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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을 보는 원리 1
최근 무척 흥미로운 일련의 전생들을 다룬 <알키오네의 생애들>(역주)이 출판되자 어떻게 하면 전생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지 그 정확한 방법을 묻는 질문들이 매우 많이 들어오고 있다. 투시가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그 주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를 통해 배우는 자들이 적어도 이해의 가닥을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선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의 개념에 대한 설명부터가 결코 용이하지 않다. 이해의 편의상 한 쪽에 큰 거울이 달린 방을 상상해 보자. 그 방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거울에 비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거울이 일종의 영사기의 속성을 갖고 있어서 거기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후에 일정한 상황 하에서 그걸 다시 재생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아카식 레코드의 이해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거울에 장면뿐만 아니라 축음기처럼 모든 소리를 재생하고 상념과 느낌까지 재생시킬 수 있는 기능을 추가시켜야 한다.
이제, 거울 속의 반영의 본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만일 두 사람이 거울 앞에, 그것도 자기가 아닌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같은 거울 안에 두 이미지가 비치고 있다. 자신은 상대방의 모습만 볼 수 있지만 상대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거울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을 다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리가 그 위에 비춰진 모든 이미지를 보존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거울은 동시에 두 이미지(두 사람의 모습)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거울 앞에서 상하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거울 속의 이미지도 그대로 움직인다. 따라서 유리의 모든 입자는 거기에 비춰진 모든 대상물의 입자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울 안에 비쳐지는 장면은 우리의 눈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반영을 거울 속에서 보기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의 육체적 시각이 동시에 동일 공간을 점할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거울의 입자에 일어난다고 가정한 것은 사실상 모든 물질 입자에 대해 발생하고 있다. 길가의 모든 돌들조차 자기를 스쳐간 모든 것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담고 있다. 그 기록은 보통의 물질 감각에 가시화 되도록 재생되지는 않지만 발전된 감각을 지닌 영능자라면 어려움 없이 그것을 감지해 낸다.
기록(아카식 레코드)은 어떤 종류의 질료 안에 본래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기록을 읽기 위해서 어떤 특정 물체와 직접 접촉할 필요는 없다. 일단 한 번 연결되고 나면 거리와는 상관없이 기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원자가 기록을 간직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또는 아마 원자 자체 내에 투시가로 하여금 기록(원자의 시야 안에서 발생했던 모든 일들에 대한 기록)과 동조시키는 힘이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코메트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사이코메트리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즉 정신 감응한 물체가 있는 공간 내에서 발생한 장면만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계곡에 오랜 세월 동안 놓여 있던 조약돌을 정신 감응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제까지 그 계곡에서 발생한 일들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시야는 주변 언덕에 그칠 뿐이다. 마치 그가 수 세기 동안 그 돌이 놓여 있던 장소에 서 있으면서 거기서 발생한 일들을 지켜보았던 것과 같다.
그러나 사이코메트리의 힘은 더욱 고급화될 수 있다. 그런 고급한 사이코메트리의 방법을 사용하면 그는 주변의 언덕 너머로 펼쳐진 광경까지 보게 되며 그 돌이 옮겨져 온 이래 일어났던 일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조차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돌 없이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코잘체의 감각을 이용하여 물체의 대응체를 보면 우리는 모든 사물이 과거의 영상들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무생물 입자가 인상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대답은, 입자에도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신의 생명의 일부라는 데 있다. 따라서 사실상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서는 다른 측면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아카식 레코드를 로고스 자신의 기억이라고 보는 것이다.
로고스는 각 입자와 관련된 사건들, 그 입자의 가시권 내에서 발생했던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으며 입자는 그러한 로고스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자신의 기억이라 부르는 것도 단지 로고스의 기억(-우리를 통해 발생했던 모든 일에 대한 기억)과 접촉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지상에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두 가지 형태의 기억을 갖고 있다. 첫째는 두뇌의 기억. 그러나 이것은 때로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다. 둘째는 어떤 입자들(-예를 들어 몸이나 옷, 기타 사물) 안에 새겨진 기억으로, 이것은 언제나 완전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그걸 읽는 법을 배운 사람들에게만 활용된다.
두뇌의 기억이 부정확한 데는 두뇌 자체의 불완전뿐만 아니라 본래의 관찰이 불완전한 것에 기인함도 명심해야 한다. 때로는 편견에 의한 채색의 가능성도 크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상적인 부분만을 기억한다. 그것도 부분적으로, 때로는 그나마 틀리게. 그러나 아카식 레코드는 이 모든 불완전성을 완전히 넘어서 있다.
앞서 나는 모든 입자에 기록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에 전생의 기억이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스트랄체, 멘탈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매체들(육체, 아스트랄체, 멘탈체)은 각 화신마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생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코잘체의 차원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하의 매체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생들을 통하여 자아는 코잘체 안에 존재해 왔다. 그러므로 자아는 실제의 목격자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멘탈체, 아스트랄체, 육체는 목격자가 아니고 오직 자아로부터 받은 것만을 보고할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 자아와 인성 사이의 통신은 매우 불완전하다. 이 점을 기억할 때 우리는 제2, 제3의 부차적, 간접적 증언들이 얼마나 신뢰할 만하지 못한가를 즉각 알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아스트랄체나 멘탈체로부터 전생의 단편적인 모습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연속성도 없으며 내용의 일관성도 없다. 그 장면들은 코잘체로부터의 반영, 그것도 매우 흐리고 얼룩진 반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전생을 정확히 읽기 위해 무엇보다 코잘체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들을 타인(조사 대상자)의 코잘체에 적용시킬 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전생에 대한 자아 자신의 기억을 직접 취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아를 정신 감응하여 조사자의 힘으로 그가 거쳐 온 경험들을 보는 것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가 더 안전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자아조차 과거의 인성을 통해 그 경험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불완전하고 편견에 치우친 인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사자의 코잘체의 기능을 활용하여 상대의 코잘체를 정신 감응하는 것은 전생조사법의 평범한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전생조사는 코잘체 이하의 차원에서도 영구 원자들을 정신 감응함으로써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코잘체의 감각을 활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방법은 붓디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을 활용하려면 고도의 영적 발전이 요구된다. 이것은 완전히 조사 대상자의 자아와 하나가 되어 외부로부터가 아닌 내부로부터 그의 경험들을 마치 자기의 것인양 읽는 것이다.
<알키오네의 생애들>에 나온 일련의 전생들은 이 두 가지 고난도 방법에 의해 조사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사자들은 조사 대상자의 지성적 협력을 얻는 편의를 누렸다.
조사 대상자가 육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매체들을 완벽하게 고요히 유지시킬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흥분 상태에 있다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경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요함은 필수 요건이다. 인상들이 분명하게 전달되려면 두뇌가 고요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코잘체로부터 물질 차원으로 내려오는 것들은 모두 반드시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를 통과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들 중 어느 하나가 혼란되어 있다면 반영이 불완전해진다. 이는 아주 작은 파문에도 호수 표면에 비친 나무나 집의 이미지가 깨지거나 왜곡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편견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유리에 얼룩이 진 것과 같이 되어 그것을 통해 보이는 모든 것에 얼룩 묻은 잘못된 인상을 줄 것이다.
전생을 조사할 때는 언제나 완전한 현재 의식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사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은 의식이 육체를 떠나 조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정확히 기억을 재생해 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조사자가, 오직 육체가 잠들어 있을 때만 코잘체를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있다면 전생을 조사하는 동안 육체를 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물들을 확인하는 데는 다소의 어려움이 따른다. 수 만년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당연히 자아에는 상당한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행히 약간만 훈련하면 기록을 원하는 만큼 빠르게 또는 천천히 다시 검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물의 동일성을 확인하는데 어떤 의심이 있으면 언제나 관찰 대상 자아의 일련의 생들을 따라 과거에서 현재까지 빨리 추적해 본다.
어떤 조사자들은 아주 먼 옛날 어떤 인생 속에서 특정인의 자아를 보고 단번에 직관적으로 현재의 누구임을 알아본다. 그러나 한 찰나의 직관이 옳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틀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앞서의 경우처럼 신중을 기하는 것뿐이다.
때로는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조사자에 의해 자아의 동일성이 금방 인식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천 년 동안 그 사람이 거의 진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2만년 전 모습을 보고 현재의 그를 파악하려 하는 것은 마치 오래 전 어린 아기 때 보았던 사람을 성인이 되어서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혜의 마스터들이 조사의 대상이 될 경우는 수천 년이 경과할 지라도 순간적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와는 매우 다른 이유에 기인한 것이다. 저급 매체들이 이미 자아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것들은 아우고에이데스와 유사한 모습이다. 따라서 생에서 생으로 거의 조금밖에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아가 모나드의 완벽한 반영에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는 거의 변화되지 않고 미세하게 성장한다. 따라서 그를 즉각적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을 조사하는데 있어 가장 쉬운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앞에 기록을 자연적인 속도로 흘러가게끔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하루의 사건을 조사하는데 하루가, 한 생을 조사하는데 한 생이 소요될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기록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조절할 수 있다. 따라서 수천 년의 시간도 빨리 지나도록 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특별한 장면을 원하는 만큼 오래 동안 붙잡아 둔 채 상세히 조사할 수 있다.
이러한 완급은 영상 운동 속도의 완급과 같은 것으로 약간의 수련을 통해 의지대로 조절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의지에 의한 기록의 완급은 실제에 있어서는 기록이 아니라 조사자의 의식이 완급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기록들은 서로 층을 이루며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의 것일수록 위에 있고 오래된 것일수록 아래에 있다. 그러나 이 비유조차 올바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대로라면 두께의 개념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3차원적인 공간 점유성이 없다.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이 3차원이 아니듯이.
의식이 기록들을 통과해 지나갈 때 그것은 사실 공간 속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기록의 한 층 한 층을 외투처럼 입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 한 가운데 있으면서 지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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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알키오네의 생애들 Lives of Alcyone(1924)>은 애니 베산트와 리드비터의 공저로 크리슈나무르티(알키오네)의 여러 전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댓글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