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夫, 音扶.
무릇 인자는 자기가 서고자함에 남도 서게 하고,
내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도 도달하게 한다.
○以己及人은, 仁者之心也니. 於此에 觀之면, 可以見天理之周流而無閒矣니 狀仁之體, 莫切於此니라.
狀 : 형상, 모양, 형용하다.
자기로써 남에게 미침은 仁者의 마음이니 여기서 보면 天理가 두루 유행하여 빈틈없음을 볼 수 있다. 인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 이보다 절실한 것은 없다.
※ 서로의 삶을 수월하게 해주기위해 살지 않으면 무슨 보람으로 사는가?(조지 엘리엇)
승-승적 사고는 나도 이길 수 있고, 너도 이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나만을 위한 것도 너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승-승적 태도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도와줌으로써 모두가 성공하게 되는 기초가 된다. 우리는 승승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승-패적인 태도와 패-승적인 태도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온통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며, 자신감을 준다. 사람이란 자칫하면 이기적이 되기 쉽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일쑤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지어 살게 마련이고 따라서 항상 나와 네가 어울려서 삶을 영위하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발전시켜나간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남도 이루고자 하는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내가 누리고 싶어 하는 즐거움을 남인들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 것을 알아야 한다.
仲弓問仁한데. 子曰: 出門如見大賓하고, 使民如承大祭하며.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 在邦無怨하며, 在家無怨이니라. 仲弓曰: 雍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리.
承:받들다(奉). 모시다. 올리다.
중궁이 인을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문을 나서기를 귀한 손님을 맞는 것처럼 하고, 백성부리기를 큰제사 받들 듯하며,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하지 말고 대부의 家에 있어서도 원망하지 말라. 중궁이 말하기를 제(雍)가 비록 不敏하나 청컨대 이 말씀을 잘 받들겠습니다.
敬以持己하고, 恕以及物이면, 則私意無所容而心德全矣라. 內外無怨은, 亦以其效言之니, 使以自考也라.
恭敬으로써 자기 몸을 지니고, 容恕로써 남에게 미친다면, 私意가 容納할 바가 없어 마음의 덕이 온전해진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怨望이 없다는 것은 역시 그 效驗으로써 말한 것이니 스스로 詳考(詳細히 參考하거나 檢討함)하게 한 것이다..
○程子曰: 孔子言仁, 只說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看其氣象, 便須心廣體?, 動容周旋中禮. 惟謹獨, 便是守之之法.
정자가 말하기를 공자가 仁을 말씀하실 적에 다만 문을 나갔을 때에 큰 손님을 뵈온 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때는 큰제사를 받들 듯이 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氣像을 보면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몸이 확 넓어져서 動容함(거동(擧動)과 차림새. 동작(動作)과 의용(儀容)과 周旋(일이 잘 되도록 이리저리 힘을 써서 변통해 주는 일)함에 禮에 맞아야 하니. 오직 謹獨이 바로 이것을 지켜내는 법이다.
或問: 出門使民之時, 如此可也; 未出門使民之時, 如之何 曰: 此儼若思時也, 有諸中而後見於外. 觀其出門使民之時, 其敬如此, 則前乎此者敬可知矣. 非因出門使民, 然後有此敬也.
혹자가 묻기를 문을 나가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이 可하거니와 문을 나가지 않고 백성을 부리지 않을 때에는 어찌해야합니까? 하니 정자가 대답하였다.
이 것은 공손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해야할 때인 것 같다. 心中에 가지고 있는 뒤에야 외모가 나타나는 것이니 문을 나가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이와 같이 공경한다고 본다면 이보다 앞섰을 때 공경함을 알 수 있다.
문을 나가고 백성을 부림으로 인한 뒤에 이 경이 있는 것은 아니다.
愚按: 克己復禮, 乾道也; 主敬行恕, 坤道也. 顔 之學, 其高下淺深, 於此可見. 然學者誠能從事於敬恕之間而有得焉, 亦將無己之可克矣.
내가 詳考해 보건데 克己復禮는 乾道요, 敬을 主張하고 恕를 행함은 坤道이다.
안자와 염자의 學問은 그 높고 낮음과 앝고 깊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진실로 敬과 恕의 사이에서 從事하여 얻음이 있으면 또한 將次 이길 만한 私慾이 없게 될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그 분위가 밝고 명랑하고 건실하게 되려면 구성원 각자가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마음가짐이 있어야한다. 어른이라고 해서, 윗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궂은 일은 모두 아래 사람에게 시키는 일, 귀찮고 공적이 나타나지 않은 일만 남에게 골라서 남에게 미루고 서로 기피하는 일이 있다면, 그 가정과 직장은 人和를 이룰 수 없으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위사람 또한 아래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나간 것이 너에게 돌아온다는 말이 있고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친구나 동료 사이에도 항상 내 마음에 비추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을 일으켜 세워 주면 자기는 깡충 뛰어오른다는 걸 알아야한다.
대화는 우리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사람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대화하면서 보낸다. 그러나 다음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데 몇 년을 보냈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데도 몇 년을 보냈다. 그러나 듣기에 대해서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경청하는 법을 얼마나 교육 받거나 훈련 받았는가?
먼저 경청하여 이해하는 것. 처방을 내리기 전에 진단을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올바른 원칙이다. 현명한 의사는 처방전을 쓰기 전에 진찰부터 한다. 훌륭한 엔지니어는 교량을 설계하기 전에 작용하는 힘과 응력부터 계산한다. 유능한 세일즈맨 역시 제품을 팔기 전에 미리 고객의 욕구부터 파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을 잘 하는 사람은 이해 받기 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진단이 철저하지 않으면 처방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남에겐 먼저 이야기하여 이해 받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답변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듣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말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거나 실제로 말하면서 보낸다. 우리는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모든 것을 비추어 보고, 자신의 자서전적인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해석하며, 자신의 준거를 틀을 가지고 듣는다.
“그래! 얘야, 나는 자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
“나도 자네와 똑같은 경험을 했어. 내 이야기를 해주지.
”영향을 미치려면 반드시 먼저 영향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였다면 상호 작용의 다음 단계, 즉 상대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다. 상대가 타인에게 이해 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훨씬 더 용이하게 자신을 이해시킬 수가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공이 말했다.
한마디 말로써 일생동안 그것을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 것은 恕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
推己及物이면, 其施不窮이라, 故로 可以終身行之니라.
자기의 마음을 남에게 미루어 미치면 그 베품이 無窮하다.
그러므로 終身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이다.
○尹氏曰: 學貴於知要하니. 子貢之問은, 可謂知要矣라. 孔子告以求仁之方也하시니. 推而極之면, 雖聖人之無我라도, 不出乎此하니. 終身行之가, 不亦宜乎아?
恕 : 동정하다, 容恕하다, 理解하다 상대방의 마음 속에서 들어가서 그의 立場에서 그를 理解한다는 뜻이다.
윤씨가 말하기를 학문은 要點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자공의 질문은 요점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그에게 仁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을 미루어 지극히 한다면 비록 성인이 無我의 境地라도 이것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終身토록 행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