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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조촌동(원동) 회룡마을 ❏배향인물: 유의손(柳義孫) 유 분(柳 坋) 유숭조(柳崇祖) 유 헌(柳 軒) 송진문(宋振門) 유경수(柳景秀) 송은서(宋殷緖) ❏창건연도: 1603년(선조 36) ❏향 사 일: 2월 중정(中丁) |
용강서원(龍岡書院)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조촌동 91-1번지[회룡마을]에 있는 서원으로서 창건(創建) 유래는 다음과 같다.
용강서원의 전신(全身)인 용고서원창건기(黃岡書院刱建記)에 의하면 회헌(檜軒) 류의손(柳義孫) 선생은 안동(安東)의 기양서당(岐陽書堂)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나 대대로 쌓은 덕의 향사(享祀)에 불과하고, 유일재(遺逸齋) 류분(柳坋) 선생은 전주(全州)의 황강원(黃岡院)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나 향사(享祀)의 뜻이 모자라고, 진일재(眞一齋) 류숭조(柳崇祖)와 낙봉(駱峯) 류헌(柳軒) 두 분 선생은 지금까지 위패를 모신 곳이 없으니 유림(儒林)의 흠이라 충청, 전라, 경상도의 선비들이 재사(齋舍) 문제를 제기하고, 성균관의 여론을 받아들여 순조22(1822)년에 전주인(全州人) 류한종(柳漢宗)이 주관하여 용고서원(龍皐書院)을 창건(刱建)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회헌 류의손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황강원에 모신 유일재 류분 선생의 위패를 옮겨 모셔오고, 또한 진일재 류숭조와 낙봉 류헌 두 분 선생의 위패를 봉안(奉安)하여 전주류씨 4현(賢)의 향사(享祀)를 올렸다.
그 후 지방교육의 일익(一翼)을 담당하여 오면서 여산인(礪山人) 용암당(龍巖堂) 송진문(宋振門) 선생과 전의인(全義人) 양재(養齋) 이익렬(李翊烈)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고종1(1864)년 대원군에 의한 첩설(疊設)·사설(私設)인 서원(書院)의 폐지령으로 고종5(1868)년에 훼철(毁撤)되었는데 고종38(1901)년에 유림(儒林)이 용강서원(龍岡書院)이라 개칭(改稱)하고 먼저 강당(講堂)을 복원(復元)하였으며, 1923년에 사당(祠堂) 등 나머지 건물(建物)을 중건(重建)하였다.
여기에는 용r강서원에 모셨던 회헌(檜軒) 류의손(柳義孫), 유일재(遺逸齋) 류분(柳坋), 진일재(眞一齋) 류숭조(柳崇祖), 낙봉(駱峯) 류헌(柳軒). 용암당(龍巖堂) 송진문(宋振門) 다섯 분 선생과 유재(幽齋) 류경수(柳景秀), 송암당(松庵堂) 송은서(宋殷緖) 두 분 선생을 추배(追配)하고, 양재(養齋) 이익렬(李翊烈) 선생은 빠진채 7현(賢)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으며, 1995년에 서원(書院)을 중수(重修)하였다.
경내(境內)의 건물로서 사당(祠堂)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지붕이며, 강당(講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사당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돌로 만든 솟을대문이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仲丁日)에 유림(儒林)에서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용강서원에는 전의인(全義人) 이겸조가 지은 용강서원강당중건기[1901년]와 이병하가 지은 용강원우중건기[1923년] 등이 있으며, 또한 류보근, 류봉근, 류평근, 류맹근, 류성근, 김상혁이 지은 시고(詩稿)의 편액(扁額) 등이 있다.
1)주벽-유의손(柳義孫, 1398∼145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檜軒) 또는 농암(聾巖). 습(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극서(克恕)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빈(濱)이며, 어머니는 윤방익(尹邦益)의 딸이다.
1419년(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을 거쳐, 감찰·수찬을 역임하였다. 1436년에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곧 직제학에 올랐다.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그는 학문에만 능했다.
1447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에 동반직(東班職)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西班職)에 옮겨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2)유분(柳坋)
조선전기의 의절인, 자는 인수(仁受), 호는 유일재(遺逸齋), 본관은 전주, 맹강(孟江)의 아들로 1430년(세종 12)에 출생하였다. 족숙(族叔)인 유의손(柳義孫)에게 수학하였다. 단종이 손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 곤지산 기슭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문하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이묵암, 이평호, 이한재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유숭조(柳崇祖, 1452∼15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이조판서 빈(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손(敬孫)이고, 아버지는 서령 지성(之盛)이며, 어머니는 권득(權得)의 딸이다.
세조 때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1489년(성종 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발탁되고 사유록(師儒錄)에 들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내면서 정부 관원들의 기강 확립과 국왕에 대한 간쟁에 힘썼다.
1504년(연산군 10) 국왕의 어지러운 정치를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이와 함께 네 자급(資級)을 뛰어 판결사에 등용되었고, 공조참의로 옮겨져 삼공(三公)들의 주청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이어 성균관대서성·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젊은 문신들에게 전수했고,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장(師長)의 자리를 그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삼공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재임되었다.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북돋우었다. ≪서경≫·≪역경≫·≪예기≫에 밝았고, 특히 천문·역상(曆象)에 통달해 자신이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남긴 ≪칠서언해≫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벼슬길에서 보인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언간의 올바른 정신은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 4권, ≪대학잠 大學箴≫ 1권이 있다. 봉화의 송록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4)유헌(柳軒, 1462∼150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여(子輿), 호는 낙봉(駱峯). 형조참판 빈(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말손(末孫)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수장(秀漳)이며, 어머니는 조효생(趙孝生)의 딸이다. 영의정 영경(永慶)의 증조부이다.
1486년(성종 17)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48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초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기휘(忌諱)에 크게 저촉되어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중앙으로 돌아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신수영(愼守英)이 무함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소(疏)를 올려 임사홍(任士洪)·유자광(柳子光)의 음모와 이극균(李克均)이 죄도 없이 살해당한 사실을 논하였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며, 동료사간 강숙돌(姜叔突)도 이를 간하다가 또한 귀양 가게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뒤에 방환(放還)되어 돌아오다가 왜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도량과 기국(器局)이 있어 삼사를 두루 역임하면서 굴하지 않았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5)송진문(宋振門)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호는 용암당, 본관은 여산(礪山), 성혼의 문인이다. 최명룡 등과 조유하였고 이치도와 더불어 정여립을 배척하였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6)유경수(柳景秀)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자는 자윤(子潤), 호는 유헌(幽軒), 본관은 전주이다. 1575년(인조 8)에 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15세에 글짓기를 잘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학문이 깊어 많은 문인들이 모여 들었고,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만 진력하였다.
7)송은서(宋殷緖)
조선 중기 학자, 호는 송암당(松菴堂), 본관은 여산, 일찍이 산 속에 들어가 암혈에서 학문에 열중하여 성리학과 예학에 통하였다.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전심하였는데, 송시열이 사사되자 그 부당함을 동지(同志)를 규합(糾合)하여 상소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과, 정면 4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의 강당 등이 있다. 사당에는 유의손(柳義孫)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유분(柳坋), 유숭조(柳崇祖), 유헌(柳軒), 송진문(宋振門), 유경수(柳景秀), 송은서(宋殷緖)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1) 황강서원중건기(黃岡書院重建記) [宋煥箕, 1799]
2) 용고서원창건기(龍皐書院刱建記) [李毅遠, 1822]
3) 전주부소재서원급향현사성책(全州府所在書院及鄕賢祠成冊) [禮曹 1868]
4) 완산지(完山誌) [完山郡, 1895]
5) 용강서원강당중건기(龍岡書院講堂重建記) [李謙朝, 1901]
6) 용강원우중건기(龍岡院宇重建記) [李炳夏, 1923]
7) 전북원우록(全北院宇錄) [李泰淵, 1973]
8)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 [문화재관리국, 1977]
9) 용강서원중수기(龍岡書院重修記) [洪斗炫, 1995]
10) 전국문화유적총람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국학연구원, 2002]
첫댓글 용강서원의 전신(全身)인 용고서원창건기에 의하면 회헌 류의손(柳義孫) 선생은 안동(安東)의 기양서당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나 대대로 쌓은 덕의 향사(享祀)에 불과하고, 유일재 류분(柳坋) 선생은 전주(全州)의 황강원(黃岡院)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나 향사(享祀)의 뜻이 모자라고, 진일재 류숭조(柳崇祖)와 낙봉 류헌(柳軒) 두 분 선생은 지금까지 위패를 모신 곳이 없으니 유림(儒林)의 흠이라 충청, 전라, 경상도의 선비들이 재사(齋舍) 문제를 제기하고, 성균관의 여론을 받아들여 순조22(1822)년에 전주인(全州人) 류한종(柳漢宗)이 주관하여 용고서원(龍皐書院)을 창간하게 된 것이이다.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