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말한다
최 화 웅
이봄 부산에서는 ‘오윤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옛 혈청소, 암남공원으로 이어지는 송도 갈맷길에는 물 맑은 봄 바다를 거슬러온 파도가 진종일 오윤의 예술혼과 시대정신을 흰 포말로 풀어놓는다. 부산출신 판화가 오윤(吳潤)의 회고전은 1986년 공간화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가진 이후 부산에서는 27년 만의 일이다. 가천미술대 윤범모 교수가 기획한 <나무에 새긴 동래학춤-오윤 회고전>이 송도 ‘미부아트센터’에서 열려 판화 170여 점을 비롯한 드로잉과 삽화 등 다양한 소묘를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에디션 넘버가 없는 판화도 선보이고 있다. 특히 ‘박꽃누나’ 28점은 아직 철이 일러 터트리지 않은 어린 꽃망울처럼 한 켠으로 비켜서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민중화가 오윤은 문학사상의 단편소설 <특질고>로 진영논리와 마녀사냥에 휘둘렸다가 끝내 병들어 타계한 어버지 오영수의 뒤를 이어 부산에서의 첫 전시회를 간신히 마무리하고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이 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살아생전 변변한 전시회도,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우리 앞에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낱낱이 말하는 것 같다.
300평 가까운 2층, 3층 전시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가슴이 아팠다. 8. 15와 6. 25, 4. 19와 5. 16의 역사전개과정에서 압제와 공포에 맞서 투쟁하다 요절한 오윤과 맞닥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5. 16 군사쿠데타 이후 조국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엄혹했던 독재체제의 그 추악하고 잔인했던 죄악상, 핍박과 저항으로 점철된 민주화의 과정을 그는 자신이 새긴 <검은 새>의 눈으로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농민과 노동자, 민중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애비>와 <모자>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감과 두려움이 바로 동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오늘에 이르도록 숱한 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죽었고 회유와 협박에 무너져 생각을 바꾸었거나 궤변과 변절을 일삼아 우리를 분노케 하고 있다. 더구나 박근혜정부에서 지명된 장관후보자들은 국회청문회에서마저 5. 16을 쿠데타를 쿠데타라고 말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없이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세상에 오윤은 한을 풀어보려는 듯 신들린 무당이 되어 다시 칼을 뽑아들었나 보다. 아니 유령처럼 떠도는 반동의 시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번 회고전을 기획한 윤범모 교수는 <춤추는 무당미술가, 나무에 꿈을 새기다>라는 글에서 “오윤의 작품에 즐겨 등장된 소재는 춤이다. 전통춤은 주객의 혼영일체, 이는 무대와 객석을 엄격히 구별하고 공연하는 서양 춤과 맥락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우리 춤은 같은 수평 마당에서 연희자나 구경꾼이나 일체감이 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신명의 세계는 춤이 주는 덕목이다.”라고 썼다. 오윤은 <오늘의 우리에게 굿은 무엇인가>라는 대담에서 “전 그래요. 저는 예술가라면 무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시사한 바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춤>과 <아라리요>, <칼노래>와 <춘무인 추무인>, <소리꾼>과 <징>, <북>과 <북춤>, <무호도>와 <앵적가>, <통일대원도> 등 숱한 작품을 파고 새겼다. 이번 회고전에 붙인 ‘나무에 새긴 동래학춤’과 춤에 관련된 많은 작품들은 동래학춤을 전승하려는 외가의 영향이기도 하다. 근사한 무당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했던 그의 미학은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고 이미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오윤의 집안을 알게 된 것은 부산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기장 일광의 조그만 갯마을 학리를 작품무대로 삼은 오영수의 단편소설 갯마을을 읽고서 부터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미술시간에 판화를 배웠다. 그 어린 시절의 학습이 판화에 대한 관심, 판화가 오윤에 대한 애정을 갖게 했을 것이다. 나는 이번 회고전을 통해서 오윤의 판화로 표지를 꾸민 월간지 <열매>와 <이원수 아동문학 전집>을 비롯한 최하림, 김창범, 김관식, 신경림, 김지하, 강은교 시집과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김창범 시집 <봄의 소리>, 신경림 시집 <새재>, 강은교 시집 <붉은 강>,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과 김지하의 담시 <오적>과 <황토>, 이야기 모음 <밥>과 <남녁땅 뱃노래>의 표지화가 이번 회고전에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당시 그는 번듯한 직장도 갖지 못한 채 술로 울분과 한을 삭이며 열혈청년으로 사는 동안 간이 굳어지는 간경화로 숨졌다.
학고재가 오윤 10주기를 맞아 추모판화작품집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에 이어 컬쳐북스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작고 20주기 회고전 <낮도깨비 신명 마당>을 계기로 묵직한 도록을 발간했다. 그 이듬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그를 16번째 시대의 불꽃으로 선정하고 <한(恨)을 생명의 춤으로, 오윤>이라는 평전을 펴냈으며 ‘현실과 발언’ 창립 30주년 기념전을 즈음하여 현실문학이 <오윤 전집> 3권으로 발간했다. 평전을 쓴 작가 김문수는 “그가 탈춤, 마당극, 농악, 판소리 등 민중연희의 한 장면을 즐겨 그리며 민족의 ‘한(恨)’과 ‘신명’의 정서 그리고 ‘해학’의 감정을 살려내고자 한 것은 단순히 보이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려는 것이 아닌, 민중의 맥박이고 혼(魂)인 그 생명력 자체를 담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작품이 때로는 살벌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민중의 피땀 어린 삶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날 치열한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현실과 발언>의 발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찌든 한국화단에 네오리얼리즘의 폭풍우를 몰아치게 했다. 더구나 그의 작품에는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가족공동체를 바탕으로 <봄>과 <천렵>, <김장>과 <범놀이>, <모자>와 <할머니>를 통해 가족의 정이 넘쳐흐른다.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한다. 오윤도 우리 곁을 떠났고 머지않아 우리도 차례로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오윤의 회고전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뼈저린 가난과 슬픔, 인간적인 외로움과 고뇌의 삶을 불꽃같이 산 그의 삶과 예술혼을 만나게 된다. 그는 판화라는 예술행위를 통해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충실했으며 재야의 중심에 자신의 몸을 오롯이 던진 예술가였다. 오윤이 이승의 가장자리를 떠나는 날 두 아들 상묵과 상엽, 그리고 누나 오숙희, 남동생 오건, 누이동생 오영아가 지인들과 함께 그를 땅에 묻을 때 시인 정희성은 조시(弔詩), <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를 흐느끼며 읽어 내려갔다. 모두가 오윤을 바람처럼 다시 오기를 바라듯 나는 죽은 가지에서 새움이 돋는 잔인한 생명의 계절에 그의 영혼이 살아나기를 비는 부활의 기도를 청한다.
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
정희성
오윤이 죽었다 야속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나이 사십에 세상을 뜨며
친구들이 둘러앉아 슬퍼하는 걸
저도 보고 싶지 않겠지
살 만한 터를 가려
몇 개의 주춧돌을 부려놓고
잠시 숨을 돌리며
여기다 씨 뿌리고
여기다 집을 짓고
여기다 큰 나라를 세우자고
그가 웃으며 말하는 것처럼
아직도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는 바람처럼 갔으니까
언제고 바람처럼 다시 올 것이다
첫댓글 그리움님 글 잘 보고 갑니다.
한 예술가의 작품이 이봄에 다시 선생님과 만남을 가지셨군요. 작가는 떠났지만 작품은 살아 보는 이에게 말을 건네고 있군요. 좋은글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도 그의 혼을 되살리는 부활을 꿈꾸어본다.
"예술가라면 무당이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온 마음으로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고 몰입하는 자체가 예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이런 삶들을 모두가 갈망하고 있지만 용기가 없어 머리속 생각으로만 그치고 주저앉고마는 많은 마음들이 느껴져옵니다. 어쩌면 이것저것 너무 따지지 않고 마음가는 곳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도 열심한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당이 굿하는 모습에는 무당 자신은 없고 굿을 통해 넋을 표현하는 모습이 전체로 느껴집디다. 주제와 너무 엉뚱한 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
한번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