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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스크랩 가톨릭 교회, 가난한 이들과 이혼하다.
보리 추천 0 조회 7 10.02.03 09: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돌아다니던 시기, 그리고 그 이후에 사도들이 사람들과 모여서 빵을 나누던 시기에도 노래가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도 분명히 악기가 있었구요. 우리가 흔히 보는 '왕중왕' 내지는 이스라엘을 로마가 점령한 당시 왕궁의 파티 장면을 봐도 악기가 있거든요. 사람들도 모여 흥겨우면 노래를 불렀을 겁니다. 그 악기가 파이프오르간이었다는 소리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좀더 발전시켜서, 초대교회 시절에 신자들이 함께 모여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한 80명쯤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불렀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가톨릭교회에서 '미사'라는 지금의 형식이 갖추어진 것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은 미사의 형태가 완성된 것은 7세기 중엽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가톨릭대사전에서 미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이 21세기니까 약 14세기 정도 전에 형성된 것이라 '오래되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미사의 원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700년이나 지난 후에 형성된 미사 예식이 예수님 당시의 형태와 얼마나 많이 떨어지고 변화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손으로 쓰여진 성서조차 100년경에 쓰여진 요한복음은 예수님 당시와 시간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정확성을 마르코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보다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판에 말입니다. 즉, 예수님 당시에 초대교회에서 제자들이 모여서 라틴어로 중얼거리거나 혹은 파이프오르간으로 반주해서 엄숙한 사성부의 성가를 불러제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취임 당시부터 교회를 틀림없이 중세 이전으로 끌고 가실 것이 확실시되셨던 베네딕도 교황님께서 크리스마스 팝콘서트 중지시키셨습니다. 미사시간에 기타 치는 것도 반대하셨다고 하네요. 역시 위대하신 교황님이십니다. 여지껏 수많은 과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 '타임머신'이었고, 현대 물리학의 거장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기대어서 타임머신이 불가능함을 못박아버린 과학계에 크나큰 충격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개신교에서 부르짖으며 수많은 안티들을 양산하고 과학계에서 금치산자 취급을 받게 만든 '지적설계론'을 들고 나오시어서 과학계와 정면 맞대결을 하시리라 선포하셨던 교황님답게, 현대 과학에서 불가능을 선언한 타임머신을 지금 여기, 바로 이 21세기 찬란한 지구 위에 실행시켜버리셨던 겁니다.

 

물론 교황청에서 팝콘서트를 금지시키시거나, 성탄절동안 내내 파이프오르간 소리만 듣고 싶으시다거나 하는 것도 모두 교황님 취향입니다. 바티칸대성당은 교황님 나와바리이기도 하니까 그 안에서 기타를 부수시건, 팝음악을 사탄의 음악이라고 하시거나 말거나 그것도 모두 교황님 자유라는 거죠. 전세계인이 누려야 할 사상과 양심과 취향의 자유를 교황님만 누리지 말라고 하는 것도 사람의 도리는 아닐 겁니다. 그럼 제가 왜 이 게시판에서 아까운 시간에 주절거리며 용량 낭비를 하는 것일까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주장 중에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개인이 어떠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소비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계급을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남의 글 가지고 제 게시판 채우는 건 민망한 짓이긴 하지만 그에 관한 설명 일부를 읽어보시겠습니다.(중요한 부분은 굵게 표시하죠)

 

부르디외에게 있어 개인이 어떠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소비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계급을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사회공간으로서의 장(場)’ ‘문화자본’ ‘아비투스(habitus)’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먼저 ‘사회공간으로서의 장’이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가 혹은 이질적인가에 따라 개개인이 서로 구별되는 공간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처럼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중산층은 중산층끼리 서로 구별된다. 특히 이러한 장에선 개개인이 정치, 경제, 문화와 같은 다양한 자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실상 서열이 매겨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곧 사회공간으로서의 장으로, 그 안에서 권력이나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서열을 결정한다.
‘문화자본’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여러 자본 가운데 하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자본이란 가정환경, 가정교육과 같이 어려서부터 내면적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클래식을 향유하고 문화·예술 소장품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처럼 오랫동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 형성되기도 한다. 또 학력과 같이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해주는 문화자본도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우수한 학업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훌륭한 문화자본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력은 문화자본의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과거의 귀족과 하층민, 오늘날의 상류층과 하류층의 관계처럼 계급·계층 간에 불평등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단지 경제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클래식 음악을 즐기기 어려운 것과 같이 이들 사이엔 문화자본 또한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개인의 취향과 문화소비 경향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재능이나 기호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출신계급(계층), 교육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드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란 개념을 통해 이러한 문화적 불평등을 설명한다. ‘아비투스’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취향을 갖거나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기제이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론 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아비투스가 의식적으로 나타날 때는 자신을 남과 차별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된다. 예를 들어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 음악을, 또는 축구보다는 골프를 선호하는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유한 가정환경이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기호를 갖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속한 계급(계층)의 사회적, 문화적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즉 축구보다 골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은근히 자신이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도적 전략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듯이 보인다.

(출처 : http://cgi.chol.com/~swethom/technote/read.cgi?board=chem&y_number=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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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리나라에서도 '클래식음악'은 일종의 문화권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이미자나 김추자, 혹은 설운도나 송대관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성량의 문제점과 음악적필링의 표현에서 마리아 칼라스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말하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사회적으로 '문화적 우월성'을 누리는 쪽은 어디일까요? 뽕짝이라구요? 거짓말은 죄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교황님의 취향이 교회의 행사에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점에서입니다. 교회는 대대로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 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가난하고, 스스로 무지하며, 스스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가난한 이들은 교회에 기대고 교회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벗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만이 세상의 권력에 대항해 자신만의 권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야 할 가톨릭교회에서 보여주는 음악적 취향이 '고급 클래식'이라고 한다면, 교황청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가난한 이, 배운 것 없는 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이들이 가서 얼마나 즐거워하며 좋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급문화라 하는 클래식들은 그걸 즐기고 흥겨워하기 위해 일정 기간 이상의 문화적 소양을 위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데, 밥이 나오지도 않는 그런 교육 받겠다고 나와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가난하고 배운것 없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그런 사람들일 수 있습니까?

 

베네딕도 교황님의 음악적 취향이 클래식이건 국악이건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교황님이 자신의 방에 오디오를 갖춰놓고 혼자 들으신다면 클래식을 들으시건 플로렌스 아줌마의 엽기 아리아를 들으시건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몸을 누일 곳조차 없어서 구유 위에 누우셨던 그 날을 축하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음악 공연이,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이 함께 듣고 즐길 만한 음악이 아니라, 특별한 몇몇의 음악적 소양을 갖춘 고급스러운 인물들을 위한 클래식 공연으로 돌변한다면, 그래서 바티칸에 그런 사람들만 모여서 그 음악을 듣고 즐거워하며 자신들이 이런 음악을 모르고 팝음악만 즐기는 사악하고 무지하고 지저분한 사람들과 수준이 다르다고 즐거워한다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궁궐에서 잔치를 즐기던 왕족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한 말씀 더 드리지요. "미사는 연극대본이 아니고 제단은 무대가 아니다"라고 하셨다는데, 하지만 미사는 '잔치'입니다. 예전부터 신에게 드리는 전례는 축제였습니다. 하찮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는 마당이 축제의 마당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세상의 어떤 잔치와 축제가 엄숙하고 경건하며 숨막히게 조여드는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답니까? 그리고 무대에서의 연극은 원래 신을 위한 제의였습니다. 지금도 제단에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흉내내며 '이는 내 몸이요 피다'라고 말합니다. 사제가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독성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연극이 맞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올리고 그분의 희생과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지요. 이게 싫으십니까?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잊어버렸을 때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어져 그들 위에 군림했을 때 교회는 피를 부르는 흡혈귀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 아래에서 수많은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이 깔려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지금의 그 거대한 바티칸 성당은 그런 이들의 피냄새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잊어버리는 교회, 그것은 더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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