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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강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수월관음도- 일본 사가현립박물관 소장> (사진 : 다음, 금강카페 상운님)
1. 고려 불화, 뉴욕타임즈 "모나리자에 버금가다!"
1991년 10월,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인 미국 뉴욕 소더비사 경매에
고려 불화 한 점이 출품되었다.
경매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달아올랐고,
예상을 깨고 평가액의 열 배에 낙찰되었다.
고려불화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순간이었다.
"한국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도
이것이 아주 특별한 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반응이 아주 좋구요."
- 이소연 학예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20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또 한 점의 고려 불화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뉴욕타임즈는 이 작품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모나리자에 버금가다!"
- 2003. 10. 31. 뉴욕타임즈
2. 세계 최대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의 일시 귀환!~
2009년 4월 27일,
인천공항엔 진기한 작품 한 점이 들어왔다.
이중 삼중의 보관함에 담아 특수운송차에 신속히 이동했다.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미소.
그것은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 고국에 돌아온
세계 최대의 고려 불화 '수월관음보살도'였다.
"역사에서 그림 유물은 그 시대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 시대 그림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고려 불화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려 불화!
바로 이 고려 불화가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고려 시대사를 충분히 메워주고 있습니다.
고려 불화의 600년만의 화려한 등장.
그러나 거기엔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점의 고려 수월관음도를 통해서
아름다운 고려 불화의 세계, 고려인들의 삶과 꿈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009년 4월 21일.
일본 규슈의 사가 현립박물관에서는 조심스런 작업이 시작되었다.
겹겹히 포장된 채 수장고 깊숙히 보관되어 있던
최대 크기의 고려 수월관음도를 공개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오랜 시간 교섭 끝에
어렵게 한국 전시가 성사되어 작품의 상태를 사전 점검하는 날이다.
세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의 엄청난 크기였다.
소장측인 일본의 사가 현립박물관도 일년에 30일만 전시하는 특별한 작품이다.
양측 관계자의 긴장된 모습속에 차분히 점검이 시작되었다.
신용철 학예연구실장, 통도사 성보박물관.
다케시타 연구원, 사가 현립박물관
워낙 작품이 커서 한 번 펼치는 데도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
'수월관음도'는
관세음보살이 달밤에 바다위에 떠있는 보타락산에 앉아
진리를 구하는 선재동자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경전을 형상화 한 것이다.
그래서 통상 '수월관음도'라 부른다.
높이 4미터 20센치미터, 너비 2미터 55센치미터의 대작.
세계 최대 크기의 고려 수월관음도.
여느 불화가 1~2미터인 것에 비하면 압도적인 크기다.
1954년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 수월관음도는
1971년부터 3년간 대대적으로 수리, 복원한 일본의 중요 지정 문화재다.
안료의 벗겨진 부분과 균열 부분 등을 이동전에 양측이 사전에 확인해야
전시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손상의 책임 소재를 가릴 수 있다.
"저 부분이 우선 갈라져 있지요?"
"균열 부분인가요?"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보험 가입이 말해주듯 상태 점검은 밑에서 위로 샅샅이 훑으며 진행한다.
"전체적으로 상태는 좋은 상태입니다.
탈락이 많이 된 상태지만 전체적으로 좋은 상태입니다."
- 신용철 학예연구실장.
이동전에 점검하고,
전시장에 도착해서 또 한 번,
그리고 전시가 끝나고 원 소장처에 도착했을 때 또 한 번 점검한다.
불화의 백미로 꼽히는 고려 불화,
그 중에서도 이 수월관음도는 명성은 이미 세계적이다.
지난 2003년 샌스란시스코 아시아 예술 박물관 개관 특별전인 '고려왕조전'에서
이 수월관음도는 미국인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당시 이 수월관음도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압도적인 규모, 화려하고 정교한 색채, 그리고 빼어난 완성도.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미국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수월관음도를 소개했다.
상상을 초월한 크기 때문에
이동용 특별 보관함과 별도의 전시 공간 등을 새로 만들어야 했고
서구인들이 제일 자랑하는 모나리자에 뒤지지 않는다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높이 20피트, 너비 10피트의 나무박스를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모나리자에 버금가다!'
"모나리자를 가지고 있는 그 나라까지 주어도 이 작품하고 바꾸지 않을 것 같아요.
모나리자하고 비교가 안돼요.
왜냐면 모나리자는
자체가 지니고 있는 긴장감이나
여인의 자태나 여러 가지 시대적인 것이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예술이 종교이고, 종교가 예술이 되는 접점을 구현했기 때문에
인간이 보면 스스로가 무장 해제되고..."
- 김호석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이 수월관음도의 진가는 단순히 크기 때문만이 아니다.
관음보살의 이마에 자리한 백호는
2.5센치미터의 원 안에 0.2미리미터 남짓의 세밀한 나선이 가즈란히 이어져 있다.
눈은 마치 눈화장하듯 색조를 넣었고
눈으론 보이지 않는 속눈썹과 얼굴의 잔털까지 정밀하게 그렸다.
"큰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작은 그림이 지니고 있는 섬세함...
그리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대작이 지니고 있는 대범함이 같이 숨 쉬고 있어서,
모순되는 대립 관계를 서로 껴안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는
고려 불화의 전통적인 화법은 지금도 생명력이 길다."
- 김호석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색상은 단지 다섯가지 원색만으로 화려하게 표현을 했다.
붉은색, 녹색, 흰색, 감청색과 어우러진 금색이 조화돼
화려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세음보살을 돋보이게 수묵으로 그려진 배경 산수는
고려 시대 산수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다.
수월관음도의 겹쳐 입은 겉옷과 속옷에 그려진 문양들은
고려인들의 세련된 미감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 그림에도 일본 그림에도 없는 고려 불화의 독특한 특색입니다.
고려 시대에만 그릴 수 있었던 풍부한 그림이라는 것이
아시아 사람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고
또한 일본 사람도 높은 평가를 한 큰 이유가 아닐까요?
저렇게 섬세한 모양을 그리는 기술, 당시 동아시아에선,
아니 세계에서 저런 기술을 가진 나라는 고려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 기쿠다케 교수, 고려 불화 전문가
2009년 4월 27일 인천 국제 공항.
복잡하고 오랜 절차를 마친 수월관음도가
사가 현립박물관의 감독관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왔다.
공항에서 통도사까진 특수 운송차로 운송한다.
진동을 없애고, 항균, 항원 기능과 위치 추적 장치까지 갖춘 예술품 운반 특수 차량이다.
호송 차량과 함께 신속하게 전시장으로 이동했다.
3일 동안 작품을 안정 시킨 후,
지난 4월 30일 통도사에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의 특별 전시회가 개막되었다.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이미 수월관음도는 그 장엄함으로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했다.
고려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최대 규모의 수월관음도는
오늘도 중생들을 한없이 자비로운 미소로 달래고 있다.
3. 수월관음도는 수리 과정에서 파손된 부분이 잘려나갔다!~
"정말 엄청나군요.
이 작품은 고려 최대의 불화인 수월관음도입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감상하자니 숨이 막혀 올 정도로 장중하고도 아름답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타의 고려 불화의 서너배가 넘는 크기인데요,
과연 오늘날에도 그리기 힘든 이런 대작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일본의 역사가 숨쉬는 <천옥박고관>엔
한중일의 빼어난 예술품들이 연중일 전시된다.
명화들이 전시된 회화관에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 있다.
고려 시대에 그려진 또 다른 수월관음도가 그것이다.
고려 불화 중 보존 상태도 대단히 우수하고 작품성도 뛰어난 작품이다.
달빛을 배경으로 물가의 바위산에 앉아 선재동자를 바라보는 이 수월관음도는
통도사에 있는 수월관음도와 크기만 다를 뿐 비슷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작품엔 화가와 제작연대가 있다.
'지치3년' 즉, 서기 1323년에 서구방이라는 화가가 그렸다.
수월관음도 - 서구방 畵
"고려 충숙왕 8년 1323년이라는 제작연호가 기재되어 있어
당시의 기준작이 되고 있습니다."
- 히로카와 마모루 학예과장
머리에 쓴 보관부터 복식, 주변 경관까지 겹쳐놓은 듯 닮아있다.
그렇다면 통도사에 있는 수월관음도 역시 이즈음에 그렸을까?
그런데 최대의 불화 수월관음도를 자세히 보니 흐릿한 글씨의 흔적이 있다.
특수 형광 백선 촬영을 해봤다.
놀랍게도 이 그림을 기증한 일본인 기증자에 대한 기록이었다.
"카가미 신사에 관음상 그림 한 점이 있는데, 양각선사가 안치 봉안하였다."
- 명덕 2년(1391년) 양현 삼가 기록함
일본 가라쓰 카가미 신사.
왜 고려 불화가 카가미 신사에 안치되었을까?
최대 크기의 수월관음도는
원래 카가미 신사에 신궁황후를 모신 제 1궁에 안치되어 있었다.
카가미 신사측은 보관상의 어려움 때문에
사가 현립 박물관측에 위탁, 보관했던 것이다.
"왕비인지 누군가의 순산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이곳에 봉납되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관음도에 관해서는 그다지 음..."
- 카가미신사 관주
신사의 관주 역시 이 수월관음도가 왜 여기로 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수월관음도에 대한 기록이
타다다카 기념관(일본 카토리)에 있다고 했다.
타다다카(1745~1824)는
1800년대의 김정호처럼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본 지도를 제작한 인물이다.
그가 각지를 돌며 기록한 <측량일기> 1812년편에
카가미 신사에서 본 수월관음도에 대한 기록이 있다.
1391년 카가미 신사의 승려 양각이 수월관음도를 기증했다는 내용과
지금은 수월관음도에서 지워진 수월관음도 제작기가 있었다.
그런데 기록엔 당시 수월관음도가
높이 1장 8척(540cm)에 너비 9척(270cm)이었다고 되어있다.
1척은 30cm이다.
그렇다면 수월관음도의 원래 크기는
지금보다 폭은 15cm, 높이는 1미터가 더 긴,
폭 270cm, 높이는 520cm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크기와 빼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관음보살 머리위 여백이 없어 답답했던 아쉬움이 풀린다.
제작후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위 1m의 공간이 잘려 나간 것이다.
폭은 어디가 줄어든 것일까?
그림을 살펴보면 수월관음도의 달에 해답이 있다.
남은 달 곡선을 따라 원래 곡선을 복원해보면
큰달의 곡선은 작은달의 곡선과 겹치는 볼품없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통도사에 전시된 수월관음도와 달리 다른 수월관음도는
큰달이 작은달을 안에 품고 완전한 형태로 관음보살의 머리위로 그려졌다.
그런데 다른 그림과는 달리 선제동자와 관음보살의 사이가 너무 가깝고
두사람 사이가 완전히 지워진 흔적이 있다.
<측량일기>의 기록만큼 이 그림의 폭을 늘려보면 어떨까?
달이 제 모습을 찾고, 머리위 여백도 넉넉해진다.
수리 과정에서 파손된 부분을 잘라냈음을 알 수 있다.
<측량일기>엔 정확한 제작 연대도 기록되어 있다.
'지대 3년(1310년) 5월에 불화 완성'
그런데 놀라운 기록이 등장한다.
'원주 왕숙비'
"그 제작한 발원자를 원주라 합니다.
원주 왕숙비라는 말은 발원자가 왕비 숙비라는 뜻입니다.
- 장동익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과
1310년 제작된 후,
1391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최대 크기의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는
고려 왕비의 발원으로 그렸다!
4. 숙비 김씨는 누구인가?
그녀는 왜 수월관음도를 발원했는가?
"예!~숙비 김씨! 왕비가 발원을 한 그림이었군요!~
고려 불화에는 유독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이 많이 나옵니다.
지금 보시는 아미타불은
중생들을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구요,
그리고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은
이런 아미타불을 도와서 중생들의 깨달음을 돕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이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은
이름만 불러도 소원이 이루어진다 해서
흔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고려 불화에는 유독 아미타불과 수월관음도가 많은 겁니다.
왕비의 자리에 있던 숙비가 관세음보살을 발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려사>는
수월관음도를 발원한 숙비를
대단한 미모의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충선왕이 숙비로 봉하니 비가 밤낮으로 아양을 다 부리니 왕이 혹해..."
- 고려사 89권 후비2
과연 숙비 김씨는 누구일까?
박달재 충북 제천 김취려 장군 동산.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숙비 김씨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명장 김취려 장군의 증손녀다.
그녀는 고려 후기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런데 온양 김씨의 족보엔 그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나온다.
김취려 장군의 증손녀인 숙비는 3남 5녀중 일곱째였다.
다른 딸들은 남편의 이름을 족보에 올리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기록이 되었는데
그녀는 '숙창원비'로 기록되어 있다.
숙창원비!
왜 '숙비'가 아니고, '숙창원비'로 기록되어 있을까?
숙비는 누구며,
숙창원비는 누구인가?
그런데 <고려사>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숙창원비 김씨는 일찍이 최문에게 시집가 젊어 과부가 되었다..."
- 고려사 89권 후비2
김씨는
왕비가 되기 전에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다.
남편이 죽은 후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기록은 계속 된다.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을 위해 김씨를 들였고
충렬왕은 김씨를 숙창원비에 봉했다...."
- 고려사 권 89 후비2
아버지를 위해 추천한 숙비를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자신의 왕비로 삼은 것이다.
"몽고인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후처나 사촌, 형수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후처의 경우에는
아버지 사후에 생모를 제외한
처첩들을 자기의 처첩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이민족들도 점차 답습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지배층도 이를 본 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 장동익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과
1311년.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던 국제 국가 고려의 왕비였던 숙비.
그녀가 최대 크기의 수월관음도를 발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궐 잔치에서 벌어졌던
한 일화에서 첫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충선왕에겐 숙비외에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순비 허씨는 숙비 김씨의 최대 연적이었다.
비슷한 연배에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두 왕비는
잔치 도중 무려 다섯번이나 옷을 갈아입으며 신경전을 벌인다.
이런 복잡한 왕비들간의 갈등때문에
숙비 김씨는 왕실내 자신의 위상 강화를 위해
최대 크기의 수월관음도를 발원했을 가능성을 보인다.
왕비나 왕비의 모후가 권력 강화를 불사로 일으킨 경우는 더러 있다.
교토 박물관에 있는 <대보적경 변상도(1006년)>.
고려 시대 불교 미술의 뛰어난 예술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특급 문화 유산으로,
고려 변상도 중 연배가 가장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상도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발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비도 천추태후처럼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수월관음도를 발원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측량일기> 화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반종사 김우를 중심으로 문한서직대조 이계, 임순, 송연 등이
그리고 원외중랑장 최승이 책임을 맡아 전 작업을 감독하였다."
그렇다면 수월관음도의 제작은
숙비가 단순히 개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제작했다기 보다는,
고려의 중요한 행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숙비 김씨가 주도하여 행한 불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시대의 내반종사가 더 이상 어떻게 활동했다는 건 없지만
조선 시대로 미루어 볼 때는 아마도 왕실에서 필요한 공예품이라든가,
이런 것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 장경희 교수,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1310년은 숙비의 전남편인 충렬왕의 3년상이 든 의미 있는 해였다.
"지대 3년 5월(1310년)에 그림이 완성되다."
"1310년 5월, 6월, 7월은
1310년의 7월 충렬왕의 3주기를 위해 여러 일이 확정된 시기였습니다.
그 때 수월관음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제작에는 1년 이상 걸렸을 것이며,
상식적으로 충렬왕의 1주기 때 준비를 시작하여
특수품을 만들어 3주기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데 센노스케 교수, 큐슈대학 미학 미술사
9월은 제사가 있는 달이었다.
충선왕 친모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사위국(부마국)으로
원나라 황실의 입김은 절대적이었다.
충선왕 친모를 위한 대형 불화의 발원은
숙비에게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여러 가지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당시 사회가 불교 사회였기 때문에
당신들의 돈독한 신앙심의 결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장동익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과
고려 최대 크기 수월관음도에는
숙비 김씨의 기구한 운명과 원 간섭하에 혼란스런 역사가 담겨 있다.
5. 세계 최고의 기술의 정수로 그려낸 수월관음도!~
한 장의 통비단, 투명 너울, 금박 문양!~
"세 번의 결혼, 그리고 부자에 의해 왕비에 봉해진 숙비 김씨!
그녀는 고려 불화 사상, 전무후무한 크고 아름다운 수월관음도를 발원하는데요,
이 수월관음도가 제작되던 1310년 당시 고려는
원의 간섭에 의해서 자주권이 억눌렸던 고통스런 시대였습니다.
어쩌면 이 수월관음도의 불사는 개인적인 권력 강화가 아닌
왕실의 고난을 이겨내고자 하는 고려인들의 모든 염원이 담긴 불화가 아니었을까요?"
최대 크기의 고려 수월관음도가 특별 전시 중인
경남 양산 통도사엔 조선 시대의 귀중한 불화가 있다.
그 중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담은 <영산회상도(보물 1353호)>.
이 불화는 18세기 전반 조선 불화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러 폭의 천을 이어붙인 자국이 보인다.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불화 역시
여러 장의 바탕천을 이어붙여 그린다.
전통적인 베 짜는 모습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일반 베틀의 폭은
한사람의 손으로 날줄이 반복할 수 있는 너비로
보통 30~40센치미터다.
그래서 조선 불화를 비롯, 일본 중국의 불화는
대부분 40센치 내외의 천을 이어붙여 바탕천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전시 중인 수월관음도는 어디에도 이어 붙인 흔적이 없다.
놀랍게도 통비단을 사용한 것이다!
보통 천의 열 배 가까이 되는 천을 사용한 통비단!
어떻게 이런 엄청난 크기의 비단을 구했을까?
"대부분의 고려 불화는 비단을 이은 흔적이 없습니다.
폭이 넓은 불화를 만들 경우
일본이나 중국 모두 비단을 이어 붙여 큰 폭을 만들었습니다.
고려 불화는 주로 1장의 비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고려 불화의 특징입니다.
카가미 신사의 경우에는
한 장의 비단이면서 3미터나 되기 때문에
특수한 기계가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하죠."
- 이데 센노스케 교수
고려인의 직조 능력은 넓은 통비단을 짠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걸치고 있는 속이 비치는 투명 너울!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는 이 투명 너울은
중국이나 일본 불화에는 없는
고려 수월관음도에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다.
너울이 덥힌 부분, 겹친 부분이 각각 다르게 표현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일락 말락 하는 아주 가는 천으로 한 올 한 올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겹쳐지는 부분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흰색 선을 사용해 그 시작되는 부분을 조금 짙고 굵은 호분으로,
나머지는 아주 옅고 투명한 색으로 표현해서
이 너울이 바람결에 움직이고,
그리고 살포시 드러났다 다시 없어지고 하는
섬세한 감정들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 김호석 교수
수월관음도에 한결 같이 등장하는 투명 너울.
이것은 무엇을 표현한 걸일까?
충남 예산 수덕사 근역 성보관엔
이것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유물 한 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물은 고려 수월관음도와 제작 연대가 비슷하다.
손이 훤히 비치는 얇은 비단.
수월관음도의 너울은 고려인들이 사용하던 얇은 비단을 그린 것이다.
"수월관음도에는 당시의 회화 솜씨만이 발휘돼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옷이라든지 아니면 장신구라든지 그 뒤에 놓여있는 수반과 정병,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모든 복식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고려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상향이기도 하면서
고려 공예 기술의 정수로서 가장 아름다운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장경희 교수,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수월관음도의 또 다른 특징은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들이다.
한국직조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한국전통문화학교 심연옥 교수는
고려 불화의 문양이 고려인들이 사용하던 비단임을 밝혀냈다.
투명한 너울 이면에 정교하고 세련되게 그려진 문양을 하나하나 복원해봤다.
치마엔 육각형의 물문양이 규칙적으로 배치돼 떠 있는 연꽃과 함께 아름다움을 받쳐준다.
수지연화문.
대단히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이 숨어 있었다.
국화연화과문.
국화송이 사이 사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꽃잎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채워 통일성을 띄고 있다.
일반 직조기와 달리 문양을 넣을 수 있는 전통 문직기를 복원해
고려 시대 방법대로 문양을 넣어 비단을 짜봤다.
복원된 고려 불화의 색감과 문양!
700년전의 문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지금은 기계로 짜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하는 것보다 기계로 하는 것이 더 세밀하고 발달되었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고려 시대 수공으로 하던 직물들이 지금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더 섬세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심연옥 교수
섬세하고 화려한 금박의 봉황 무늬는
고려인의 미감이 얼마나 고급스러웠는지 짐작케 한다.
산수 배경과 어울려
훨훨 나는 착각을 줄 정도로 환상적이다.
전통 금박 문양 전문가(김기호, 금박장 기능 전수자)의 도움으로
당시 방법을 재현해봤다.
문양고를 뜨고,
그 위에 특수하게 제작된 접착제를 얇게 발라 비단에 바른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종이보다 얇게 편 금박을 붙인다.
금을 종이보다 얇게 펼 수 있는 기술이 금박의 핵심 기술이다.
실제 고려 시대엔 금박 뿐만 아니라
금실을 뽑아 비단실과 함께 짜는 최고급 직금 기술이 발달돼 있었다.
고려 왕비 숙비 김씨가 발원 제작한 이 수월관음도는
고려의 정신과 세계 정상의 기술이 총동원된 고려 그 자체였다.
"고려 불화는 하나의 회화 작품이라기 보다는
그 안에 표현되어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고려의 우수한 직조 기술,
그리고 또 조형적 디자인의 능력,
고려 시대 사람들의 섬세하고 귀족적인 그 정신 세계를
총괄해서 표현한 그런 작품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 심연옥 교수
6. 고려 불화가 대부분 일본에 있는 이유는?
"이것은 수월관음도에 나오는 너울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고려 불화가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존하는 고려 불화 160여 점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십여 점에 불과하고
120여 점에 달하는 불화가 일본에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역동적이어서 고려 문화의 결정체라고 불리웠던 고려 불화.
이 고려 불화가 국내가 아닌 대부분 일본에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 최고 박물관의 하나인 미국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엔
1998년 한국관이 개설돼 수준 높은 우리 문화를 연중 상설 전시한다 .
담백하게 절제된 조선 산수화,
자유분방하게 만들어진 분청자기 등이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오랜 역사를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도 수월관음도, 아미타삼존도 등 고려 불화가 넉 점이나 있다.
"넉점이 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왔어요.
지금 해외에 고려 불화가 다 그렇지만 초기에 박물관에 들어왔을 때는
한국 불화, 한국 작품으로써 들어온 게 아니고
중국 내지는 일본 그림으로 잘못 알려졌던 게
박물관에 소장하게 돼서 최근 한 20년간에 우리 한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이게 한국 작품이라는 게 밝혀졌고요..."
- 이소연 학예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관경분야 변상도 - 일본 서복사
미륵하생경 변상도 - 일본친왕원
지장보살도 -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고려 불화로 알려지고 연구 되어진 것이
삼십여 년도 채 되지 않는다.
고려 불화가 국적조차 불분명한 채 700여 년 떠돈 이유는
남아있는 160여 점 중에 국내에 있는 건
십여 점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160여 점의 대부분의 고려 불화는
일본이 소장하고 있다.
왜 고려에서 만들어진 고려 불화가 한국에서는 존재도 모른 채 일본에 있는 것일까?
유출 경로를 알 수 있는 한 점의 고려 유물을 통해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의 한 기관엔
고려말에 제작된 금자묘법연화경 한 점이 보관되어 있다.
금가루로 부처님의 말씀을 그린 금자묘법연화경.
고려 불교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열 점이 안 되는 진기한 문화재다.
연화경의 시주 발원자로
고려에 중대광 벼슬을 지닌 유성길, 주휘, 박중점 등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지원 6년(1340년), 불경의 제작 연대도 뚜렷하다.
그런데 제작한 지 17년이 지난 1357년 10월,
'쇼니 요리히사'라는 사람이 일본 신사에 기증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평 12년(1357년) 대재부 쇼니 요리히사가 천만궁에 기증 봉안하다.'
과연 쇼니 요리히사는 누구일까?
후쿠오카 난린사.
당시 요리히사 집안은 일본 대재부의 책임자였다.
대재부는 일본 큐슈 일대를 다스리는 관청이었고,
천만궁은 대재부의 신사였다.
요리히사 집안은
큐슈 일대에서 대대로 대재부의 최고 통치 권력자였다.
요리히사는 어떻게 그것을 손에 넣었을까?
1357년 9월 왜구가 개경 근처 흥천사에 침입한다.
금자연화경은 이때 일본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가 승천부 흥천사에 침입해
충선왕과 그의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약탈해갔다..."
- 고려사절요 27권
"그야말로 고려 심장부에 왜구가 들어온 겁니다.
전국에 조운선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고,
해상 교통의 요지인 개경에 왜구가 들어왔다는 것은,
더구나 왕가와 관련된 흥천사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당시 고려 왕실과 조정에 있어서는 아주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영 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큐슈 인근 지역인 이곳 히라도(일본 나가사키)는
대마도와 큐슈 지역 왜구의 근거지였다.
금자묘법연화경을 약탈한 왜구들은
큐슈 지역 최고 권력자인 요리히사에게 상납했거나 팔았고,
이것이 천만궁으로 넘어간 것이다.
고려 불화,
그 소중한 유물의 운명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273년과 1281년도에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일본 침공 이후,
고려가 일본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한 1366년까지 약 90년 동안,
고려와 일본 양국 사이에는 군사적 정치적 긴장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무역도 일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고려의 많은 문화재들이 공식적인 루트가 아니라
약탈이라는 방법으로 통해 일본에 건너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이 영 교수
숙비가 발원한 고려 수월관음도가 일본으로 건너간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약탈 당했다는 근거가 없기에 고려 불화에 접근 방식은 대단히 조심스럽다.
지난 2004년 한국인들이
일본 사찰에서 고려 불화 한 점을 훔쳐
국내에 반입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고려 불화의 공개를 꺼려
초기 단계인 고려 불화 연구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측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현재 소재지가 일본이고,
소유권이 일본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조건 돌려 달라고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여건이 달라질 때까지 참아보고 여건을 조성 시켜보는 겁니다.
신뢰를 구축한 후에
뭔가를 진행해보자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이 일본에서도 원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 정영호 교수, 단국대 박물관장
고려의 자부심과 뼈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는 수월관음도!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며칠후 이 그림은 40여 일의 짧은 고국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고려 불화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지만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앞서 본대로 일본 학림사는 소중한 불화 한 점을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고려 불화의 600년의 역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700년전 고려인의 꿈과 이상이 고려 불화를 낳았듯
우리의 뜨거운 애정과 합리적인 노력이 계속 될 때
고려 불화는 다시 우리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 한상권의 역사추적 (늘 웃음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