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說文解字(한문)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역사교실 스크랩 성삼문과 조광조의 행적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192 10.01.07 17: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적 인물의 이면엔 항상 '빛과 그림자'가



사육신 추앙받는 성삼문…

'개혁의 화신' 조광조… 평가자따라 엇갈린 조명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구한말 과거에 응시하던 때를 회고하며 "당시 나의 꿈은 성삼문 같은 충신이 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성삼문 이야기는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 이야기와 함께 조선 500년을 이어온 양대 '충신(忠臣) 신화'의 하나였다.

 

일편단심(一片丹心).


그러나 정작 실록을 보면 성삼문의 '행적'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 한 둘이 아니다.


첫째 그는 왜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제거한 계유정난 직후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을까?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세종·문종 때부터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정변으로, 이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유정난이라 한다.


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제도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단종의 모후(母后)인 권씨도 세자빈 때 단종을 낳은 뒤 바로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영의정부사(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남지(南智)·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좌의정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鄭?)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황보인·김종서 두 고명대신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세종비 심씨의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들인 대군(大君) 7명도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안평대군의 집에는 많은 문신이 출입하고 있었고,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로 하여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1453년 봄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는데, 이 동안에 김종서나 안평대군 등이 그를 제거하려 한 일이 없었던 것은 이들이 단종에 반역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정변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계획되기 시작하여 수양대군이 명에서 귀국한 뒤 뛰어난 무인 또는 문신을 본격적으로 규합함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그결과 1453년 10월 즈음에는 수양대군 휘하에 홍달손(洪達孫)·홍윤성(洪允成)·양정(楊汀) 등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은 이들 심복 무사들을 거느리고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나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서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 아뢸 겨를이 없었다"고 보고하고는 곧 왕명을 빌어 고위관료들을 불러들여서 사전에 계획한 대로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의정부찬성 이양(李穰)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궐 문에서 죽였다. 이어서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을 매어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보낸 뒤 왕명으로 스스로 죽도록 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를 맡아 문신·무신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는 한편 새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설치하고 이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군사권까지 독점했다. 또한 권람·홍달손·한명회 등 정변을 이끄는 주요인물과 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 등 자기 세력이 될 만한 주요관료 등 43명(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고 이들을 요직에 앉힘으로써 권력기반을 다져갔다. 이같이 정변에 이어 취한 여러 조치를 바탕으로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변은 당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던 정인지·최항·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之)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관직자들까지 김종서·황보인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된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정변이 난 뒤 수양대군이 권력을 독점하자 이들은 수양대군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수양대군에 반대하여 단종을 보위하려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고, 결국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1456년(세조 2) 박팽년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제거당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김종서의 심복 무장으로서 함길도(咸吉道) 병마도절제사로 강력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징옥(李澄玉)을 정변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파직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징옥의 반란이 나기도 하였다.→ 단종, 세조, 세조찬위


 

물론 이에 대해서는 성삼문이 적극 참여해서라기보다는 수양대군이 회유 차원에서 포함시켰다는 설명이 있긴하다.


둘째 2년 후인 1455년 9월5일 수양대군이 결국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좌익(佐翼-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보좌한 공이 있다는 뜻)공신(功臣)을 정할 때도 성삼문은 3등공신에 책록됐다.

 

이때는 분명한 공이 있었다.

 

1455년 윤6월11일 수양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 동부승지였던 성삼문이 옥새(玉璽)를 수양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셋째 이듬해인 1456년 6월 성삼문을 비롯해 훗날 '사육신'으로 불리게 되는 뜻있는 인사들이 세조를 내쫓는 거사를 꾸미다가 발각돼 참화를 빚게 되는데 실은 그에 앞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등이 미리 결행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은 거사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성삼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는 죽는 과정이 장렬했기 때문에 훗날 사육신을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추앙을 받게 된다.


이런 성삼문의 행적에 대해 일찍이 비판적 시각을 보였던 인물이 있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심수경(沈守慶  1516년 중종 11년~1599년 선조 32년)이다. 그는 '견한잡록(遣閑雜錄)'이라는 문집에서 성삼문이 수양에게 옥새를 올리던 때의 일을 거론하며 이렇게 논평했다.

 

심수경(沈守慶) 

1516(중종 11)∼1599(선조 3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 아버지는 사손(思遜)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52년 검상(檢詳)을 거쳐 직제학을 지냈다. 1562년 정릉(靖陵: 中宗陵)을 이장할 때 경기도관찰사로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 설치를 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뒤에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98년 치사(致仕)하였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저서로는 《청천당시집》·《청천당유한록 聽天堂遺閑錄》이 있다

 

견한잡록(遣閑雜錄)

조선 선조 때 문신인 심수경(沈守慶 : 1516~99)의 수필집.

〈청천견한록 聽天遣閑錄〉이라고도 한다. 1책. 필사본. 심심풀이를 위해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은 것으로 약 82항목에 달하는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다루었다.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급제한 것, 관직생활, 친구와 집안 식구들에 대한 내용 등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으며 과거급제자와 그 병폐 등 과거에 대한 내용도 많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대한 내용도 가끔 보였다. 시를 짓는 데 얽힌 이야기인 시화(詩話)를 소개했으며, 송순(宋純)의〈면앙정가 ?仰亭歌〉같은 국문시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로 보아 지은이의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이 간단하여 문학관까지 끌어내기는 어렵다.


이 책은 야담·실기(實記)·시화를 종합하여 자유롭게 쓴 것이다. 신이(神異)한 이야기보다는 사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야담집과 다르고, 역사적인 사건보다 개인적인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실기와도 다르다. 또한 일정한 서술체계나 특정한 문학적 취향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화집과도 다르다. 조선 중기 상층문화의 움직임을 가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지은이의 문집과 〈대동야승 大東野乘〉 권13, 홍만종(洪萬宗)이 엮은 〈시화총림 詩話叢林〉 권2 등에 실려 있다.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정난공신(靖難功臣)  

조선시대 공신 가운데 하나.

1507년(중종 2) 8월 이과(李顆)의 옥사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내려진 훈호이다. 이과는 중종반정 때 유배지인 전라도에서 유빈(柳濱)·김준손(金駿孫) 등과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晋城大君:뒤의 중종)을 옹립하려다 반정이 이미 성공했음을 알고 이를 중지한 적이 있다. 그후 그는 '정국원종공신'으로 전산군(全山君)에 봉해졌으나, 박원종(朴元宗) 등의 독주체제에 불만을 품고 이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후 노영손(盧永孫)에 의해 모반으로 부풀려져 고변(告變)되었다. 이 사건은 심문과정에서 대신을 모해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어 노영손과 이 사건의 추국에 관계한 추관(推官) 등 22명이 정난공신으로 봉해지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1등 '추성보사유세정난공신'으로 노영손 등 5명, 2등 '추성보사정난공신'은 민효증(閔孝曾) 등 5명, 3등 '추성정난공신'은 설맹손(薛孟孫) 등 12명으로 모두 22명을 책정했으나, 뒤에 대간(臺諫)의 공박으로 노영손 1명을 뺀 21명은 삭훈되었다. 정난공신은 중종반정의 주체세력인 정국공신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단순한 사건에 불과한 것을 역모로까지 확대시켜 경쟁세력을 제거하고, 그 여세를 몰아 녹공되었던 것이다.→ 공신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승지(禮房承旨-예조 담당 승지)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오활(迂闊)

1 곧바르지 아니하고 에돌아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2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다.



한 마디로 세조가 좀 더 세심하고 치밀했다면 성삼문의 '어색한' 행동은 훨씬 일찍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수경의 결론은 단호하다.

 

'대사를 이루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성삼문이 충신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흔히 뜻만 크고 일이 치밀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       *       *       *       *       *       *       *       *       *

 

중종 때의 조광조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개혁의 화신', '미완의 개혁사상가' 등으로 극찬 일색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사림계열의 인사들은 조광조를 깍듯이 받들었다.

 

중종 12년(1517년) 중종의 총애를 받던 신진사림 조광조는 "일부에서는 스승을 찾거나 벗을 사귀는 사람을 화태(禍胎-화의 씨앗)라 하지만 사우(師友)의 도가 있은 연후에야 인륜이 밝아지는 법"이라며 당파 형성의 조짐을 이루던 사림파를 적극 옹호한다.

 

그러나 결국 기묘사화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조광조는 화태"라는 비판을 이미 당대에 받아야 했다.

 

기묘사화 (조선 역사) [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사건.

성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림은 연산군 때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주도권을 장악한 반정공신들은 연산군 때 악정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림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세력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사림을 주목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일시 물러났던 사람들이 대거 중앙정치에 등장했다.


이들은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경연을 강화함으로써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중종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 노력했다. 또한 기존의 언론기관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권력에 관여하기 위해서 낭관(郎官)에게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부여하여 실무의 결정과 집행과정에서 재상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 천거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사류와 성균관의 학생들을 정치에 참여시켰고, 공론정치를 강화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의견도 정치에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사림은 향촌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향약(鄕約)의 실시로 나타났다.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수용하여 〈언해여씨향약〉을 통해 일반민에게까지 보급했는데, 그들의 호응에 힘입어 단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움직임에 대하여 반정공신들은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낭관권의 형성, 천거제의 시행, 현량과의 실시, 향약의 실시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당하자 사림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림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공신들의 잘못을 탄핵하자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519년(중종 14)에 다시 가열된 중종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였다. 사림은 일찍부터 이 문제를 주목하여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힘이 커지면서 1519년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여 마침내 공신의 3/4에 이르는 76명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게 했다. 중종은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림들을 지원했으나 사림의 독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공신 삭제와 같이 사림의 독주를 허용하는 조처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림의 주장에 밀려 삭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종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사림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했다. 피해를 입은 공신들 역시 사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사림의 탄핵으로 상당수 중앙정치에서 탈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권력이 위축되어 있던 상황에서 대규모 공신 삭직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심한 위기의식을 가졌다.


김전(金銓)·남곤·고형산(高荊山)·심정 등은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중심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통해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趙의 破字)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1519년 11월에 홍경주 등은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사림들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가서 사형당하거나 자결했다. 이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이자(李)·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유배·파직을 당했다. 사림들이 언관과 낭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던만큼 피해를 입은 이들 역시 언관과 낭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로 언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것과 대조가 된다(→ 기묘명현).


사화 이후 공신세력이 요직에 임명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들은 사직된 공신들에게 다시 공신호를 반환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면서, 사림의 권력기반이었던 낭관권의 혁파에 노력했다. 이들은 낭관권의 핵심요소인 자천제(自薦制)나 낭관들의 정치적 결속을 문제삼으면서 사림이 강화될 수 있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공신들의 정치적 비리를 공격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당시의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근거 위에서 언권과 낭관권이 서 있었으므로 근본적인 불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재지사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의 중앙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기묘사화는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사림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기묘록, 기묘명현, 사화


 

선조 즉위 초 영의정 이준경은 신왕(新王)의 학문연마를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의 후배이기도 했던 명유(名儒) 이황을 초빙했으나 이황은 한양에 잠시 머물다가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이준경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李浚慶]1499(연산군 5)~1572(선조 5).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할아버지는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다.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었으며 그도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李延慶)과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 일파에 밀려 파직당했다. 이후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1537년에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직제학·승정원승지·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0년 정적(政敵)이었던 이기(李?)의 탄핵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1553년에 함경도순변사로서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을묘왜변 때는 전라도도순찰사로서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와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기간에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尹元衡)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1572년(선조 5) 국가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朋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현실화되었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東皐遺稿〉·〈조선풍속 朝鮮風俗〉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 이준경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5-1번지 소재 이준경 선생의 묘소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1570년 음력 12월 8일)

조선 명종, 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황은 조선 연산군 7년(1501년), 경북 예안군(오늘날의 안동)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7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성, 단양 군수, 풍기 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선조 즉위 직후 임금에게 올린 성학십도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南人) 계열의 종주가 되었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광해군 치세인 1609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와 사마시에 같이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일본 에도 시대에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은 학파로 기몬(崎門) 학파와 구마모토(熊本) 학파가 있다.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상계동  퇴계선생의 종택

 

▲ 퇴계선생의 묘소


이에 이준경은 이황의 이같은 행태를 '산새(山禽)'에 비유했다.

 

게다가 이준경은 선조 5년 세상을 떠나며 선조에게 남긴 유서에서 당쟁(黨爭)의 조짐이 있다며 사실상 이이를 지목했다.

 

이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1584년 음력 1월 16일)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이며 정치가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다. 대한민국의 5000원권 지폐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대한민국의 50,000원짜리 지폐 초상으로 선정되었다.

 

  ▲ 율곡 이이 선생의 초상화

 

▲ 퇴계선생의 묘소

 

 

조광조 이후 또 하나의 화태로 본 때문이었다.

 

러나 이후 이황은 남인(南人)의 정신적 뿌리가 되고 이이는 서인(西人)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남인 (조선 역사)  [南人]

조선 선조 때 동인(東人)에서 갈려나온 붕당(朋黨)의 하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北人)으로 나뉜 것은 서인 정철(鄭澈)의 세자책봉 문제제기로 동인 내부에서 생겨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에서 기인하였다. 분당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당시 집권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것은 집권당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현상이었다.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를 따른 일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을 따른 일파를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서울 남산 밑에 있었고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남인은 이이(李珥)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을 제외하고는 이황(李滉) 문하의 영남학파 출신이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은 북인과 갈린 이후 우성전·유성룡·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북인이 1602년(선조 35) 유성룡을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탄핵, 사직하게 한 뒤 정권에서 밀려났다. 서인을 중심으로 북인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반정 때,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자 남인과 서인 사이에는 유대가 성립되었다. 인조 때 당파세력은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과 연합하는 형세였고, 북인 중 소북(小北)의 일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조 때의 남인으로는 유성룡의 문인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당시 영의정 이원익과 이광정(李光庭)·이성구(李聖求)·이준(李埈)·장현광(張顯光)·정온(鄭蘊)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남인과 서인 사이의 유대관계는 점점 이완되어 서인과의 알력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성리학의 논쟁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서인 주기파(主氣派)와 남인 주리파(主理派)의 논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효종 이후 북벌 등을 내세워 정국을 주도하는 서인과 그를 비판하는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남인은 현종 때 효종의 상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쟁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바로 1659년(현종 즉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그뒤 다시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을 둘러싸고 다시 예송이 전개되었을 때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물러나게 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예송에서 남인의 주장은 대체로 왕실의 예와 사족의 예가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서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남인이 다시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를 탁남(濁南), 후자를 청남(淸南)이라 불렀다. 허적(許積)을 수령으로 하는 탁남에 대립하여 서인의 죄를 강력하게 추궁해서 문죄하자는 청남에는 허목(許穆)이 수령격이었다. 탁남을 중심으로 한 남인정권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군문을 확보하면서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정권을 잃은 뒤 서인(노론·소론)과 정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탁남과 청남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후 탕평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오광운(吳光運) 등 탕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단과 소극적인 집단으로 나뉘기도 하고, 정조년간에 채제공(蔡濟恭)이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경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남인집권기는 도래하지 않은 채 중앙정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남인들의 주장이 탕평책과 연결된 것은 그들의 붕당론에서 왕의 정치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과 연관된다.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기반을 유지하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실학자'들 가운데는 남인계가 많으며 18세기말에 천주학이 일부 남인계를 중심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동인, 붕당정치, 사색당파

 

서인 (조선 역사)  [西人]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하나.

붕당의 성립은 1575년(선조 8)의 동·서 분당을 기점으로 한다. 이때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정릉)에 있었고, 김효원(金孝元)의 집은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인현동)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지지자들을 서인과 동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초기 서인의 구성원은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구사맹(具思孟)·홍성민(洪聖民)·신응시(辛應時)·성혼(成渾)·조헌(趙憲)·남언경(南彦經)·이귀(李貴) 등이었다. 특히 이이와 성혼의 제자는 이후에도 서인의 주요학맥이 되었다. 서인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중앙정계에서 활약해온 명문가문 출신과 기호지방 사림출신들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 지역에 든든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은 조선 후기 중앙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서, 세력이 위축·실각했을 때는 있으나 완전히 축출된 적은 없었고 정계에서 항상 일정한 기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도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때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거치면서 왕권의 지나친 비대화나 외척의 일방적 성장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윤원형을 제거한 뒤에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을사 사화 희생자들의 신원을 주장하고, 경상도·전라도 사림의 등용을 주선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토지문제를 위시한 국정혁신 정책에 대해서는 동인보다 소극적인 편이었다.


1588년(선조 21)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의 동인에 대한 탄압은 서인·동인 간의 대립을 굳히고 동인을 남인·북인으로 분리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591년 정철이 세자책봉 건의로 노여움을 사게 되어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진출했다(建儲議事件). 그러나 서인 실각의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등극이었다. 서인은 선조 때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군제 붕괴와 초반 패전에 책임이 있었다. 물론 전쟁중에 대명외교를 성공시켜 명나라의 원조를 얻어냈고, 의병활동에서 조헌·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의 활약이 있었으나 전반적인 공로는 남인과 북인이 앞섰다. 또한 서인은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으므로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광해군 때 서인은 비교적 중도적 입장을 유지했던 이항복(李恒福)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광해군 후반기에 대북정권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위와 서양갑(徐洋甲) 사건(七庶事件)을 빌미로 일어난 계축옥사로 서인은 일대 위기를 맞았으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킴으로써 위치가 공고해졌다. 인조반정 뒤 서인은 소수의 남인과 소북(小北)·중북(中北) 일부를 등용하는 한편,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을 주축으로 한 기호사림을 포섭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이후 서인의 내부에 여러 번 당(黨)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분당이라기보다는 유력인물을 중심으로 한 계파(系派)로서 김유(金?)·김자점(金自點)·이귀·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심명세(沈明世)·구굉(具宏) 등 공신·외척 세력을 포함한 훈신세력과 사림인사로 구분된다. 인조 초기에는 반정공신 세력인 훈서(勳西:또는 功西)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김상헌(金尙憲)의 청서(淸西)로 구분되었다. 훈서는 다시 김유를 중심으로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의 노서(老西)와 이귀·장유·나만갑(羅萬甲)의 소서(少西)로 나누어진다. 이는 남인인사를 등용하는 문제로 갈라진 것인데, 각 당파의 인물을 어떻게 등용할 것이냐를 놓고 이외에도 여러 번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에는 반정공신계보다 사림계인 김상헌·김장생 등이 더욱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인조 후반에 김집·송시열 등이 중용되면서 서인정권은 최후의 공신계열인 원두표의 원당(原黨), 김자점의 낙당(洛黨), 김육(金堉)·신면(申冕)의 한당(漢黨), 사림계인 산당(山黨)으로 구분되었다. 한당과 산당은 김육·김집이 대동법 시행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발생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촉구한 김육의 집이 한강 이북에 있고, 산당은 연산(連山)·회덕(懷德) 지역의 사림들이므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효종 때 김집이 이조판서가 되어 송시열·윤선거·이유태(李惟泰)를 천거한 것을 계기로 서인 내부의 사림은 세력을 확충하여 송시열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외에도 이때의 주요인물로 김수흥(金壽興)·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민유중(閔維重)·민정중(閔鼎重)·김만중(金萬重)·윤선도(尹善道)·남구만(南九萬) 등이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자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여, 주자의 명분론에 기초한 신분제와 지주전호제의 안정을 기축으로 한 사회재건을 추구했다. 동시에 주자도통계승운동과 율곡의 문묘종사운동을 일으켜 주자·율곡(기호학파)으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학문적 계보와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하여 당시 최대의 정적이었던 남인에 대항하는 한편, 일부 진보적 학자들에게 도입된 반주자학적 경향과 토지개혁론에 대처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신들의 국정주도를 강조하며 왕실의 비대와 척신정치(戚臣政治)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서인 내부에서 훈서·한당 계열 인물과 송시열계의 대립이 깊어졌다. 결국 현종 때 예제논쟁을 시발로 척신인 김석주(金錫胄)와 윤휴(尹?)·허적(許積)을 대표로 하는 남인이 연합하여 정계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인도 개혁론과 다른 당파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노론·소론으로 분리되었다. 인맥과 정책으로 보면 서인의 주류는 노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숙종~경종 때의 정국은 출척(黜斥)과 환국(換局)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론은 숙종 때 송시열이 사형당하고, 소론의 지지를 받는 경종이 즉위하자 이이명(李?命)·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위기를 겪지만 영조 즉위와 함께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노론, 동서분당, 동인, 붕당정치, 소론


 

특히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세상이 200년 이상 계속되면서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까지 당대에 추앙받았던 이준경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했다.

 

인조반정 (조선 역사)  [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이귀(李貴)·김유(金?)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뒤의 인조) 종(倧)을 왕으로 세운 정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역사적 평가는 붓을 쥐는 평가자의 뿌리나 주변에 유리하게 이뤄지는 것인지….[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