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와 냉장고는 이웃사촌입니다.
난로는 거실에, 냉장고는 부엌에 있지만 그 사이는 한 자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산골집은 하도 작아 거실이 부엌이고 부엌이 거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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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집은 쓸쓸합니다.
증조할아버지가 쓰던 집을 할아버지가 고쳐 현우네 가족들 별장으로 쓰고 있지만 명절 때나 주말에 가끔 들를 뿐 거의 비워져 있습니다.
난로와 냉장고는 7년 전, 산골집을 고칠 때 같이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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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냉장고가 산골집 심장이 됩니다.
여름 산골은 햇살이 너무 따가워 냉장고가 없으면 죽은 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겨울에는 무쇠 난로가 산골집 심장이 됩니다.
겨울 산골은 얼음 나라라 난로가 없으면 가족들이 와서 하루도 견디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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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다가옵니다.
냉장고는 미리부터 짜증이 납니다.
난로가 또 얼마나 센 불을 피워대며 잘난 척을 할까요?
참나무 장작은 불 힘이 엄청 셉니다. 오래오래 탑니다. 가족들이 있을 땐 하루든 이틀이든 불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현우네 가족들은 잠잘 때를 빼고는 거의 난로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떡도, 밤도, 고구마도… 고기까지 난로 위에서 구워 먹고, 텔레비전도 난로 곁에 앉아 보고, 노래도 난로 곁에 앉아 부릅니다.
냉장고 살이 녹아내릴 듯 뜨거운 것쯤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옮길 데가 없어."
할아버지 혼자 냉장고 걱정을 잠시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
설이 사흘 뒤로 다가왔습니다.
시계, 텔레비전, 가스대.. 난로뿐 아니라 산골집 물건들은 모두 가슴 설레며 설날을 기다립니다.
냉장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로가 못살게 구는 건 정말 싫지만, 가족들이 이따금 갑갑한 가슴을 열어주는 것도 좋고, 현우 동생 현비가 아장거리며 다니는 것도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난로가 좀 이상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잘난 척을 하고 야단일 텐데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헤이 난로, 무슨 일 있어?"
냉장고가 말을 걸었습니다.
"뭘!"
"너, 재통이 꽉 차서 갑갑해?"
"아니야!"
"그럼 연통이 막혀 답답해?"
"아니라니깐!"
쩌젓쩌젓!
"응, 뭐야?"
"뭘?"
"새소리 나야? 혹시 네 안에 새가……?"
"아니야!"
삥! 쩌젓쩌젓쩌젓!
삥! 삥! 쩌젓쩌젓!
"새소리 맞네!"
"쉬-잇! 조용!"
난로가 냉장고 밑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왜 그래?"
"쉬-잇!"
난로는 검지를 입술에 대며 입모양 말로 말했습니다.
"그저께 박새 한 마리가 들어왔어."
"……."
"연통으로 떨어져 들어왔어. 날갯죽지가 찢어졌어."
"살았어?"
냉장고도 입모양 말로 물었습니다.
"오늘에야 깨어났어……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난로가 또 냉장고 밑을 바라보았습니다.
"아!"
냉장고 밑 물받이통 귀퉁이에 늙은 쥐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성탄절 무렵, 개수대 밑 하수관이 박힌 틈으로 들어왔습니다.
친구 쥐와 둘이 들어왔다가 친구 쥐는 찍찍이에 붙어 죽고, 늙은 쥐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늙은 쥐는 집 안에 있는 먹이를 먹지 않았습니다. 흔적이 남아 들키면 또 찍찍이가 온 집에 깔릴 테니까요. 늙은 쥐는 바깥에서 가져온 시래기와 풀뿌리만 먹었습니다. 물은 냉장고 물받이에 흐르는 것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늙은 쥐는 가끔 냉장고 밑에서 나와 마루를 돌아다니며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아, 고기가 먹고 싶다. 야들야들 굼벵이, 오들오들 새 새끼."
웅웅웅웅~~~~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났습니다.
새소리가 그 속에 묻혔습니다. 쥐가 듣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냉장고야 고마워. 근데 쥐한테 들키지 않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현우 할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왜?" "새 구워 먹으면 맛있다고 했어!"
"헉!"
"할아버지가 오기 전에 박새가 다 나아야 할 텐데…. 할아버지가 불 피우려 난로 문을 열자마자 도망쳐 날아가야지. 그러지 않으면 참나무 불쏘시개가 될지도 몰라."
..
하룻밤이 지났습니다.
"야! 드디어 내일이면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오시겠다."
"현우랑 현비는 모레 설날 아침에 오겠지?"
산골집 물건들은 즐겁게 조잘대었습니다.
"헥헥! 난로야, 어때? 박새는 다 나았어?"
냉장고는 몸에 펄펄 열이 나고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냉각기를 돌려 몸살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난롯불이 닿지 않아도 뜨끈뜨끈 온몸이 뜨겁습니다.
"글쎄… 나은 듯도 한데 어제보다 힘은 더 빠진 것도 같아."
그랬습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웅웅웅웅~
웅웅웅웅~
냉장고 소리만 집안 가득 찼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늙은 쥐가 나왔습니다.
"아유 더워라. 냉장고 밑이 왜이렇게 뜨거워졌담."
늙은 쥐는 난로 옆으로 왔습니다.
"오히려 난로 밑이 딱 알맞게 시원하겠는 걸."
늙은 쥐는 난로 밑으로 기어 들어가려 했습니다.
난로와 냉장고는 혼비백산했습니다.
다행히 마침 가스대 밑에서 그르르르~ 밤 한 톨이 굴러 나왔습니다.
"뭐야?"
늙은 쥐는 몸을 돌려 밤 쪽으로 갔습니다.
"뭐야? 조금 쭈그러들었지만 맛있겠는 걸."
늙은 쥐는 밤 한 톨을 물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냉장고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밤 껍질이 할아버지 눈에 뜨이지 않으려면 그게 나았습니다.
"휴…."
"휴…."
난로와 냉장고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새소리가 왜 아예 들리지 않지?"
냉장고가 물었습니다.
"글쎄, 상처는 다 나은 것 같은데…"
"굶어서 그건 것 아냐?"
"그런가…. 헤이 냉장고, 네 속에 있는 먹을 것 좀 내놓지 그래?"
"참나…. 약 올리지마. 그러지 않아도 한 달도 넘게 문이 꽉 닫혀 갑갑해 죽을 지경인 걸."
새소리가 나지 않으니 냉장고는 한결 편해졌습니다. 냉각기를 세게 돌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간혹 조금 새소리가 날라치면 잠깐만 웅웅~ 냉각기를 돌렸습니다.
"냉장고야, 아무래도 박새가 죽을 것 같아. 휴… 불쏘시개가 되려나? 쥐 먹이가 되려나."
난로는 새 걱정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윙윙--
바깥에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마당 청소를 해놓으려는 듯 감나무 가지 위에 앉아 쉬고 있던 바람이 내려와 설칩니다.
"에이, 밤껍질이 돌 같아…"
밤 까먹기에 실패했는 듯 늙은 쥐는 두어 번 마루로 나와 어슬렁거렸습니다.
"야들야들 굼벵이. 오들오들 새 새끼."
늙은 쥐가 중얼거리며 난로 밑을 기웃거릴 때면 난로와 냉장고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
날이 밝았습니다.
"야! 할아버지 할머니 오시는 날이다!"
"와! 신난다!"
날이 밝자 집안은 물건들은 환호성을 쳤습니다.
난로와 냉장고만 말이 없었습니다.
쩟… 쩟… 어쩌다 힘없이 내는 새 우는 소리 속에,
타탈 터털...
어쩌다 내는 새 날갯짓 소리가 간간이 섞일 때면,
웅- 웅-
냉각기 돌아가는 소리만 힘없이 섞였습니다.
늙은 쥐는 더욱더 쥐죽은 듯 조용했고요.
..
덜컹!
대문 여는 소리가 났습니다.
윙 절꺽.
자동차 세우는 소리도 났습니다.
"할아버지 빨리 들어오세요!"
"할머니도 빨리 오세요!"
산골집 물건들은 신나게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았습니다.
..
"난로야, 박새 안 되겠지? 못 날지?"
"응… 끝장인 것 같아. 꼼짝 달싹도 안 해."
냉장고와 난로는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띠- 띠- 띠- 띠-
현관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어왔습니다.
"어~~~ 추워! 빨리 불부터 피워야지."
할아버지는 들어오자마자 난로로 다가갔습니다.
옆에 있는 참나무 장작을 들고 난로 문을 열었습니다.
장작을 먼저 쌓은 후 불을 붙여야 하니까요.
"흡!"
난로와 냉장고는 눈을 꼬옥 감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푸드득 푸드득!
새 날갯짓 소리가 났습니다.
푸득푸득 파다닥!
세차게 났습니다.
박새가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뭐야? 새 아니야?"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장작을 놓았습니다.
"얏!"
날아오르는 새를 할아버지가 막 잡으려 할 때였습니다.
"아, 아악! 쥐-! 쥐!" 할머니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늙은 쥐가 할머니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새는 두고 늙은 쥐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참나무을 내려치려하자 늙은 쥐는 싱크대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도망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참나무 장작을 놓고 휴지통을 집어들었습니다.
"얍!"
휴지통으로 쥐를 덮었습니다.
그 사이 박새는 파닥파닥 타달타달 날았다 뛰었다 하며 현관 밖으로 나갔습니다.
불을 피우기 위해 현관문을 닫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
"늙은 쥐가 때 맞춰 나왔어!"
"새를 살리려 싱크대 쪽으로 갔어!"
"밤새 난로 밑을 들락날락하는것도 봤어!"
"밤알이랑 물을 나르는 것 같았어."
할아버지가 널브러진 쥐를 신문지로 둘둘 말아 감나무 밑으로 던질 즈음, 산골집 물건들은 한 마디씩 했습니다.
난로와 냉장고는 멍하니 현관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
설날입니다.
가족들은 제사를 모시면서도 난롯가만 맴돕니다.
"어이, 냉장고. 역시 내 인기가 짱이지?"
난로는 여전히 잘난 척을 합니다. 참나무 열을 피우며 냉장고를 못살게 굽니다. 하지만 냉장고는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끄떡끄떡 고개를 흔들며 웃어주기까지 합니다. 늙은 쥐가 나간 물받이통을 가만히 쓸어보면서요.
여름이 와서 냉장고가,
"어이 난로, 여름엔 내가 짱이지? 아무도 널 거들떠보지 않는 걸."
하고 잘난 척을 할 때엔 아마 난로도 그렇게 웃어줄 것입니다.
..
난로와 냉장고는 이웃사촌입니다.
그 사이는 한 자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이제, 두 마음도 한 자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
이 림
․경남 창원 출생
․《경남신문》 신춘문예,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계몽사 아동문학상 장편동화 부문 당선
․동화집 《빨간 눈사람》 외 다수, 동시집 《엉덩이잠》
(창원문학 2012. 2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