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어색한 예술가 >
이나윤
바쁘게 흘러가던 학습 분기가 어느새 나를 에포크 주간으로 초대했다. 입학 전부터 한 주 동안 한 분야의 예술 활동에 몰입해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설레어 어서 에포크 주간이 오기만을 기다린 나인데, 눈 감았다가 뜨니 에포크를 하는 것 같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에포크 주간을 시작했다.
에포크를 시작하는 월요일, 에포크 수업 선택의 시간이 있었다. 첫 에포크인 만큼 모든 수업 이 전부 기대되어 다 들어보고 싶었다. 사진 수업이나 밴드 수업도 들어보고 싶었지만 화창한 봄에 고래 무대에서 ‘마당극’을 연습해볼 기회가 너무나도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조차 두려운 내가 무대 위에서 큰소리로 대사를 외치고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지 나 자신의 용기의 한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최종 선택지는 마당극 수업으로 결정되었다. 마당극 팀은 인터뷰를 따로 진행하지 않아 같이 마당극 수업을 듣게 된 재연이와 윤지랑 바로 느티나무 아래 고래 무대에서 대본 리딩을 진행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한 줄씩 대본을 소리 내 읽었다. 그 후 선생님들께서 각자의 배역을 정해주셨다. 내 배역은 해설이었다. 정해진 배역을 본 나는 아주.. 실망했다. 난 무엇보다 연기를 해보고 싶었고 ‘해설’이란 배역의 대사도 겨우 세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요일 저녁의 나는 마당극을 괜히 선택했다는 후회로 인해 매우 침울했다. 항상 아름다워 보이던 별빛도 어두컴컴해 보였던 저녁이었다.
쌓이고 쌓인 침울함이 극에 달할 때쯤 화요일 아침이 밝았다. 본격적인 에포크 주간의 시작이 설레진 않았으나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번 마당극 「별주부전」에는 총 두 곡의 노래가 있었는데 화요일엔 마당극 수업에서 3년째 전통으로 하는 ‘태평한 창가(노세 노세)’를 연습했다. 처음엔 어색했던 춤과 노래가 점점 익숙해지는 과정은 꽤 즐거웠고 뿌듯했다. 노래도 신나서 우울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마당극 연습을 즐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가득한 아쉬움 속에서 조금의 아쉬움이 빠져나갔다 해도 여전히 침울했다. 계속해서 후회했다.
수요일 오전에는 스쿼트와 달리기로 무대에서의 체력을 유지하는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한 운동은 힘들었지만 달리는게 의외로 즐거워서 견딜만했던 것 같다. 그 후 노래 ‘난감하네’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시작하기 전 그리고 노래 중간에 긴 사설이 있었는데 해설이 그 부분을 나눠 맡아야 했다. 사설 부분이 외우기 힘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가장 재밌는 부분 같아 다른 해설 친구들에게 큰 파트를 맡고 싶다는 부탁을 하고 윤지, 재연이와 파트를 잘 조율했다. 또한, 새우 역을 맡았던 보나 언니가 건강 문제로 인해 마당극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새우 역을 해설끼리 나눠 맡게 되었다. 비채 언니가 맡은 비둘기 뒤에 따라다니는 비둘기 역할 까지! 갑자기 지루했던 마당극에서 대사 외우기에도 벅찬 바쁜 마당극 수업이 시작됐다. 사설은 판소리 억양까지 ‘흉내’내야 했으며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대사 타이밍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외울 대사도 많아 바쁜데 바로 장면 연습에 들어갔다. 장면이 만들어지며 내가 정말 마당‘극’을 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들어 신기했다. 모두가 마당극에 진심인 배우가 되어 몰입하며 극을 만들었던 것 같다. 전체의 극에서 반쯤 진도를 나가고 연습을 마무리했다.
공연 하루 전인 목요일엔 수요일과 같은 하체 운동과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장면연습을 끝마쳤으며 더욱 완벽하게 해내기 위한 반복만을 했다. 그리고 모든 마당극 팀원이 마당극 의상을 입고 단체 사진을 찍었고 의상을 입은채로 연습을 해 내가 아닌 다른 배역의 의상을 보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특히 용왕역의 옷보다 가재 장군역의 옷이 더욱 화려한 붉은 옷이라 그 부분도 재밌었다. 졸업사진을 찍느라 연습시간이 조금 늦어지긴 했었으나 그 시간 동안 다른 에포크 수업을 구경하며 내년에 들어보고 싶은 에포크 수업을 생각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그리고 14기의 졸업사진 촬영 현장을 구경하는 일도 신이 난 상태로 지루할 틈 없이 구경하며 쉼을 즐겼다. 16기의 3학년을 기대하는 상상도 재미있었다. 졸업사진 촬영이 끝난 후엔 극을 2번 정도 반복하여 연습한 후 연습을 끝마쳤다.
드디어, 아니 어느새 공연 날인 금요일이 다가왔다. 그다지 떨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고등과 함께하는 에포크여서 그런지 더욱 많은 사람이 나를 본다고 생각하니 매우 긴장되었다. 그 후 공연을 보러오신 부모님과 인사한 후 다른 팀의 공연을 보다 마당극 공연의 순서가 다가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연 직전과 커튼콜까지의 기억이 사르르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퇴장 장면밖에 기억나지 않는 공연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볼 땐 결국 최종 공연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에겐 크게 실수한 부분 없이 공연이 진행되어 기억나지 않는다는 뜻이기에 정말 뿌듯한 결과라고 느껴진다. 공연이 끝난 후 밀려오는 그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개운했다.
힘들기도 아주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뿌듯함에 겨워 첫 에포크 수업을 끝마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의 행복을 느끼며 나도 모르던 나의 숨겨진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의 나는 ‘힘든데 즐거운 순간’을 누리는 한 명의 예술가가 된 기분을 느꼈다. 아티스트의 밤에 낭송한 나의 시를 지으며 문학인이 된 기분을 느꼈고 마당극을 하며 노력하는 배우가 된 기분을 느꼈다. 나 또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의 어색함과 설렘을 느끼며 나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에포크 주간이었다. 처음으로 예술가가 되어본 듯한 이 날들을 기억하며 예술가로서 나를 보듬으며, 그리고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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