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는가?
여성 폭력은 그 사회의 도덕관과 연결되어 있는데,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에 대한 범죄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 ‘배신자’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폭력당하는 아내에게 피해 사실은 나의 피해, 나의 고통 이전에 집안의 비밀이다. 가해 남편이 아내에게 비밀 유지를 강요하는 경우도 많지만 가족/남편의 명예가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피해 사실을 숨긴다. --- p.176
“순경 말이, ‘정 그러면 한 번 더 맞고 오세요. … 눈에서 피가 철철 나면 오세요.’”
경찰처럼 주로 남성들로 구성되는 공적 기관들은 ‘집안일’(아내 폭력)에 ‘간섭’(처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논리인 ‘사생활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법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얘기는 곧 ‘남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다’, ‘남편의 폭력 행위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
폭력 발생시 경찰이 가정에 들어오는 것을 사생활 ‘침해’라고 보는 것은 가정이 한 남성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정에 남성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곧 남성들 간의 충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 p.234,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