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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편(Catholic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스(Moses Maimonides, 1135-1204)로 그쳤다. (50PKJ)
가톨릭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라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용함으로써 판관권(사제권)으로부터 제국권(지배군)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종교라기보다 국가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국가직을 수행하는데 민주적으로 이행한다면, 한번 수행하고 시민(인민)으로 돌아와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사제든 추기경이든 영구직으로 만든 것이 민주적이지 않다. 달리 말하면 권력의 공고화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리를 이용한 것이다. 벩송이 꼬집어서 쓴 단어는 아니지만 네오토미즘까지도 주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세의 종교 권력 강화에 기여하였다면, 신칸트학파는 19세기 국가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갔다. 국가주의는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기구(군대)를 내부에 포획하고 있다. 종교는 이들의 앞잡이로 또는 뒤잡이로 역할을 한다. 꼴꽁과 ‘어벙이 연합’의 뒤잡이가 누구인지 다 알지 않는가! 이런 사고는 인민의 삶에 대한 연민도 보시도 공감도, 공명도 부족하다. 인민의 흐름이 전쟁기계라고 하는 것은, 물과 배의 비유처럼, 인민은 권력을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지주의에 편승한 경제 제도가 신자유주의이다. (50P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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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교부철학
제2부 스콜라 철학 579
제13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 672-688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Thomas Aquinas 1225/1226-1274)[마흔아홉]는 스콜라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1879년에 교황 레오 13세가 교서(敎書)를 내린 후 오늘날까지 하나의 규칙이 되어 왔다. (672)
아퀴나스 때에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위하여 플라톤에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퀴나스의 영향은 르네상스 때까지 우세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로 플라톤은 중세 때보다 다시 우세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7세에는 데카르트 학파가 정통이 될 수 있었다.(672) [데카르트의 선천적 관념은 플라톤의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관념과 길이를 이원적 실체라고 주장하면서 17세기를 열었다. (50PLG)]
성 토마스는 아퀴노 공의 아들... “천사같은 박사”(Doctor Angelicus) .. 그는 나폴리 프레데릭 2세 대학에서 6년 동안 공부를 한 후에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콜로뉴(Cologne, Köln)에 가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에게 배웠다. 그 당시 알베르투스는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 1269년에서 1272년 .. 이삼 년 동안 파리에 머물렀다. 그 때 파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말미암아 대학 당국에 문제가 일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아베로에즈파와 상통하는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673) [아베로에즈(Averroes, Ibn Rushd, 1126-1198)]
아베로에즈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의거하여 영혼의 불멸이 있어서 개인적인 영혼은 불멸이 아니며, 불멸성은 오직 이성에만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 / .. [이는] 신앙과 배치되는 교리로 이끌려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편으로 이성에 입학한 철학적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계기에 의한 신학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좋지 못한 인상을 품게 하였다. 성 토마스는 파리에서 이 아라비아 학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이하게도 이에 성공한 셈이다. (678)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교회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는 기독교 철학의 기초로서 플라톤의 철학 체계보다 더 가치가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슬람 교도들과 아베로에즈파 기독교인들이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나는[러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을 볼 때 아베로에스즈의 견해가 아퀴나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옳다고 생각한다. (674) [벩송: 온영혼은 잔존, 개별영혼은 불연속]
내가[러셀] 특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논리학과 철학에 대한 문제의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대체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674) [교황청의 교황선출을 민주적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적이 아니라, 간접 민주제인 대의제의 가장 나쁜 점(토호주의)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50PLG)]
성 토마스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이교도 반박대계(Summa Contra Gentil, Somme contre les Gentils))는 1259년부터 1264년에 사이에 쓰인 것이다. .. 교인 아닌 사람을 상대로 쓰였다. 이 책을 읽을 때 그 가정된 독자는 대체로 아라비아 철학에 능통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674) [십자군 VII차(1248-1254)와 VIII차(Loui IX 튀니지에서 사망 1270) 사이에 쓰여졌다.]
이교도 반박대계 에 대하여 / 우선 “지혜”라는 말 ... 이런 의미에서 지혜로운 일은 가장 완벽하고 숭고하며, 유익한 모든 일들 중에서 제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의해 입증된다. (674-675)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나의 목적은 가톨릭 신앙이 주장하는 진리를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자연적인 이성에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적인 이성은 신에 대하여 아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삼위일체, 도성인신(道成人身, 성육신 成肉身 Incarnation)이나 최후의 심판 등은 입증할 수 없다.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신앙과 일치한다. (675) [허수아비 오류(straw man fallacy)과 같다. 없는 대상을 누가 무엇을 입증하였다고 하나. 크리스트교의 최악의 허수아비는 부활이다. 부활은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50PLH)]
신의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동의 원동자(th unmoved mover)에 대한 논의로 증명된다. .. 이 ‘부동의 원동자’가 곧 신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부인하는 운동의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대체로 운동의 영원성을 가정하고 내리는 어떤 결론이, 그 반대의 가정 즉 운동은 시작을 갖는다는 가정, 다시 말해서 제일 원인을 갖는다는 가정에서 내리는 결론으로 말미암아 더욱 강화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676) [말하자면 순환논증 오류로서 신이 ‘부동의 원동’라 한다. 이는 정지가 먼저이고 운동이라는 것인데, 고대철학은 운동의 상대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동이 존재라고 상상할 수 도 없었기 때문이다. 벩송에 이르러서야 운동이 형이상학의 근원이며, 정지는 운동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한 정지는 상징 또는 기호일 뿐이다. (50PLH)]
그는 신학대계(Summa theologiae, Somme théologique, 1266-1273)에서 신에 관한 다섯 가지 증명을 하고 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 ho ou kinoúmenon kineî),에 대한 주장이 서술되어 있고, 둘째로 제일원인의 주장은 다시금 원인을 추궁하여 무한 소급할 수 없다는 견해에 입각하고 있다. 셋째로 모든 필연성에는 반드시 그 궁극의 원인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둘째의 주장과 동일하다. 넷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완전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어떤 것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세계에서 무생물들도 어떤 한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의 목적은 그들의 외부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생명을 가진 사물들만이 이 내면적 목적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677) [이 설명(신학 대전)은 여기 나오는 데, 신학 대전을 이교도 대전보다 먼저 서술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이교도에 대한 것은 표현상 개종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용상으로 상대를 공격한다는 전제가 암암리에 깔려있다. 그래서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있어서, 항상 문제거리이다. (50PLH)]
이교도 반박대계에 돌아가 ... 신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신은 피동자[수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불변이다. 왜냐하면 피동적인 가능태(可能態, potentiality)를 포함하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디난트의 데비이브(David of Dinant, 1160경–1217경, 범신론자)는 신은 제1차적 질료와 같은 것이라고 잠꼬대를 하였다. 이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왜냐하면 대개 제1차적 질료는 순수 수동성이고, 신은 순수 능동성이기 때문이다. (677) [토미즘의 약점은 제멋대로 질료를 순수 수동성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스피노자와 벩송에 따르면, 자연은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으로 능동자이다. 물리학도 생물학도 그러하다 (50PLH)]
신은 그 자체의 본질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단일하지 않고, 본질과 존재로 이루어질 것이다(이 점이 중요하다). 신에 있어서는 본질과 존재는 동일하다. 신에게는 우연성이란 있을 수 없다. (677) [토미즘이 주지주의의 틀에 머물고 있다.]
신은 선하다. 신 자신이 곧 선이다. 신은 모든 선의 신이다. .. [플라톤의 관점이기도 한다. 들뢰즈는 그리스인들이 아름다움의 추구에서 최고의 선을 상정한 것이고 선은 아름다움이라 한다. 그리스 조각 예술에서 운동성을 보탠 미의 감정이 있다. 비너스상과 승리의 여신상을 보라. 이미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가! (50PLH)]
실재적(實在的)인 형상은 하나의 완전체이다. 신의 예지는 본질상 모든 사물에 적합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 즉 신과의 유사성이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678) [완전성, 불변성, 영원성은 동일성에서 나온 추론이다. 동일성의 추구에서 유사, 대비, 인접 등을 추가로 추론한 것이다. (50PLH)]
우리는 이제 이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함께 괴롭힌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신은 특수한[특이한] 사물들을 알 수 있는가, 또는 보편개념들과 일반적인 진리만을 알고 있는가? (679) [전자는 플라톤의 고민이었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이었다. 보편논쟁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아퀴나스 이후로, 사물보다 먼저(플라톤), 사물 속에(아리스토텔레스), 사물 이후(유명론자), 셋으로 구분할 것이다.]
신에는 의지(will)가 있다. 그 의지는 신의 본질이다. 그리고 신이 의지하는 주요 대상은 신의 본질이다. 신이 자기 자신을 욕구하는 까닭에 다른 사물들도 욕구하게 된다. .. 신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신의 의지에는 이유(reason, 근거)가 있지만 그것인 원인(cause)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신은 모순을 참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신은 인간을 당나귀로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680) [제멋대로 안 될 때 서양인들은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들고 한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신만이 안다고도 한다. 전자에는 모순이 없다는 것 후자에는 도덕적으로 악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즉 악을 만든 원인이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교도 반박대계 2권에서) ... 신은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였다. 이 대목은 신에 위배되는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데 유용하다. .. 신은 자기 자신을 변경하지 못한다. 신은 실수할 수 없고, 괴로워 할 수 없다. ... 신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이 되지 않게 할 수 없다. 신은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 (680) [어쩌면 이 신은 이데아들과 놀고 있다.]
제2권은 주로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같다. 인간에게는 세가지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영혼이 있을 따름이다. (681) [신의 본질 그리고 신의 속성으로서 영혼 그리고 영혼의 양태로서 신체라는 순서로 생각하는 경우라면, 플로티노스를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스피노자가 등장할 것이다.]
보편문제를 지성에 관련시켜 논하면서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서 있다. (681)
제3권은 대체로 윤리 문제에 대하여 취급하고 있다. 악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악은 오직 하나의 우연적인 원인을 갖고 있을 뿐이다. (681)
인간의 행복, ... / 신의 섭리 .. [다음으로] / 천사들은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질서가 있다. .. (682) [천사의 등급은 토미즘의 것인가 보다. / 불교의 보살들은 등급이 아니라 활동성의 차이로 드러난다.]
점성술은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숙명(fate)이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질서에 대하여 “숙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숙명”이란 이교도가 잘 쓰는 말이다. (682) [자연의 섭리라는 용어가 먼저이다. 신의 섭리라는 말은 자연을 신으로 바꾼 것이다. 죽음은 숙명이다. 부활을 숙명으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도그마(독단)의 환상에 빠진다. 이는 이슬람교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보인다. 사실상으로는 스토아에 대한 열등의식이지만 말이다. (50PLH)]
신의 율법이 .. 산아제한을 금한다. .. 근친결혼을 금해야 한다. .. 아퀴나스는 형제 자매 사이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로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만일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형제와 자매들 사이의 관계로 얽히게 되면, 피차에 끄는 힘이 너무 강하여 지나치게 자주 성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83)
예정설(豫定說, predestination)에 대하여 성 토마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어찌하여 누구는 죄 가운데 내버려 두고, 누구는 택함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이유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684)
제4권에서는 삼위일체론, 도성인신(道成人身), 교황의 지상권(至上權), 성례(聖禮), 육신의 부활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여기서는 철학자들에게 말하고 있다기보다도 주로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684)
신을 아는 방법에 세 가지가 있다. 이성에 의한 방법, 계시에 의한 방법, 계시에 의해 이미 알려진 일들에 대한 직관에 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는 셋째 방법인 직관에 의한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684) [불교에서 보면 첫째는 점수(漸修)이고, 둘째는 돈오(頓悟)인데, 셋째로 돈오돈오인 셈이다. 돈오돈오는 나로서는 망상이라 보인다. 돈오의 무한 증식이란 어느 의미에서는 계열상 앞의 돈오가 뒤의 돈오 차이가 차히로서 있게되고, n-1 양태는 n 양태에 내용이 될 것이다. 즉 언제나 새로운 생성은 돈오라기보다 자기형성의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50PLH)]
세례는 악한 성직자가 집행할 경우에도 유효하다. 이 것은 이 교회의 교리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많은 성직자들이 도덕적인 죄 가운데 상고 있다. .. 청교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불가침의 덕을 지니고 있는 사제를 내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가 죄를 짓더라도 그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685) [그런 성직자를 쫒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국가의 대통령직에 있을 때 형사소추를 받지 않는 것과 같은 식이다. 그 공직은 일정기간인데 비해 사제직은 평생직이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 다 추방하고 나면 순진한 사제가 없다고 하면, 이슬람처럼 사제없는 교회도 괜찮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용기가 감옥 가도 여의도 교회는 남아 있을 것이다. 달리 만들어져야 한다. (50PLH)]
끝으로 취급하고 있는 문제는 육신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 / .. 만일 누가 그의 평생에 사람의 고기만 먹고 살고 그의 부모도 그랬다고 하자. ../외견상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 토마스는 육신의 동일성은 같은 물질적 분자들의 존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식인종이라도 부활하는 날에 그의 육신 안에 있던 것과 같은 질료는 아니더라도 동일한 육신[형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위로가 되는 사상으로서 이교도 반박대계의 요약을 마치려고 한다. (685-686) [신학 대계보다 이교도 반박대계를 죽 설명한 것은 흥미있다. 어쩌면 오류가 있더라도 믿고 있는 신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 같다. 이성적으로 종교의 교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경우에 계시를 통해야 하지만, 이교도들이 받은 계시는 그들의 계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래도 도그마를 믿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겠나. (50PLH)]
[평가] 아퀴나스 철학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일치한다. ../ 아퀴나스의 독창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세부에까지 그대로 기독교의 교리에 적용시킨데 있다. ... / 그의 가르침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 대계는 인상적인 한 지적인 체계로서 그대로 남게 될 것이다. (686)
그러나 그러한 장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그의 큰 명성을 정당화시킬 만한 근가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가 이성에 호소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어느 면에서도 진지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리 그가 목적하는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686)
아퀴나스에게서 참된 철학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 그가 만일 신앙의 어느 부분에서나 외견상 합리적인 논리를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일이며, 그런 논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는 계시(啓示)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리 주어진 어떤 결론을 위해 이론을 찾아내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아전인수론(我田引水論)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나는[러셀] 그를 그리스시대나 현대의 최대 철학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을 옳다고 보지 않는다. (688) - [벩송이 선전제미해결의 오류라고 지적한 것을 러셀은 아전인수라고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로서 설명과 설득의 기초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 19세기에 내부로 철학은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제반 학설이 무너지는 과정이다. 게다가 벩송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전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벩송은 창조적 진화 4장 마지막에서 신칸트주의 학설들이 새로이 토마스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데 대해 비판한다. 자연의 제일성(또는 통일성)이 먼저라는 주장과 학문의 통일성에 대한 주장이 네오토미즘의 기본이 되는 것은 착각이다. 계시라는 용어를 입맛에 맞게 쓰는 것이 인민들을 현혹하고 혹세무민의 지름길이다. 나로서는 교황이 포르투갈에 100년 전에 죽은 꼬마들(11살 9살)의 시복식을 하는 것도 토미즘에서 오는 착각이라 본다. (6:8 50P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