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 하륜> <부창부수의 리더십>
태종의 삶을
보면 마치 광기가 서린 듯 하다.
조선이 건국되고 그가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정말 심할 정도로 많은
살상을 자행했다. 그는 매우 방어적인 인물이고, 매사 자기 위주의 결정을
하였던 이기적인 왕이기도 하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권력을 탐 할 여지가 있는 세력들은 단호히 척결 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하늘과 기싸움을 벌인 인물이다.
당시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을 위해 기우제를 주관하며 백성을 위해 기도했다. 태종이
죽은 후 한바탕 비가 내렸고, 그 이후 기일마다 비가 내렸는데 이를 <태종우>라 한다. 이처럼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 날, 태종은
조선왕조의 초석은 물론 조선 부흥의 근간을 마련한 한 훌륭한 왕으로 평가 받는다.
태종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본명은 이방원. 조선을 건국할 때, 정몽주를 얻고자 scout
제의를 했으나 이를 거절한 정몽주를 가차 없이 암살한다. 정몽주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 지은 <하여가>와 정몽주의 답변인
<단심가>는 오래 전 학창시절에 배웠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자신의 존재가 부각될 즈음엔 태조 이성계의 참모 정도전의 견제로 인해 계비의 아들인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가차 없이 정도전을 살해하고
계비 강씨의 두 아들과 사위를 죽인다. 소위 1차 왕자의 난이다.
이에 더해 2차 왕자의 난은, 바로 위 형인
이방간이 1차 왕자의 난 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박 포와 연대하여 이방원과 벌인 왕위 찬탈 전투를 일컫는다.
태종이 유일하게 목숨을 보존하여 준 인물이 있다면 이 때 패배한 이방간이 유일한 정도다.
그는 왕이 된
후, 권문세가의 사병집단 해체를 추진하는데 이에 부응하지 않던 자신의 혁명동지 이거이를 단호히 제거한다. 과거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주창하며 이방원에게 사병을 해체할 것을 명령했을 때, 반기를 들며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주된 원인이 바로 이 사실임을 감안하면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 헌신 한 부인 원경왕후 민씨의 남동생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물론 세자로 책봉된 충녕대군
(후의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과 그의 일가를 외척발호를 우려하여 모두 사사하였다.
태종은 준비된
왕이었다. 결단력과 과감성이 겸비됨은 물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 말로 힘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밀어 부친 <뚝심의 리서십>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비록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지만 결코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냉혈인간의 본보기와
같은 태종과 같은 인물을 보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거나, 비위를 잘 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목숨 유지도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주군을 잘 모시기 위해서는
무조건 뜻을 받들어 추진하되, 정확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한 언변력이 뒷바침 되어야만 한다.
더욱이 정도전과 같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주군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단박에 목이 떨어져 나가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태종의 참모
하륜은 고려 말부터 벼슬을 했다.
공민왕 때 신돈에게 배척 당한 적도 있었고,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한 적도 있는
일종의 재야세력에 속한다. 조선 건국 후 제 1,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왔고, 검소한 인품을 바탕으로 자기 분수를 철저히 지켰던 지략가로 평가 받는다. 그는 또한 도참사상의 이치를 깨달은 인물로 역학에 매우 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태종을
택하게 된 이유도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태종을 보필하면서도 그가 풀어낸 사주, 팔자, 관상풀이가 태종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70세의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고위 관직에 늘 머물러 있던 태종의 <정치적 부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런 배경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태종은 재임
시 세자로 책봉되었던 맏아들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선택한다. 그가 어렵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역시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종 때 장자승계 원칙이 이미 깨졌다고 볼 수 있다.
후에 손자인 문종이 죽고, 문종의 동생인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 시키고 왕위에
오른 역사적 사실과 무관치 않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태종과 하륜의
만남은 마치 부부지간에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참모 한 사람의 역할이 주군의 결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런 결정이 고스란히 역사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때론 포악한
인품의 소유자인 태종을 웃게 하였고, <정권>이라는 안 살림을
책임진 하륜이 펼친 <참모의 리더십>인 <부창부수의 리더십>에 귀감이 가는 이유다.
<다음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과 그의 참모 황희에 대해서 논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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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러시아의 진정한 문화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휴가 차 다녀 왔습니다. <참모들의 리더십>
연재 중간 정도에 2회에 걸쳐 – 나 홀로
여행, 상트페테르브르크를 가다 –를 게재 해 볼 까 합니다.
첫댓글 재미있습니다. 또 여행기도 기대됩니다. 제가 상트페테르브르그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주로 TV를 통해 드라마로 나오는 내용에서는 이방원이 악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저 역시 태종이 결단력이 있는 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양한 방면으로 인물을 인지하고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