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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 176 ❏문화재지정: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7호(1983.07.20지정) ❏배향인물: 정몽주(鄭夢周) ❏창건연도: 1715년(숙종 41) ❏향 사 일: 4월 4일 |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715년(숙종 41) 영일정씨 후손들이 시조인 정습명(鄭襲明)과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6명의 선조에게 향사를 올리기 위해 이곳에 세덕사(世德司)를 지었다.
그 후 1830년(순조 30)에 서원으로 바꾸면서 정몽주의 위패만 모시고 봄가을에 향사를 올렸다. 정몽주가 1374년(공민왕 23)에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로 진주에 와서 이곳 비봉루에서 하루를 묵은 인연으로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의 사림들과 그 자손들이 예조에 주청하여, 옥산서원을 진주 비봉산 비봉루에 세웠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 자리에 영당을 지어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서원을 복원하고 사당을 신축하여 문충사(文忠祠)라 이름 짓고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주벽-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말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 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제사를 지내는 곳인 사당, 영각, 배우는 곳인 강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사당 안에는 정몽주의 위패를 모시고 왔으며, 영각에는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장판각에는 정몽주의 문집판각 500여 판을 보관하고 있다.
1)정몽주영정
2)정몽주의 문집판각 500여판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경남의 서원, 선인, 2008
하동군 문화관광 http://tour.hadong.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