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면 원리리院里里 유래
동쪽은 창수면과 남쪽은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은 영양의 양구를 연접한 고장이다. 화산(火山)의 분화구였던 것으로 보이며 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다. 석보면의 사무소ㆍ파출소와 초ㆍ중등학교가 있고 보건지소와 우체국ㆍ농협 등의 기관들이 있다. 본래 영양현 석보부곡(石保部曲)의 땅으로서 조선조 인조 무렵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을 위하여 서당을 세운 뒤에 원리동이라고 부르게 된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인지동과 답하동의 일부를 따다가 원리리라고 하였다.
[마을의 특징]
원리리에는 이시명(李時明) 선생을 위하여 세운 석계서당과 장씨 부인의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당목(堂木)을 들 수 있다. 이 곳에는 조선 시대에 지역민의 복지를 베풀기 위한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1640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들어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화매천(花梅川) 가에 있는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와 서대, 그리고 낙기대(낙기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한편 장씨부인 유허비(遺墟碑)는 마을의 앞 언덕에 세워져 있다. 조선조 선조 때부터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요리에 관한 서책을 쓴 분이다. 아울러 당목(堂木)을 알아 보자. 가두들 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가 서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서낭당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보름이면 제사를 모신다. 두들 남쪽에는 세심대(洗心臺)가 있는데, 바위 앞면에다 세심대라고 적어 놓았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원두들ㆍ원리(院里)
조선 시대 이 곳에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두들ㆍ원리라 부르게 되었다. 원리는 1640년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하기 위해서 이 곳으로 들어 와 개척한 마을로 그 후로는 석계선생의 후손들인 재령이씨(載寧李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 왔다. 이 마을 옆 둔덕에는 석계 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남아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 가에 서 있는 암석들에는 석계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ㆍ서대ㆍ낙기대ㆍ세심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김기수(51) 제보).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이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조 고종 무렵에 세운 것이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갱빈ㆍ강변(江邊)ㆍ중학교마을
원리의 동쪽으로 흐르는 화매천 옆에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강변 혹은 갱빈이라 하며, 석보중학교가 이 마을에 들어서자 학교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두둘ㆍ주남ㆍ화매로 통하는 삼거리이며 중학교가 생긴 뒤 마을이 커졌다(김기수(51) 제보). 강변을 갱빈으로 소리 냄은 일종의 모음의 소리가 바뀐 것이니 소리의 닮음 현상으로 볼수 있다.
*아랫강변ㆍ아래갱빈ㆍ바람내기
구강변 마을보다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아래강변이라고 하며 바람이 매우 세어서 옛날에는 바람내기라고도 불렀다 한다. 물레방아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헐리고 자취가 없다(박호경(51) 제보).
*두들
화매천 언덕 위 둔덕으로 새장터 옆의 산기슭이다. 1965년 장터뫁에서 새장터로 장이 옮겨지자 이 곳에 인가가 들어 서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편에 넓은 평지가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인다(김주락(54) 제보). 언덕에 대한 이 지역말인데 두드러지다ㆍ돋다에서 갈라져 나온 이름이다.
*맛들ㆍ마웃들
마을의 옆 들판의 모습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맛들에 있는 논의 일부를 메꾸어서 그 자리에 석보초등학교를 세우고 그 주위에 집이 들어 서서 원리(院里)와 연결되고 있다(김진수(63) 제보).물론 땅의 모양이 누운 소나 말(馬)처럼 생길 수는 있다. 다른 지역의 땅 이름과 비교하여 보면 말-마에서의 걸림을 받아 들인다면 말-마리-머리와 같이 볼 가능성이 있다. 하면 맛들은 머리들이요, 맏이들이라고 풀이할 수 있으니 큰 들이란 말로도 볼 수 있다.
*솔밑ㆍ송하(松下)솔밑은 새장터의 서쪽 광여산 줄기가 끝 나는 곳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옛날에는 마을의 뒤 언덕에 노송이 울창하게 들어 차 있었기 때문에 솔밑 또는 송하라 부르고 있다(김진수(63) 제보).
송하(松下)는 솔밑을 한자로 뒤친 이름으로 솔밑이 더 오랜 우리식 부름말로 보인다.
*가두들ㆍ가구(佳邱)
이 곳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이들 광산 김씨 중에서 조선 시대에 벼슬을 하여 가재(佳在)라는 당호(堂號)를 받은 이가 있었는데 그의 당호에서 마을 이름을 따서 가두들ㆍ가구하고 불렀다. 또 이 마을의 앞산이 개가 누워서 짖는 형상이라고 하여 개두들이라고도 불리웠다 한다(유응선(62) 제보).
*장터
석보면의 옛날 장은 지경동의 옛장터에 섰으나 장소가 알맞지 않아서 집들이 많은 원리로 옮겨서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장 역시 1965년에 새장터로 이전하였다(김진수(63) 제보).
*옛장터ㆍ구장터ㆍ구장기(舊場基)
옛날에는 원리동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지경동에 속해 있다. 당초에는 석보장이 이 곳에 섰으나 좀 더 넓은 장소를 찾아 원리의 장터로 옮겨가고 이름만 남아 있다(김수학(69) 제보).
*새장터ㆍ신시장(新市場)원리의 북쪽, 두들 옆에 있는데 1965년에 석보장이 장터몰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오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황석겸(52) 제보).
[ 참고문헌 : 영양군지, 영양군청홈페이지]
#추가
1.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유래
석보石保는‘끝없는 복된 땅으로서 돌의 굳건함처럼 사람을 보존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돌석石자에 보전할보保자로 '石保석보'라 하였으며, 원리는 조선시대에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이어서 원리라하였고, 두들마을은 언덕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원리리(院里里) 두들마을은 동쪽에 영덕군 창수면과 남쪽에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에 영양읍의 양구리를 연접하고 있습니다.
석보면 소재지 마을이며. 석보면행정복지센터ㆍ경찰서파출소와 석보초등학교ㆍ석보중학교가 있고 보건지소와 우체국ㆍ농협 등의 기관들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조선 시대에 지역민의 복지를 위한 광제원(廣濟院)이 있었습니다. 1640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들어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마을입니다. 지금은 60여호에 120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을앞에 흐르는 인지천(주남천) 가에 있는 언덕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세심대, 낙기대, 동대, 서대 등의 글씨가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가 마을의 앞 낙기대 언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조 선조 때부터 양반가 음식 요리에 관한 서책을 한글로 쓴 분이며, 詩, 書,畵, 음식,가정화목에 기여한 공로가 많아 여중군자로 불리어 오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입니다.
원리(院里) 두들마을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 이 곳에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리두들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입니다. 조선조 고종 무렵에 세운 것입니다.
2. 석계 이시명이 터를 딱은 마을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 독립운동가 등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 이기도 한 이곳에는 여산정사를 비롯하여 석계고택, 석간고택. 주곡고택. 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예절관과 유적비,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 "전통주체험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언덕밑에 주남천 (인치천) 흐르고, 마을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섬들(섬모양의 농지)'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자료정리 : 문화관광해설사 박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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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갱변, 여불때기, 끄뜨메기, 수두룩, 맹가세, 소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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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66) 석보면 원리리(院里里)가 궁금니껴?
석보면 원리(院里)는
옛날에 화산(火山)의 분화구가 있떤데고
면 중심지 마실이시더.
본래는 영해부 석보부곡(石保部曲) 땅이였꼬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이었니더.
조선시대때는 주민들에게 (복지)의료를 베푼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따고 케서
원리(院里)라꼬 카니더.
(원두들ㆍ원리)
조선시대(고종)때 주민에게 (복지)의료를 베푼
광제원(廣濟院)이 있었꼬.
언덕(두들)에 원(院)이 있었떤 마실이라꼬
원(院)두들 또는 원리(院里)라꼬 카니더.
(갱빈ㆍ강변ㆍ중학교마을)
석보 소재지, 주남리, 화매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는 마실이시더.
그랑(화매천) 가세 마실이 맹글어졌따꼬
강변(江邊) 혹은 갱밴, 갱변, 갱빈이라 카다가
1964년 석보중학교가 맹글어지면서
중학교마실이라꼬 카니더.
(아랫강변ㆍ아래갱빈ㆍ바람내기)
강변마실보다 알게 있따꼬
아랫강변 혹은 아래갱빈이라 카기도 하고
골바람이 억씨 센데라꼬 바람내기라
카기도 하니더.
(두들)
그랑까(화매천) 언덕 우(위)이고,
새장터 여불때기 산기슭에 붙어 있니더.
1965년 석보장터가
장터뫁(석보초등 앞 근바)에서
두들마실 내에 있는 새장터(면 노인회관
주변)로 옮기게 되면서 마실이 크지고
최근에는 마실 뒤쪼구에
장계향문화체험관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관광명소로 탈바꿈 되었니더.
(맛들ㆍ마웃들)
석보초등학교 주변 마실이시더.
마실옆의 들판 모양이
소가 더리누워가 있는 형상이라 케서
맛들이라꼬 켔따카기도 하고.
높은 곳에 있는 들판이라꼬
맛들 혹은 마웃들이라꼬도 카니더.
(솔밑ㆍ송하)
지경리로 통하는 다리입세 마실로
소재지캉, 지경, 옥계로 나눠지는
삼거리가 있꼬.
새장터(면 노인회관 근바)의
서쪽 광여산 자락 끄트메기에 있니더.
마실 뒤쪼구 언덕빼기에
노송이 수두룩 빽빽하다 케가꼬
솔밑 또는 송하(松下)라꼬 카게 됬니더.
송하(松下)는 솔밑을 한자로 쓴거시더.
(가두들ㆍ가구(佳邱))
본래는 광산김씨 집성촌이었니더.
조선 시대때 가재(佳在)라는 벼슬을 했는
이를 배출했따꼬 케서
가두들 혹은 가구라 켔따카기도 하고.
마실 앞산이 개가 누워가 짖는 형상
이라케가 개두들이라 카다가
가두들이라꼬 카게 됬따카기도 하고.
두들마실 가운데에
맹가세에 있는 마실이라꼬 가두들이라꼬
켔따카기도 하니더.
(장터ㆍ장터뫁)
옛장터(지경리)에서 석보초등 앞 갱변캉
그 근바로 시장이 옮기면서
장터 혹은 장터뫁이라 부르게 된니더.
그 뒤 장터에서 새장터(면 노인회관 근바)로
시장이 또 옮겨가게 되자
장터주변으로 집들이 들어서게 된니더.
(옛장터ㆍ구장터ㆍ구장기)
본새 지경리마을회관 동쪼구 갱변에
있던 장터로 원리땅이었찌만
지금은 지경 땅이시더.
석보시장이 맹처음 여기 갱변근바에 섰어나
소잡아 장터(석보초등 앞 갱변 등)로
시장이 옮겨가면서
옛장터 혹은 구장기(舊場基)라 카니더.
(새장터ㆍ신시장)
1965년 장터뫁에서 더 넓고 편리한 곳인
새장터(면 노인회관 근바)로 이전 된니더.
신시장(新市場)이라꼬도 카며
장터(석보초등 앞 근바)에서
시장이 새로이 옮겨오면서 부터
두들 주변(새장터 주변)에
새로운 마실이 맹글어지게 되었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