖天,手持九節銅鞭,鞭之三百,肉爛骨折。於是左足踐其腹,右手抉其目,數之曰:「汝生時枉有目珠,不辨忠佞,聽信讒言,殺吾父兄,豈不冤哉!」遂斷平王之頭,毀其衣衾棺木,同骸骨棄於原野。
오원은 잠수를 잘하는 사람을 시켜 물속에서 무덤을 찾게 하니, 과연 요대 동쪽에서 돌로 만든 큰 궤를 발견했다. 즉시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각기 모래 한 자루씩을 지고 오게 하여 그 묘 주위에 쌓게 하여 물을 막은 후에 석곽을 파내어 그 안에서 관을 얻었는데 대단히 무거웠다. 그 관을 여니 안에는 다만 의관과 정련된 쇠 수백 근이 있을 뿐이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곧 가짜 관입니다. 진짜 관은 그 아래에 있습니다.” 했다. 다시 아래의 석판을 뜯어내니 과연 관이 하나 있었다. 오원이 관을 부수라고 명령하여 시체를 꺼내어 살펴보니 과연 초평왕의 시신이었다. 수은을 사용하여 염습하였기 때문에 그 시신의 피부와 살이 변하지 않았다. 오원이 그 시신을 보자 분한 기운이 충천하여, 아홉 마디 구리 채찍을 손에 쥐고 300번 채찍질을 하니, 살이 흩어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이에 오원이 왼발로 그 배를 밟고 오른손으로 그 눈을 뽑아내어 따지며 말하기를, “너는 살았을 때 눈알을 잘못 굴려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참소를 믿고 나의 부형을 살해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하고 마침내 칼을 들어 평왕의 목을 자르고 시신의 의복과 관을 훼손하여 해골과 함께 들판에 버렸다.
髯翁有讚云:「怨不可積,冤不可極。極冤無君長,積怨無存歿。匹夫逃死,僇及朽骨。淚血灑鞭,怨氣昏日。孝意奪忠,家仇及國。烈哉子胥,千古猶為之飲泣!」伍員既撻平王之屍,問老叟曰:「子何以知平王葬處及其棺木之詐?」老叟曰:「吾非他人,乃石工也。昔平王令吾石工五十餘人,砌造疑塚,恐吾等洩漏其機,塚成之後,將諸工盡殺塚內,獨老漢私逃得免。今日感將軍孝心誠切,特來指明,亦為五十餘冤鬼,稍償其恨耳。」員乃取金帛厚酬老叟而去。
염옹(髯翁)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남에게 원한을 쌓지도 말며, 남을 원통하게 하지도 말라! 원통함이 극에 달하면 임금도 없게 되고, 원한을 쌓으면 생사도 상관하지 않는다. 필부는 목숨을 구하여 도망쳤으나, 욕보이는 것은 썩은 해골에까지 미쳐, 피눈물을 흘리며 채찍을 휘두르니, 원한으로 하늘이 어둡도다. 효성은 충성을 빼앗았고, 집안의 원수가 나라에까지 미쳤도다. 열렬하구나, 오자서여. 천고에도 오히려 눈물을 머금게 하도다!” 했다. 오원이 초평왕의 시체를 채찍질하고 나서 노인에게 묻기를, “노인께서는 어떻게 평왕이 묻힌 곳과 그 관이 거짓인 줄 아셨습니까?”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석공입니다. 옛날 초평왕이 우리 석공 50여 명에게 명령하여 가짜 무덤을 돌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비밀을 누설할까 걱정하여 그 무덤이 완성된 후에 여러 석공을 무덤 안에 가두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은 몰래 탈출하여 죽움을 면했습니다. 오늘 장군의 효심에 감동되어 특별히 와서 가리켜드려서 저도 또한 50여 원통한 귀신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할 뿐입니다.” 했다. 오원이 황금와 비단을 가져와서 그 노인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돌아갔다.
再說,楚昭王乘舟西涉沮水,又轉而南渡大江,入於雲中。有草寇數百人,夜劫昭王之舟,以戈擊昭王。時王孫繇于在旁,以背蔽王,大喝曰:「此楚王也,汝欲何為?」言未畢,戈中其肩,流血及踵,昏倒於地。寇曰:「吾輩但知有財帛,不知有王!且令尹大臣,尚且貪賄,況小民乎?」乃大搜舟中金帛寶貨之類。箴尹固急扶昭王登岸避之。昭王呼曰:「誰為我護持愛妹,勿令有傷!」下大夫鍾建背負季羋,以從王於岸。回顧群盜放火焚舟,乃夜走數里。至明旦,子期同宋木、鬥辛、鬥巢陸續蹤跡而至。鬥辛曰:「臣家在鄖,去此不及四十里,吾王且勉強到彼,再作區處。」
한편, 초소왕은 배를 타고 서쪽의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돌아서 큰 강을 건너 운중(雲中) 땅으로 들어갔다. 그때 도적 떼 수백 명이 밤에 초소왕이 탄 배를 습격하여 과로 소왕을 찌르려고 하였다. 그때 왕손 요우(繇于)가 초소왕의 곁에 있다가 소왕을 등으로 가리며 크게 소리치기를, “이 분은 초왕이시다. 너희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적들이 과로 그의 어깨를 찔려 흐르는 피가 그의 발뒤꿈치까지 흐르더니 혼절하여 바닥에 쓰려졌다. 도적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단지 재물과 비단을 알뿐이며 왕이 있는지 모른다. 영윤이라는 대신도 뇌물을 탐하는데 하물며 상민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고, 도적들이 즉시 배 안을 수색하여 배 안에서 황금과 비단, 보물 등을 찾아냈다. 잠윤 고(箴尹固)가 급히 초소왕을 부축하여 강언덕에 올라 피신했다. 소왕이 소리치기를, “누가 나의 어린 누이를 보호하여 다치지 않게 하라!” 하니, 하대부 종건(鐘建)이 계미(季羋)를 등에 업고 초소왕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왔다. 뒤를 돌아보니 도적 떼들이 배에다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초소왕의 일행은 밤을 도와 몇 리를 달아나서, 아침이 되자 자기(子期)와 송목(宋木), 투신(鬪辛), 투소(鬪巢) 등이 계속해서 초소왕의 자취를 쫓아 도착했다. 투신이 말하기를, “신의 집이 운(鄖) 땅에 있는데 이곳에서 40리가 채 못 됩니다. 대왕께서는 힘을 내셔서 그곳에 가서 다시 변통하여 처리하셔야 합니다.” 했다.
少頃,王孫繇于亦至,昭王驚問曰:「子負重傷,何以得免?」繇于曰:「臣負痛不能起,火及臣身,忽若有人推臣上岸,昏迷中聞其語曰:『吾乃楚之故令尹孫叔敖也。傳語吾王,吳師不久自退,社稷緜遠。』因以藥敷臣之肩,醒來時血止痛定,故能及此。」昭王曰:「孫叔產於雲中,其靈不泯。」相與嗟嘆不已。鬥巢出於乾糒同食,箴尹固解匏瓢汲水以進。昭王使鬥辛覓舟於成臼之津,辛望見一舟東來,載有妻小,察之,乃大夫藍尹亹也。辛呼曰:「王在此,可以載之。」藍尹亹曰:「亡國之君,吾何載焉!」竟去不顧。鬥辛伺候良久,復得漁舟,解衣以授之,纔肯艤舟攏岸。
조금 지나자 왕손 요우도 도착했다. 소왕이 놀라 묻기를, “그대는 중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올 수 있었소?” 하니, 왕손 요우가 말하기를, “신이 고통스러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불이 신을 덮치려는 순간 갑자기 어떤 사람이 신을 끌어 언덕에 오르게 했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중에 그 사람의 말을 들으니, ‘나는 옛날 초나라 영윤을 지낸 손숙오(孫叔敖)라는 사람이오. 왕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시오. 오나라 군사들은 머지않아 스스로 물러가고 사직은 오랫동안 면면히 이어질 것이오.’ 했습니다. 그리고 소신의 어깨에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깨어 보니 피가 멎고 통증이 진정되어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손숙오는 운중에서 태어났으니 그의 혼령이 없어지지 않았구나.” 하며 서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투소가 말린 양식을 꺼내어 서로 나누어 먹고, 잠윤 고가 표주박을 허리에서 풀어 물을 떠와서 초소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투신을 시켜 성구(成臼)의 나루에 가서 배를 찾아보게 했다. 투신이 바라보니 동쪽에서 배 한 척이 오는데, 처자를 싣고 있었다. 투신이 살펴보니 그 배에 탄 사람은 바로 대부 남윤 미(藍尹亹)였다. 투신이 부르기를, “대왕께서 이곳에 있소. 배에 왕을 태우시오.” 하니, 남윤 미가 말하기를, “망한 나라의 임금을 내가 무엇 때문에 태우겠소.” 하고, 마침내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투신이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고깃배를 발견하여 옷을 벗어 주고 겨우 배를 언덕에 붙이게 했다.
王遂與季羋同渡,得達鄖邑。鬥辛之仲弟鬥懷,聞王至出迎。辛令治饌。鬥懷進食,屢以目視昭王。鬥辛疑之,乃與季弟巢親侍王寢。至夜半,聞淬刀聲,鬥辛開門出看,乃鬥懷也,手執霜刃,怒氣勃勃。辛曰:「弟淬刃欲何為乎?」懷曰:「欲弒王耳!」辛曰:「汝何故生此逆心?」懷曰:「昔吾父忠於平王,平王聽費無極讒言而殺之。平王殺我父,我殺平王之子,以報其仇,有何不可。」辛怒罵曰:「君猶天也,天降禍於人,人敢仇乎?」懷曰:「王在國,則為君,今失國,則為仇,見仇不殺,非人也。」辛曰:「古者,怨不及嗣。王又悔前人之失,錄用我兄弟,今乘其危而弒之,天理不容。汝若萌此意,吾先斬汝!」
초소왕이 누이동생 계미와 함께 강을 건너 운읍(鄖邑)에 도착했다. 투신(鬥辛)의 동생 투회(鬪懷)가 초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아가 맞이했다. 투신이 음식을 준비시키니, 투회가 음식을 초소왕에게 바치면서 여러 번 눈으로 보았다. 투신이 이상히 여겨 즉시 그의 막내동생 투소와 함께 친히 왕을 침소에 모셨다. 밤중이 되어 칼 가는 소리가 나서, 투신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바로 투회였다. 손에 서릿발 같은 칼을 잡고 노기를 띠고 있었다. 투신이 말하기를, “아우는 칼을 갈아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투회가 말하기를, “왕을 죽이고자 하오.” 했다. 투신이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런 역심을 품었는가?” 하니, 투회가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초평왕에게 충성했지만 초평왕은 간신 비무극의 참언을 듣고 아버지를 죽였소. 초평왕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초평왕의 아들을 죽여서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안 된다는 것이오?” 했다. 투신이 노하여 꾸짖기를, “임금은 하늘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재앙을 내렸는데 사람이 감히 원수를 갚겠느냐?” 하니, 투회가 말하기를, “임금이 나라가 있으면 군주가 되지만, 지금은 나라를 잃었으니 원수가 됩니다. 원수를 보고 죽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했다. 투신이 말하기를, “옛말에 원한은 그 자손에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왕이 또한 부왕의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 형제들을 불러 임용했는데 오늘 그가 위험에 처한 것을 틈 타 죽인다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만일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이겠다,”라고 했다.
鬥懷挾刃出門而去,恨恨不已。昭王聞戶外叱喝之聲,披衣起竊聽,備聞其故,遂不肯留鄖。鬥辛鬥巢與子期商議,遂奉王北奔隨國。卻說,子西在魯洑江把守,聞郢都已破,昭王出奔,恐國人遺散,乃服王服,乘王輿,自稱楚王,立國於脾洩,以安人心。百姓避吳亂者,依之以居。已而聞王在隨,曉諭百姓,使知王之所在,然後至隨,與王相從。伍員終以不得楚昭王為恨,言於闔閭曰:「楚王未得,楚未可滅也。臣願率一軍西渡,蹤跡昏君,執之以歸。」闔閭許之。伍員一路追尋,聞楚王在隨,竟往隨國,致書隨君,要索取楚王。
투회가 칼을 품고 문을 나가면서 원통해하기를 마지않았다. 초소왕이 문밖에서 소리쳐 꾸짖는 소리를 듣고 옷을 걸쳐 입고 엿들어서 그 까닭을 상세히 알고, 마침내 운읍에 유숙할 마음이 없어졌다. 투신과 투소가 자기(子期)와 상의하여 마침내 왕을 모시고 북쪽으로 수(隨)나라로 달아났다. 한편 자서(子西 ; 공자 신)는 노보강(魯洑江) 가에서 지키다가 영도가 이미 함락되고 초소왕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사람들이 흩어질까 걱정되어 이에 자신이 왕의 복장에 왕의 수레를 타고 스스로 초왕이라고 칭하며 비설(脾泄)에서 나라를 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초나라 백성들이 오나라 난리를 피하여 그를 의지하며 살았다. 이윽고 초소왕이 수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에게 초소왕이 있는 곳을 분명하게 알린 후에 자신도 수나라로 가서 초왕을 따랐다. 오원은 끝내 초소왕을 붙잡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합려에게 말하기를, “초왕을 붙잡지 못했으니 초나라를 멸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원컨대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혼군 초왕의 자취를 찾아서 그를 잡아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합려가 허락했다. 오원이 곧장 쫓아가며 찾다가 초소왕이 수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수나라로 가서, 수나라 군주에게 편지를 보내 초왕을 붙잡아 보내라고 요구했다.
畢竟楚王如何得免,且看下回分解。
필경 초소왕이 어떻게 화를 면할까? 다음 회를 보면 플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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