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꽃을 따라오는 벌이 아니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영끌족의 독백
이승현
지난밤에 엄습한 서리의 모양을 보니
하향의 경기지표가 시리도록 멍들겠다
빚잔치 회생절차도 풀어낼 수 없는 앞날
첫발을 잘못 디뎌서 수렁에 빠진 건가
무지無智가 이정표를 이해를 못 했는가
가위에 몸부림치며 점점 깊이 가라앉네
풍요의 일자리가 뻘밭으로 변한 것은
무거운 두 손 위에다 더 얹으려 했던 일
오는 해 꽃이 피어도 봄은 아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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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데 끌어들인 영혼으로 인해 ‘지난밤’엔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설사 그랬어도 밤새 꾸었던 ‘개꿈’에 대해 말할 수나 있을까? 자꾸만 바닥으로 심해로 내리꽂히는 ‘경기지표’의 상방경직성에 혼절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과몰입이라는 말이 요즘 종종 들린다. 사전적으로야 본인에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별 볼 일 없는 일에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행위겠지만 내심 본인의 아픔, 고통, 어려움을 누그러뜨려 주는 호르몬으로 여길만하다. 그것이 ‘영끌족’을 탄생시키는 필요조건 정도가 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표현대로 ‘영끌족’이 가는 곳곳에 ‘이정표’는 있었을 것이며 ‘수렁’이라는 곳에 덮인 수풀은 그래도 카멜레온과는 달리 은폐 솜씨가 뛰어나지 못했겠지만 그만 “과몰입”에서 나온 부작용의 덫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한때 이 나라, 이 산하는 그래도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있었고 “자수성가 自手成家”라는 사자성어가 가슴을 뛰게 하던 때도 있었다. 또 가훈이나 사훈으로 쓰던 “성실”, “정직”, “노력”이 꿀리지(?) 않는 문구이기도 했다. 골라서 가던 일자리가 그다지 형평성을 잃지도 않았었다. ‘영끌’하면 나도 가능한 시절이었으니까......집, 일자리, 꿈도 영혼을 동원하면 바라는 것의 반의 반타작이라도 할 수 있는 때였으니까......
땅 한 곳에 내가 가진 모든 꽃씨를 한 번에 뿌려 버린 탓에 꽃들이 꽃들의 그늘에 가려 피어나지 못하는 모순에 “꽃은 피었으되 꽃은 시들었고 봄은 왔으되 봄은 아니다.”라고 자백하는 영끌족의 등허리가 시리고 멍들어 간다.
‘독백’이 고백을 넘어 자백이 될 때는 ‘봄’이 왔으면 좋겠다. 겨울이 깊어만 가는 지금, ‘봄’이 시간과 공간을 혼획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얹혀있는 것이 아닌 이상 투쟁하고 저항하고 항쟁하고 대항하는 누구에게나 다가왔으면 정말 좋겠다.
봄은 꽃을 따라오는 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