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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세 | 성 명(자, 호) | 주요 이력 ‧ 행장 |
15 | <Ⅰ-5 능파정>
정창후(鄭昌垕) 복(復) 청취옹, 북헌 (淸翠翁, 北軒) (1694 ~ 1775) 忠孝
*부 상교(相僑) | 어버이 병환에 신단을 구하여 목숨을 연장했다. 영조 무신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수령 구윤명이 그 공적을 칭송하는 증시를 하였다. 도리와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므로 신도 감탄하였다. 문명이 높은데도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다들 이를 칭송하였다. 계사년(영조49년, 1773년)에 천수로 첨지하고 갑오년(영조50년, 1774년)에 동지로 승자하였다(수 82세). 유고가 남아있고 ⌜예조문첩⌟에 행적이 실렸다
親癠得神丹延壽 英祖戊申(1728년)倡義旅勤王 本倅具公允明贈公時 以窮道誠孝感江神 半世文章傾俗類等語獎詡之 癸巳壽僉知中樞府事 甲午陞同知中樞府事 有遺稿 事載「禮曹文帖」 |
16 | <Ⅰ-6 승지 >
정해(鄭楷) 백후(伯厚) 도장재(道藏齋) (1765 ~ 1834) 憂國 恩典 *부 광지(光祉) | 충의로운 마음이 복받쳐 중화를 존숭하며 서양 오랑캐를 한탄하였다. 학문을 전념할 정사를 지으며 벽에 현판을 걸어 가로대 “숭정천지 대명일월(대략, 청나라 오랑캐를 증오하고 친명 시대를 추모한 뜻)”이라 했다. 사림들이 조정에 천거해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忠義慷慨 尊華洋夷卜築精舍揭壁帖曰崇禎天地大明日月 士林薦于朝 贈童蒙敎官 |
17 | < Ⅰ-7 진사 >
정이용(鄭履溶) 진명(振明) 농재(農齋) (1846 ~ 1913) *부 운련(運蓮) |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고 상을 당하여 6년 여묘하며 삭망에 성묘하니 무릎 닿는 자리가 패였다. 또한 후학을 이끄니 여러 번 조정에 천거 하여 계사년(1893년)에 동몽교관 조봉대부를 제수되었다
親疾斫指 丁艱居廬朔望展省 當膝處成坎 啓迪後學 累入永薦 癸巳(1893년) 除童蒙敎官 朝奉大夫 |
18 | < Ⅱ-9 성재 >
정춘수(鄭春洙) 명옥(明玉) 청오(靑吾) (1875 ~ 1951) 삼일운동33인 *부 석준(錫駿) | 삼일운동 민족대표로서 삼년 옥고로 치루며 항절불굴 하였다.
목사, 기독교조선감리교 감독 문학박사 김상기(金庠基) 찬 비명, 대통령 박정희 서 충북공화당부 입석
以 三一運動民族代表 三年縲絏抗節不屈 牧師 監理敎 監督 |
18 | < Ⅱ-9 성재 >
정필수(鄭弼洙) 문옥(文玉) (1861 ~ 1894) 동학혁명 선봉대장
*부 석영(錫永) | 1894년 갑오혁명의 주무로서 충청도임을 맡았다. 고종 갑오년 9월 24일에 청주병영에서 처형되었다
以甲午革命主務 忠淸道任 高宗甲午 9월 24일 處刑于淸州兵營
< 동학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이 운동은 처음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황현(黃玹)이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 정필수의 집 :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여 1894년 9월 이종묵, 홍순일 등과 함께 선봉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청주 무심천 변에서 효수 당함 |
18 | < Ⅱ-9 성재 >
정면수(鄭勉洙) 성전(聖旃) (1821 ~ 1896)
節義
*부 석민(錫民) | 철종12년(1861)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문과
1861년 가주서(假注書) 1864년 원릉별제(元陵別檢) 1865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867년 이조좌랑(吏曹佐郞) 186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874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874.12월 영의정 이유원(領議政 李裕元)의 비석사건을 탄핵 1882년 부사과(副司果) 1884년 봉상시정(奉常寺正) 1887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1991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右通禮) 1894년 서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족손 문학박사 기호 찬 묘표
* 1874년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사사로운 “화성(華城)의 비석 사취 건”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1875년 원악도(멀고 외진 섬,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 가셨다가 1879년 12월 28일에야 풀려나셨다(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 : 8년 출사공백
* 정면수공의 “화성(華城)의 비석 사건” 영의정 탄핵 - 왕조실록 중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12월 24일
전 정언(正言) 정면수(鄭勉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은 대대로 벼슬을 한 세신(世臣)이며 훌륭한 시대의 영의정으로서 현명한 임금을 만나 이처럼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손영로(孫永老)가 상소를 올려 주제넘게 헐뜯고 방자하게 멸시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상신(相臣)으로서 공격을 받은 사람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법도가 없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몹시 노하여 국문(鞫問)하고 형신(刑訊)하고서 외진 섬에 귀양을 보냈고 전 영의정에 대해서는 여러 번 돈유(敦諭)하고 융숭한 대우를 베풀고서 잠깐 파면시켰다가는 곧바로 임명하여 반드시 나오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전하의 이 조치는 대신을 예의로 대하고 나라의 체통을 중하게 여기는 데서 나온 것이니 누군들 만만번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에게는 한 가지 개탄스러운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이니 전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옛날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이 수성(隋城)에 새 고을을 만들면서 능침(陵寢) 아래에 있는 다른 산에 한 조각의 돌을 묻어둔 것은 임금의 뜻으로서는 아마도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 저 영의정은 지난 기미년(1859)에 망령되게도 탐욕을 부려 사적으로 돌을 파내고 나무를 찍어서 수레를 만들어 거리낌 없이 운반하여 자기 조상의 묘 앞에 우뚝 세워놓았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들었으며 본 고을의 선비들도 상소를 올려 규탄한 일입니다. 돌 하나를 다듬어도 정성껏 하고 나무 한 그루를 북돋우어도 조심스럽게 하는 판에 선대 임금의 손때 묻은 것을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으니 이것을 차마 한다면 무엇을 차마 못하겠습니까? 이 일을 놓아두고 그 심보를 용서해준다면 설사 무기고를 청하거나 무덤길을 만들 것을 청하는 것도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백 가지 죄를 속죄할 수 있어도 이 죄만은 속죄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였다. |
19 | <Ⅰ-1 절제사>
정하석(鄭夏錫) 문옥(文玉) 미재(薇齋) (1845 ~ 1896) 憂國之士
* 부 감(瑊)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움을 타고났으며 문행이 이름났다. 갑오년 동학비적이 날뛰니 엄정하게 이를 물리쳤다. 도를 더해 악독한 일을 당했으나 그 주동자가 연이어 잡히매 초토사 민종렬(閔種烈)을 접견하여 말하기를 “우두머리가 이미 죽었으니 화합으로 다스려 민심을 진정시켜주시오”하니 초토사가 이를 옳게 여겨 죄수를 모두 풀어주었다
孝友根天文行名世 甲午東匪猖獗嚴正斥邪 饒被螫毒及其株連被執 見招討使閔種烈曰渠魁旣誅恊從因治以鎭民心 招討公然之盡釋罪囚
* 배우 23세 정보석(족보명 鄭普重) 고조부 |
19 | < Ⅱ-1 참봉 >
정화익(鄭和翼) 사홍(士鴻) 국포(菊圃) (1840 ~ 1865) 忠孝
配 蔚山金氏 (1835 ~ 1885) 恩典
*부 문수(文洙) | 품성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모습과 거동이 뛰어났다. 학문과 기예가 높고 독실이 실행하였다. 어려서 상을 당하였으므로 늦게 상복을 입고 정성을 다하였다. 재산을 나누어 종친을 도우고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므로 여러 번 공적을 천거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니 선비들이 모두 아쉬워하였다. 유고가 남아있다
天賦純厚風儀魁偉造詣深高踐履篤實早喪所恃追服盡情傾財敦族出儲救飢累登採察公薦 不幸早世 士論惜之 有遺稿
배 울산김씨(配 蔚山金氏)
일찍 남편을 여의었으나 매사 여일하니 사별한 사람 같지 않았다. 병정 년간*의 기근과 질병이 창궐했을 때, 백성의 구제와 구휼에 힘쓰니 고을 원인 심대영이 조정에 아뢰어 은전을 입었다.
早哭城崩凡事一如 所天所爲 丙丁歲飢癘疫大熾 救活甚衆 本倅 成大永 聞于朝 有給復恩典
* 병자, 정축년(1876~1877년) : 성대영 무장현감(茂長縣監) |
19 | < Ⅱ-6 양촌 >
정인태(鄭寅泰) 맹숙(孟叔) (1841 ~ 1896) 忠 倡義 殉節
*부 승수(承洙) | 고종 을미년(1895년)에 의병을 규합하여 보국하고자 하였으나 부끄럽게도 조정이 정책을 바꾸고 간사한 무리가 거짓 참언하여, 고종 병신년(1896년) 1월 12일에 피해를 입었다. 그해 나이 56세요 시론이 바르다 하였다
高宗乙未糾合義旅 欲爲報國 雪耻旋朝 奸人讒言 高宗丙申一月十二日被害 得年五十六時論韙然
* 을미의병은 명성황후의 시해와 서원철폐, 단발령 시행 등의 급진정책에 대하여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창의하였다 |
20 | <Ⅰ-2 응교광>
정제신(鄭濟莘) 준백(俊伯) (1883 ~ 1928) 건국훈장
*부 동현(東鉉) | 1919년 3.27일 경기도 광주에서 만세운동 주도 1992년 건국국훈(建國國勳) 애족장(愛族章) 추서
1919년 3월 27일 오전 1시경 광주군 오포면(五浦面) 고산리(高山里)에서 같은 마을 주민 사십여 명과 함께, 횃불을 들고 뒷산에 올라가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에 시위군중이 집결되어, 천여 명이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오포면사무소와 광주군청까지 진출하려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항일 비밀운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고문 후 석방되었으나 왜경의 감시로 생계마자 막연해지자 애석하게도 46세 되시는 1928년 5월 31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시었다. |
20 | < Ⅰ-3 지평 > 정제천(鄭濟千) 만수(萬洙) (1928 ~ 1991)
*부 환진(煥鎭) | 국가유공자 |
20 | < Ⅰ-3 지평 >
정제원(鄭濟元) 선장(善長) (1918 ~ 1942) *부 면석(冕錫) | 일찍부터 지조와 기개가 있고 영민하였다. 태평양전쟁 시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화를 입었다. 남양으로 가 16명의 동지와 함께 적병을 치고자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물에 투신하였으니 임오년 11월 5일이다
志氣早敏 當東亞之變 强被日本徵用之禍 入于南洋與同志十六人欲反賊兵事勢不得已遂投水而死卽壬午(1942년)也 十一月五日也 |
20 | < Ⅱ-6 양촌 >
정두환(鄭斗煥) 성칠(星七) (1857 ~ 1896) 倡義 殉節
*부 인태(寅泰) |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용기와 지혜가 남달랐다. 부친을 해한 자의 복수를 서약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天性至孝智勇過人 誓復父讐 起服擧義
* 부친과 같은 해에 순절
- 13세 계광 - 14세 명천 - 15세 항철 - 16세 재원 - 17세 석린 - 18세 승수 - 19세 인태 |
20 | < Ⅱ-9 성재 >
정제환(鄭濟煥) 복경(伏經) (1878 ~ 1956) 倡義 投獄
*부 낙준(樂俊) | 1906년(병오)에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체포 투옥되어 3년간 항절 불굴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丙午以倡義累建奇勳被逮縷絏三年抗節不屈 建國勳章 授與
* 정제환(鄭濟煥) : 1878 ~ 1956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908년(순종 2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연기우(延基羽) 의병 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연천과 삭녕(현 경기도 연천군 북부 지역) 일대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음력 9월 삭녕군 서면에서 동료 의병 수십 명과 함께 포목상으로부터 포목 수십 점을 확보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1,500냥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던 정제환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09년 4월 17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6년 3월 14일 사망하였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13세 숭기 - 14세 희망 - 15세 덕휘 - 16세 재곤 - 17세 석조 - 18세 인수 - 19세 낙준 |
20 | < Ⅱ-9 성재 >
정두환(鄭斗煥) (1880 ~ 1942) 倡義 投獄
*부 낙희(樂喜) | 1906년(병오)에 의병을 일으켜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丙午以倡義投獄三年 建國勳章 授與
- 13세 숭기 - 14세 희망 - 15세 덕휘 - 16세 재곤 - 17세 석조 - 18세 익수 - 19세 낙희 |
21 | < Ⅱ-1 참봉 >
정규삼(鄭圭三) 여백(汝百) 난곡(蘭谷) (1876 ~ 1941) 倡義 *부 용환(龍煥) | 정미년(1907년)에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8년 옥고를 치렀다. 항절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丁未義擧 累建奇功 八年縲絏 抗節不屈
* 후일 애국지사로 공훈을 인정받지 않으셨는지? |
21 | < Ⅱ-6 양촌 >
정용대(鄭用大) 중범(重凡) 의암(毅菴) 1882 ~ 1909 倡義 殉節
配 昌原黃氏 (1882 ~ 1965) 烈婦
*부 두환(斗煥) | 성품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웠다. 행의는 단정하고 정중하였다. 을사조약 후 비분강개하여 대절(大節)하였다. 1908년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붙잡혀 의로서 굴하지 않았으며 저들의 회유에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적을 준엄히 꾸짖고 마침내 참화를 입으니, 조야에서 애통해 하였다. 바로 순종 기유년(1909) 일이다. 사후 69년이 지난 정사 년(1977년)에 나라에서 은전을 내리니 후손은 이를 영광으로 삼았다. 유고가 있다
* 건국훈장(建國勳章) 국민장(國民章)
賦性仁孝資質端重 乙巳條約後 慷慨有大節 純宗戊申(1908년) 倡義累建奇勳 及其被逮 抗義不屈 彼以百行誘服 而竟不少橈 罵敵峻嚴大義昭然 竟被慘禍 朝野嗟惜 純宗己酉也 厥後 六十九年 丁巳 以國恩典致祭 復其子孫 世皆榮之 有遺稿
< 1977년 독립유공자 공적서 일부 : 붙임 >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 마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구한국군에서 정교를 지낸 정용대는 군대해산 이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을 칭하고 무장한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과 접전하면서 적성·양주(楊州)·풍덕(豊德)·교하(交河)·통진(通津)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정용대는 경기도 일대의 의병소탕전을 전개한 일본 토벌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1909년 10월 28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순국하였다.
배 창원황씨(配 昌原黃氏)
유인은 남편, 시아버지, 시조부 3대가 순절하시므로 28세에 청상이 되었다. 기일에는 왜적이 누누이 샅샅이 조사하여 견디기 힘들므로 친척 집에서 친구들이 기제사를 모셨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바르고 의롭게 교육하니 가문의 명성을 세우고 규문의 사표가 되었다. 의열비를 세웠으며 족질인 정기호 문학박사가 글을 지어 새기었다
孺人以二十八歲靑孀 因夫舅祖三世殉節爲倭賊 所忌累累尋査殆人所難堪 而友于宗黨育子女敎以義方 樹立家聲爲一世閨門師範 有義烈碑 族姪 文學博士 琦鎬撰陰記 |
21 | < Ⅱ-9 성재 > 정재우(鄭在禹) (1925 ~ ) *부 백환(伯煥) | 화랑무공훈장(花郞武功勳章) |
22 | <Ⅰ-2 응교흥> 정상운(鄭尙運) (1926 ~ 1950) *부 찬림(瓚林) | 6.25 참전 전사(戰死) |
22 | <Ⅰ-2 응교광> 정상설(鄭尙卨) (1928 ~ 1990) *부 종림(鍾林) | 1952년 중공군과 전투중 전상(中隊 10명 생존), 국가유공자 |
22 | < Ⅰ-4 자의 > 정상훈(鄭尙勳) (1928 ~ 1950) *부 수림(守林) | 육군대위, 전사(戰死) |
22 | < Ⅱ-4 판서 > 정인호(鄭仁鎬) (1928 ~ 1951) *부 용대(用大) | 6.25 참전 전사(戰死) |
22 | < Ⅱ-6 양촌 > 정중호(鄭重鎬) (1932 ~ 2010) *부 용무(用武) | 6.25 참전 국가유공자
1968년 향토예비군 창설 초대 소대장 |
22 | < Ⅱ-9 성재 > 정태호(鄭泰鎬) (1928 ~ 1950) *부 용관(用寬) | 1950년 11월 12일 황해도 남천(南川) 지구 전투에서 전사(戰死) |
23 | <Ⅰ-2 응교광> 정기재(鄭騎載) (1952 ~ 1989) *부 상흔(尙欣) | 순직(殉職), 대전국립묘지 안장 |
23 | <Ⅰ-2 응교진> 정사능(鄭思能) (1926 ~ 1951) *부 상덕(尙德) | 대위(大尉), 1951년 12월 26일 전사(戰死) |
23 | <Ⅰ-2 응교진> 정사욱(鄭思旭) (1925 ~ ?) *부 상화(尙華) | 6.25 참전 전사(戰死) |
23 | < Ⅰ-3 지평 > 정형규(鄭亨圭) (1957 ~ 1984) *부 상균(尙均) | 1984년 8월 4일 전사(戰死) |
23 | < Ⅰ-4 자의 > 정성중(鄭成重) (1944 ~ 1971) *부 상섭(尙燮) | 육군소령, 1971년 7월 16일 월남전 전사(越南戰 戰死) |
23 | < Ⅱ-6 양촌 > 정영배(鄭永培) (1955 ~ ) *부 중호(重鎬) | 1970년 군복무 시, 최전방 군사분계선 수색정찰 중 지뢰폭발 부상
국가유공자 |
24 | <Ⅰ-2 응교광> 정윤학(鄭胤鶴) (1932 ~ 1951) 配 龍仁李氏 (1930 ~ 생존) 孝婦 *부 승재(承載) | 1951년 8월 30일 양구(楊口)지구 전투에서 전사(戰死)
配 용인이씨(龍仁李氏) 1994년 효부상(孝婦賞) |
24 | < Ⅰ-6 승지 > 정충일(鄭忠一) (1930 ~ ) *부 공중(公重) | 군장교 예편, 근무공로훈장(勤務功勞勳章), 국가유공자 |
* 정춘수(鄭春洙) : 1873년 2월 12일 ~ 1953년 1월 10일
1873년 2월 12일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이다. 1882년부터 1897년까지 한문을 배우고,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감리교 성서학원(聖書學院)에서수학하였다.
1907년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에 입학해 1911년 12월 졸업하였으며, 1911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개성 북부교회(北部敎會)를 맡았다. 1916년 9월부터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를 담임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5월 출옥하였다. 1922년 9월부터 1924년 8월까지 개성 북부교회, 1924년 9월부터 1926년 8월까지 개성 중앙교회(中央敎會)를담임하였으며, 1926년 9월부터 1930년까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춘천지방 장로사(長老司)를 지냈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신양리구역 목사로 있다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 동대문교회(東大文敎會)를 맡았다. 이 무렵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참여하였고, 경성(京城)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를 담임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1939년 9월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基督敎朝鮮監理會聯盟)을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영미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였으며, 『동양지광(東洋之光)』 1942년 1월호에 「응징의 이유 세 가지」, 『국민문학(國民文學)』 1942년 3월호에 「기독교와 신체제운동」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 통폐합과 전투기 헌납을 골자로 하는 「애국기(愛國機)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7월 개신교를 통합해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의 고문을 맡아 일제의 황민화운동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1947년 2월 감리교에서 일제강점기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을 폭로하는 성명이 발표되어 활동이 제한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란 중 충청북도 청원에서 1953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정춘수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97~53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 동학혁명 선봉대장 정필수 관련
< 「동학혁명의 성지(聖地) 보은」, 채길순 중에서 발췌>
3. 동학 포교의 중심지 장내리
1864년 창도주 최제우가 대구 장대(將臺)에서 처형되자 교권을 이어받은 최시형(崔時亨․1827~1898)2)은 경상 북부와 강원도를 거쳐 단양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또 최시형은 상주 지방의 교도들과 상의하여 최제우의 가솔들을 속리산 자락 왕실촌에 피신시킨다. 관에 쫓길 때 도계(道界)를 넘어 피신하기 쉬운데다 도인들이 많아서 뒷바라지가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은은 왕실촌을 넘어 들어오는 길 외에 추풍령을 넘어 황간 청산으로 통하는 길과, 상주에서 팔음산을 넘어 청산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보은 장내리는 최시형의 도피처인 동시에 교세 확장의 교두보로, 뒷날 동학교단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실제로 교세는 속리산 너머 상주와 미원 회인 문의 회덕 청주 청산 영동 옥천 등지로 교세가 분포했는데, 당시는 여러 접주들의 연원(淵源)이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동학교도가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보은 장내리와 가까운 청산 문바우를 주목할 수 있다. 청주 손병희와 황간 조재벽(趙在壁) 접주의 주선으로 청산 문바위골 김성원(金聖元)의 집에 최시형의 도피처가 마련되었는데, 당시 동학교도들 사이에 작은 장안이라 불리워질 만큼 비중이 컸다. 1893년 3월에는 청산 포전리 김연국(金演局․1857-1944)의 집에서 창도주의 조난 일을 맞아 손병희 이관영 권재조 권병덕 임정준 이원팔 등과 제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시 이 일대의 동학 교세를 가늠케 한다. 또 황간 조재벽 대접주는 황간 청산 옥천 영동 회덕 진잠 금산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교세를 떨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상주 지방에는 동학교도들이나 접주 및 대접주들이 많았으며, 청주 문의 미원 지방에도 교세가 성했다. 이 중 청주군 북면 금암리 일대는 손병희 손천민 서우순 서장옥 음선장 최동석 정필수 정석복 김자선 권병덕 등 10 두령을 꼽을 만큼 교세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곳을 교두보로 충청도 북부는 물론 호서와 경기 강원 지방으로 널리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다. 이처럼 빠른 교세 확장과 함께 1886년에는 육임제를 두어 포 조직을 강화하게 되자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는 명실 공히 동학의 중심지가 된다.
* 1894년 9월 청주성 전투
청주성전투는 9월 24일 쌍다리 장터(북일면 세교리) 싸움과 청주성 공격이 동시에 일어난 듯 하다. 9월 28일 관보에 청주 읍성을 닷새 동안 연일 공격하였으나 28일 패퇴했다. 충청도관찰사의 장계에 의하면 9월 24일 동학교도 수만이 청주를 습격하여 병마절도사 이장회가 친히 전투하여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9월 30일 동학군이 청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0월 1일 병마절도사 이장회, 군관 이용정 등이 동학두령 이종묵, 정필수, 정석복 등을 체포하여 무심천변에서 군중 앞에 효수하여 경계했다 등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 인터뷰 : 청주지도자 정필수의 증손자 정용승씨, 1994.3.22. 한겨레 >
청주지도자 정필수의 증손자 정용승씨 할아버지 ‘한’ 풀어드려야죠! 절반만 세운 비석 국가에서 마무리를
정필수는 청주에서 동학군 지도자로 맹활약했다. 그를 증조부로 둔 정용승(56)씨는 1백년은 족히 묵었을 한지를 여러 뭉텅이 꺼내 놓았다. 사람 키만 한 책장 반을 메울 만큼 많았다.
“몇 해 전 집수리하는 중에 거두어 모았어요. 뭔지 몰라 물어물어 찾은 충북대 신영우 교수로부터 귀한 자료라 듣고 보관 중이에요.” 그도 교수다. 교원대에서 대기과학을 가르치는데, 한자 보다는 영어가 가까워선지 “무슨 내용인지 잘 몰라 안타깝다.”
수백 장 가량의 한지는 거의 고조부 것이다. 마을서 서당하다 상경해 내부주사를 지내던 고조부가 고향의 두 아들, 집 근처 운적산에 훈련장을 만들어 동학군을 조련하던 장남 필수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진사로 급제한 차남에게 띄운 서한도 백여 장이다.
“ 33살의 아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청주 감영의 친구에게 선처를 부탁했는데 이미 총살된 뒤였답니다. 관보에도 나옵디다. 농민만 동학군이 아닌거죠. 증조부님이야 분명히 농민이 아닌데, ‘항일’ 그것으로 뭉친거겠죠.”
정필수는 어린 시절, 손병희와 한 마을,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 살았다. 나이는 동갑이었고 집이 5백 미터 떨어졌다. 지금 정씨가 작은 농장을 꾸민 청원군 강내면으로 온 집안이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이사오기 전 까지이다.
또 3.1운동 33인 가운데 한 분인 정춘수 감리교 목사도 증조부의 14살 아래 사촌으로 같이 살았다. “아마도 이 곳이 엄청난 근거지인 것 같죠?”
정씨는 두 분의 묘를 집 옆에 모셨는데, 필수 할아버지 앞에는 반석만 놓았다. “상석은 나중에 국가가 세우라고 남겼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렇게 해서 억울한 한을 풀어드려야죠. 명예회복을 해달라고 말입니다.”
* 정용대(鄭用大)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범(重凡), 호는 의암(毅庵). 양촌공파(陽村公派) 21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의병 정인태(鄭寅泰)이며, 아버지는 정두환(鄭斗煥)이다. 어머니는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다. 부인은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정용대(鄭用大)[1882~1910]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 7월 24일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한국군에서 특무정교(特務正校)를 지낸 정용대는 군대 해산 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스스로 창의좌장군(倡義左將軍)이 되었다. 정용대는 무장한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과 접전하면서 경기도 양주를 비롯하여 적성·풍덕·교하·통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인근 일대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 부대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의병 운동의 효과적인 전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2월 27일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와 함께 양주군 석적면[현 양주시 광적면]에서, 3월 2일에는 양주군 회암면 율정리[현 양주시 율정동]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4월 12일 부하 신관수로 하여금 통진군 수곡리[현 김포시 통진읍]의 김화안으로부터 군자금 10원을 조달하게 하였다. 4월 23일에는 부하 이종근 외 18명으로 하여금 통진군 대패면[현 김포시 통진읍]에서 1만 5000냥의 군자금과 군도 한 자루를, 양릉면 곡촌[현 김포시 통진읍]에서 군도 두 자루를, 교하군[현 파주시 교하읍]에서 양총 7자루와 탄환 900발, 군도 4자루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전력을 크게 보완하였으며, 고을 사람 조운원 등과 연락하여 일본 헌병과 순사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1908년 5월 20일경에는 신관수로 하여금 교하군 문발리[현 파주시 교하읍] 민영도의 집에 들어가 총기 두 자루와 탄환 100발을 조달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활동 영역을 넓혀 경기도 강화군에서 군자금과 군량미를 확보하게 하였다. 6월 8일 경기도 부평군 내면[현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을 습격하였으나 순사 3명과 수비대 13명의 공격을 받아 의병 4명이 체포되었으며, 무기 9정을 빼앗기고 패퇴하였다.
1909년에 들어서면서 소규모로 정예화하여 양주 일대에서 항일 유격전을 펼치자, 일본군은 300명의 병력을 양주에 집결시켜 집중 공세를 가해 왔다. 이때 양주에서 함께 항일 투쟁을 펼치던 의병장 윤인순(尹仁淳)이 3월 19일 적성에서 전사하였고, 이은찬도 3월 31일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정용대 의병장은 풍덕군[개성직할시 풍덕군]에서 진을 치고 “이은찬, 윤인순 두 대장을 잃었으나 우리 의병은 좌절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여 일본의 압박을 제거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여 반드시 그 뜻을 관철할 것”이라고 재천명하고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정용대 의병 부대는 한말 의병사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자금 모금으로 유명한데, 이종근(李宗根)·신관수(申寬秀)·박만안(朴萬安)·백영현(白永賢)·이학선(李學善) 등의 부하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군자금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정용대는 계속하여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면서 전투를 준비하다가 1909년(순종 3) 10월 28일 체포되었다.
정용대는 체포된 후 일본군의 심문에 당당하게 응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심문을 받는 동안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붙잡혔으니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며, “살기를 도모하다가 대한의 흥황복조(興皇復朝)를 손상하면 도리어 신자(臣者)의 도리가 되지 않는다”고 한 구절에서 그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정용대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1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 독립만세운동 정제신(鄭濟莘) 판결문(1919년 5. 9. 경성지방법원 징역1년 보안법위반)
위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해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 문
피고 정제신(정제신)을 징역 1년에 처한다.
이 유
피고는 독립운동 취지에 찬동하여 시위운동을 하고자 대정8년(1919년) 음력 2월 27일 오전 1시경 광주군(廣州郡) 오포면(五浦面) 고산리(高山里) 주민 약 40명을 선동하여 동리(洞里)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동일(同日) 오전 11시경 같은 목적으로 집결한 약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오포면사무소 및 광주군청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가 조선독립의 취지에 찬동하여 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을 기도했다는 내용을 제외한 피고가 당 공정에서 한 그 내용의 자백 및 사법경찰관의 피고인 신문조서 중 조선독립의 목적으로 시위운동을 했다는 내용의 공술기재에 의해 이를 인정한다.
법에 비추어보니, 피고의 소위(말한 바)는 보안법 제7조, 형법 제55조, 조선형사령 제 42조에 해당하는데, 위 범행 이후의 발포에 관계된 대정 8년(1919년) 4월 15일 제령 제 7호에 의하면 동 제령 제 1호, 형법 제 55호에 해당하므로, 형법 제 6호, 제 8조, 제 10조에 의해 신·구 양법의 경중을 비교하고, 가벼운 보안법 제 7조를 적용하고, 그 소정 형 중 징역형을 선택하여 그 형기 범위 내에서 양형 처단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조선총독부검사 대리 사법관 시보 화촌미수(花村美樹)가 간여함
* 오포면사무소 독립만세가 다음 날인지 당일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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