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석(安機石)
2派18世
漁隱齋 順興安公(機石) 墓碣銘
어은재 순흥안공(기석) 묘갈명
공의 휘는 기석이요 자는 지경 호는 어은재라 성은 안씨이며 순흥인이라 대대로 고려조에 벼슬을 하였다.
상호군 자미는 시조가 되신다. 휘를 문개 호를 질재란 분이 있으니 충숙왕을 따라 토번국에 가신 공으로 순흥군에 봉하고 시호를 문의공이라 한다.
휘를 준, 호를 노포라 하는 분은 고려말 과거급제하여 판봉상시하셨다. 조선조 초에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죄가 되어 예천에 유배되었다. 길야은 선생과 슬픈 심정을 글로 깨치기도 했다. 太宗大王이 그 절개를 가상히 여겨 시호를 충정공이라 하였으며 기천서원에 향사한다.
휘 경빈은 문과해서 형조 정랑이시니 공의 고조시다. 증조의 휘는 명남으로 글의 행공이 들어났으며 공조좌랑이다.
조의 휘는 직이요, 호는 나봉, 공조참의로 증직되시고 우복선생 문하에 교류하였다.
아버님의 휘는 도징, 호는 점리와로 목재 홍선생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었다.
효종 때 예제의 일로 항소하여 대궐 앞에서 규탄했다. 어머님 진주류씨는 응형의 따님이요 판관 번의 손이며 승지 최수도의 외손이다. 1640년(인조 경진) 8월 20일 공이 함창 도계리 외가에서 나셨다. 공은 나면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빼어났다.
5세에 글을 잘 읽었고 7세에 능히 편액 글자를 옮겨쓰고 8세에 소학, 호경을 익히니 어려서 이미 문리를 얻었다. 깊이 살피고 해석하고 연의하는데 책상 앞에 꿇어앉아 침식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1657년 봄 운암사에서 장노의 모임에 글을 짓는데 공이 사물에 따른 이치의 뜻을 화답하여 올리니 장노들이 칭찬하였다.
일찍 서로 기록하기를 유학의 운세 관계가 침쇠하여 시가와 문장이 옛사람의 글을 따서 암송하고 기록함이 구이지학이라 그 학문의 근저가 여기에 있다. 중용의 학을 말로 그 뜻을 진술하여 목제 선생을 물러 나서는 구경, 도설을 닦고 정성잠을 지었다.
기해년 처가에 있을 때 장인 정자구옹이 자탄 안군은 참으로 짝이 없는 선비라 보통의 사위와 다르다 하였다.
1678년 선공께서 자리에 누워 유서로 경계하되 자손이 근본에 보답하는 것은 오직 제사이니 정성껏 할 따름이다. 또 명하시되 만장을 구하지 말라 하였다.
이해 아버지가 돌아가니 유언을 한결같이 지키고 1699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니 슬픔이 극에 달해 아버지 때와 예를 같이 했다.
1720년 81세 노인으로 호군의 가자체를 받고 23년에 계씨 월오공이 수첩을 거듭 받으니 달천집에서 잔치를 하니 하압하는 축하의 글이 많았다.
1725년 월오공이 하세하고 공이 지은 “상례고증”에 공회(형제간의 우애)의 슬픔을 서술하고 이해 9월 25일 돌아가니 86세로 흥천 어둔산 병좌 언덕에 장사 지내다. 부인은 동래정씨 자구의 따님이요, 서계 언굉의 증손으로 두 아들을 두니 이순, 이항이다.
부인 의성 김씨는 이리의 따님이며, 군수 정룡의 손, 서계 담수의 증손이다. 4남1녀를 두니 남은 이중, 이규, 이구, 이범, 사위는 진사 이덕겸이다.
이순의 남은 성세, 응세, 사위는 신정모로 문과 해서 부사이다. 이항의 남은 익세 사위는 이매이다. 이중의 남은 구세, 붕세, 이규의 사위는 이석성, 이구의 계자는 붕세이다. 이범의 남은 명세이고 이덕겸의 남은 윤엽, 사위는 장천수, 증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았다.
공의 가정의 학문이 크고 넓은 공부라 경의와 예설에 더욱 힘쓰니 만년에는 태극도설을 써서 걸어놓고 이를 취미로 했다. 또 여씨향약을 줄여서 향약의 조례로 삼고 회재와 퇴계의 예설을 모아 조례로 한질을 만들어 상례와 제례의 요점을 가려 확실히 알게 밝히고 장구의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스승으로 삼을 벗을 가렸다. 이어서 명을 하노니,
예를 전공하여 유학을 넓게 힘써 여씨향약의 법규를 본받았다. 태극도설을 써 걸어 선초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명주에 좋은 글을 써 걸어두었으니 어찌 겉모양을 구하리오
실로 몸소 얻음이라 알운산 동쪽 흥천의 북편 공이 묻혔으니 지나는자 반드시 알도록 내 돌에 새겨 긴 세월에 크게 고하리라.
1908년 10월 하순 전행의금부도사 풍산후인 류도헌은 삼가 짓노라.
어은재안공문집서(漁隱齋安公文集序)
自世降來, 士之遇固難矣. 間有才學拔類之士出, 而不能見用於世, 往往窮而在下, 獨善其身, 蓋其志潔行高自重者存, 不屑屑於器使也. 今觀漁隱齋先生遺集, 其文溫雅有典則, 略浮靡而趨本實, 尙志節而篤倫理, 眞有德之言也. 公早登木齋洪先生之門, 特蒙奬詡, 至比魏舒衛玠之倫, 資才之美也. 同門諸賢, 有不得鞭引幷驅之歎, 蘊蓄之富也. 是不但師友間講習有資, 必有聞於羅峯离窩詩言禮立之庭, 豈無所本而然哉. 以公負抱之大, 出而試之於世, 則事功上做措, 必有大可觀者, 而乃觀占玩象, 高蹈自將, 追逐雲霞, 托跡漁釣, 翛然作山澤間一隱倫而止, 豈非所謂自重者存焉者耶. 晩節尤整, 暇以平日所受庸學於師門者, 沈潛硏究, 九經有圖, 正性有箴, 自敍訓辭曰, 攻詞章者, 尋摘而已, 專記誦者, 口耳而已, 俛焉日孜, 不知老之將至, 年與德邵, 天爵自至, 茀祿備躬, 神彩燁然, 輝映鄕邦, 一時尙德知言之君子, 擧推之以師門之高足, 當世之儒仙, 爲之歌詠之圖繪之不已, 於乎休哉. 始公之卒, 淸臺權先生將爲文以賁其幽, 屬草藁未定, 遽爾易簀, 而雲仍屢經灰劫, 遺文蕩佚, 爲世舊之所嗟惜者久矣. 迺者, 嗣孫永一甫廣探諸家舊篋, 編爲若干卷, 其存者特十之二三耳. 雖然, 一臠可知全鼎, 奚必多乎哉. 方謀所以繡梓, 廣其傳, 責昌烈弁一言, 顧不敢當, 而亦有所不敢終辭, 遂敬諾而卒業焉. 又竊有所感於中者, 昌烈嘗過笁城之南, 有洞曰興泉, 幽寒古棲, 人去樹老, 臺沼荒廢, 顧語古老, 是爲先生當日垂釣處, 亦書之左傍云.
동려문집 (東旅文集) 안창렬(安昌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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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미(安子美)ㅡㅡ>안영린(安永麟)ㅡㅡ>안정준(安貞俊)ㅡㅡ>안성철(安成哲)ㅡㅡ>안문개(安文凱)ㅡㅡ>안천선(安千善)ㅡㅡ>안손주(安孫柱)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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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安俊)ㅡㅡ>안숭덕(安崇德)ㅡㅡ>안효조(安孝祖)ㅡㅡ>안황(安璜), 안찬(安瓚)ㅡㅡ>안경빈(安敬賓)ㅡㅡ>ㅡㅡ>안명남(安命男)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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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집(安潗) 안직(安溭) 안현(安顯) 안혁(安奕) 안개(安漑) 안홍(安鴻)
11 12 13 14 15
안찬(安瓚)ㅡㅡ>안희맹(安希孟)ㅡㅡ>안명(安銘)ㅡㅡ>안양윤(安良胤)ㅡㅡ>안상인(安尙仁), 안상예(安尙禮)
안현윤(安賢胤)ㅡㅡ>안엽(安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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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집(安潗)ㅡㅡ>안석징(安碩徵) 안구징(安久徵) 안헌징(安獻徵)
안직(安溭)ㅡㅡ>안서징(安瑞徵) 안몽징(安夢徵) 안도징(安道徵) 안선징(安善徵) 안두징(安斗徵) 안하징(安夏徵)
안현(安顯)ㅡㅡ>안기징(安起徵)ㅡㅡ>안한세(安漢世)ㅡㅡ>안익이(安翼履)ㅡㅡ>안세진(安世律), 안세도(安世度)
안혁(安奕)ㅡㅡ>안태징(安泰徵) 안후징(安厚徵) 안건징(安健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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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징(安道徵)ㅡㅡ>안기석(安機石)ㅡㅡ>안이순, 안이항, 안이중, 안이규, 안이구, 안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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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순ㅡㅡ>성세, 응세
안이항ㅡㅡ>익세
안이중ㅡㅡ>구세, 붕세
안이규ㅡㅡ>
안이구ㅡㅡ>붕세
안이범ㅡㅡ>명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