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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智慧(지혜)의 사람’이 되기를 念願(염원)하는 ‘성령님의 侍從’,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의 묵상4 (650P)
지혜 - 상식 밖의 세계사
지은이: 안효상 지음
약간은 자극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은 독자들에게 역사의 재미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들은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세계사`나 `문화사`라는 이름의 과목이나 여러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이
갖는 한계 때문에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 자신있게 자신의 논
리를 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란 왜
지 딱딱하고 연대기나 딸딸 외우는 것이며 어렵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역
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 나아가 나름의 역사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다. 그래서 섣불리 역사 공부를 시작해 보기도 하고 곧잘 포기하기
도 한다.
글쓴이는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도전해 보았다. 중요하다고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나 잘
못 알려진 것들을 드러내 주거나, 또 중요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교과서나 역
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책의 방향을 잡았다. 그런
다음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그것을 개개의 장면으로 나누고 사실의 전후 맥락
과 의의를 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므로 목차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부분
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실들을 추려 내는 것도 추려
낸 사실에 의의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도 글쓴이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색다른 면을 밝히기 위해 얄궂게도 기존의 많은 책들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활자화된 책을 통한 도움 이외에도 글쓴이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자료를 주거나 내용을 정리해 준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느끼고, 또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면이 숨어 있음을 안다면 글쓴이의 첫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 담긴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책을 더 읽어 나가면서
나름의 역사관을 만들어 나가기 바란다. 그래서 이런 독자들을 위해 글쓴이가
참고했거나 독자들이 더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말미에 정리해 놓았다.
1. 바벨탑의 수수께끼를 푼다
현재 지구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10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말이 민족
을 구별하는 주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이 나라
와 민족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은 하늘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벌을 내린 결과라고 한다.
성경 창세기 제 11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는 의논했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
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
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
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후일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말을 쓰는 이유가 바벨탑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탑에 대해서 만은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 바벨탑은 실재했던 것일
까? 실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일까? 사람들은 이 바벨탑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
이 의문을 던졌다. 특히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바벨이라는 것은 원래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후에 그리스인들은 바빌론이라
고 불렀다. 7세기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이슬람 교도가 되었지만 바벨탑의 신
비를 쫓는 서유럽 기독교인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벨탑의 흔적을
발굴한 것은 금세기 초 독일 조사단이었다. 이들은 18년 동안이나 땅을 파 옛
바빌론의 모습을 발굴했으며 바빌론에서 가장 신성한 에사기라(성역)내에서 그
옛날의 7층탑(지구라트)의 흔적을 찾아 냈다. 흔적 밖에 없었지만 면밀한 조사를
통해 탑의 첫번째 층은 각변이 91미터, 일곱번째 층은 24미터이며 높이는 약 90
미터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1차대전 이후 영국·미국 합동 조사대가 이라크 남부의 고대 유적을 10
년에 걸쳐 발굴했다. 그 결과 그 곳이 기원전 2000년 전의 수메르 인의 도시 국
가 우르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고 이 유적 가운데 탑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날 메소포타미아에는 계단 모양의 신전이 40개 이상 발견되어 있
다. 이것을 지구라트라고 부른다. 이 지구라트가 아마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벨탑
일 것이다. 하지만 40개가 넘는 탑 중에서 어느 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인
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탑이 필요했을까? 문명 발생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
수메르 인들이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4000년경이었다. 이들은 작은 도시 국가
들을 세웠고 도시의 중심에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던 것이다. 동부 산악지대
출신인 이들은 처음에는 신을 평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모셨지만, 메소포타미
아 지방이 두 강(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으로 인해 홍수 피해가 심한 곳이었기
때문에 단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신전을 모셨던 것이다.
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 법전
자신이 당한 대로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을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에도 나온다.
이러한 보복의 사상이 최초로 표현된 것은 함무라비 왕(Hammurabi, B.C. 1728
∼1686)의 법전에서이다.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개방된 평원지대였기 때문에 수
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잇따랐다. 기원 전 2350년
경에 셈 족인 아카드 인(Akkadians)이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오
래 가지 못하고 같은 셈 족인 아무르 인(Amurites)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워
다시 이 지역을 통일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시대에 전성기
를 맞이했다. 함무라비 왕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
었다.
우리가 이 함무라비 법전을 알게 된 것은 법조문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된 덕
분이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De Morgan)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탐험대가
수사(Susa:페르시아 만 북방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에서 큰 돌기둥 하나를
발굴했다. 세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지만 이어 보니 완전한 모습이었다. 이 돌기
둥은 높이 2.5미터, 둘레가 1.8미터였다. 그리고 돌기둥의 상부에는 함무라비 왕
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 있다. 즉 함무라비 왕이 지상
의 백성을 통치하는 권한을 신으로부터 위임받는다는 뜻이다.
이 돌기둥에는 이란의 고대 문자인 설형 문자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이 문자
를 해독한 결과 그것이 법률 조문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은
282조로 되어 있는데 토지 제도, 재산, 결혼, 상속, 범죄에 대한 형벌 등 여러 규
정을 담고 있다.
이 법전에서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중형주의와 보복주의이다. 중형주의의 예
로는 절도의 경우 10배, 20배, 30배를 물거나 사형, 술을 마신 성직자는 화형을
집행한 것 등이다.
`만약 누군가(귀족)가 다른 사람(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도 상하게
한다. 만약 그가 타인(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을 때는 은 1마나를 지불한다`는 조
문은 보복주의의 예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딸을 때려서 유산하게 하면 자기의
딸이 사형 당하며, 목수가 집을 짓다가 무너져서 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
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보복주의 원칙이 나타나 있는 예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이 법의 적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 든
예문처럼 동등한 보복은 귀족들 사이의 사건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평민의 범죄
는 귀족의 범죄보다 더 중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가장 완전한 첫 성문 법전으로
당시의 사회를 비교적 소상히 전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새
겨져 있는 이 돌기둥은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3. 이집트의 미라도 자격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미라이다. 물론 미라는 이
집트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는 미라 보존에 적
합해 현재까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 미라에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고
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후일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 와서 죽은 후에도 삶이 지속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
은 `오시리스 신화`에도 남아 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류를 훌륭
하게 다스리는 자비로운 왕 오시리스가 있었는데 이를 질시한 동생이 그를 죽여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시스가 고생 끝에
남편의 유해를 찾아 관에 정성스럽게 모셨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다시 관을 찾
아 내어 오시리스의 유해를 조각조각 내어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 그러나 이시스
는 다시 남편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었다. 이후 소생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들
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이 신
화는 왕이 사후에 부활해 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삶을 보낸다
는 고대 이집트인의 내세관을 보여 준다. 이러한 믿음에 바탕해서 만들어진 것
이 영혼이 돌아 올 수 있도록 한 미라이다.
그런데 아무나 영혼이 되돌아 오는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무나 미라가 되지
는 못했다. 고대 이집트 초기에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파라오(pharaoh: 이집
트의 왕)뿐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자 신과 같은 존재여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국가였으며 국토 전체는 형식상 파라
오의 소유였고 상업, 농업 등 모든 경제 활동이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렇듯
전제 국가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최고 지배자인 파라오만이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 귀족들도 영혼이 다시 돌아 온다고 믿게 되었
다. 그 뿐만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종교적 계율을 열심히 지키다가 일생을 마
친 일반 사람들 역시 내세에 부활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며 그리스 역사가 헤
로도투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라 만드는 전문 직인도 있었다고 한다.
미라 만드는 방법은 우선 사체에서 뇌를, 다음으로 내장을 끄집어 낸다. 그 다
음 소금, 향료, 수지의 혼합물을 이용하여 사체에 방부 처리를 하고 건조시킨다.
이후 미라의 속을 채우고 끝으로 아마포로 몇 겹씩 감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라는 유가족에게 돌아와서 상징적인 의미의 `입을 벌리는
의식`을 받는다. 이것은 죽은 자로 하여금 다시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는 뜻에서 치러진 의식이다. 이로써 미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 갈 모든 채비를 갖
추게 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도 미라가 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차별은 존재했다. 그것은
재력에 따른 것이었는데 미라 만드는 사람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정도에 따라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훌륭한 미라가 되는 것은 부자들 뿐이었을 것이다.
지혜 - 세상을 보는 지혜 (72P)
Hand-Orakel und Kunst der Weltkugheit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쇼펜하우어 엮음
가라! 네 눈짓을 따르라.
너의 젊은 날을 이용하고,
배움의 때를 놓치지 마라.
거대한 행운의 저울 위에
지침이 평형을 이루는 순간은 드물다.
너는 올라 가든가, 아니면 내려 가야 한다.
너는 이기고 지배하든가, 아니면 지고 나서 굴종해야 한다.
이겨 의기양양하든가, 쓴 맛을 삼키든가
망치가 되든가, 모루가 돼야 한다.
괴테 Goethe
서문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상을 보는 지혜>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가득한 작품이다. 나는 독일어권에서는 최초로 이
책을 직접 스페인어 원문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로 옮기기에 정말 어려운 몇 마디
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전달하도록 노력했다.
어떤 말은 가능한 한 비슷한 개념으로 바꿔 옮겼다.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냉철한 이성을 지녀라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hasar Gracian Y Morales)은 1601년에 출생,
1658년에 사망한 스페인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1619년부터
제수이트 교단의 일원이었고 여러
수도원 학교 교사를 전전하다가 타라고나 제수이트 교단에서 동료들에게
강의를 했다. 그는 또 군목사로서 능변을 보여 군인들 사이에서는
'승리의 대부'라는 칭호를 받기로 했다.
그리고 한때는 마드리드 궁정에서 철학강의와 설교를 했다.
그라시안의 저술 가운데 보존된 것은 대부분 그의 친구이자
고고학자이고 문학 애호가인 후안 데 라스타노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러나 당시 저자의 이름은 발타자르
동생 로렌처 그라시안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감춘 이유는
제수이트 교단 상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저술 활동을 하고 싶어서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곧 알려져 그는 자신의 저술 내용보다는
상부의 허락이 없이 그것들을 출판했다는 죄목으로 한 때 수도원 옥에
갇혀 빵과 물 만으로 지내야만 했다. 그라시안의
저술 가운데 <세상을 보는 지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이다.
이 번역서는 쇼펜하우어(Schopenhauer)가
자신만만하게 독일어로 번역한 독일어판을 텍스트로 하였다.
오만하리만큼 자존심이 강한
대철학자인 그가 이 책을 극찬하면서 편역한 것만 보아도 그
내용의 훌륭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1647년에 나온 초판 가운데
남은 것은 한 부도 없고,
현재 발행되는 재판들은 모두 1653년 판에 의존한 것이다.
그라시안은 사람을 대단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냉철한 사유를 통해 아무런
꾸밈없이 이기적이고 허영심에 차고 변덕스럽고 사악한 인간이라는
존재와 어떻게 교제를 해야 할지 충고를 던지고 있다.
마지막 경구에서 그가 "성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그가 말한 모든 교훈
뒤에 마지막으로 덧붙인 하나의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실제 그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살아가는 데 있어 냉철한
이성을 지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는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일종의
마키아벨리즘을 필요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인생의 지혜에 대한 교훈은 일상생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교훈서에서 많은 일상적인 일들을 발견해도 독자는 이상해 할
것이 없다. 그의 경구들은 대가적인 풍부한 정신력, 사고력, 위트,
서슴치 않는 파라독스, 번쩍이며 신랄한 재치, 빛나는
언어, 통찰에서 우러 나온 인간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가까운
인간의 모습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 보고 개선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훈들이다.
끝으로 나 역시,<세상을 보는 지혜>를 권한 독일 뮌헨 서점
안내원의 말처럼 '이 책을 알게 되고, 또 많은 이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된 행운'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옮긴이 두행숙
지혜 - 인생에 필요한 조건을 두 배로 갖추어라
그러면 생활 역시 두 배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1. 오늘날은 모든 것이 그 정점에 도달했다. 그 중에서도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기술은 최고에 달해 있다. 오늘날에는 한 사람의 현인이 옛날
일곱 사람의 현인이 지녔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옛날 한 민족 전체를 다스릴 때보다 오늘날
한 사람을 다루는 데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2. 심장과 머리는 우리 능력의 양극점이다. 서로가 다른 한쪽이
없이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이성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다. 어리석은 자의 불행은
신분, 관직, 땅을 관리할 때, 사람들과 교제할 때 자신의 사명을
그르치는 데서 시작된다.
3. 지식은 용기가 뒷받침될 때 위대함을, 즉 불멸을 낳는다.
그것들 자체가 불멸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해 낼 수 있지만 현인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성찰과 의지의 관계는 눈과 손의 관계와 같다. 용기가 없는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4. 자신의 의도를 남에게 확실히 드러 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새로운 것을 보고 경탄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성공할 것을
기대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공개된
카드로 게임을 하는 것은 유리하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자신의 의도를 곧바로 밝히지 마라.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기대감을 고조시킬 수 있다. 특히 높은 직위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될 때는 더욱 그렇다. 모든 일에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엿보이고 그것이 지닌 폐쇄성 자체로
경외심을 불러 일으켜라. 자신을 드러 낼 때조차 평범한
모습은 피하라. 사람들과 교제할 때도 자기 내면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보이지 마라. 신중한 침묵은 지혜의
성역이다. 이미 입 밖으로 한번 새어 나간 의도는 결코 높이
평가 되는 법이 없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만일 결과가 좋으면 그 불행은 배가 될 것이다. 그러니
마치 섭리를 만든 신처럼 자신의 의도를 감추라.
사람들로 하여금 추측케 하고 불안케 하라.
5. 남의 의타심을 굳혀라. 우상을 만들어 내는 자는
도금장이가 아니라 숭배자들이다.
현명한 자는 사람들이 그한테 고마워하기 보다는
그를 필요로 하기를 더 바란다. 다른
사람들을 희망의 밧줄에 묶을 수 있는 것은 노련한 궁신의
기술이며, 사람들의 칭찬에 만족하는 것은 치졸한 농부의
기법이다. 후자는 잊혀지기 쉬우나 전자는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남에게 감사할 때보다 의존할 때 더 많은 것을
갈구한다. 그러나 목의 갈증이
식으면 곧 그 샘에서 등을 돌린다. 마치 사과의
즙을 다 짜 먹은 뒤 흙 속으로 내던져
버리듯. 사람들은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을 때
그들의 화합도 끝이 나고 더불어
존경심도 사라진다. 그러니 희망을 갖되 결코 희망 만으로
채워서는 안되는 것이 체험에서
나온 큰 교훈이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라. 그대 주인이 왕관을 썼더라도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지나쳐 침묵이 되어 일을
그르쳐서는 안된다. 그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외부에서 피해를 받았을 때 이를
회복시키지 않고 그냥 놓아 두어서는 결코 안된다.
6. 자기 완성에 도달하라. 완전하게 태어 나는
사람은 없다. 매일 같이 사람은 인격을
닦고 소명을 다해야 한다. 모든 능력이 완벽하게 발휘되고,
뛰어난 성품이 다 발전하여
자기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고상한 취미가 생기고, 생각이
맑아지고, 판단이 성숙해지고,
의지가 순수해질 때 그 완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7. 윗사람을 능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뛰어난 것은 미움 받기 마련이다.
자기 윗사람을 능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 아니면
운명의 장난이다. 언제나 뛰어난 것은
미움을 받는다. 더욱 뛰어난 것은 더 미움을 받는다.
그러니 신중한 사람이라면 속물들이
내세우는 장점을 감출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은 허술한 옷 차림으로
감출 것이다. 행운이나 정서에 관해서는 남에게
양보할지 몰라도 지적인 것에서 양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 열정을 다스려라. 열정은 위대한 정신의 속성이다.
그 뛰어 남은 일반의 감명을 산다.
자신의 열정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큰 권세는 없다.
이는 자유의지의 승리다. 혹 열정이
사람을 지배하더라도 그가 하는 일까지 지배를 당해서는
안된다. 불쾌한 일을 피하여 지름길로 명망을 얻는 것은
고상한 수법이다.
9. 국가적 과실을 감춰라. 아무리 교육 수준이 높은
국민이라도 이웃 나라한테 비난 받을
잘못이 하나도 없는 국민은 없다. 이웃 나라들은 자기들을
스스로의 과실로부터 보호하거나 이웃 나라의 과실로
위로하려 한다. 그러니 자기 국민의 그런 결점 자체를
개선하거나 감추는 것은 훌륭한 수완이다. 그러면
누구에게서나 훌륭한 평판을 얻을 수
있다. 가정, 신분, 직무 그리고 자기 나이에 저지르는
과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억제되지 않고 쌓이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낳는다.
10. 행복과 명성. 전자는 일시적이지만 후자는 지속적이다.
전자는 현세를 위한 것이고,
후자는 후세를 위한 것이다. 행복은 갈망하는 것이나
명성은 획득하는 것이다. 명성에
대한 소망은 그 가치에서 우러 나온다. 명성의 *여신은
거인들의 자매였고 지금도 그렇다.
이 여신은 언제나 특출하고 기괴한 것, 이상하거나
혐오스러운 것, 또는 갈채의 대상이
되는 것의 뒤를 따른다.
*명성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여신 Fama로
의인화되었다. 로마 시인 베르질은 이 여신이
머리를 구름 속에 감춘 채 땅 위를 걷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11. 배울 것이 있는 사람과 교제하라. 우정 어린
교제는 지식의 학교이며 즐거움이 있는
가르침이다. 자신의 친구를 교사로 삼아 배움과
즐거움을 교대로 얻도록 하라.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로 이끄는 것은 대개 우리 자신의
관심사이다. 신중한 사람은 허영에 찬
화려한 궁전 보다 위대함의 산실인 노련한
궁신의 집을 종종 방문한다. 여기에는 처세술로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본보기가 되고 또 그들이 말하는 위대한
예언과, 그들이 사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무리들로 인해 온갖 훌륭하고 고귀한 지혜의
아카데미를 열고 있는 것이다.
12. 자연과 예술. 자연은 질료이고 예술은
작품이다. 어떤 아름다움도 보조 없이는
존속할 수 없고 어떤 완전함도 예술에 의해 고상하게
빛나지 않으면 야만적인 것으로 퇴보한다. 예술은
나쁜 것을 기르고 좋은 것을 완성한다. 자연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최선의 상태이고,우리는 예술 속에서 그 완성을 기대한다.
예술 없이는 최고의 재능도 가꿔질 수 없다. 완벽한 것도
가꾸지 않으면 부족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인간도
인위적 교육 없이는 거칠고 천하기 마련이니, 어떤 종류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연마는 필요하다.
13. 실체와 형상, 사물 속에 있는 본질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형상도 필요하다. 아름다운
행동, 태도는 삶의 장식이며 모든 즐거운 표현은
그것의 훌륭한 보조 역할을 한다.
14. 그대의 뜻을 때로는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나타 내라. 인간의 삶은 바로 인간적 사악함과의 투쟁이다.
지혜는 의도하는 대로 전법을 쓰며 인간을 이끈다.
지혜는 그것이 사칭하는 것을 속임수로 삼을 뿐 결코 목표로
삼지 않으며, 수완으로 허세를 부리고 실제로 나중에는 뭔가
예기치 않았던 것을 나타 낸다. 지혜는 자신의 게임을 늘
감추려고 한다. 적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자 거짓 의도를
드러 내고, 돌아서서는 누구도 생각 못했던 것을 통해 승리에
이른다. 그러나 또 앞서 예리한 주의력으로 교묘히
숙고하고 염탐한다. 지혜는 늘 사람들이 보통 알려 주는
것의 이면을 파악하고 일부러 거짓 표정을 짓기도 한다.
첫번째 암시는 그냥 보내고 두 번째, 세 번째 암시를
기다린다. 그럴 때 거짓은 위장에 치장을 더해 기승을
부리고 더욱이 진실 자체를 이용해서까지
속이려 한다. 또 술책을 바꾸려고 게임도 바꾼다.
그리하여 실체를 허상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 때는 완벽한
솔직성에 속임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 있는
지혜는 망을 본다. 그 예리한 눈빛을 긴장시켜 빛
속에 숨겨진 암흑을 주시한다. 그리하여 솔직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기만적이었던 그 의도를 남김없이
밝혀 낸다. 이처럼 사악한 *피톤은 사물을 꿰뚫는 아폴론의
태양빛에 대적한다.
*피톤 Pyth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 태양신 아폴론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5. 도움되는 인물을 확보하라. 권력자들의 행운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데 있다. 현인들은 권력자들을
무지의 위험에서 지켜 주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 이들을 신하로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우리 보다 우월하게 만든 자를 인위적으로 우리의 신하로 만들 수
있다면 이는 인생 최고의 일이다. 지식은 길고
인생은 짧다. 무식한 자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힘 안 들이고, 그것도
전지한 자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을 통해 공부하는 것은
지극히 현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모임에서 자신의 입으로 여러 사람을 위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면 이는 타인의
노력을 빌어 자신이 예언자의 영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자들은 먼저 교훈을 모아 그
지식의 정수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하지만 그 현인들을
직접 신하로 만들 수 없을 때는 교제를 통해 그들의 도움을 얻으라.
지혜 - 세상을 사는 지혜
백이(伯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숙제와 함께 고죽국의 왕자였다. 그런데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자 숙제는 그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백이 또한 부왕의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자, 둘은 함께 왕위를 버리고 주나라 문왕의 신하가 될 요량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통박한 다음, 자기 네는 주나라 영향권 밖에서 살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 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참다운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진정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으며, 악인이 있는 조정에서는 함께 벼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그였기에 비록 제후들이 정중하게 초대하는 글을 보내 와도 받기를 거절했다. 제후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 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기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치 않고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 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친 것이다.
심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폭유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져 버린 옆 집의 젊고 예쁜 과부가 혼자 사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유하혜는 즉시 방문을 열어 주었고, 둘은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 번이나 벼슬 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 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고 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백이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연상하게 된다.
유하혜의 일생을 통해서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했던 용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말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라고...
지구를 떠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도 그와 같이 부패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나 외에는 모두 죄인이요 부정한 자라고 떠들며, 백이와 같이 산에 들어 가 고사리나 캐 먹고 사는 못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지혜 - 📚 가문의 이은 셋째 며느리의 지혜 🍒
“진실로 ‘智慧(지혜)의 사람’이 되기를 念願(염원)하는 ‘성령님의 侍從’,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의 묵상 중에서... (124P)” 인용
옛날 어느 富者가 회갑을 맞았다.
아침을 먹은 후 시아버지가 세 명의 며느리를 불러 앉혀 놓고
한 줌의 쌀을 나누어 주면서,
'꼭 10년 후면 나의 고희가 되겠구나!
지금 나누어 준 쌀로
고희 잔치 선물을 마련하도록 해라' 고 말했다.
방에서 나온 첫째 며느리는
'아버님이 노망(치매)을 당겨 하시나 봐' 하고는
마당에 있는 닭들에게 주었다.
둘째는 집으로 가지고 와서, 쌀독에 도로 넣었다.
셋째는 집으로 돌아와 한 줌의 쌀을 꼭 쥐고
한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10년이 지났다.
고희 잔치를 맞은 富者는 온 가족을 한 방에 모이게 했다.
'내가 10년 전에 세 며느리에게 쌀 한 줌을 주면서,
오늘 고희 잔칫날 선물을 준비하라고 했었다,
준비한 것들을 가져 오너라.
첫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둘째는 아버님이 농담을 하시는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셋째는 장부 하나를 가만히 내밀었다.
장부를 읽어 보던 시아버님은 눈이 둥그레지면서,
'소가 5마리, 돼지가 10마리, 염소가 20 마리, 그리고 닭이 100마리...'
셋째를 바라 보았다.
'그래. 막내야!
너는 어떻게 한 줌의 쌀로 10년 만에
이렇게 많은 선물을 마련했는지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아라' 하였다.
셋째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이 쌀을 주신 뜻을 오랫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뒷집으로 가서 한 줌의 쌀과 병아리 한 마리를 바꿨습니다,
1년이 지나자
병아리가 알을 낳고,
그 알을 팔아서
또 병아리를 사고,
3년이 되니 닭이 100마리가 넘었습니다.
닭을 몇 마리를 팔아서 염소를 사니,
닭은 계속 알을 낳고
염소는 또 염소를 낳고,
그 다음은 돼지를 샀고,
그 다음은 송아지를 사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불어 났지만,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2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아버님! 생일 선물로 부족하지만 받아 주세요.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을 잊고 감탄하고 있었다!!!
'우리 가문을 이어 갈 사람은 막내 며느리 밖에 없구나!
내 모든 재산을 막내에게 상속할 테니,
네가 맡아서 가문을 크게 일으키거라!'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을 알고
그 행복을 추구한다.
노력의 댓가는 언젠가는 꼭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한 성취를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지혜 – 솔로몬의 명 판결
다윗의 군대가 전장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을 때, 삶은 달걀이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그 군인들 가운에 어느 젊은 근위병은 몹시 배가 고파 옆 사람에게 달걀 한 개를 꾸었다.
“갚을 때는 계란에서 발생한 모든 이익과 함께, 달걀을 주는 거에요.”라며 그 사람은 근 위병에게 달걀을 내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달걀을 꾸어 준 이가 근위병을 찾아왔다.
“일 년이면 달걀 한 개가 병아리로 부화 되어 암탉이 됩니다. 다음 해에는 그 암탉이 병아리 열 여덟 마리가 되고, 그 다음 해에는 열 여덟 마리가 각자 또 열 여덟 마리를 낳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빚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할 수 있겠지요.”
다윗의 근위병은 자기가 진 빚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는 고민했다. 그는 다윗 왕을 찾아 가 보았으나, 왕은 달걀 한 개만 돌려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다.
낙심한 이 근위병에게 다윗의 아들인 어린 솔로몬이 지혜를 빌려 주었다. 근위병은 다음날부터 군인들이 지나 가는 길에서 삶은 콩을 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군인들은 조롱하며 지나 갔다. 삶은 콩에서 싹이 나올 수 없듯이, 삶은 달걀에서는 결코 병아리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다윗 왕은 그것이 솔로몬의 지혜임을 알고, 달걀을 꾸어 준 이와 근위병을 불러 판결을 다시 내렸다.
“삶은 달걀 한 개를 빌린 사람은 삶은 달걀 한 개로만 갚는다.”
지혜 - 삶의 ‘쉼’을 누릴 줄 아는 지혜 (12P)
*담임목사는 일정 기간 사역 변화를 위한 쉼의 시간을 갖습니다.
‘쉼에 대한 배종부 목사의 고뇌’ 참조
안식의 시간을 떠나면서 읽는 영적 독서 – ‘인생 수업, 상실 수업’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3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절
사도 요한은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때 비둘기를 키우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장로가 사냥을 다녀 오는 길에 요한 사도의 집을 지나가다가 그가 새를 데리고 노는 것을 보았다. 그 장로는 요한 사도에게 그런 하찮은 일로 시간을 보낸다고 부드럽게 핀잔을 주었다. 요한 사도는 그 사냥꾼 장로의 활을 보면서 활 줄이 늘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장로는, “네! 사냥을 하지 않을 때는 활 줄을 늘 이렇게 느슨하게 해 놓습니다. 항상 팽팽한 채 두게 되면 탄력성을 잃어 사냥할 때 실수를 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때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마음의 활을 느슨하게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화살을 더 잘 쏘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경이 긴장되어 있거나, 어떤 중압감으로 인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심으로 전도하고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쉬어야 할 필요성을 아시고 쉴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함께 데리고 가셨다. 취미, 휴가, 건전한 오락은 균형 잡힌 경건한 삶을 사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90분 주기로 생활 리듬이 고정돼 있다.
호르몬의 분비량, 근육의 긴장도, 호흡, 혈압, 맥박 이 모두 상승하는 때가 활동할 시기인데, 이런 긴장 상태는 90분이면 끝나고, 반사적으로 휴식을 필요로 하므로, 모든 기능이 저하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하루 전체를 놓고 봐도, 낮과 밤에는 현저한 생리적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적게는 90분, 크게는 밤낮을 주기로 해서 활동과 휴식,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것이다. 건강한 상태란 이렇게 긴장과 휴식의 진폭이 클 때를 말한다. 진폭은 클수록 좋다. 일할 땐 전력 투구하고, 쉴 땐 푹 쉬는 것이다. 수렵 민족인 서구인은 맹수는 물론,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가슴이 뛰고 온 몸엔 땀이 흐르지만, 사냥이 끝나면 다리 쭉 뻗고 쉰다.
농경민인 우리는 일하며 쉬고, 쉬며 일한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니다. 농사는 사냥처럼 가슴이 뜀박질 하도록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이 남아 있어서 우리의 사무실은 노는 건지 일하는 건지 구분이 안될 때가 많다. 담배 피우고 잡담하고 바둑 두느라, 일이 제 시간에 끝날 수 없다.
6시 퇴근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서구인은 오전, 오후 두 차례의 커피 타임이 있다. 대신 일하는 동안에는 잡담은커녕, 긴장 일색이다.
우리 생활도 긴장과 이완의 진폭이 커야 한다. 단잠을 자려면 낮 동안 열심히 뛰어야 한다.
하룻밤의 휴식을 찾아서
‘지혜의 슬픔’은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그리보에도프의 작품이다.
주인공 차츠키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슬퍼하는 진보적 사상의 대표자. 3년 만에 유럽에서 모스크바로 돌아 온 차츠키는 여전히 무지하고 완고한 귀족과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지식층의 생활 태도를 보고 신랄한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고, 애인에게 절교를 당하게 되어, 다시금 고향을 떠나야만 하게 된다. 자기가 사는 세계의 가공스러운 정도의 비속함에 대해 절망한 차츠키는 다음과 같이 비통한 말을 한다.
“마차를 타고 끝 없는 평원을 달리노라면 언제나 앞에 무엇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밝고 파릇 파릇한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하여 한 시간 두 시간 지나 하루의 여행을 계속하고... 하룻밤의 휴식을 찾아 말을 빨리 몰아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도 끝 없이 넓은 평원, 공허하고 죽음 속에 갇힌 황야일 뿐인 것이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은 아시아 국가 중 우리나라 최고 경영자들의 휴가 일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휴가를 가도 국내에만 머문다고 꼬집었다. 예전 같으면 그 근면성이 부러움을 샀겠지만, 지금은 휴가도 못 가고 일만 하니 그 머리에서 무슨 전략이 나오겠느냐는 비웃음을 받게 된다.
프랑스는 ‘바캉스’ 문화를 이미 정착시켰다. 대부분의 도시 근로자들이 여름철 약 한 달 가량 가족과 함께 도시를 탈출한다. ‘바캉스’ 자체가 본래 ‘비운다’는 뜻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여름 바캉스를 위해서 일년 내내 저축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매우 가치가 있다.
첫째, 가족끼리의 결속이 강화된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준비하고 행동하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고, 정도 깊어진다.
둘째, 문화 예술에 참여하는 기회가 커진다.
바캉스 시즌에는 전국 관광지나 위락시설에서 연극, 무용, 연주회 등이 열리고, 크고 작은 축제들이 이어진다. 이런 활동에 참여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고 의욕을 북돋우게 된다.
셋째,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선진국 사람들은 휴가 갈 때, 책을 가지고 떠나는 습관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하면 창의성 개발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는 그 동안 ‘일’ 은 미덕이고 ‘휴식’은 악덕시 해 온 경향이 있다. 근면 성실과 내핍 절약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인 노동 집약적 산업사회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치 창조형 휴가 문화로 전환되어야 한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속에는 꼭 필요한 때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뭔가를 정신 없이 하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피곤함이 경건함 다음 가는 신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하여 자랑 삼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바람직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심으로써 휴식의 필요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꼭 필요할 때 휴식을 취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허락하신 휴식의 때를 지혜롭게 누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 당신이 취하고 있는 휴식은 당신의 삶에 활력소가 되고 있는지요?
현명하게 취하는 휴식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얻는 것이다.
휴식에 대하여...
일 속에 숨겨진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휴식을 잘 사용하는 크리스챤, 또한 영혼의 휴식을 누리는 크리스챤 직업인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식은 '몸과 마음 푹 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푹 쉬는 것만 으로 휴식을 정의하기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휴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크리스챤은 다음 다섯가지 측면에서 휴식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 일 자체의 의미를 깨닫고, 일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
일을 '의무'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 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직업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을 사회와 나와의 관계로 파악하는 대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파악할 때 휴식의 바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이 정해 주신 휴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하루를 휴식하도록 하셨습니다. 주일을 잘 보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주일 (구약의 안식일) 을 제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월요일에 출근할 의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땀 흘려 일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6일에 손을 놓고, 예배하며 쉬도록 하신 대로 주일을 보냄으로써 휴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째. 저녁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 기업의 중간 관리자 가운데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사람은 7명 중 1명에 불과합니다. 이 점은 가족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자신에게도 휴식이 없음을 뜻합니다. 국민 소득 1만불 시대인 우리나라 실정상 8시간만 일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그렇지만 그 부족한 시간을 아침에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일찍 퇴근해서 저녁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은 몸과 마음을 쉬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을 기쁨과 화목으로 끌어 주는 좋은 약이기도 합니다.
네째, 일정한 기간을 떼어서 내 놓은 휴식입니다.
이런 휴식으로 이스라엘에는 절기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휴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휴가는 종종 지나치거나 소모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다시 일에 임하기 위한 재충전의 기간이며,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평가하고 점검하는 기간이어야 합니다. 휴가를 사용하기 전에 계획하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는 사람에게는 일 년에 한 두 차례의 휴가가 꼭 필요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신뢰할 때 진정한 휴식이 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육체와 정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직정한 휴식은 영혼의 휴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밤낮으로 일했지만, 피곤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짐을 벗어 놓고 쉬는 사람,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휴식이 있습니다.
휴식은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절제된 휴식은 미국을 아름답게 건설했지만, 휴식이 행락이 되고 목표가 되어 버린 미국은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지나친 휴식은 경제생활 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망치게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할 것을 명령 하셨습니다. 다음 학기를 준비할 때의 방학은 아름다운 휴식이지만, 졸업 후에 계속되는 방학은 아름 답지 않습니다.
일 속에 숨겨져 있는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휴식을 잘 사용하는 크리스챤, 또한 영혼의 휴식을 누리며 사는 크리스챤 직업인의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인생수업,상실수업-
안식의 시간을 떠나면서 읽는 영적 독서>
*담임목사는 일정기간 사역변화를 위한 쉼의 시간을 갖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류시화 역, <인생수업>,<상실수업> 2권의 책을 꼭 사서 읽으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엘리자베스는,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 났다. 자신과 똑 같은 모습의 다른 두 자매를 바라 보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평생 놓지 않았다.
스위스 시골에서 자란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보면서 죽는 것에 대해 일찍 생각하게 되었다. 공포에 직면하여 죽기 전, 그 남자는 이웃의 아이들을 그의 방으로 불러,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농장을 꾸려 나가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경험은 어린 엘리자베스에게 ‘큰 자부심이자 기쁨’으로 남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 아홉 살의 나이로 자원 봉사 활동에 나선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마이데넥 유대인 수용소에서 인생을 바칠 소명을 발견한다.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들이 지옥 같은 수용소 벽에 수 없이 그려 놓은, 환생을 상징하는 나비 들을 보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그녀는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한다. 이후 뉴욕,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 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는데, 의료진들이 환자의 심박수, 심전도, 폐기능 등에만 관심을 가질 뿐,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앞장 서서 의사와 간호사, 의대생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죽어 가는 이들과의 수 많은 대화를 통해 어떻게 죽느냐는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녀가 말기 환자 5백 여 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써낸 (죽음의 순간)은 전세계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고, 그녀는 ‘죽은’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 이후 20여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학술 세미나와 워크숍들로부터 가장 많은 부름을 받는 정신 의학자가 된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으로 기록된다.
말년에 이르러 온 몸이 마비되며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을 한 엘리자베스는 70세가 되던 해에 쓴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를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그녀는 죽음에 관한 최초의 학문적 정리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비할 바 없이 귀한 가르침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가르침을 전하며 살았다.
“인생수업 life lesons”은 그녀가 살아 가는 동안 인생의 진실들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을 마지막 저서로, 그녀는 2004년 8월 24일 눈을 감았다.
맑은 머리와 즐거운 기분으로 집중으로 일했을 때, 일의 효율은 높아지고 양질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귀 기울여 들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이청득심)/
영혼의 귀를 열어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 상대가 누구이든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축복은 우리 삶에 들어 오시는 하나님이시고, 능력은 우리 삶에서 나가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잘 되고 성공하는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이다. 부자가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 사이, 축복과 축복 사이에는 감사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감사하는 사람은 남아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자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으로 일하면서 어느 순간 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일을 즐기는 그들은 날마다 설레는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일터로 향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성공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과 감사가 있다. 자신의 일을 감사히 생각하고 여길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하찮은 허드렛 일이라도 행복하게 여기고, 결국 그 일로 성공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반드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고, 자신의 일을 감사하고, 그 일을 즐기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 사람은 사람들의 사랑과 환영, 그리고 인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따라 오게 된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면서 감사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삶은 날마다 소풍 가는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된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배웠는가?)
모든 끝맺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작은 찬란한 모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모험은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모험들이 그렇듯이 두려움의 순간들도 있을 것이고 기쁨, 평화, 슬픔, 좌절, 근심, 걱정 등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만약 당신이 잠시 동안 조용히 침묵을 하고 내면의 소리, 즉 당신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면 당신이 사는 세계는 안전하고 어떤 문제라도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선 당신은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삶 그 자체를 믿고, 신을 믿고, 당신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당신이 믿기 시작할 때 모든 문제들은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안개처럼 없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삶의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에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20C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케슬러와 함께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 백명을 만나 왔고, 그들로부터 듣게 된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정리하여 (인생수업)을 출간하게 되었다.
(인생수업)이 죽음을 맞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메시지라면, (상실수업)은 남겨질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인생수업)이 죽음 앞에서 삶의 열정을 제시하는 책이라면, (상실수업)은 죽음 뒤에 더욱 타오르게 될 삶의 열정을 불러 일으켜 주는 책이다.
감당 못할 만큼 신은 가혹하지 않다는 것,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됐을 때 느껴지는 분노와 통곡, 혹은 원망과 자존심, 그밖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 만가지의 감정을 ‘제발 부인하지 말고, 100% 드러 내 놓아라’고 저자는 부탁한다.
이는 삶의 마감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네.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 가는 반복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상실은 ‘모든 것이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 되는 삶’의 증거에 다름 아니다.
상실수업/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녀가 죽음 직전에 완성 시킨 마지막 저서. 그녀는 세상을 떠나며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 그것도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이제 ‘상실’이라는 주제를 조명한다.
마음 깊은 곳에 호소하는 이 책은 책장에 반드시 꽂혀 있어야 할 책이다. 진실이란 그 만큼 깊이 감춰지는 보석, 사람은 무엇을 보던지 간에 깊이 봐야 하는 것이다.
상실은, 가장 큰 인생수업이다.
당신이 살아 가면서 무언가 잃어 간 것들에 대해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 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 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 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의 증거가 된다.
황홀하지 않으면 새벽을 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지금 그것을 챙겨 보십시오. (조선일보 이주향의 책 향기)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동안에 그치지 말라.”
인생수업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적이 언제였는가?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적은 언제였는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는가?
이것은 다시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경험들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은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듭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자.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 만의 여행이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죽음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 제로가 된다. 삶의 끝에서 아무도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학위를 가졌으며, 얼마나 큰 집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좋은 고급차를 굴리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은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전정한 힘과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는 미술 작품 속에 있습니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갖고 나온 것에 감사하는 일, 자신의 독특함에 감사하는 일, 백만년이 흐른다 해도 당신과 똑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과 똑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감사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더 많은 물건들과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한번도 감사의 근육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되어도 감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삶이 ‘충분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날들이 ‘충분할’ 때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은 이대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기분이 드는 걸 낯설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삶이고, 난 더 이상 필요 없어.” 하고 말할 수 있다면 큰 힘과 행운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힘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너무도 무지합니다. 진정한 힘은 자신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더 많이 축적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완전히 잊은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모든 사람이 정해진 길을 걸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진정한 힘이 생겨 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영원한 하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 곳에 왔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가?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동시에, 즐거움으로부터 일을 떼어 놓기 위해 애써야 한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 들이면 놀이를 잊어 버리게 된다. 놀이는 이따금씩 주어지는 휴식의 순간 이상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상실은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 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준다. 관계는 자신을 일깨워 주고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 준다. 두려운, 분노, 죄책감 조차도 훌륭한 교사다.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도 성장하고 있다. 삶은 그 특별한 매력을 나타 내기 위해 굴곡이 있는 것이다.
배움과 깨달음의 책
‘인생수업’ 에는 ‘행복하라’ 는 숙제 뿐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은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인생의 교사들이다. 삶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의 강으로 내몰린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들려 주는 교훈은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로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해냈다.
두 사람은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 백명을 인터뷰 해, 살아 있는 우리에게 강의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강의의 제목은 “인생수업”이다.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태어 나는 순간 누구도 예외 없이 삶이라는 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수업 시간이 하루 24시간인 학교에... 살아 있는 한 수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충분이 배우지 못하면 수업은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이다.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인내, 받아 들임, 용서, 행복... 등이 이 학교의 과목들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 지상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는 것을 일깨운다. 우리가 한 말과 행동이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죽어 가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삶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이해하고, 놀이를 하고, 별들을 바라 볼 기회를 주었으니까...
우리가 지구로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나비가 누에를 벗고 날아 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허락된다. 시간이 되면 우리는 집에서 신에게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나비처럼 떠날 수 있고,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배워야 과목들은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인내, 받아 들임, 용서, 행복 등이다. 나아 가 이 수업은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것이 이 수업의 완성이다. 그 ‘나’ 는 죽음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모습을 바꿔가며 배움을 계속하는 존재인가?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직면한 이들의 가르침은 어떤 종교의 설교 보다도 뛰어나다. 그들은 책이니 경전에서 얻은 경구가 아닌, 자신들의 육성으로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때로 부조리하고, 하찮고, 무의미한 것 투성이인 이 삶에서 추구할 것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즐겁지 않은데도 웃고, 본질에 가 닿지 않으면서도 화를 내고, 황홀하지 않은 데도 새벽을 맞이한다. 가슴이 맞닿지 않는데도 관계를 맺고, 절망적이지만 밥을 먹는다.
죽음은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 가지 말라’고...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 인 것이다.
이 책 속의 숱한 등장 인물들의 말을 빌리면, 삶은 하나의 기회이며, 아름다음이고 놀이이다. 그것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세상이 보여 주는 최상의 것을 배우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살아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 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 거예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은 여인, 삶과 죽음에 관한 한 모든 이들의 교사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자신에게 다가 오는 죽음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악기를 배웠더라면 연주하고 노래할 텐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음을 아쉬워 하면서...
비록 모든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할지라도, 세상은 그녀로 인해 더 나은 곳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을 바쳐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의 가슴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한 의사이며, 사상가였다.
왜 우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를 물을까?
그것은 우리가 해 아래서 살기 때문이다. 나이는 태양을 중심하고 살아 가는 인생의 연륜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면 일년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살고 있기에 나이가 있고 죽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살면 나이가 없다.
시84:10-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 하루가 천년, 천년이 하루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다. 요3:14-15, 요24-29.
나이가 필요 없다.
하나님 안에 살면 나이가 없다.
그러나 시90:12-나이를 헤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위해서-죽음의 기원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위해서-죄를, 삶의 기회를 위해서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위대한 사람과 대면할 때, 우리는 위대한 것에 이끌린다.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인간은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와 같다고...
태양이 밖에 있을 때는 반짝이고 빛이 나지만, 어둠이 드리울 때 스테인드그라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안의 빛에서 나타 난다.
폭풍으로부터 골짜기 들을 보호해야만 할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폭풍우로 인해 생겨난 그랜드캐년 같은 장관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실패를 알고, 고통을 겪고, 상실을 경험하며, 깊은 구덩이에 빠져 길을 찾아 헤맨 이들이다.
그들은 동정심과 따뜻함, 사람과 배려로 가득한, 곧 삶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기러기들은 언데 태양을 향해 날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알까?
우리 인간은 떠날 시간이 되었음을 어떻게 알까?
인간의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이 이해하게 해 준 한 여성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이 곳에서는 ‘이 곳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인류에게 이 보다 더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도 죽음은 해당된다. 그러므로 너무 늦을 때까지 삶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
2004년 8월. 78세의 나이에 에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그렇게 은하수로 춤추러 떠났다. 40년 동안 삶과 죽음을 화두로 삼은 연구자 답게 그녀의 장례식 또한 독특했다. 가족적으로 치러진 고별식은 흑인 성가대가 부르는 성가곡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리고 장례식 때는 유대교 랍비를 비롯해, 아메리카 원주민 치료사, 티베트 불교 린포체 등 평소 그녀와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성직자들이 미리 받은 종이 봉투에서도 수 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날아 가는 장면을 보는 것 만으로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드디어 번데기에서 부화해 나비가 되어 죽음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계에 태어 났음을...
그녀가 ‘나비의 수수께끼’에 빠진 것은 소녀 시절 자원 봉사자로 폴란드 마이데넥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였다. 수용소 내부 벽에는 곳곳에 손톱이나 돌조각으로 새긴 나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왜 나비일까?
그녀는 무척 궁금했다.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그로부터 스무 해가 흘러 스위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뉴욕과 시카고병원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하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로도 유체 이탈 등 다양한 신비 현상을 경험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몸은 나비가 날아 오르는 번데기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임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수용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도 그녀처럼 ‘영혼의 영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인생 수업”을 마무리 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평생을 죽어 가는 사람들 곁에서 죽음에 대한 책을 써온 나는 꼭 책 한 권을 더 쓰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책이 아니라, 삶과 살아 가는 일에 대한 책 말이다. 삶의 끝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글로 남기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아직까지 삶에 도전하고 그 결과를 음미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사한다.”
작별을 고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 곳에 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엔 행복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숙제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한 적이 언제였는가?
마지막으로 멀리 떠나 본 적이 언제였는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껴안아 본 적이 언제였는가?
살고 live, 사랑하고 love, 웃으라 laugh, 그리고 배우라 learn.
이것이 우리가 이 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2022.1.18.화. 역경의 열매 김의식 목사 1. 치유 목회 원동력은 ‘지역 의식 뛰어 넘은 십자가 사랑’ (10P)
약력:한양대 공과대, 성서침례신학교, 장신대 신대원(교역학 석사), 장신대 대학원(신학석사),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 호남신대(명예신학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부회록 서기 및 서기 역임, 현 치유하는교회 위임목사,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혹독한 지역 차별의 상처·고통 받은 이들
치유하기 위해 대학서 상담 치유학 전공
십자가 사랑 체험 후 치유의 은혜 충만
내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262번지다. 1958년 4월 20일 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영산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호남 출신이어서 받은 혜택 보다는 상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경험한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 갈 때도 그랬고, 이후 목회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신학대학원 시절에도 호남 출신 전도사들은 서울 시내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자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호남 출신 목사가 서울 지역 교회에 들어 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한다.
혹독한 지역 차별의 상처와 고통의 연단 속에서 나는 호남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졌고, 차별받는 불쌍한(?) 호남을 더 사랑하게 됐다. 일찍이 이순신 장군도 “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호남의 지역 의식을 뛰어 넘어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한 후, 이보다 더 소중한 치유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상담치유학을 전공했고, 이 모든 것이 치유 목회의 원동력이며, 은혜의 가시가 됐다.
아버님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인데, 고향에서 사랑하는 형제를 잃었고, 학교도 소학교만 나오셨다. 해방 직후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고향을 떠나 당시 무안군에서 하나 밖에 없었던 성모의원에서 마동안 장로님을 만나셨다. 그 분께 신앙과 의술을 배워 1950년 약종상 면허시험(현 약사고시)에 합격해, 영생당 약방을 여셨다. 또 심정택 목사님을 모셔 영산포중앙교회를 개척하셨고, 초대 장로로서 1985년 전남노회(전남노회 광주노회 광주동노회 분립 전) 노회장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을 다하셨다. 그리하여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 때 총회장 표창까지 받으셨다.
충성의 결과로 영생당약방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계속 확장돼, 나주군 광산군 장흥군 강진군 영암군 함평군 무안군에 이르기까지 도매로 약을 공급하는 커다란 약방이 됐다. 당시 집에서 일하던 직원만 해도 상주 직원과 배달 직원, 가정부를 포함해 1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나주군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 아들로서 상당히 윤택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할아버지 김달복 집사님과 할머니 박연심 집사님을 봉양했을 뿐 아니라, 여섯 동생과 그 가족들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뒷바라지 하셨다.
그 결과 모두 의사 약사 간호사 교수 건축사 미용사가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2) “의식인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어머니의 폭탄 선언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두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어릴 적 큰 약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에 윤택한 가정 환경에서 살았으나 학교와 교회에서 문제아였다.
부모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내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 받아 교회를 섬기며 각각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그리고 목사 가정을 이뤄 복 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셋째인 나에게 있었다. 부모님은 약방이나 교회 일로 늘 바쁘셔서 여러 자녀에게 깊은 사랑을 쏟아 주기 힘들었다. 더욱이 나는 남매 중 한가운데에 샌드위치가 되어 위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 상처는 처음엔 부모님에 대한 불순종과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저것은 형이나 누나는 안 닮고, 동생들 만도 못하니,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것을 낳았는지 모르겠어야!”하고 한탄을 쏟아 놓으셨다.
그 때마다 내 상처는 더 깊어졌고, 점점 그 증상이 가정 밖에서도 나왔다. 학교에서 애들을 얼마나 두들겨 팼던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 엄마들이 약값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 왔다. 그나마 아버지가 약방을 경영해서 그 약값을 댈 수 있었다.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교회에 처음 오는 아이들을 못 나오게 하고 여자 아이 들을 괴롭혔다. 선생님들은 선임 장로 아들인 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나를 예배당 밖으로 끌고 나가 “의식아! 너는 왜 1년 내내 아프지도 않냐?”고 하셨다. 그 때 나는 선생님이 내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원기소와 에비오제(당시 어린이 영양제)를 먹어서 튼튼해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약방을 해서 원기소와 에비오제를 군것질거리처럼 먹었으니 얼마나 튼튼했겠는가? 나는 학교 폭력을 넘어 교회 폭력의 주범이 돼 있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동안 어머니의 속은 썩을 대로 썩어만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 난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우리 5남매를 모두 불러 모으셨다. 그러더니 다짜 고짜 “다른 자식은 다 내가 낳았지만, 의식이 저것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폭탄 선언을 하셨다.
그 날 어머니의 폭탄선언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평생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어린 내가 그날 저녁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53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저녁의 기억 만은 내 머릿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 잤는데 그날 밤에는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 가까이 다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방구석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베개를 적실 정도로 한 없이 울면서 속으로 외쳤다.
“엄마! 엄마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다음 날부터 더 이상 의붓 부모님(?)과 의붓 형제들(?)과 함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디 갈 만한 곳도 없었기에 나는 열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아버지 약방의 극약통에 있던 사이나(청산가리)를 꺼내 먹으려 했는데 크기가 주먹만 해서 한 입에 먹을 수 없었다. 깨뜨려서 먹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려고 하셨던지, 잘 깨지지 않았다.
그 날 자살 시도(?)는 실패였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는 나를 점점 내성적으로 만들었고 위축시켰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3) 금고 손대려다 아버지께 들켜 “커서 뭐가 되려고…”
김의식(뒷줄 오른쪽 두 번째) 목사의 아버지가 1998년 전남 나주 영산포중앙교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될 당시 찍은 가족 사진.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방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 와 “의식아, 엄마가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다 너 잘 되라고 하신 거야!” 하면서 위로해 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당시 나를 붙들어 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약방에서 손님을 대하고 계실 때 그 뒤편 금고에서 돈을 훔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신 아버지가 돌아 보시는 바람에 그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갑자기 얼음이 되어서 금고에서 손을 슬며시 뺐다. 손님이 가신 후 아버지는 나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 가셨다. 나는 그날 죽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오히려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의식아! 벌써부터 도둑질을 하면 커서 무엇이 되겠냐…”
나는 지금도 그 날 저녁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2남 3녀 자녀들에게 무언의 신앙교육을 하셨다. 자녀들이 모이면 아버지는 늘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또 예배에는 절대 빠지지 말라고 하셨다. 부모님이 삶으로 보여 주신 신앙의 모범을 통해 우리 자녀들에게 남기신 가훈은 첫째 하나님 중심, 둘째 성경 중심, 셋째 교회 중심이었다. 자녀들에게 물질은 남겨 주시지 않았지만, 우리 남매들을 오늘날 목사 장로 권사가 되게 만들었던 가장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 주셨다.
아버지는 장로 은퇴 후 고향 교회의 원로장로로 계시다가 2001년, 50여 년을 경영하던 영생당 약방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 서울로 오셨다. 그런데 당시 교회가 극심한 불화와 분쟁 가운데 있었다. 어떤 장로는 나를 회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불러 위협과 압박을 가하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우리 아들은 아버지 말씀 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잘 듣는다”라고 말씀하시라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과 10년 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다.
2011년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얼마 전에 한번은 새벽기도회를 모시고 가는데, 갑자기 나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가 평생 교회와 노회, 총회를 겪어 봤지만 이렇게 힘든 교회는 처음인데, 김 목사가 잘 이겨 내서 너무도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아버지 말씀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아버지께 불효만 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다.
부모님은 고향의 영산포중앙교회를 세 번 건축하시면서 건축비 70%를 감당하실 정도로 평생을 주님과 교인, 이웃을 위해 바치고 나누고 베풀며 사시다 가셨다. 그리고 마지막 시신까지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하셨다. 부모님이 우리 남매들에게 남기신 신앙 유산은 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말씀이다. 평생을 이 말씀대로 사시다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읽고 전할 때마다 그리운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4) "주님! 저 좀 살려 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성령 임재
의대 입학 좌절하며 춤과 술로 방황하다,
원인불명 병 걸려 병원 치료도 차도 없어,
성경 읽는 순간 질병의 고통 의미 깨달아...
김의식(화살표) 목사가 1978년 서울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 입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양대 재학 시절 성령을 통한 병 고침을 받고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숭일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슈바이처 선교사의 삶에 감명을 받아 재수하며 의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셨다. 그 해 11월 종강 파티를 마치던 날 밤 서울 마포구 집으로 돌아 와 쓰러졌다.
처음에는 몸살 감기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2주 동안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어도 고열과 오한이 그치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신촌의 작은 아버지 병원이며 고향의 전남대병원을 찾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다시 서울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고향 집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 있을 때였다. 장롱 선반 위에 있는 아버지의 성경책이 눈 앞에 들어 왔다. 그 때 저 성경책을 붙잡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강렬한 충동이 솟구쳤다. 성경책을 붙들고 엎드려서 “하나님 아버지!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대로 순종할 테니. 저 좀 살려 주십시오!”하고 성경책을 펼쳤다. 그때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이 눈에 들어 왔다.
말씀을 읽는 순간 방황했던 대학 생활이 동영상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그 때 비로소 내가 왜 이 질병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쳐야 했는지 깨달았다.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저를 한 번만 살려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면 남은 삶을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간절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얼마 동안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울부짖었을까? 갑자기 머리와 등을 따라 성령님의 불이 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신다는 약속의 징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기력을 되찾은지 사흘도 안 되어 나는 78년 1월 1일 고향 교회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주의 종으로서 헌신기도를 올렸다. 두 달간 요양 후 서울에 올라 와 연세대 신학대에 편입하고자 했으나, 이과에서 문과로 편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윤 은혜성서침례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야간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다.
공대 강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신학교 도서관으로 달려 갔다. 그 때 포스터 선교사님을 만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미국 침례교의 복음주의 성서신학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더구나 포스터 선교사님이 미국의 유명한 영적 강해 설교가인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강해 설교의 기초를 닦았다. 그렇게 성서침례신학교를 3년 간 장학생으로 다니고 최우수 졸업생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의 종으로 부르실 거면 왜 공학을 공부하게 하셨을까 하는 의혹을 품었다. 그런데 은혜성서침례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맡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증거했더니, 많은 학생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12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중고등부가 3년 뒤에는 70여 명으로 부흥했고, 목회자가 7명이나 나왔다. 그 가운데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신학대학원인 미국의 서남침례신학대학원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 김종환 박사도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역경의 열매-김의식 (5) 결혼 후 독립선언… 신혼여행 다녀 오니, 13만원이 전부
김의식(왼쪽) 목사와 문채성 사모가 1981년 광주제일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와 문 사모는 가난한 신혼생활 중에도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포스터 선교사님께서는 군대를 마치고 미국에서 석·박사학위 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도록 해 줄 테니, 유학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셨다. 장로교회 출신이었던 나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 노회장까지 역임하셨던 아버지는 “어떻게 부자 간에 장로교와 침례교로 나뉠 수 있겠냐. 네가 그렇게 좋다 하는 복음을 장로교회에 와서 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눈물로 권면하셨다.
그래서 나는 장신대 신대원 한경직 목사님 특별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그 때 장신대 교무과에 매형의 매형이 되시는 권길웅 장로님이 교무과장으로 있어서 시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시험으로는 2등이었는데도, 최종 결과는 탈락으로 나왔다. 그것을 보고 권장로님이 연락을 주셔서 총회장을 지내신 한완석 광주제일교회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한 목사님은 바쁜 와중에도 그날 밤 아버지와 함께 야간열차로 서울로 올라 오셔서 다음 날 이종성 학장님을 만나셨다. 그 때 이 학장님은 병역 미필을 탈락 이유로 내세우셨다. 그런데 그 후에 보니까 병역 미필자가 계속 한경직 목사님 특별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이렇게 장신대와 쓰라린 만남은 시작됐다. 나는 1981년 3월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일반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해 3월 21일 이대 약대를 졸업한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할 때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부모님! 결혼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겠습니다.” 라고 말 한 마디를 잘못했다가 난생 처음 해 보는 고생 길에 접어 들었다.
신혼여행을 다녀 오니 수중에 13만원이 남았다. 군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 아들이 갑작스럽게 가난해지고 나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신대원 공부를 시작하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배우면서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성경’(The Interlinear Bible)이 너무 갖고 싶었다. 전 4권으로 당시 2만원이었다. 그래서 새벽 마다 기도했다.
어느 날 오전 10시 쯤 혼인신고를 위해 동사무소를 찾아 갔을 때 기적의 응답이 일어 났다. 입구에 막 들어 서는데 오른쪽 바닥에 5,000원짜리가 구겨져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 오지 않는가?
그 순간 다른 사람이 먼저 집을까 봐, 몸을 날렸다. 그러나 전도사 양심에 도저히 그냥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안 보이게 돈을 손에 움켜 쥐고 제발 주인이 안 나타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외쳤다.
“여기 돈 잃어 버린 사람 있어요?”
사람들이 힐끗 힐끗 쳐다 보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한 번만 묻기가 아쉬워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런데 아무도 나타 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주머니에 5,000원짜리 구겨진 돈을 집어 넣었다.
혼인신고를 마치자 마자 동사무소에서 나와 골목으로 들어 섰다. 구겨진 돈을 펴서 확인했는데 한 장이 아니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딱 2만원이었다.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금도 교회 목양실 한쪽에 놓인 4권의 원어 성경을 볼 때 마다 40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 “저 성경은 주님이 선물로 주신 성경이다!”
역경의 열매-김의식 (6) 괴롭히던 선임이 싸 놓은 더블백엔 ‘폐의류만 가득’
경비 근무 설 때마다 기합 주고 때리다.
다른 부대 전출 가게 되자 골탕 먹여,
사과 전화에 용서, 전도 기회로 삼아...
김의식 목사가 1983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군종 사병 생활을 하던 모습.
김 목사는 군 생활이 영성은 물론 체력과 정신력을 연단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1981년 7월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청와대 경호부대)으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30경비단에 가게 된 데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혜성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금요철야 기도회를 인도할 때였다. 칠순이 넘고 몸도 불편하신 김순례 권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전도사님, 서울 시내 한복판에 배치돼,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마음속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고 하면 광화문 네거리인데,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서서 근무하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권사님의 기도는 정확하게 응답을 받았다. 내가 배치 받은 곳은 청와대 앞 당시 중앙청 뒤 경호부대였다.
30경비단 생활을 가장 견디기 어렵고 힘들게 한 사람은 같은 소대의 불교 군종 사병 김모 상병이었다. 그는 주·야간 복초(두 사람) 경비 근무 때마다 이병인 나를 데리고 가서 질문에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기합을 주고, 개머리 판으로 머리를 때렸다. 그 때마다 M16 소총으로 쏴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모든 분노와 울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한 덕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는가? 그래서 나도 “주여! 원수 같은 그를 내 감정으로는 용서하기 어렵지만,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82년 1월 1일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이현우 당시 30경비단 단장(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 경호실장)이 사령부 작전 참모로 갈 때, 나를 당번병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내무반에 돌아 가자 뜻밖에도 그토록 나를 핍박하던 김 상병이 내 더블백 짐을 다 싸 놓았다. ‘마지막이라 선행을 베푸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출 신고를 마치고 나는 소대를 돌아 보지도 않고, 북악산을 5분 만에 뛰어 내려 왔다. 그런데 사령부에 도착해 더블백을 펼쳤더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짐 안에는 훈련소에서 받았던 군복, 내의, 겨울용 내복, 양말은 하나도 없고, 다 떨어진 폐의류만 가득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김 상병은 병장이 되어 전역했는데, 어느 날 밤 늦게 사령부 군종부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술에 취해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김 일병, 다 용서해라!”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김 병장님, 저는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 하지 마시고 가까운 교회에 꼭 나가십시오” 하고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불교 군종 사병이었던 그에게 교회 나가라고 한 것이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생명력 없는 종교생활을 하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변화된 삶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30경비단과 수도경비사령부 생활은 영적인 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강인한 정신력, 굳건한 체력에 이르기까지 치유 목회를 위한 영·혼·육을 연단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7) 림인식 목사의 신앙과 삶 보며 치유 목회의 틀 다져
전역 후 장로교 정통 목회 배우고 싶어,
아버지와 림 목사 찾아가 청빙 부탁하자,
세 가지 질문 후 교육전도사로 받아 줘...
김의식(왼쪽) 목사가 2008년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와 함께 한 모습.
김 목사는 1984년 노량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부터 림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1983년 10월 군대 전역 후 봉사할 교회를 찾아 기도를 시작했다. 누나의 시아버지인 김두현 광주 서석교회 장로님이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회계였고, 총회장은 림인식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 김 장로님께 림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노량진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알아 봐 달라고 부탁 드렸다. 당시 림 목사님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데, 림 목사님께 장로교 정통 목회를 배우고 싶었다.
아마 총회 임원회가 열렸던 날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함께 총회로 림 목사님을 찾아 뵈었다. 아버지는 모처럼 고급 식당에서 림 목사님과 김 장로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 하셨지만, 림 목사님이 극구 사양을 하셔서 종로5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앞 1,000원짜리 백반집에 갔다. 그 만큼 림 목사님은 첫 인상부터 소박하셨다.
림 목사님께서는 그 때 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셨다. “우리 노량진교회는 사례가 적은데, 밥 굶을 각오가 되어 있수?” “네, 저는 굶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이 많은데, 잠 못 잘 각오도 되어 있수?” “네, 잠 못 잘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속 썩이는 교인이 많은데, 참고 이겨 낼 각오도 되어 있수?” “네, 맡겨만 주시면 죽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오구려!”
세 가지 질문으로 노량진교회 교육전도사 면접에 통과한 셈이었다.
그 후 89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노량진교회 교육전도사부터 시작해 심방 전도사, 교육 목사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충성을 다했다. 노량진교회에는 어려운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치유 목회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신앙과 목회의 아버지이신 림 목사님께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고 축복이었다.
림 목사님의 신앙과 인품, 삶의 모범을 따라 나는 치유 목회의 틀을 잡아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보다 먼저 소년부를 맡고 계셨던 김광식 전도사님(현 제주 충신교회 은퇴목사)을 자문하며, 토요일 학교 앞 전도에 힘쓴 결과 200여 명 모이던 소년부를 600명에 이르도록 부흥시켰다. 이후 신혼 가정부도 이어 받아 매 주일 성경공부와 친교 모임을 통해 2배로 부흥시켰다. 10여 명 모이던 대학부를 맡았을 때는 여름 농촌 전도 봉사활동과 영성훈련을 강하게 해 기적의 응답을 체험했다. 교구 심방 전도사를 맡아서도 2년 만에 1.5배의 부흥이 일어 났다.
모든 부흥에는 먼저 교사들과 구역장들을 올바로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과 동역하면서 목표를 세우고 뜨겁게 기도하며 전도, 심방에 힘쓴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 부서든지 그 부서의 지도자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훈련 시키면서 앞장서 솔선수범했던 것이 부흥의 요인이었다.
노량진교회에서의 사역은 부흥의 기쁨을 누렸을 뿐 아니라 가장 존경하는 림 목사님 밑에서 목회의 틀을 잡았기에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치유 목회 훈련기였다.
역경의 열매 김의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 가시나요?”
사고로 딸 잃고 주님께 원망했지만,
같은 고통 겪은 성도와 공감 나누며,
남은 삶 치유 사역 위해 살기로 결심
김의식(왼쪽)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 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87년 11월 3일,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다섯 살 딸 아이 한나가 “아빠! 해태 종합선물세트 하나 사 주면 안 돼요?” 라고 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나야! 이제 성탄절도 가까워지니까 성탄절에 아빠가 선물하면 안 될까?” 하고 말했다. ‘아니요’가 없었던 착한 딸은 “네” 라고 대답했지만, 못내 아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흘 후, 그 날도 밤 늦게 퇴근했는데, 딸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 딸 아이에게 약을 먹여 재운 뒤, 아내의 약국 문을 닫아 주려고 나갔다.
길어야 10분 정도 걸렸을까?
돌아 와 보니 딸아이가 1층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간 사이 딸 아이가 깨어 났는데 아빠도 없고, 대문은 밖에서 잠겨 있으니 베란다로 나와서 나를 찾다가 그만 떨어진 것이었다.
딸 아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교회에 가기만 하면 혼자 본당에 들어 가서 하나님께 항변을 시작했다.
“새벽 일찍부터 나가서 밤 늦게까지 심방하느라 쉴 틈도 없이 충성을 다했는데, 그 보상이 딸 아이를 불러 가시는 것입니까? 주님! 할 말 있으시면 한번 해 보세요!”
항변을 계속 이어 가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김 전도사,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그렇게 힘드냐. 나도 너희를 위해 단 하나 밖에 없는 죄 없는 아들을 잃었는데…”
나는 그 날 거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여! 사랑하는 딸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맡겨 주신 목회의 사명에 죽도록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나는 그 날 이후부터 비로소 목숨을 걸고 목회를 하게 됐다.
하나 밖에 없는 딸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사고로 잃고 나니 교인들 보기에도 너무 부끄러웠다. 더 나아 가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교인들을 통해서 주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 교인들이 다가 와 “전도사님, 저도 첫째를 잃었어요” “저는 막내를 잃었어요”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헨리 나우웬 박사가 말했듯이, 나의 여생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성탄 예배를 마치고 해태 종합선물세트를 샀다. 혼자 교회 봉고를 몰고 노량진 동산으로 향했다. 그 날 따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밭을 헤치고 딸 아이 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한나야! 아빠가 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물세트 사 왔어. 이렇게 늦게 사 와 미안하구나. 이제라도 아빠를 용서하고 아빠의 사랑을 받아 다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무릎 위에 하염없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