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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시오 몬시뇰]
*[소년의집]과 [마리아수녀회]& [그리스도회] 설립자
*세상의 가난한이들과 불행한 청소년들의 친구
*일생을 청빈과 겸손으로 사셨던 분
*성서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한 분
*예수님과 성모님을 무척 사랑했던 분
*세계5개국 10개도시에있는 30,000 명 고아들의 아버지
*누구보다도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1. 사제의 꿈을 지닌 개구쟁이 소년
'나는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 한가지 뿐 이었다. 이 생각은 내가 자라는 동안 숨쉬는 공기와 같이 내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생각은 나의 혈류속에 들어 갔으며 내 신체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어린시절 늘 사제가 되고 싶은 열렬한 꿈을 지녔었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1930년 918일 미국 워싱턴시에서 태어났다. 카톨릭 교회의 겸손한 한 사제로서 30,000여명의 가난한 고아 청소년들의 아버지이며 교육자였던, 그의 어린 시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상식과 신뢰감을 갖추고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와 한 달에 두 번, 혹은 해질 녘이면 온 가족이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함께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화목한 성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성실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양친은 영리한 둘째 아들을 매릴렌드 주 케이톤스빌 소신학교에 보내 사제가 되기 위한 먼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13세살의 소년 알로이시오는 대담하고 사내다운 인물로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 학생이었다. 한 번은 물리시간중에 팔과 무릎으로 교실바닥을 기어 교탁 앞에 서서 강의 하는 교수 뒤를 돌아 교실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구쟁이 소년 신학생에게 급제동이 걸렸다. 어느 오후 신학생 담당 신부님께 불려가 사정없이 엉덩이를 맞고 절뚝 거리는 발걸음으로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감사합니다. 나에게는 그 매가 필요했습니다.' 라고 고백한 후 그의 신학교 생활은 더 없이 진지하고 성숙하게 되었다.
해외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하여 소신학교에서 4년을 보낸 후 4년의 수학을 위하여 메리놀회 대학에 입학했다.
( 메리놀 대학은 지성을 추구하는 상류 미국사회의 선교회이다. ) 그의 적극적인 대학생활은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는 각종 스포츠에도 활동적이었고 대학에 남아 교직을 맡게 될 정도로 공부도 잘했으며 학생회장직과 대학잡지 편집도 맡는 등의 활발한 활동의 대학 생활은 훗날 알로이시오신부의 본격적인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류 생활방식은 가난한 해외 선교 사제의 길을 의심하게 했다.
이러한 자신의 내면모습을 깨달은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선교 사제로써 사도직을 양성하는 단체를 찾던 중 유럽의 벨기에 벨지움의 루벵시에 있는 한 외방 선교회에 입회 신청서를 냈다. 주위사람들은 모두 험악한 길로 들어선 그를 보고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며 만류했다.
1953년 1월 루벵대학에 입학한 그는 달라진 기후와 음식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마치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이 공부했다. 또한 그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접한다는 것은 해외 선교에 필요한 심리적 안정감을 미리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어 신학교를 좋아했으며, 수업도 맘에 들어했다.
루벵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던 신학생 알로이시오는 이곳에서 여러명의 한국인을 알게되고 한국의 신앙과 역사에 관한 책도 읽으며 한국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해서 알기시작했으며. 무엇보다 한국동란인 6,25직후의 한국사회의 참상을 들은 그는 더욱 한국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이런 관심은 훗날 머나먼 동양의 한 작은 나라인 한국과 알로이시오를 하나의 삶으로 엮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보낸 방학도 학업에 못지 않는 훌륭한 공부가 되었다. 그는 무일푼으로 무전여행을 즐겨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다. 후에 그가 선교 사제가 되어 전세계를 다니며 모금운동을 할 때 이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루벵에서 북아프리카의 마라케시까지 여행하며 마라케시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사막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의 진료소에서 일을 돕기도 했다. 이태리 시칠리섬,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을 거쳐 루벵으로 돌아오면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을 하며 얻어 먹기도 했다. 또다른 방학에는 남부 불란서의 산골 본당에서 감자도 캐고 호두를 따며 본당신부를 돕기도 하고, 또다른 경우에는 목동과 밤을 지낸 일들도 있으며 넝마주의와 함께 보낸일도 있었다. 한 번은 여행 도중 자다가 깨어 보니 어마어마하게 깊고 넓은 구덩이 옆에서 자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다시는 살아 나올수 없음을 알고 삶과 죽음의 큰 의미를 깨닫기도 했다.
이윽고 1957년 6월 29일 해외 선교사제를 꿈꾸던 청년 알로이시오는 워싱턴의 성 마틴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같은해 12월 그가 언제나 마음에 두고있었던 자신의 삶의 상대로 선택한 '한국에 가기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2. 가난한 아이들과의 만남
불확실한 휴전으로 끝이난 한국전쟁은 그 후유증으로 인하여 수십만의 가정이 집을 잃고 수만의 아동이 고아가 되어, 한국의 어느 곳이나 오두막과 판자집과 피난민 들이 있었다.
청년 알로이시오 신부는 목적지인 부산에 가기 위해 밤 기차를 탔다. 그가 전에 들었던 머릿속에 가득한 한국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차가 한 간이역에 멈추어 섰을 때 그는 궁핍의 극적인 현장을 목격할 수있었다. 기차가 역 구내에 정차하자 문이 활짝 열리고 한무리의 소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가두어둔 쥐가 갑자기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승객들의 다리사이로 버린 사이다병 , 빵조각, 담배꽁초를 찾고 있었다. 음식은 입속으로 넣고 병속에 남은 한방울의 음료수를 마시며. 그 물건들은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마대속에 집어넣었다. 아이들의 얼굴과 몸에는 때국물이 줄줄 흐르고 두눈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차장이 나타나자 모두들 쏜살같이 차밖으로 달아났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이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잠시 악몽을 꾼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 아이들이 장차 자신과 함께 생활하게 될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자녀들이 되리라고는 아직은 예기치 못했다.
3. 곳곳에 세워지는 구호사업
1962년 6월 부산교구 송도본당 신부로 발령받은 알로이시오 신부의 생활은 가난 그자체였다.
어느 수녀님은 그때를회상하기를 본당'수녀님의 안내로 신부님께 면접을 가는데 화장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 화장실로 데리고 가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천장이 내려 앉아 굵은 막대기로 지붕을 받쳐 놓고 비가 오면 군데군데 세숫대야를 동원해야 하는 판자집이 그의 사제관 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에는 쥐들이 사제관 천정을 시끄럽게 왔다갔다 하기때문에 잠을 잘때면 기다란 막대기를 옆에 놓아두고 쥐소리가 날때마다 천정을 두드려서 조용히 시키고 잠을 청해야만 했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가 말로만 듣던것보다 더 비참한 당시의 한국 모습을 보며, '이곳이야말로 내가 일 할곳이구나..'라는 결심을 굳히고 다른 가난한이들과 함께 아주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각처에 산재해 있는 고아원과 판자촌을 자주 방문하고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그들의 영혼과 육신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구호사업을 하나하나 계획해 나갔다.
먼저 알로이시오 신부는 세계여러곳을 돌며 한국의 어려움을 많은이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의 도움을 진심으로 호소하며 한국의 가난한이들을 돕는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선진국의 많은 은인들의 도움을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기위해 한국자선회를 설립하였으며, 송도성당 옆에 가족단위 고아원도 만들고 이들을 도와 줄 [마리아보모회]를 발족하였다. [마리아 보모회]는 [마리아수녀회]의 모체이다.
이렇게 극빈자들을 돕던 그는 너무나 가난한 일반인들을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자수자조사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당시 한국을 도와주던 세계각지의 은인들에게 대한 답례로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한국인의 모습을 담은 자수 손수건을 선물하려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수용 바늘과 실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손수건용 천'에 간단하게 자수를 할 수 있게 그림을 프린트하여 나누어주고 그 그림을 따라서 자수를 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당시 이 작업은 그려진 선을 따라서 일자로 바늘을 넣었다가 빼는것만 반복하면 되는 쉬운 것이어서 학생들도 모두 할수 있을정도였다.
자수를 놓아서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가져오면 신부는 그들에게 하루분의 일당을 지급했다. 이것은그 당시 어려웠던 수 많은 가정의 생계를 돕는데크게 기여했다. 가난했던 그들도 정당하게 일을해서 돈을 벌수 있었던 것이다. 이 활동은 그후 6년여동안 계속 되었다. 알로이시오신부는 정성으로 모아진 자수손수건을 한국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은인들에게 답례로 보냈으며, 이런 한국인의 정성은 다시 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더욱더 사랑을 가지고 한국을 돕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늘 모든 일에 솔선수범이었다. 부산시로부터 결핵환자들을 위한 시설인 '구호소'를 인수 받아았을때 그곳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집합소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전염병때문에 씻지도 못하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한 환자들은 너무나도 아위어 있었다. 하지만 전염병때문에 그들이 불쌍해도 아무도 그들을 돕기 위해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이들이 주저할때에도 알로이시오 신부는 주저함없이 앞에 나섰다. 그는 전염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들을 씻기고, 청소를 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이런용기있는행동은그의제자들이자동료인[마리아수녀회]수녀들 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에 [마리아수녀회]수녀들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알로이시오 신부의 마음은 현재의 상황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가난한이들을 돕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그가 진정으로 원했던것은 가난한이들이 하루하루 밥만 먹고 살아가게 도와주는것보다 이들이 교육을 받아 깨우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살게하는 것이었다.
만일 현재 이런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시도해 보려고 하였다. 이 자선 프로그램의 정신은 모두 그가 믿고 사랑하고 의지한 성경말씀에 기초를 하고 있다.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평소에 늘 하던 말처럼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 하듯이 하느님과 성모님께 모든것을 맡겼다. 성서의 말씀처럼 굶주린이들에게는 먹을것을 나누어주고, 병자에게는 치료를 해주고, 가난에 묶여있는 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해서 가난을 극복하게 해주고자 하였다.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그의 마음이 하느님 사랑의 계획으로 가득차던 바로 그순간 부터 모든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에 들어갔다.전보다 더욱 자주 온세상을 돌면서 더욱더 많은 이들에게 간절하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도움을 호소하였다. 많은 이들은 이런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감명을 받아 그에게 기꺼이 희사를 하였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더 많은 가난한이들에게 더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1967년에 송도본당 주임직을 사임하고 3년전부터 그전부터 그가 창설하여 함께 일하던[마리아수녀회] 수녀들과 함께 본격적인 구호활동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은인들의 계속되는 후원으로 그는 두 곳의 탁아소, 세 개의 무료진료소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고등공민학교, 그리고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난한 환자에게 무료로 치료해 주는 두 개의 병원과 결핵환자를 위한 구호소, 가정파탄으로 인하여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소년들을 위한 소년의집, 그외 모성원과 아기들을 위한 영아원을 만들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난하다 못해 절망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게 환희와 희망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의식주는 물론 치료와 교육등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며 영신적으로는 하느님의 은혜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누릴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일생동안 오직 가난한이들을 위해서 모든것을 바치던 그는 끝까지 가난과 함께 하였다. 한번은 알로이시오신부가 모금운동을 위해 여러나라를 돌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기나긴 여행중에 배가 너무 고팠던 그는 중간에 빵이라도 하나 사먹으려고 가게에 들렸다. 그런데 작은 빵 하나의 값이 '500원'이라는 가게 주인의 말에 '500원'이면 나 아닌 가난한 다른 사람의 한끼 식사값이라는 생각에 그 빵을 내려두고 가게를 나왔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 후 그의 사랑하는 소년의집 아이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아버지 신부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또한 알로이시오 신부를 조금만 유심히 살펴본적이 있는 소년의집 학생들은 그의 구두가 자신이 소년의집에 들어가서 학교를 졸업하고 아니 졸업한 후에 살펴보아도 조금도 바뀌지 않은것을 모두 알고 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구호사업을 시작한 이후엔,평생을 단 한결레의 구두를 꿰매고 꿰매어 신고 다녔다. 그가 미국에 자선모금을 하러 갈때 자주 구두를 수선해 준 어느 수선공은 "신부님 제가 새구두를 한켤레 사 드릴테니 이젠 이 구두는 버리십시오"라고 적극 권했으나 알로이시오 신부는 아직도 신을 만하다며 이를 거절 했다고 한다. 가난한이들을 위해서는 좋은 집과 좋은 음식을 마련해 주길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스스도 가난한자의 위치를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
4. 이러한 사랑은 전세계로 퍼지고
한 평생을 한국의 가난한이들을 위해서 일하던 그는 한국에서 그의 자선사업을 체계화
시켜 놓았다. 이것은 청년 알로이시오가 30여년에 걸쳐 피와땀의 노력으로 이룩해 낸
결실이었다. 그가 이룩한 사업은 서울과 부산에 가난한사람들을 위한 [무료병원]을 운영하며,결핵환자들을 위해서 [구호소]를 운영하고,[소년의집]과 [소녀의집]을 지어 불쌍한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보금자리를 제공해주고 [초/중/고등학교]를 세워서 교육을 시켜 사회에 진출 시키고, 버려지는 갓난아기들을 위해서 [영아원]을 만들었으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모성원]을 세웠으며, 행려자들을 위한 시설인 [갱생원]을 서울시로 부터 인수받아 병들어 길거리로 쫓겨난 노인들을 돕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모든 사업은 그의 제자들이며, 동시에 동료인 [마리아수녀회]와 [그리스도회]를 통하여 운영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로이시오 신부의 자선 프로그램은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어,한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필리핀, 멕시코,과테말라, 과달라하라와 같은가난한이들이 아직도 많은 5개국 10개의 도시까지 확대 되어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소년의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90년2월1일 알로이시오 신부가 필리핀에 진출하여<소년의집>을 짓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일한지 5년이 되던 해 필리핀 <하이메 신 추기경>의 추천으로 <몬시뇰>에 추대 되었다.이 해는 알로이시오 신부가 60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몬시놀>이란 천주교회의 고위성직자를 일컫는 말로서 통상 사제와 주교사이의 위치를 말한다. 평소에 늘 겸손한 사제였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이런 직위를 받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 하였다. 하지만 그가 몬시뇰 서임식 강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봉사하도록 소명을 받은 어린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심사숙고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몬시뇰>서임식과 착복식은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장인 <하이메 신 추기경>이 주례하는 축하미사중에 필리핀 주재 교황대사 <브루노 토르피리글리아니 대주교>가 집전하였다. 이 미사에는 시부 추기경및 주교님, 사제단 40여명과 3,200명의 학생들과 국내외 축하객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소년의집 자선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세계여러나라에 까지 확대할 당시 알로이시오
신부는 ALS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 의사로부터 길어야 3년이상은 살지 못하리라는
의학적 선고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가난한이들에 대한 사랑은 병이 깊어가도 식을 줄
몰랐다. ALS병의 특성상 모든 신체가 조금씩 조금씩 마비되어 결국에는 겨우 어렵게
말만 할 수있을때까지 그는 필리핀은 물론 멕시코까지 사업을 확대하여 그곳의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소년의집]을 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생명이 약속된 3년의 시간이 다 차올무렵 알로이시오 신부는 자신이 할수있는 일이, 어렵게 입을 움직여 '말'하는 것 밖에 할수 없게 되었을때 그는 평생자신의 자선사업을
도와준 세상의 모든 은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마리아수녀회를 통하여 세상의 가난한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그리고 후원을 보내달라는 유언이 담긴 비디오 테입과 그의 자서전인 <조용히 다가오는 나의 죽음>을 육성녹음으로 탈고하였으며, 임종의 순간에도 '천국에 가서도 아이들을 돕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성체앞에서 기도 드린후 1992년 3월 16일 그의 사랑하는 아이들 곁을 떠났다.
[소년의집]은 세상의 많은 이름모를 후원자들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후원금을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기부하고 알로이시오신부는 [마리아수녀회]의 수녀들과 함께 세상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며 만들어낸 진정한 세상사람들의 사랑의 집합소이다. 이곳에 모인 사랑은 세상의 모든 국가와 인종과 사상을 초월한 것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의 생명을 다해 이 일을 이루어 내었다.
오늘날 알로이시오 신부의 위대한 사랑의 정신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세운 [마리아 수녀회]와 [그리스도회] 회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1. 그리스도회
(1) 역사
그리스도 수도회는 1981년 가난한 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미국인 사제 소알로이시오 슈왈츠 몬시뇰(사진)에 의해 서울에서 창설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깊은 의미에서의 창설자는 가난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외로움과 소외받음이 그리스도회를 창설하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회와 가난한 이들은 밀접한관계가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발생하는 부랑인들을 수용보호하는 서울시립 갱생원을 서울시의 의뢰로 위탁운영하면서 저희 그리스도회가 창설되었습니다.
현재는 지원자를 포함한 18명의 회원이 가난한 이들과 삶을 공유하며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영성
1) 어린이 영성
어린이의 천진난만함 속에는 순수함과 소박함과 하느님나라가 담겨져 있기에 어린이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은 이웃에게 기쁨과 미소와 평화를 안겨 줍니다. 어린이는 자신들의 열정, 사랑, 감수성을 저장해 두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쓰면서 삶의 환희, 축복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어린이의 삶을 수도회는 지향하고 있습니다.
2) 순간영성
영원한 생명은 끝없는 생명이 아니라 순간의 생명입니다. 과거, 미래가 없어져 버리는 시간. 과거, 미래가 만들어 내는 온갖 슬픔, 고통, 판단, 시기, 질투가 없어져 버리는 시간.
이 시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간입니다. 순간을 주시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회 수사들은 순간을 주시하고 순간의 공기(과거와 미래의 공기가 아닌)를 들이 마시고 순간 속에서 호흡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에고(ego)의 죽음영성 (십자가 영성)
어린이 영성, 순간 영성을 지닌 이는 과거와 미래를 죽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아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아의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곧 진정으로 사는 것임을 알기에 말입니다.
(3) 사도직활동
1) 부랑인 시설 운영 (은평의 마을)
원래의 명칭은 서울 시립 갱생원이었으나 갱생원에 대한 어감이 좋지 않아 은혜롭고 평화로운 마을이라는 의미로 은평의 마을이라고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은평의 마을에서 저희 그리스도 수사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버림받은 2,100여명의 다양한 부류(노약자, 정신질환자, 지체장애자, 정박, 결핵환자, 알콜중독자)의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며 살아 갑니다.
2) 자활사업 및 양로원 운영
은평의 마을 퇴소자 대부분이 재입소 등 사회적응을 못하는 현실을 감안해 그들에게 실질적인 삶의 자립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경기도 파주에 농장, 화훼, 양봉 등을 할 수 있는 자활센터와 은평의 마을에 계시는 노약자 분들과 외부의 노약자 분들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삶을 편안하게 보내드리고자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는 양로원을 운영할 계획이며 현재 진행중입니다.
2. 마리아수녀회
(1) 수녀회 소개
창립동기와 배경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복음 4장 18절)의 말씀에 의하여...
창설자 알로이시오 신부는 1957년 12월 8일 전쟁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있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찾았다.
당시 한국은 절망, 폐허, 그 자체였다. 특별히 부산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은 의식주는 물론, 제대로 먹지못해 누렇게 뜬 얼굴로 병이들면 죽기만을 기다리는 처참한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영양실조로 다리가 비비꼬인 아이들, 수백개의 판자집이 마치 성냥갑 처럼 모여 있었고 그 판자집마저 없어 흙위에 아기를 낳은 산모, 사람들이 달려갔지만 이미 아기는 얼어 죽어 있던 모습, 학교를 다녀야 할 어린이들이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며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 거지나 양아치들이 우굴거리는 다리 밑...,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기쁜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젊은 미국인 사제가 준비를 시작하였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가난의 참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틈만나면 가정방문을 하고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던 중 불우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봉헌하고 일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수도회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이러한 구상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소명을 띤 [마리아수녀회]가 창립되었다.
가난한 이들의 영원한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
(2) 마리아수녀회 심신
마리아수녀회의 신심: 마리아수녀회 영적생활의 기준이 되는 세 가지 신심
1. 성체성사 신심
성체성사는 으뜸가는 것이며 제일 중요한 것이다. 성체성사안에 믿고 자주 영성체 하고 기회 있을 때 마다
성체조배 하기를 좋아하며 생활화 한다.
2. 성모 마리아 신심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우리는 열심히 마리아를 사랑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마리아와 함께 매일 묵주기도를 드려야 한다.
3. 성인 신심
성인들에 대하여 자주 묵상하고 성인들에 관한 책읽기를 좋아하고 묵상해야 한다.
참된 성인 신심은 무엇보다 먼저 성인들을 사랑하고 모방하고 본받으려고 해야 한다.모든 성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듯이 우리가 성인들을 본받도록 노력하며 성인처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인 들은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며 그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참된 성인 신심이다.
마리아수녀회의 봉사정신
마리아수녀회의 봉사정신은 기도와 그리스도다운 봉사에 근거한다.
기도 해야 만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자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의욕이 생긴다.기도는 영적생활의 근본이며 영혼의 산소이다. 등산가는 산소가 꼭 필요하다. 높은 성덕의 산, 완덕의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영신적인 산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산소를 받아 마시므로 더욱 가볍게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 할 수 있으며 완덕의 산에 오를 수 있다. 그리스도답게 봉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아 산에서 3시간 동안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것처럼 마리아수녀회 수도자는 매일 3시간씩 기도하고 있다.
마리아수녀회의 봉사는 가난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목숨을 바치러 왔다." 고 하신 것 처럼 마리아 수녀회 봉사는 그리스도의이름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그리스도 답게 복음적으로 봉사하는 데 근본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 다운 봉사의 3가지 특징]
1. 희생적인 봉사이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안에 상처를 입으셨다"고 하였다. 우리 수도회의 목적은 불쌍한 아이들과 환자, 가난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는 것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희생하고 고통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 처럼 봉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욕심, 물질, 육신적으로 자신을 죽여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처럼 봉사하는 이들의 일상 생활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엔 절망을 밀어내는 기쁨과 희망의 행복이 함께한다.
2. 겸손한 봉사이다.
그리스도 다운 봉사는 희생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작은 일로도 우월감 가지고 자신을 높이려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사하기 위해서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겸손하게 도와 주어야 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칭찬이나 영광을 바라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봉사했다.
기계적으로 위선적으로 하지 않고 불쌍한 마음으로 따듯하게 도와 주었다.
마리아수녀회 봉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조용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처럼 제일 매력없고 말썽부리고 약한 아이에게 먼저 봉사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을 모범으로 삼아 봉사하고자 한다.
마테오 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때 의인은 예수님께 칭찬을 듣고" 주여 언제 내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질문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겸손한 마음으로 숨어서 봉사했기 때문이다. 마리아수녀회 봉사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봉사하는 데 근본을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자연의 신비안에서 숨으셔서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고 계신 것 처럼...
3. 그리스도 다운 봉사의 3번째 특징은 영신 적인 봉사이다.
마리아수녀회 봉사의 가장 핵심은 영신 적인봉사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어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 것처럼 마리아 수녀회 봉사 역시 이 세상에 근거하지 않고 영원한 세상, 영원한 생명, 행복에 목적을 두고 있다.
"성심께서 나에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다."는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의.식.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을 알게 하고 더 거룩하게 완전하게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일 또한 마리아수녀회 봉사의 목적이다.
첫댓글 Moon 회원님께서 신부님의 발췌된 저서 일부를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이 글을 적으시는 동안 큰 은혜를 받지 않으셨을까 나름 생각해 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께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울 카페에서 최연소 학생인데 참 기특하지요?
그의 양친은 영리한 둘째 아들을 매릴렌드 주 케이톤스빌 소신학교에 보내 사제가 되기 위한 먼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