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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02. 東方大帝國의 막이 오르고
주임교수 추천 4 조회 67 14.05.13 0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二. 東方大帝國의 막이 오르고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대통을 이으니 고대 조선의 중시조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大東方의 거족(巨族)인 웅씨의 딸이며, BC 2370년 5월 2일 왕검 단군이 탄생하셨다. 왕검은 성장함에 천성이 고매하고 지모가 비범하여 세상에서 신인으로 추앙하니 웅씨 왕국의 비왕으로 있었다. 배달 국에서 5가의 우두머리가 되어 8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단목하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할 때 사제(司祭)들의 축복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천제의 명을 받들어 천왕 지위에 오르니 백성들이 신인이 하강하였다고 해서 우러러보았다.

천왕은 九規를 부활하고 아사달(哈乙濱)에 천도하고 국명을 朝鮮이라 하였다. 기원전 위서(魏書)에 기록하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건국해서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國號朝鮮) 이에 九桓의 왕후 추장이 배석하여 東夷 九種(東有歲貊諸國西有幽燕契丹諸國比有肅愼靺鞨諸國自此元來自爲東方別種夷 {通鑑})이 만백성에게 훈련 조서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天範은 오직 하나이니 너희가 마음을 精齊하면 그것이 곧 조천이다.

 

민심은 오직 한 가지니 모름지기 성심을 다잡아 인심에 미치면 감화하여 하느님의 뜻에 합치고 온 누리에 작용한다. 너희가 세상에 사는 것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이요. 어버이는 곧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에서 너희를 낳으니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충효인 것이다. 너희가 도를 체득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벗어날 것이다. 짐승도 짝이 있고 헌 신짝도 짝이 있다. 너희 남녀는 화목하고 원망하지 말며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헐뜯지 말며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라. 그리하면 집안과 나라가 흥성할 것이다. 소와 말을 보아라. 오히려 물을 나눠 먹는다. 서로 빼앗지 않고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면 나라는 융성할 것이다. 호랑이를 보아라. 강하지만 공손하지 못하여 천한 것이 되었다. 너희는 서로를 찔러 죽이지 말고 사람을 상하지 말며 제휼 하라.

 

너희가 규칙을 흩으리면 신의 도움을 영원히 얻지 못하여 몸과 집이 망할 것이다. 너희가 논에 불을 놓으면 벼는 남김없이 말라죽을 것이며 신은 노할 것이다. 너희가 그 향기를 두껍게 쌓더라도 반드시 셀 것이다. 떳떳한 성품을 가져서 사악함을 품지 말며 악을 숨기지 말며 화를 감추지 말며 마음은 하늘을 길이 공경하며 백성들을 친히 하라. 너희는 복이 무궁할 것이다. 오가의 무리는 흥복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檀君世記}) 帝는 신료들을 모아 각자 소임을 맡기니 영의 대신 팽우(彭虞)에게는 토지를 개간하여 백성의 양식을 늘리고 궁궐을 짓게 하였다. 대신 거지(巨智)는 문자를 정돈 정제하고, 대신 기성(箕省)은 의약을 개발하여 질병을 다스리게 하고, 대신 나을(那乙)은 판적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병사 희전(羲典)은 화복 운기를 점치고 병마를 관장하며 군량을 비축시키고, 구한 열국의 안보를 충실히 하였다. 帝는 5家 64제후를 통괄하는 통치 기구를 삼분하여 三汗을 설치하니(後書에 이르기를 番汗 辰汗 馬汗 或은 신한 말한 불한이라 하고 後에 다시 番朝鮮 莫朝鮮 眞朝鮮 等으로 쓴 것이다.) 번한의 왕검성은 험독(險瀆) 산동성에 정하고 우순과 국경을 감정하고 유주와 영주에 방위군을 주둔케하고 기주를 12분하여 순으로 하여금 관장케하고 그 동쪽은 조선국 번한에 속하였다. 후세 한인(漢人)이 말하는 흉노와 서로 접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한 것은 역사 기록의 오착이다. 무이웅씨(武夷熊氏) 말하기를 서주 기사 諸州는 기주 동편 영주 예주(山東 河北) 지방과 모두 한 울타리 안이고 동방의 좋은 땅을 형성하여 서주는 곧 노나라와 경계하여 희해와 연하였고 동이(조선)에 속한 두 고을인 즉 곡부기사의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는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漢人所謂斷匈奴右臂者以其不與西成相接也史書有錯武夷雄氏曰徐池沂朝諸水在其前冀東與?豫之地皆不雄引在懷抱排楫之內亦東方一形勝也徐卽魯境地連淮海東夷其俗有二曲阜沂朝則禮儀文雅之邦西 {書傳})

 

이어서 제는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를 번한(番汗)에 봉하여 기주와 동북 여러 나라와 연 유 거란 제국을 양분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이것은 동북쪽을 영유한 것이다. 따라서 우순(虞舜)은 중원 요지의 ¼을 영유하였다.(冀洲帝都之地三面距河充河?之西河초之東豫河之北周禮職方河內曰冀洲是也天下四分之一舜分爲 {書傳}) 이와 같이 구주를 12주로 나누어(기주 동북을 조선에 넘김) 어느 세월에 다시 회복할 것인가(이것을 사관들은 虞舜의 사죄라고 비난함)라고 하였는데, 일변 또 그것은 虞가 치수 사업을 한 후에 그 차례가 사죄의 앞에 있는 순 소행 대사라고 사관이 잘못 기록한 처음부터 선후를 헤아리지 못하고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是爲十二河盖河甚久不知其自何時復合爲九也吳氏曰比一節在禹治水之後其次序不當在四罪之先盖史官泛記舜所行之大事初不計先後之敍也) 이와 같이 단군과 우순과의 국경 감정에 관해 후세 사관들의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시대에 동이 대제국의 단군 천왕 명을 항거할 자 누구이랴. 약소한 우순으로는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 옛날에는 요순과 몽고도 동이족으로 그 영지 또한 대단군제국 영토에 포함할 것이나 후세 변화를 참고하여 분리 기록한다.(도면 참조)

 

진한은 왕검성을 아사달에 정하고 서북은 몽고와 접하고 북은 환천리하고 동은 연해주에 이르고 남은 마한과 송화강을 경계하고 마한은 서는 요하를 경계로 번한과 접하고 남은 대마도에 이른다. 마한은 왕검성을(심양 개원 지역으로 추정됨) 정하니 대단군의 조선국 영토는 동은 연해주에서 서는 황하 북은 몽고 시베리아에 닿는 당시 아세아 유일의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구환의 64제후국을 3 5로 분활 통치한 것은 당시의 교통 수단으로는 말과 호랑이(山海經海外東京에 海外 東京이란 河北省一帶에 古朝鮮 地域을 말함. 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 라고 하여 큰 호랑이를 방에 두었다고 하니 호랑이를 길들여 타고 다닌 것으로 여겨짐)가 원거리 교통 수단이고 통치상 편의 수단 이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는 팔년대한 구년 제수(八年大旱 九年 涕水)의 저 유명한 대 재난으로 대륙이 황폐화되었다.

 

팔년간의 가뭄으로 백성의 굶어 죽는 자 부지기수인데 다시 구년간의 홍수로 국토가 황폐화하여 사람이 살아남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堯는 舜에게 舜은 湯에게 선위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원의 二代江(楊子江 黃河江)이 넘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나라안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니 비참한 광경은 헤아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탕왕의 온갖 노력에도 미숙한 기술로는 어찌할 수 없어 왕은 형산(衡山)에 올라가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고 산하 휴식처에서 잠자고 있었다. 꿈속에서 단군의 사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스스로 창수사자(滄水使者)라하며 三日 祭戒하고 도산으로 가 보아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 때에 단군 대제께서도 중원의 재난으로 백성들의 고통스러워함을 걱정해서 백관을 소집하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태자 부루가 아뢰기를 "소자를 탕우에게 보내 주시면 그들을 깨우쳐 오행 치수법을 가르쳐 만백성의 고통을 덜겠사옵니다"하였다.

 

제가 이르기를, "너는 오행 치수 법을 익혀 널리 국토 관리에 효과를 충분히 보았으니 그 일을 감당할 것이다. 이제 서둘러 떠나도록 하라"하셨다. 부루태자가 탕우의 도산에 도착하였다. 이에 우왕이 사우(似禹)를 보내 맞이하니 부루태자는 오행 치수의 기법과 도량형계(度量衡計)의 수리를 강의하니 탕왕이 꿈을 깨고 일어나 도산에 당도하여 태자와 인사를 나눈 후 태자가 오행 치수 법을 강하고 비책을 전하였다. 월나라 고전(春秋)에도 '팔년 대한이 지난 후 구년제수'라는 천재가 닥쳐 왕은 치수에 골몰하여 자기집 대문 앞을 지나도 5년간을 들어가지 못하고 물난리를 겪는 백성들의 구호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3일 목욕 재계하고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날 꿈에 주신(朝鮮人을 洲愼肅愼등으로 呼稱하였다.)이 나타나, "나는 창해 사절(滄海 使節)이다 도산에 오면 신서를 주겠노라"하여 일어나 도산에 가서 금간옥첩 신서를 받아 치수에 성공하고 오랫토록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짖고 제사를 올렸다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 사기에는 이러한 중대한 역사를 기재하지 아니하였으니 한무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음이랴!

 

부루태자는 돌아가 천왕에게 비참한 상황을 고하였다. 물론 천왕의 직할 지역인 요하와 화북 산동도 수해는 무참하였으나 중원의 중심지인 양자강 황하강 일대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지역 대 수해는 오래 계속되다가 후세 수나라에 이르러 대규모 운하 등 군사 목적 수리 공사로 약간 개선되었다. 단군 천왕께서는 지구상에 제일 큰 대제국을 건설하여 홍익인간의 교화를 베푸시고 장수를 누리시고 遼河邊 別宮에서 각부 사제와 태자부루를 탑전에 불러 홍익인간의 교리를 세상에 펴는데 소홀히 하지 말고 게으리지 말라 경계하시고 또 삼신(태일 신인즉 삼위일체라 하여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신은 곧 하느님이라는 뜻)을 섬기는데 정성으로 다하라 하시고 귀천 하시니 천왕의 붕어 하심이 세상에 전해지자 만백성이 슬퍼 통곡하였다. 때는 BC2241년 3월이었다. 대통을 이은 부루천왕을 평생을 통하여 홍익인간의 교화에 전념하고 삼신을 섬기는데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부루천왕은 백성을 구휼하는데 전념하는 군왕이었다.

 

천왕 또한 장수하시고 붕어 하시니 백성들이 슬퍼하여 단을 만들어 곡식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이것을 후세에 부루단지 업신 삼신 등으로 섬겨 사람의 생명도 삼신이 점지 하사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삼신 사상을 후세에 구세주로 일컬어지는 여러 성인들의 구세 철학 교리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식민지 통치로 일제가 민족 사상의 국교 말살 정책으로 그들의 국교인 아마데라 스오미가미 종교를 강요하여 말살되었다. 이전에는 전국 가가호호 빠짐없이 부루단지 또는 삼신 단지를 모시고 예수 교도나 불교신도 가정에도 여일하였다. 『한단고기』에 遼河左岸에 관경비가 있다 하였다.

 

*일제(日帝)가 파괴한 국사당

日本은 南山에 있는 단군 성조를 모시는 국사 당을 철폐하고 그 자리에 日本의 假想神 아마태라스오미고도 神宮을 세워 조선 신궁이라 名하고 조선인에게 改宗과 참배를 강요하고 조선인의 三神敎 天帝 신앙을 말살하였다. 그리고 日本국의 역사를 조선보다 오랜 것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는 단군 성조의 역사를 실상이 아닌 神話라고 조선인에게 교육하기 위하여 조선 총독부 주관으로 조선 역사 교과서를 날조하여 조선인에게 교육 주입시켰다. 그 교과서 편찬에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인 학자도 다수 참여시켰는데 총독부 통감이 위원장이 되어 그명령으로 임의로 만들어졌다. 거기에 참여한 조선인 학자의 한사람 이였던 최남선이 훗일 단군을 실상이 아닌 신화라 한 것은 마땅치 않다는 한마디 말을 했다고 전해질 뿐 아무도 이의를 감히 달지 못하였다고 한다. 태고사에 관한 글을 마감함에 앞서 첨언 하는 바는, 좋으나 싫으나 상고사를 참고함에는 중국사를 살펴야 하는데 중원을 무대로 한 치우천왕의 동이족 활약상에서 대단군 조선 제국에 이르는 사료가 너무나 빈약하고 치우에서 하은으로 이어지는 치적도 사기에서 끊어 버리고 공자께서 요전을 시작으로 요순 우탕 문무 주공에 이르는 중국의 정통사를 기록하니 태고사를 연출할 수 없다.

 

공자께서 요전 이상의 역사를 끊는 것에 대하여 당시 사가들의 비난이 있어 상고 기록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끊어 버린 것은 부당하다는 항의에 대하여 공자는 역사를 뺀 것은 그 기록을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간단히 회피하였다. (武夷熊氏曰孔子定書斷自唐禹以下堯典是第一編書以前更有文字孔子曰吾猶及史之厥文也今亡矣 『書傳』) 공자가 끊어 버린 요전 이전의 기록에 조선족에 관한 것을 대략 살펴보면 고대 사학자 應邵 가로되 치우는 옛날에 천자다.(應邵曰蚩尤古天子)

공자는 삼조기에 가로되 치우는 서인이며 빈곤하였는지라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침벌함에 치우가 가장 사나웠으니 천자로 안 섬겼다 라고 상반되게 말하였다. (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貧者諸候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書傳』) 또 제나라 관자 가로되 치우는 여산의 금이라 (위대하다는 뜻)오병을 일으켰으니 분명 서인은 아니다.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고 황제는 드디어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앞세우니 천하가 두려워하고 치우가 죽지 않았다 하여 팔방 만방이 복종하였다. 공안국이 가로되 九黎 즉 천하가 인군이라 하였다. (管子曰蚩尤受盧山之金而作五兵明非庶人…中略…蚩尤沒後天下復擾亂黃帝遂畵蚩尤形像以爲天下天下咸謂蚩尤不死八方萬邦皆爲?服孔安國曰九黎君?蚩尤是也『三朝記大載記』)

 

공자는 무왕도 옳지 못한 인군으로 치부하였는 즉 치우 천왕의 무력 통일도 옳지 못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공자 가로되 동에 구종이가 있고 남예 팔개종의 만족이 있고 서에 육종의 융족이 있고 북에는 오종의 적족이 있어 사해의 큰 왕이라고 이른다 하였다. (孔子曰東有九夷南有八蠻西有六戎北有五狄謂之四海之大夫君『漢書』禮樂志) 이러한 단편적 기록뿐 치우에서 단군으로 이어지는 태고 역사는 영원히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그것은 당왕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 할 적에 국내성에 있는 고구려 태조 사당과 역사 서고를 불태워 없앰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 볼 수 없고 중국 기록은 공자가 요전 이전의 기록은 끊어 버렸으니 중국 당시의 사학자들이 역사란 기록으로 남겨야지 입으로 전하는 것은 그때의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기 쉬운 것인데 공자가 태고사를 역사에서 뺀 것을 잘못이라고 반박한 것을 보아도 그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BC 1833년 12세단군 아한이 재위에 오르고 별궁 근교 요하좌안네 순렵관 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겨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것이 금석문의 시초이다. 문헌이 모두 멸실 되고 이러한 실물이 귀중한 옛 역사의 자료이거늘 국토를 상실하고 반도 한 구석에 칩거하는 형편이니 어느 누가 보전하랴. 후세에 창해 역사 여홍성이 이곳을 지나다가 숲속에 묻혀 있는 고비를 살펴보고 감개무량하여 시 한 수를 남겼으니 가라대 [마을 밖 번한 땅에 이상한 돌이 있네. 축대는 무너지고 철쭉만 붉었구나. 글자는 마모되고 이끼만 푸르구나. 이끼를 갈아내고 글자를 찾아내니 흥망성쇠 얽힌 시절 기울어진 사연을 문헌에 그 증거를 찾을 길 막막하고 여기에 거룩할 손 당시 자취이 아니냐] 대단군 조선 백세기 간에 은은 친선 사절을 수시로 보내 왔었는데 은왕 무정의 대에 이르러 조선의 변방 제후국으로 황하 북녘에 있는 귀방을 침략하고 다시 동진 하여 색도와 금지 두 나라까지 침범하였다.

 

이에 본국에 구원을 청하는 고변이 연다라 이르고 피난민이 몰려오니 제는 영을 내려 구원군을 편성하여 국경 지역으로 출동케하고 계사원 태수 고등으로 하여금 은도 구원 대장을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귀방에 이르니 은왕 무정은 색도 금지에서 이미 패하여 고등군이 이르니 잔군을 이끌고 멀리 달아났다. 이번 전쟁으로 은왕은 섣불리 동이 변방을 치다가 패하고 장차 조선의 대군이 원정 올까 두려워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약속함에 제가 이를 윤허하였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盖斯原 추장 고등이 귀방국을 병탐하고 중병을 보유한 강국으로 부상하여 서북 국경 지대의 열후를 제압하고 세가 강성함에 우현왕에 봉해 줄 것을 주청 하였다. 제는 이를 허락지 아니 하였으나 그 후 다시 여러 번 주청하니 끝내 불허하면 은과 연계할까 두려워 이를 허락하여 우현왕에 봉하였다.

 

BC 1287년 우현왕이 죽고 손자 대에 이르러 색불루가 삼대 우현왕위를 계승하였다. 제는 연로하여 정무를 서우여에게 맡기고 살수에 봉토를 주고 기수후를 봉한 후 국중을 순회하여 민심을 수렴하고 오가를 소집하여 이르기를 "과인이 연로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장사 서우여에게 선위코저하니 백관은 과인의 고충을 승지하고 선위의식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라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우현왕은 천왕이 노쇠하여 친히 정사를 돌보지 못함을 짐작하고 장차 자신에게 선위할 것임을 믿고 있다가 크게 놀라 군신의 공론을 들은 후 상소문을 써서 사자로 하여금 천왕에게 올렸다.

 

(大檀君天王國右賢王臣索弗累奉表于大檀君天王尊殿下矣往日殷王武丁侵我國不法略欲於我邊境三國以累汲於聖上之宸襟而那際臣祖爲阻敵侵之害以救國難而破敵遂報國之本務矣時於我側被害亦多焉其後繼臣以又亦電務守防西部廣境嚴戒萬全無漏以殷余他諸種族之國敢不入寇矣臣如爲之務是由不可不參與廟堂國政萬機焉臣近次傳聞則聖上爲念禪位於徐于余之配慮則此是千萬不當之事而徐于余者久爲侍尊側受恩仕官於廟堂雖然別無功積也夫官掌大權以統治百姓之大任者經歷國家之苦役以獻身於顯萬民之龜鑑爲要也今玆徐于余全無衆人之信望的功勳矣凡國家的大事則大統承繼之信諮問群候之意收斂以鑑定朝臣之議定然後讚定尊旨大爲可乎臣恐懼百拜敢願聖敎再審伏望矣) 漏錄補記 (臣 索弗累는 삼가 천왕 어전에 表를 올리나이다 신은 일찍이 殷王 武丁이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대국의 변방 삼국을 침범하여 성여를 깨침에 신은 조왕을 따라 출전하였습니다. 신의 일문은 혈투수삭에 적을 섬멸하고 갈충 보국하여 국토를 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도 지대하여 상이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감히 아뢰옵건대 그로부터 은과 기타 열국이 이제는 조선을 넘보지 못 할 것이 옵니다.신이 변방 수호의 임무에 전념하여 국정 책정에 참여치 못하였으나 들려 오는바에 의하면 성상께옵서 서우여에게 선위한다 하오니 이는 천만부당하옵니다. 서우여는 묘당 주위에서 오래도록 관직에 머무르고 있었사오나 뚜렷한 공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무릇 국가의 대권을 이을 자라면 신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헌신 불식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어야 하온대 서우여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만한 공적을 쌓지 못하였사옵니다. 국가 대사를 감정하고 대통을 승계 하는 일은 널리 민심을 수렴해서 군신의 의결을 거쳐 영단을 내려야 하옵니다. 공구 백배 하옵고 성교를 복망 하옵니다 하였다.) 천왕은 여차 표문을 보고 심란 무책이라 우현왕이 서부 광역을 관할하는 번한 제1의 실력자로 정예 대군을 영도하고 있으며 은과 접하여 그의 향배는 국가 흥망이 걸려 있는 형편이니 무력 문책은 어림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천왕은 우현왕의 건의를 받아 드리지 아니 하였다. 사태가 여기 이르니 우현왕은 백관의 권유를 받아 관할 역내 제후국의 추장을 소집하여 경계를 강화한 후 수천의 장수를 거느리고 부여에 진주하여 신도로 정하고 대단군 조선국의 서우여에게 선위를 인정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함께 제도로 통하는 양한의 요로를 차단하고 신왕의 등극을 막았다. 이때 제도는 청주이나 계평과 아사달도 비왕이 있는 왕검성으로 삼도의 연락이 차단되었다. 천왕은 할 수 없이 서우여를 퇴위시키고 서인을 삼고 옥책과 옥새를 우현왕에게 내리고 양위하여 우현왕 색불루가 천왕 위에 나아가니 이가 22세 단군이다. 이때에 은의 서남에는 남국이 일어나 강성 하야 여라 하고 후일 진의 주력이 되었다.

 

이르매 서북 총병 신독이 서북 방위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재도 험독을 급습하여 천왕이 영고 탑으로 피하였다. BC 1238년 천왕이 붕하고 23세 단군 아홀이 즉위하고 웅가손으로 하여금 일군을 이끌고 은나라 경계에 가서 남국군과 힘을 합쳐 반란군을 돕는 은의 변방을 파하고 반란군 본거지를 습격하여 반장 신독을 주살 하였다. 이어 은경 변방 추장금달 청구군 구려군 주개 등과 몽고군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서경을 수시로 침범하는 적을 토벌하는 일대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연합군은 은계를 넘어 방책을 분쇄하고 희대까지 진격하여 은군을 대파하여 그곳에 새로이 국경을 감정하고 성곽을 쌓고 포고씨를 음후에 영고 씨를 서후에 방고씨를 희후에 봉하였다. 중원에서는 은나라가 대단군 조선국과 같은 시기에 중원의 동북은 동이족이 서남은 은이 오래도록 번성해 오다가 BC 1000년경 부터 殷은 쇠약하기 시작하여 폭군 걸주가 포나라 추장의 딸 포사를 첩으로 드린 후 그의 희대의 미색에 빠져 왕후와 태자를 폐하고 황음 무도한 통치로 제후 추장들이 이반하여 은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주나라 문왕이 각부 추장들을 포섭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위엄이 중원에 떨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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