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크레인 (외 4편)
석미화
차라리 기린 무리라고 부르고 싶어요 목을 빼 몸을 교차하면서 허공을 누벼요, 누벼놓아요
밤낮, 어슬렁 거닐며 구름 너머에 쌓아 올리는 거죠 허공의 십자로에서 바람이 편을 가르고 있어요
약정서상, 목뼈가 가장 취약하다죠, 허점을 밟아 올라갈수록 발아래는 더 아득해, 행복한 거니까요
누군가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일러줬어요, 웅성거리는 소리 들었어요
저 건너편 고공 초원,
동물의 왕국은 늘 재방송되죠, 낮달은 인각麟角에 걸리고, 길쭉한 몸통과 몸통, 부비며 부비며 애무하는 사이
밥상머리 쪽으로 천천히 조여들어오는 그림자
낯익은 하품 안쪽, 구멍 숭숭한 목뼈가 걸리고, 공중분해되는 새떼
빛의 잔해가 붉은 국물 속으로 끝없이 스며들어요
점층적으로, 서사적으로 쓰다
그녀가 설탕을 쓰는 법은 독특해요
그녀가 처녀 적엔요,
마를린 먼로의 피부빛, 그 감미로움 한 스푼만 떠내오고 싶었지요
그 여백의 색깔 운운한 것은요, 그때 즐겨 손댔던 가장 밝은 톤의 어둠,
백설탕이었을 테니까요
고백컨대, 그녀의 민낯이 누렇게 발효되었다는 걸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제 살결, 제 격에 맞는 맛,
그때부터 우울한 달무리, 먼 먼 色을 고집했어요
그녀는 나아가 매력적인 구릿빛, 슈거의 아린 맛도 알아냈어요
몸에 녹아드는 속도에 따라,
점차 과감해져 갔어요 황량한 맛도 취해봤어요
잉카, 그 까마득한 고원의 원주민을 영혼으로 불러들였어요 절절한 황하의 그 노랫소리도 간혹 귓속으로 녹여 먹고 싶었지요
이제껏 도정搗精의 나날이었던가요
그런데 말이지요
뒤늦게 한 사랑은 깜깜한 밤, 그 어둠의 살갗을 도톨도톨 만지고 싶은 거였어요 혓바늘이 돋도록,
끝없이 끝없이 맛보고 싶은 거였지요
아직도 바닥에 닿지 않는,
그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의 재즈는
위험한 무릎 위의 시간, 무릅쓰는 동작이었어요
밤의 거품 속 내 몸 남김없이 오르내리고 싶은 거였지요 하지만 끝내
그 뒷맛마저도 씁쓸한 일이었지만요
내 저녁의 양념통들,
내가 써 붙인 백설탕, 황설탕, 흑설탕,
점층적으로, 서사적으로 때론 퍽이나 낭패스럽게
확 쏟아져버려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요
마구 섞여 구분이 되지 않는 나날은 왜 더 달콤해지는 거지요
———
* 전경린의 소설 제목.
뿔
엄마가 애인을 만나고 오는 날은 우우, 나는 뿔이 조금씩 올라오지
수염이 까뭇까뭇 돋은 길쭉한 그림자를 업고 엄마, 새벽녘에야 들어서면,
발꿈치 조심조심 내디디면, 저 천장까지 하늘로 번쩍 쳐들리는 것 같지
우우, 나는 그 소리 남김없이 엿들으며 한 켜씩 뿔을 키우지
내 속눈썹 위로 흔들어 보이던 엄마의 손바닥,
옷소매에 묻어 있던 엄마의 남자에게선 시큼한 버즘나무 잎 냄새가 나곤 했지
아, 가려운 이 뿔, 뿔뿔이 흩어진 우우,
뿌리까지 후벼 파내도 뾰족뾰족 올라오는
하루 종일 통화를 해대는 비의 일만은 아니지
버즘나무 사내 냄새는 우우,
가을 전의 일기보다는 겨울 후의 일, 아냐 그런 사시사철 시시각각이 아닐 거야
엄마 등 뒤로만 날아다니는 아홉 살 곤줄박이의 일은 더더욱 아니지
도대체 보이지도 않는 버즘나무 밑동은 언제 잘려나가는 거지
아, 이것마저 아닌
몸 뜨거워
다 튀어오르는 불, 불, 뿔, 뿔, 뿔뿔이, 뿔뿔이, 뿔뿔이, 뿌리
사촌들
우울한, 목 긴 물푸레를 키우고
적진으로 향하는 낡은 목선을 끌어요
오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 무너진 코 같은 산간오지가 되어버렸어요
아포여관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 소읍 구급대원이 되기도 했어요
몰랐어요, 누이에게 간을 이식받아 족도리꽃처럼 숨어, 사력을 다해 산 보름이었대요
더 이상 풍문은 없어요
머리 위에 구름왕국을 만들고
왕관 속 앵무새를 숨겼다가 간혹 산책시키는 족속도 있어요
층층 아래, 분위기를 달리하는 부류들은요
제트기가 몸 비트는 방향을 꿈꾸고 빙벽을 타며 발아래 낙법을 단련시키기도 해요
비일비재해요 꿈이 바뀌는 건…… 몇 년간 소식 없다가 그림자를 발굴하러 다닌다고 했어요
돌무덤에 묻힌, 한 장의 캄캄한 그런 소식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잊히지 않는 일은요,
열병에 귀를 앓고 난 후 산 한 채가 달팽이관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요
가끔 모이면 펼쳐보는 사진이에요
그날엔, 전공 비전공을 북북 찢어 날렸어요 다 버리고 몸이 요구하는 소리를 따라다니며 아직 나비잠을 자고 있는 돌책상 앞의 무릎,
손바닥이 뚫리고 방아쇠를 당길 수 없어 신에겐 잠금장치를 풀었죠
자아, 오늘 밤만은 편안히 자고 떠나도록 해요
그러니, 그러니, 이곳 생과 혼숙을 하고 자란 사촌들
어느 혹성, 혼성 듀엣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요 제물과 재물의 불씨는 혈육지간
별이 돋는 밤마다 물을 긷고
야생의 말, 말들을 길들였다가 멀리 풀어주는 법을 잘들 배웠어요
우리는 여전히 골짜기를 움직이고 물살을 가로지르고 싶어해요 북극여우처럼 잠시 침묵했어요 모의처럼 둥근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다들 잘 살아갈 듯 외로워요
이제 안녕,
결혼식을 끝내고 다들 싱글처럼 잠시 머물러요
아주 사소한 식탁
나는 매일 밤 늙는 꿈을 꿔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때 낀
붉은 구름들 늘 올라와 있고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려
빵은 곁에서 퉁퉁 부어 칭얼대고
아이는 몇 주째 부비동염을 앓고
나는 매일 밤 늙는 꿈을 꿔
반쯤 베어물고 외면해버린
멍투성이 사과알
잘못 본 것일 거야,
오늘은 식칼이 식탁 위에 서 있지
움찔움찔 구석으로 몰리는 겁 많은 벤자민은
순간 한 번 더 살기가 돌고
내 몸은 폭우 다음 날 치여 죽은 고양이마냥
깨어진 접시를 붙들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나는 꿈속에서조차 굳어가는 내 얼굴을 더듬거려
흉측한 꽃눈을 달고
여기저기 독을 키우는 유리컵들
내 꿈속으로 새어들고
도통 읽을거리가 없는 식탁은
기막힌 사연만 아무렇게나 다그치고 있어
나는 믿지 않아
어느 날 식탁 앞에서 늙어 죽은 나를
또 흔들어 깨우고 있는 나를
2014년 <시인세계> 봄호 신인상
▲ 석미화 / 1969년 경북 경주 출생.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녀의 골반」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