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의 다솔사 시절(2)
< 김동리의 다솔사 시절>에 관한 전기적 사실은 김정숙의 「김동리 삶과 문학」(1996. 집문당)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다. 그리고 김동리의 「소설작법」(1975. 명진사)과 「곤명면지」등에서도 산발적으로 그 편모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주로 「김동리의 삶과 문학」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해 볼 것이다.
김동리의 학력은 기독교계인 계남학교 4년 (14살 입학, 1924-1927)과 대구 계성학교 (1928.4-1930.3)2년, 그리고 서울 경신학교 전학(1930.4-1931.9)1년 합하여 7년이 전부이다. 경신학교 교사로는 당시 양주동, 김건, 이윤재, 김계숙, 이광수, 이선근, 장지영, 일본인 하마구치 등이 있었는데, 김동리는 하마구치 선생의 영향으로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마구치 선생은 당시 학생들에게 일본의 나쓰메 쇼오세키라든지 구니키다 독보 같은 작가의 작품을 읽으라고 독려했고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필독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 작품을 읽지 않고는 문학작품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로 김동리는 학교 도서실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 <레미제라볼>, 나쓰메 쇼오세키의 <우리는 고양이다>등을 밤새워 독파해 갔다.
그러나 경신학교 3학년 1년의 시간은 김동리의 문학에의 열정이 불붙는 때가 되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학교를 휴학하고 맏형 범부가 살고 있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김범부는 동생 동리를 동래고보에 전학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리는 한때 영도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하기도 했으나 뜻같이 되지 않아 결국 경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경주로 가서 독서 일념으로 지낸 4.5년간이 동리에게는 작가로 입문하기 위한 준비기간이 되었다. 소설가 서영은에게 동리가 평소에 "그 당시 세계문학을 읽을 때 꼭 내가 쓴 것같이 작가의 의도가 환히 보이더라"고 말한 것이 전해진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내용의 몇 배 이상을 깨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여 전해진다.
김동리는 1933년에 잠시 서울로 올라가 서정주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이 향후 한국문단에서의 시와 소설이라는 상대적 위상을 이루는 단초가 될 줄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정주와 김동리 사이에 김범부라는 동양정신의 그늘이 드리우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신문사가 모집하는 신춘문예에 전장르 석권이라는 목표로 한 달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 등을 써서 각 신문에 일제히 보냈는데 그 중 시 한편만 1934년 1월 1일 조선일보에 가작으로 뽑혔다. 경주로 내려와 다시 소설을 집중적으로 써서 1935년 중앙일보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는데 형 범부가 독립운동 혐의로 구속되는 일에다 '조선의 심벌'인 황진사가 화랑의 후예라는 점을 밝혀 나가는 구조로 된 작품이었다.
1935년 봄, 신진소설가 동리는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위해 맏형 범부를 따라 다솔사로 왔다. 맏형은 다솔사 스님들에게 동양 철학을 가르쳤고, 동리는 불교 서적을 손에서 떼지 않고 보내는 것이 일과였다. 다솔사 주지 최범술은 김범부와 뜻이 맞아서 형제처럼 지냈는데 그 무렵 범부의 큰 아들 지홍이 범술의 상좌가 되었다. 동리는 한 살 아래인 조카 지홍과 친구처럼 지냈다.
김동리는 다솔사 오른쪽 선당에서 지냈는데 적멸보궁(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 뒤에서부터 큰스님 거처인 지전, 승당이 있었고, 오른 쪽 뒤로부터 시왕전, 나한전, 선당이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입구쪽에 대양루가 있었다. 선당의 방 위치는 다음과 같았다.
(선방)
ㅣ
(부엌)- (범술)-(범부)-(지홍.동리)-(총무 )
필자는 시간이 날 때 혼자서 다솔사로 가 선당 마루에 앉아 사색에 빠지는 때가 있었다. 1930년대 그 분들의 조국과 교양, 그리고 아픔의 중심부로 들어가 보고 싶었던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