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핏파이어 마지막 글로써 두 고수님의 Mk. XIV 시리즈 작품들을 고증해보록 하겠습니다.
1944년 초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할 무렵,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승리 이후에 독일을 향해서 거칠게 밀어붙히고 있었고, 서구 연합군쪽은 조만간에 프랑스 해안 모처에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1943년부터 이미 엄청난 숫자의 영국과 미국의 중폭격기들이 P-51 무스탕과 같은 더 이상 루프트바페의 전설적인 전투기들이 상대하기에 벅찬 무서운 신형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독일 본토에 폭탄을 쏟아놓고 있었습니다.
(1990년 개봉된 "멤피스 벨"은 2차대전 공군 전쟁 영화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작으로 남았습니다. 미국이 참전한 이후 1943년 B-17 폭격기
편대의 실감나는 독일 공습 작전을 보여준 이 영화처럼 엄청난 숫자의
연합군 폭격기들이 격추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간 폭격을 위한 출격을
감행하였습니다.)
(1943년 멤피스 벨 B-17 폭격기의 실재 조종사 및 승무원들)
(날으는 요새 B-17 중폭격기)
1944년 엄청난 스피드가 가능한 스핏파이어 Mk. XIV형이 있었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짧은 항속 거리로 독일 공습에 나서는 폭격기 편대들을 호위하는 임무는 뒤늦게 전쟁에 투입된 P-51 무스탕의 몫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은 영불해 근처에서만 활동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본토에서 스핏파이어가 해야 할 임무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V-1 미사일을 막아내는 것이었는데 약 300기의 V-1을 공중에서 격추시키는 활약을 하였습니다. 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이 가까와오자 부지런히 프랑스 해안 지역으로 날아가서 고공 정찰 임무로 사전에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자! 스핏파이어 Mk. XIV 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스핏파이어 기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갖게 되었던 후기 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항속 거리가 짧다는 이유로 정작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 약 1년 동안 서구 연합군이 서부 전선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전투를 벌이면서 베를린으로 진격해나갈 때 그 주인공의 자리를 P-51 무스탕에게 양보해야 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영국을 루프트바페의 강력한 공격에서 지켜내고 북아프리카와 몰타 공방전에서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 영국 공군의 영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Mk.XIV형의 캐노피 모양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 버전의 캐노피보다 훨씬 조종사의 경계 시야를 넓게 해준 소위 "물방울"(Teadrop) 캐노피는 조종사 입장에서 "매우 고마운" 개선이었습니다. (이 물방울 캐노피는 Mk.XIV 전량 적용된 것은 아닙니다.) Bf 109 관련 글을 쓸 때에도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들이 이구동성으로 요구했던 것이 시야 범위를 더욱 넓게 가질 수 있는 캐노피의 개선이었던 것을 보면 전투 중에 조종사들의 두눈에 의지하며 적기를 발견하고 사격해야 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스핏파이어 초기 캐노피 모양은 Bf 109의 그것처럼 조종사의
경계 시야가 넓지 못해서 불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소속 편대에 관한 고증을 하려고 했는데 의외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NI"라는 편대 코드는 1945년말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 451 편대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대가 "NI"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1945년 말로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Mk. XIVe의 모습은 이미 2차대전이 끝난 싯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451 편대는 1946년에 해체해버리는데 이유는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이편대가 독일에 주둔하게 되자 본국에서 지원자가 격감해버린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 451편대 스핏파이어 Mk. XIVe)
Mk.XIVe에서 끝에 "e"는 이 전투기의 무장 타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역대 스핏파이어 무장 타입을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같은 Mk.I이라도 a타입이 있고, b타입이 있습니다.
무장
a 타입
b 타입
c 타입-1
c 타입-2
d 타입
e 타입
브라우닝 7.7mm기관총
8정
4
1
2
비무장(정찰용)
히스파노 20mm 기관포
2
4
4
2
브라우닝 12.7mm 기관총
4
Mk.IXV도 F타입 주익(즉, 원래 오리지날 타원형 주익)으로 생산되었습니다. 다만 Mk.XIVe는 저고도 및 지상 공격 전용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저고도 속도 향상 효과가 있는 절단익(F.L)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도사님 작품도 고증 들어갑니다.
(도사님 작품입니다.)
(아카데미 1/72 스핏파이어 Mk.XIVc)
c타입 2형 무장으로 F형 주익이 적용된 (이제는 위에 글을 보시면 이게 무슨 얘기인지 다 이해가 갈 겁니다.) 이번 작품은 "DW" 코드를 보면 RAF 610 편대 소속입니다. 지상 공격용으로 로켓탄을 주익 아래에 탑재한 상태입니다.
(도사님 작품의 바로 그 610편대 기체 번호 RB159 전투기의 사진입니다.)
610 편대는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런던 방어를 책임지는 비긴 힐 공군기지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영국 상공에서 루프트바페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1941년 이편대는 탱미어 공군기지에 영국 최고의 격추 에이스들 중에 한사람인 더글라스 베이더(최종 20대 격추 기록)가 지휘하는 3개 편대중에 하나로 편성되게 됩니다. (베이더는 그해 8월에 프랑스 지역에서 아군 전투기의 오발로 격추되어 1945년 4월 미군에게 해방될 때까지 전쟁 포로 신세가 되버립니다.)
(영국 공군의 전설적인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는 루프트바페 격추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 장군과의 진정한 에이스만이 가질 수 있는 우정이 전후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
더글러스 베이더와 아돌프 갈란트의 운명적인 만남
아돌프 갈란트(1912년~1996년)는 루프트바페에 장군까지 진급한 격추 에이스(104대 격추)입니다. 그는 폴란드 침공 작전부터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나서 제3제국 멸망까지 2차대전 전기간에 걸쳐서 활약하였고 에이스로써의 명성뿐만 아니라 루프트바페의 공중전 전술 교범을 저술한 공군 전략 전문가로써 독일 공군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영국 공군에는 불운한 영웅 더글라스 베이더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공군에서 불의의 비행 사고로 두다리를 잃은 베이더는 쫓겨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공군에 지원하여 두다리가 없는 장애인이지만 뛰어난 조종 기술로 정상인 조종사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는 교전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RAF 조종사로써 22대 격추 기록을 가졌습니다. (그의 기록은 불과 1년 밖에 안되는 기간에 수립되었습니다.)
(1941년 4월 1차대전 격추 에이스인 동시에 2차대전에도 참전한
오스테르켐프의 생일 파티에 초대된 갈란트가 참석자들 앞에서
자신의 공중전 기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미 루프트바페 조종사들 사이에 전설적인 RAF의 격추 에이스 베이더의 명성은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1년 8월 어느 날 불운하게 프랑스 상공에서 임무 수행 중에 아군 전투기의 오발로 베이더의 스핏파이어 Mk. Va는 추락하게 됩니다.
(RAF의 전설적인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 중령의 Mk.Va.
1941년 8월 그가 프랑스 지역에 추락하여 전쟁포로가 되던
시점에 조종하던 기체입니다.)
여기서 갈란트는 포로가 된지 얼마 안된 베이더를 만나게 되었고 두사람은 비록 적이지만 서로에게 호의를 느끼게 됩니다. 베이더가 추락으로 인해서 부서진 의족을 영국제로 다시 받고 싶으니 영국 공군에게 요청해서 하늘에서 투하하게 해달라고 베이더에게 요청했고 베이더는 그 부탁을 들어줍니다. 영국 공군은 베이더를 위한 의족을 독일 공군기지 상공에서 투하한 후에 그 공군기지 활주로를 폭격하고 돌아갑니다.
그는 장애인이면서도 포로가 된 후에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여 결국 외딴 성으로 이동하여 수감되게 됩니다. 사실 서슬이 퍼런 나치 독일의 시각에서 봤을 때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는 베이더는 즉결 처분을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의 목숨을 보존함은 물론 비록 수감 상태지만 안락한 숙식을 할 수 있는 성으로 옮기게 해준 것은 종전때까지 루프트바페에서 수많은 조종사들에게 존경을 받던 갈란트 장군의 호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41년 전선을 방문한 루프트바페 총사령관 괴링을 맞이하는
갈란트. 그는 괴링이라도 군인으로써 옳지 못한 명령을 내리면
당당하게 반대하였던 진정한 군인이었습니다.)
한번은 베이더가 갈란트에게 자신이 맞서 싸웠던 Bf 109를 한번만 타 볼 수 없겠냐고 농담식으로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갈란트는 그 대답으로 "자네에게 조종간을 쥐어주면 곧바로 영국으로 달아나버릴 것이고, 다시 영국 전투기를 타고 날아와서 우리를 공격하겠지. 그러면 나는 자네를 격추시키기 위해서 출격해야 한단 말이세."하면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1945년 종전이 된 후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미국군에 의해서 구출된 베이더는 영국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돌프 갈란트는 물론 귄터 랄과 울리히 루델과 같은 기라성 같은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들이 초라한 전쟁 포로 신분으로 영국으로 끌려오게 되는데 자유의 몸이 된 베이더가 수용소를 방문하여 전쟁 중에 오른쪽 다리를 잃은 슈투카 최고의 에이스 루델에게 의족을 선물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란트는 전쟁 당시 독일군 전체에서 최연소 장군이었을 만큼 히틀러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위치가 전쟁이 끝났을 때 전범 혐의를 받은 상황을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베이더는 갈란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런 그의 노력의 결과로 갈란트는 전범 혐의를 벗고 1947년에 석방되었습니다.
(울리히 루델(1916년~1982년) 슈투카 에이스로 전쟁 기간 중에
무려 514대의 연합군 탱크들이 그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저의 이전 글 중에서 슈투카 관련 글을 보시면 그의 기적과 같은
무용담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갈란트는 전쟁 후에 아르헨티나 공군 고문으로 위촉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고, 베이더는 자신의 고향인 도체스터에서 조용한 생활을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1982년 말년에 더글라스 베이더 예비역 중령. 그는 무선조종 스핏파이이 모형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시 스핏파이어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그는 1996년 알츠
하이머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수많은 영국 국민은 그의 전공을 기리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스핏파이어의 영국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 버전인 씨파이어(Seafire)를 스핏파이어 소개 글 마지막회에서 해보려고 했는데 너무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스핏파이어 이야기는 여기서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냉전 시대 게시판이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서 다음 글은 그곳에서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재미있어요. 제 스핏파이어는 선물 시리즈 1호이고 첫 위장 무늬 도색이어서 어색함이 극에 달합니다. 하하. 스핏파이어 멋지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했었는데 만들면서 매력을 많이 느낀 비행기죠. 1/48 프롭기 킷 다 처분했지만 타미야 스핏파이어는 하나 남겼어요. 다음에 다시 한 번 해보려고요. 재밌는 글 늘 감사합니다!
첫댓글 참혹한 전쟁중 적군과의 관계에서도 우정이 생기기도 하는 군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항상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재미있어요. 제 스핏파이어는 선물 시리즈 1호이고 첫 위장 무늬 도색이어서 어색함이 극에 달합니다. 하하. 스핏파이어 멋지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했었는데 만들면서 매력을 많이 느낀 비행기죠. 1/48 프롭기 킷 다 처분했지만 타미야 스핏파이어는 하나 남겼어요. 다음에 다시 한 번 해보려고요. 재밌는 글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