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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요한복음]
3. 하나님이 함께 하는 말씀
2019. 5. 10. 이현래 목사
요한복음 1장을 말씀하고 있다.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희랍사람들은 개념이 말과 사람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말대로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이기 때문에 수사학을 공부했다. 정치를 하려면 사람을 설득해야 하므로 언변이 좋아야 한다. 그래서 대학은 수사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희랍 사람들은 말로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말과 사람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말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보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나니까 에서가 뒤늦게 별미를 가지고 왔을 때, 희랍 사람 같으면 내가 다른 사람을 축복한 모양이니 다시 하자고 하면 된다. 그런데 이삭은 내가 축복을 다 해버려서 너를 축복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말로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으로 축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야곱이 자식들에게 마지막에 단에 대해서 말할 때는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창49:17)라고 했다. 이것은 오도 가도 못하는 자리에서 꼼짝 없이 물리는 것이다. 그렇기까지 저주의 말을 했다. 아버지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속으로 좀 밉든지 그렇게 보이더라도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는데도 아버지가 되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말과 말하는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다. 말을 해버리면 우리가 도장 찍은 것처럼 그냥 그 사람 자신인 것이다. 그 사람들은 말한 것 자체가 그냥 도장을 찍은 것이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할 때도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라고 할 때도 빛이 있으라는 것과 빛이 있다는 것이 분리가 안 된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있는 것이다. 따로 갈라져 있지 않다.
우리는 지금 희랍화 되어 있다. 지금 목사님들이 축도를 하는데 좋은 말로 축도를 한다.그것이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별효과가 없어도 축도를 한다. 나는 축도를 별로 해보지 않았지만 축도를 하고 나면 내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축복을 하면 그냥 축복이 되면 좋은데, 될지 안 될지 모른다. 결혼식에서 좋은 말씀을 했다면 그것이 그대로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진심을 다해서 했는데, 뒤에 가서 싸워서 이혼한다고 하면 참 속상하다.
희랍 세계에 오면 말과 사람이 분리된다. 이것이 편리하기는 편리하다. 말은 말대로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있으니까 적당하게 필요한대로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사람들은 그러 것이 안 된다. 그들은 말과 사람이 하나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렇게 살려면 참 어렵다. 말과 사람이 똑 같아야 되기 때문이다. 언행일치가 쉬운 것이 아니다. 언행일치가 되면 그 사람은 성인군자이다. 안 되니까 문제가 된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100% 언행일치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어렵다.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을 원시적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이 원형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말씀은 전부 히브리 사람들의 말이니까 말하는 사람과 말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고 했다.
하나님이 계시지 어떻게 말씀이 계시는가? 그런데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고 했다. 희랍사람들은 로고스가 따로 있고 사람 말이 따로 있는데,요한복음에서는 둘이 합해서 로고스를 하나님이라고 했으니까 희랍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그 사람들이 들을 때는 이상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로고스가 하나님이다.’니까 이렇게 말하면 로고스가 희랍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인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도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 말이 사람이 말하기에 따라서 다르니까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전에 성경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성경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성경대로 해도 결국 나는 나고 말은 말이다. 결국 말과 나는 하나가 아니다. 이것이 문제이다.
지식은 그렇게 말해도 된다. 지식과 나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나 따로 성경 말씀 따로 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다.하나님 말씀이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나와 하나님 말씀이 하나여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 말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학을 했다고 하나님 말씀을 하겠는가? 아니면 기도를 했다고 하나님 말씀을 할 수 있겠는가? 참 어려운 문제다.
내가 성경 말씀을 한 글자도 틀림없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이런 것은 그냥 성경일 뿐이다. 그런데 교리에 안 틀리게 말해야지,성경에 틀리지 않게 말해야지 하니까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그런데 예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이상하게 하나님과 말씀이 하나라고 딱 묶어놓았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묘하게 묶어놓았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말씀이 사람이 됐으면 당연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한 것이다. 좀 어렵고도 난해한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내가 믿는 것이 그냥 나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이기 전에는 믿는다는 것이 갓바위 돌부처를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의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은행을 신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지 않으면 연합이 안 되면 공허하다. 다 맞는 것 같은데도 공허하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해서 맞는데 이상하게 공허하다.
옛날에는 설교를 하고 나면 힘써서 했는데도 공허했다. 공허하지 않고 말씀을 했으면 그 말씀만큼 자기도 충만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말씀을 열심히 했는데, 하고나면 공허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공허하다. 천당에 간다는 소망이 없으면 공허해진다. 뭐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는 자기고 사업은 사업이다. 참 평생을 해도 어려운 문제이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문제이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정성을 다해서 해도 안 되는 문제이다.
둘이 하나가 아닌데 아무리 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잘해보려고 애를 썼고, 보다 완전하게 해보려고 했다. 보다 더 성경에 가깝게 해보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역자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산다. 그래서 설교할 때마다 ‘내 모습은 감춰주시고 하나님 말씀만 드러나게 해주소서. 듣는 자로 하여금 감동 감화하게해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단위에 올라간다. 그것이라도 안 하면 안 된다. 그것이라도 해놓으니까 마음을 놓고 올라가는 것이다. 많이 해보셨으니까 알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내 모습은 감춰주시고 하나님 말씀만 드러나게 해주십시오.’하는 이것이 되는가? 안 된다. 어떻게 나는 가려놓고 내 말만 나오겠냐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안 될 일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맡겼다는 위로가 되니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게 되면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하는 말이니까 내 말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은 내 말이지 하나님 말이 아니다. 강단에서 해도 내 말이다. 강단에서 했으니까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성령으로 했으니까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이것이 속는 것이다. 내가 한 말은 내 말이다.
이삭이 한 말은 이삭 자신이다. 이 사람은 다 줘버려서 더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의 축복이라는 것은 상속권이기도 한 것인데, 모든 권위를 위임해주는 것이다.가부장적 제도에서 아버지는 제사장이었다.그것을 다 주는 것이었다. 한 번 주었다가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다시 해야겠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논밭 문서를 다 줘놓고 도로 가져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태인들이 하는 말이 맞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생명 안에서는 맞는 말이다. 짖는 것이 개니까 짖는 것이다. 누구에게 배워서 짖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한 말은 사람의 말이다. 사람의 말인데 우리가 어떤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시인하고 듣는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게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은 어떤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들은 것이다. 내가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들을 수도 있고, 내가 했는데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성경!’하는 것도 허황하다. 교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성경이 필요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가 한 것을 확인하려면 또 성경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됨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그분과 하나됨이 필요하다.
연합(聯合)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연합이 없으면 무엇을 해도 시원하지 않다. 확신할 수 없다. 구약을 읽으면 다 약속이고 답이 없다. 신약에 오면 완전하게 답이 있지만 나에게 완전한 답이 되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약의 말씀이 도로 내게는 구약과 마찬가지가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하는 그분과 내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보니까 별 것이 다 있다. 주식회사에 대표이사가 있다. 주식회사 대표이사가 찍은 것은 완전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속았다. 주식회사 대표이사라고 도장을 받았는데, 아주 근사한 도장으로 찍었다.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가니까 주식회사가 없어졌다면 아무 효과가 없다.
주식회사는 있는데 대표이사가 바꿔져도 소용없어진다. 대표이사가 끝나더라도 대표이사의 개인도장을 받지 않으면 그 증서가 아무 소용없다. 돈을 받을 수 없다. 법인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법적인 사람이지 그냥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대표이사 도장 밑에 개인도장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건설회사 대표이사를 보면 자기 재산이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혹시 문제가 생기면 다 뺏기니까 재산을 다른 사람으로 해놓고 대표이사를 한다. 공사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아무 것도 없다. 법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모르고 했다가 큰일 날 뻔 했다. 교회당을 지으려고 하는데, 내게 몇 년간 늘 와서 공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괜찮아보였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그 사람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어서 교회에 내놓고 맡겼다. 그랬더니 이창용형제가 꼼꼼히 따져서 이 문제를 갈라냈다. 재산이 얼마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재산 조사를 해보니까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는 도장을 찍어도 우리에게는 헛일이 되는 것이었다. 아주 큰 것을 배웠다. 잘못했으면 교회당을 짓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떤 곳에서도 돈을 받지 못한다. 감옥에 보내도 돈을 받을 수 없다. 아무 것도 없으니까 돈을 받아낼 수가 없다.
희랍화되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말과 사람이 다른 줄 알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에는 그렇게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해야 되고, 사람의 말은 사람이 해야 된다. 하나님이 사람 말을 할 수도 없고, 사람이 하나님 말을 할 수도 없다. 둘이 하나가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할 때, 그것이 자기 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 말이어야 된다. 내말인데 하나님 말이어야 한다. 바울이 한 말은 다 바울의 말이다. 하나님 말로 어디 창고에 있는 것을 꺼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승인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놓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보니까 도저히 사람 속에서 나온 말이 아니니까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많이 하든지 적게 하든지 큰 소리로 하든지 작은 소리로 하든지 간에 그래서 조그마하게 하더라도 자기 말로 해야 한다. 남의 말을 할 수 없다. 책에서 그렇다고 말하려면 책을 보라고 하지 뭣 하러 말을 하겠는가?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있더라고 하려면 뭣 하러 말씀을 하겠는가? 성경을 보라고 하면 된다.
우리가 그 말씀을 먹고 소화해서 자기 말이 됐을 때 말하는 것이다. 내 말이니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을 할 때는 아무리 많이 해도 수고로움이 없다. 자기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말을 하려면 굉장히 힘들다. 쉬운 것 같지만 너무 힘들다.
목사님들 집에 가면 저녁꺼리가 없을지라도 책은 가득 있다. 목사들은 돈 생기면 책을 산다. 친구 집에도 가보니 책을 얼마나 많이 사두었는지 모른다. 평생 설교를 하려고 하면 옹색할 때가 많다. 자기 지식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이 지식을 다 폐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말이 되었을 때만 그것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자기 말일 때만, 자기 말과 하나님 말이 같을 때만, 하나일 때만, 사역자로서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자면 그분과 연합이 없이 불가능하다.
하나님 지으신 세계는 아예 연합을 위해서 만들어놓았다. 처음부터 홀로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그 말을 넣어 놓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하고서 그 뒤에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고.’라고 집어넣어 놓았다. 그냥 아담을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둘이 합해야 아기가 나온다. 모든 만물이 전부 그 원리로 지어져 있다. 어느 하나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사람을 생각해보라.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말을 가져다 쓸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 말을 책에 써놓았다고 쓸 수 있겠는가? 어림없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분과 내가 하나된 것만큼만, 내가 너안에 너가 내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17:21)라고 했다.
요한복음에서 이런 오묘한 말씀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희랍인들이 이것을 들으면 ‘아 로고스가 있었구나.’ 이렇게 들릴 것이다. 로고스가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희랍인들은 또 생각했다. ‘아 그것은 데오스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이 아니다. 그냥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라는 그 말씀이다. 축복을 하면 그대로 되어버리는 말씀이다. 예전에 읽을 때는 바꾸면 되지 왜 못한다고 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야곱이 축복을 다 받아 가버려서 내가 더 줄 것이 없다고 한다. 무슨 물건을 주는 것도 아니고 말로 한 것인데, 취소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취소할 말을 하면 안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축복을 하는데 이 축복을 취소해야 되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건은 취소하면 되는데, 이것은 취소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를 이런 세계로 불렀다. 사역자로 부른 것은 이런 세계로 불렀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 증인이 되라고 했다.
어디도 누구도 증인이 되라고 한데는 없다. 공자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석가모니도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한데가 없다. 예수님만 한 말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까 그분은 그럴 수밖에 없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이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증인이 되려면 그것도 또 문명 안에서 생각해보면 변호사가 있고 증인이 있고 다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증인은 바로 그 사람과 하나여야 한다.
박**씨를 변호한다고 처음에 약 30명을 불러 놓았다. 이제는 다 떨어져 나가고 아무도 변호할 사람이 없다. 박**씨 마음에 맞도록 변호를 하겠는가? 그렇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변호인이 하나도 없다. 너무 불쌍하다.
변호사들은 그 말을 안 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세월호가 침몰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가? 이 한마디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그때 세월호 진실이라고 하길래 무슨 공작을 했는가 생각했다. 내가 바닷가 사람이라 잘못하면 배가 가라앉는 것인데, 왜 그러는지 무슨 비밀이 들었는가했는데 비밀은 무슨 비밀인가? 아무것도 없다. 몇 년간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없다. 잘못하면 가라앉는 것이지 아무 이유가 없다. 잘못해서 배가 뒤집어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진실을 밝히라고 한다. 진실을 밝히라고 하면 거기서 뭐가 나오겠는가?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다. 진짜 진실을 밝히려면 그 배를 누가 사왔는지? 왜 이 배가 거꾸로 뒤집어 졌는지? 이런 것이 비밀이다. 왜 배가 거꾸로 넘어졌는가? 위로 한 층을 더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 층을 올린 것은 누가 올렸는가? 누가 허락을 했으니까 올렸을 것이 아니겠는가? 배를 만들 때 배가 물에 서도록 하중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그것이 안 되면 밑을 무겁게 하기 위해서 밑에 층에 물을 넣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세월호는 거꾸로 뒤집어 졌다. 위에 한 층을 올려놓았으니 무게가 얼마인가? 그래서 넘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말을 안 한다. 나는 변호사가 아니라 말을 할 수가 없다.
예수님에게는 증인이 필요하다. 조금 증거 하더라도 증인이 필요하다. 거창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 우리에게 증인으로서의 우리를 요구하고 있다. 한 가지라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예수를 증거 하려면 무엇을 증거 하겠는가? 죽어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을 증거 하는 것 말고 내가 증거 할 것이 없다. 내가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이라도 해야 된다. 그런데 그 말을 해 놓으니까 상당히 시끄럽다. 이렇다 저렇다 하고 시끄럽다.제일 쉬운 것인데 말이다.
증인이 되려면 생각해보라.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다고 내가 그 증인이 되겠는가? 눈으로 봐도 내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증거는 하겠지만 그것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없기 때문에 증거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내가 영원히 증거하고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제일 쉬운 것을 택한 것인데, 사람들이 이것이 어려운지 아니면 다른 지식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더욱더 이것을 밝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처음에 너무 쉽다고 다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져버렸다. 우리는 그의 증인들이다. 큰 증인이 아니라도 좋다. 작은 것이라도 증인이 되면 좋다.
자기로 증거하고 자기로 증인이 될 수 있는 그 증인이 되면 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모으면 될 것 아니겠는가? 내가 못하더라도 다른 것은 다른 사람이 또 증인이 되면 된다.
나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데도 가보았고, 장님이 눈 뜨는 데도 가보았다. 나도 구경은 다 했다. 다했는데 증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