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의 원래 위치]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베드로후서 3:3-6)
창세기 1:3은 하나님의 재창조에 의한 새로운 시작이다. 현재의 모습을 지닌 인간도 창세기 1:27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으로 오직 <한글 킹제임스 성경>에 의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경우에만 발견되는 소중한 진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진리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고전 1:20)고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현대인들”을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느니라.](고전 2:9)고 성경은 잘라 말씀한다.
성경에 나타난 진리들은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게 된(고전 2:16) 그리스도인들만이 발견하고, 분별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아담과 이브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창세기 6장이나 욥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컫는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때 주께서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지식이 없는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자가 누구냐? 너는 이제 남자답게 네 허리를 동이라. 내가 너에게 요구할 것이니 너는 내게 대답하라. 내가 이 세상의 기초들을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다면 분명히 밝히라. 누가 그 치수를 재었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척량줄을 띄웠느냐? 그 기초들은 무엇 위에다 고정시켰으며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느냐? 언제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기뻐서 소리쳤느냐?](욥 38:1-7)고 성경은 아득히 먼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를 말씀한다.
인간의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이 [하나님의 아들들](창 6:4-6, 욥 38:6)은 성경에서 [신들](요 10:34, 행 14:11)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 [신들] 중 재창조 이후 인간이 사는 지상에 내려왔던 자들은 사람의 딸들과 관계하여 [거인들(giants)](창 6:4)을 낳았으며, 이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으나, 홍수가 나서](눅 17:27) 모두 진멸되고 말았다. 이들은 노아의 시대에 이 땅에 존재했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과 관계하여 “거인들”을 낳게 했고, 이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정상적인 인간들도 타락에 물들고 말았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연 현상적인 당연한 일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의 유물론적 과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성경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골치 아픈 사건들이다. 그러나 [거인들]은 지구 역사상 사실적으로 존재했고 이들 중 몇몇은 그 이름까지 성경에 알려져 있다.
예컨대, [바산 왕 옥](신 3:11)이라든지,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쟁했을 때 십브캐가 죽인 거인 자손 [십패](대상 20:4)라든지, 무게가 300세켈이나 나가는 거대한 놋 창과 새 칼을 들고 다윗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던 필리스티아의 [이스비브놉](삼하 21:16)이라든지 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카나안에 보냈던 정탐꾼들은 돌아와 [그 땅은 그 거민들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에서 우리가 보았던 백성은 키가 큰 사람들](민 13:33)이었다고 보고했다. 카나안에 들어간 여호수아가 요셉 자손에게 프리스인과 [거인들의 땅]인 삼림 지역을 주어 개간토록 했다(수 17:15). 여호수아는 이 지역의 거인족들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수 17:18) 요셉의 자손이 [큰 백성이요, 큰 능력이 있으니](수 17:17) 그 거인족들을 능히 쫓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다윗이 상대하여 물매로 이마를 찍어 죽였던 골리앗 역시 거인이었던 것은 성경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골리앗은 갑옷의 무게만도 [놋 오천 세켈](삼상 17:5)이었고, 그의 창날만도 [철 육백 세켈의 무게](삼상 17:7)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은 창 1:2 이전 어느 시점에 한 차례 지상에서 멸망했고, 노아의 때에 홍수로 또 한 차례 진멸되었으며, 또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 모두를 진멸시켰느니라.](눅 17:29)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땅에 내려졌던 이런 재앙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노아의 날들에 일어났던 것같이 인자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으나,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진멸시켰느니라. 그것은 또한 롯의 날들에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라.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였으나,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 모두를 진멸시켰느니라. 이와 같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30)고 예고해 놓으셨다.
세상은 과거에 일어났던 재앙들로 인해 창세기 1:1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세상 만물들뿐만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세 쌍의 “하늘과 땅”을 언급된다. 창세기 1:1에서의 “하늘과 땅”이 그 하나요, 창세기 1:4-20에서 언급되는 현재의 “하늘들과 땅”이 또 하나이며, 베드로후서 3:13과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언급하는 새로운 “하늘들과 땅”이 또 있게 될 것이다. 창세기 1:1-3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늘과 땅은 현대의 우주과학자들이나 천체 물리학자들이나 철없는 진화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창세기 1장은 원래의 하늘을 묘사하고 있고, 현재의 지구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던 원래의 땅을 묘사하고 있다. 원래의 지구는 예컨대 별자리로 볼 때, 지금과는 그 위치가 달랐다는 의미이다. 이 원래의 지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깊음”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고, 이 [깊음의 표면]]을 어두움이 덮어버리게 되었다(창 1:2).
비록 현재의 지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는지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늘들에 계신 위엄 있는 분]으로부터 충분히 먼 거리를 유지할 만큼은 떨어지도록 우주에는 어떤 위력적인 대폭발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현대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고전 2:14)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고전 2:13)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를 밝히고 있는 성경을 오히려 조롱한다. 그들은 창세기 1:1과 창세기 1:2 사이에 있었던 우주적 대재앙을 알고 있지 못하고, 창세기 6장에 있었던 전 지구적 대재앙도 인식하지 못하며,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장차 백보좌 심판 때에 있게 될 대재앙도 절대로 믿지 못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0:11에서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계 20:11)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엄청난 대격변이 있은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아니]하게 될 것을 성경은 예고한다(계 21:1). 현대의 기상학자들이 갖가지 실험을 통하여 얻어낸 결과는 창세기 시대의 지구 대기나 현재의 대기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지만, 이 역시 성경 말씀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에 [순수한 생각]이 아니다. 따라서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창세기 1:1에서 창조되었던 원래의 하늘은 [깊음]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 [깊음]은 지중해나 대서양이나 태평양 같은 “큰 바다”와는 물론 관계가 없다. 이것은 태양계 전체보다도 훨씬 더 큰 물덩이를 내포하고 있는 광활한 지역으로 그 표면은 절대 0도로 얼어 있어 분자활동마저 정지돼 있는 [유리 바다](계 4:6)를 말한다. 성경은 이것을 [불로 뒤섞인 유리 바다](계 15:2)라고도 언급한다.
창세기 1:7은 [하나님께서 창공을 만드시고 창공 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말씀한다. 우리 머리 위 창공 위 우주 공간 끝 어딘가에 거대한 “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들이 창세기 1장 첫 머리 부분부터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이런 엄청난 기록들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들이나 정통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이러한 기록들을 대할 때마다 과학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성경이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해보려고 “현대과학” 측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죄를 하고(딤전 6:20), 성경을 기록케 하신 성령께서는 현대의 과학적 인식이 부족하고 그 용어에 서툴러서 비유적 형상화에 의존하여 시적 묘사를 하느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이들은 성경에 대하여 그 첫 번째 책 일곱 째 절에 이르기도 전에 마귀에게 무릎 꿇고 만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은 수증기가 한 조각의 구름이 되어 허공에 떠다니는 그런 물이 아니다. 이 물은 “하늘”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표기된 [하늘들](창 1:2, 시 148:4) 위에 존재한다. 이 물들로 나뉜 [창공]은 해와 달은 물론 우주의 모든 별들까지 내포하고 있는 하늘들이다. 하늘들 위에 존재하는 돌처럼 얼어 있는 이 [깊음]의 표면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욥은 이 깊음의 표면이 북쪽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보좌는 그래서 이 우주 너머 “북쪽” 저 먼 우주의 경계 끝 유리 바다의 표면 위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욥기 41장을 보면 [리비야단]이라 불리는 사탄은 이 물 안에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 이 바다를 통과하여 지상에까지 오실 것이다(합 3:10, 삼하 22:8-17). 이 바다는 하늘과 땅이 폭발한 뒤 사라진다(계 20:11, 계 21:1-2). 이 바다는 출애굽기 12-15장에서 홍해 바다로 예표되었고, 여호수아나 엘리야, 그리고 엘리사가 강과 바다를 건넌 것으로도 예표된다(출 14장, 수 2-4장, 왕하 2장).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구하게 인간의 지식이나 상상 내지 구차한 변명 따위에 기대지 않고 성경 구절들만 찾아내더라도 무려 30군데가 넘는다.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벧후 3:5) 이 구절도 베드로후서 3:3-4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 두고 있어야 할 구절이다. 진화론의 허위성을 입증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창세기 6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에서의 [물]은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창세기 1:2에서 언급되는 [깊음]을 말한다. 창세기 1:2에서는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깊음]은 [유리 바다](계 15:2)로 불리는 우주 자체를 담고 있는 거대한 용기를 말한다.
창세기 1:1에서 최초로 창조되었던 원래의 지구는 창세기 1:2의 대재앙 때에 거대한 [깊음]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가 창세기 1:3 이후에 그 [물]에서 다시 나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따라서 현재의 지구는 천문학적 위치로 볼 때 최초의 위치와는 다른 별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의 지구 위에는 대기층이라 불리는 지구의 하늘이 있고, 대기층 바깥 너머에 우주 공간이라 불리는 하늘이 있으며, 또 그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이 있다. 그래서 [하늘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6-7에서 창공을 만드셨고, 이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셨으며, 창공 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로 나누셨다. 말하자면, 둘째 하늘 위와 아래에 물이 있는 것이다. 창공 위에 있는 물들이 곧 [유리바다]라고도 불리는 [깊음]이다. 물들 가운데 나타난 창공은 해와 달과 별들과 은하계들을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우주 공간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깊음의 표면] 위에 있다(욥 26:7-13, 욥 38:30). 이 [깊음의 표면] 위에는 원래 어두움이 있었다(창 1:2). 하나님께서는 또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셨다(창 1:3-4). 그리하여 어두움은 빛에서 분리되어 [깊음의 표면] 아래로 내려갔고, 빛은 [깊음의 표면] 위에 거하도록 나뉘게 되었다. 우주 공간은 그래서 암흑세계이다.
사탄은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 및 욥기 38장 등에서 셋째 하늘에서 쫓겨나 창공 아래의 물 속 어두움에 갇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너는 바다의 샘들 속으로 들어가 보았느냐? 아니면 네가 깊은 곳을 찾아가 거닐어 본 적이 있느냐? 사망의 문들이 네게 열렸더냐? 아니면 사망의 그림자의 문들을 보았느냐?](욥 38:16-17)고 질문을 던지셨다. 욥이 이에 대해 한 마디라도 대답할 만한 과학 지식이 없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데, 오늘날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오직 <한글 킹제임스 성경>만이 가르쳐주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다(욥기 38장, 39장, 40장조).
뜰과 성소와 지성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성막은 우주의 모형이다. “모퉁잇돌”로 비견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피라미드의 꼭대기 삼각형 꼭지 부분을 일컫는다. 이것은 우주가 삼각면을 가진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 꼭대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는 것이다. 만물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세 요소로 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도 성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세 신격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몸과 혼과 영의 세 요소로 되어 있고, 빛도 자외선과 적외선, 그리고 가시광선으로 되어 있으며, 물질 구성 원자도 양자와 전자 및 중성자로 되어 있으며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의 3요소로 되어 있는가 하면, 입체 공간도 가로와 세로 및 높이를 갖는다. 이런 사실들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진화론자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들을 [고의로 잊으려]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성경적 진리들에 대해 자신들의 무지와 불신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것을 일부러 잊어버려야만 한다. 이들에게 있어 “양심” 따위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들]은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가득 찬(딤전 4:2) 자들이기 때문에 성경이 밝히고 있는 사실들을 [고의로 잊으려]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고 또 믿기가 싫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으려면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진화론”을 옹호하는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들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고, 몇 번의 대재앙으로 인해 지구 환경이 바뀌고 생물들이 몰살당하는 대격변을 겪기는 하였자만,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벧후 3:7)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진화론”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지라, 그들은 [고의로](벧후 3:5) 이것을 잊으려고 발버둥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성경 말씀에 무지하다거나, 말씀을 왜곡한다거나 하는 것보다 훨씬 가증스럽고 더럽고 치사한 짓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까지도 스스로 속이는 대단히 뻔뻔스럽고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만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되며 그 안에 아무 불의도 없느니라.](요 7:17-18)
성경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교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범할 수는 있지만, 그 [교리]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같은 성경에서 주류를 이루는 핵심 교리들이라면, “실수”란 있을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다. 그런데 하물며 이 교리를 개인적인 목적에서 고의적으로 내팽개치거나 숨기거나 왜곡해서 가르친다면 이것은 엄청난 죄가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서의 자신이 가르치는 교리에 대해 [나의 교리는 나의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라.](요 7:16)고 천명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다(요 7:17).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리를 잘못 오해한다든 것은 애당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성결교, 성공회, 루터교등 교단교회들과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그 밖에 통일교, 다락방, 지방교회, 회복교회, 구원파, 흠정역 정동수, 신천지, 안상홍 증인회, 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물침례 구원”을 가르치는 캠벨주의 집단을 위시한 모든 이단종파들에게 진리가 없는 것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이단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당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 중대한 하나님의 구원 교리마저 “오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부정직한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멸시한 데서 초래된 “오해”인 것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주를 두려워하나, 행실이 패역한 자는 그를 멸시하느니라.](잠 14:2)고 성경은 단정한다. 부정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패역한 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지식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진리를 깨달을만한 지혜를 얻지 못한다.
[조롱하는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나, 깨닫는 자는 지식이 쉬우니라.](잠 14:6)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이 구절을 꼭 암송하고 있으라. 당신이 진정으로 성경적 진리들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갖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부터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실하고 정직한 증인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나,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내뱉을 것이라.](잠 14:5)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사가 없다면, 그 자체가 죄악이요, 그 사람이 곧 죄인이다. 그래서 악인에게는 진리의 지식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암흑 속에 갇혀 걸려 넘어지게 된다. [악인의 길은 암흑과 같아서 사람이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잠 4:19)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서 의인의 대열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길은 항상 밝게 빛나 점점 더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 [의인의 길은 빛나는 빛같이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날에 이르거니와](잠 4:18)라고 가르치는 성경은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내가 말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들을 네 눈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네 마음속에 간직하라.](잠 4:20-21)고 충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