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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山河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頭陀行
「백두대간」식 산맥표기에 대한 역사 지리적 고찰
충북대학교 교수 임덕순
I. 서론
민족주의-전통주의적 차원에서의 백두대간식 표기 복원의 필요성 등이 주장된 일이 있다. 그 외에도 이에 유사한 주장과 백두대간 논의가 다양하게 언론수단을 통해 표출되어오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주장과 논의는 언론의 자유, 탐구 및 사유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일단은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韓國地理를 가르치고 한국지리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地理學者의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대하고 읽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깊은 학문적 논구와 用語使用의 적절성에 대한 신중한 검토결과 등에 바탕을 두고 주장이나 논리가 제시되었으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같은 제시나 주장들이 무슨 '붐'처럼 번져가고 있고, 일부에서는 그 제시나 발표가 紙上을 통해서든 방송에 의해서든 경쟁적으로 행해지는 감마저 있다는 점이다. '백두대간'의 개념, 용어, 내용, 사용 타당성 등이 전문적인 관계 학계나 학자들에 의해 깊이 있게 탐구 검토된 연후에 그 사용이나 소개가 널리 보급되어야 바람직한데, 지금까지는 아쉽게도 이점이 그렇지 못하였으며, 설사 관계학계의 一員이 언론매체를 통해 백두대간 관계 주장을 펴더라도 그 주장은 신중하고도 비판성 있게 이루어졌어야 좋았겠는데, 그 신중성이나 비판성이 부족함이 적지 않았다. 또한 학문적 주장이나 제시가 유행이나 유행을 타는 장사처럼 붐을 일으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한편으로는 바람직한 일은 못된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생각이다.
본 고에서는 '백두대간'식 산맥표기의 출현, 특징, 사용기간 등을 밝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백두대간'식 산맥 표기란 [山經表] 등에 표기된 '백두대간', '장백정간', '한북정맥', '낙동정맥' 등처럼 산맥들을 ' 대간', ' 정간', ' 정맥'처럼 표기한 것(그린 것 포함)임을 말해 둔다.
탐구 방법에 대해서 말하면 여기서는 고려 초기 이후를 다룬 [패관잡기], [증보문헌비고], [성호사설]등 諸 公 私書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해좌전도'등 古地圖類를 자료로 삼아, 그 안에 들어있는 백두대간 관련 사항들을 추적해서 제시 검토 논의하는 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2. 「白頭大幹」式 산맥표기
1) 최초출현
관련 고문헌 및 고 지도들을 찾아 조사해본 결과로는 '백두대간' 식 산맥표기 및 이에 준하는 표기의 최초 출현은 高麗 初期(10 세기 초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李瀷이 저술한 [성호사설](1760 경)에 그 관련기록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고려 승려 道詵의 玉龍記에 '우리 나라는 白頭(산)에서 일어나 智異(산)에서 끝났으니, 물의 근원(水根) 나무의 줄기(木幹)의 땅이다. 푸른 것(靑)으로 몸(身)을 삼고 검은 것(黑)으로 어미(母)를 삼았으므로 색깔은 청과 흑을 숭상하여햐 한다'고 하였다."
위 기록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비록 '백두대간'이라는 用語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實質的 내용상으로는 백두대간을 말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산세의 시작(水,北, 근원, 母, 흑색)은 백두산에서요, 거기서 시작된 줄기(木,東, 幹, 몸체, 청색)는 지리산에까지 이어진다는 내용이니, 이는 사실상 <백두대간>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루 확인되어 있는 바와 같이 '백두대간'이라는 것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까지 단절 없이 이어져 있는 하나의 큰 산줄기(大幹)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실질상>의 백두대간에 관한 최초표기(표현 포함)는 백두대간 내용을 제시한 道詵에 의해서요, 그 時期는 따라서 고려 초기인 10세기 초반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1000년도 넘는 오래 전의 일이다.
만일 이익의 [성호사설]에 실린 고려 초 도선의 위와 같은 말에 대해서 신뢰를 높게 줄 수 없다면 그 출현시기는 좀더 뒤로 처져, 고려말기 공민왕 때인 14세기 중반으로 잡을 수 있고, 언급한 사람으로는 于必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숙권의「패관잡기](16 세기 중반) 중 다음과 같은 관련 문장이다.
"고려 공민왕 때 司天少監 于必興이 상서한 말에 '우리 나라(지세)는 白頭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끝났는데, 그 지세가 물의 근원(水根) 나무의 줄기(木幹)처럼 생긴 땅입니다. 검은 것으로 부모를 삼고 푸른 것으로 몸(身)을 삼았으니 土에 순응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재앙을 입습니다. 금후에 문무백관은 風土에 순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王이 그것을 따랐다."
다음으로 백두대간을 거론한 사람은 李重煥으로 볼 수 있고, 바로 그의 [택리지](1751)에서였다.
"백두에서 함흥까지는 산맥이 복판으로 내려왔다. 동쪽 지맥은 두만강 남쪽으로 뻗어갔고, 서쪽 지맥은 압록강 남쪽으로 뻗어갔다. 서쪽 지맥은 길게 칠팔백리까지 뻗었으나 동쪽 지맥은 일백리 미만이다. 大幹은 끊어지지 않고 옆으로 뻗었으며 남쪽으로 수천리를 내려가 경상도 太白山에까지 통하여 하나의 脈嶺을 이루었다. 태백산에서 영등성이가 좌우로 갈라져 우편 지맥으로 소백(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소백(산) 아래에 있는 화령 덕유(산) 남쪽에 있는 육십치와 팔량치가 大嶺이며 여기를 지나서 지리산이 된다."
"지리산은 南海가에 있다. 이 산은 백두(산)의 큰 맥이 끝난 곳이므로 일명 頭流山이라고 한다."
위 글 내용을 살펴보면 이중환은 조선의 산세를 논하면서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맥들로는 2개의 枝脈과 하나의 大幹이 있음을 지적하였고, 그 중 대간은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다시 좌우 2개의 지맥으로 갈라졌으며, 다시 그중 右脈(西脈)이 지리산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지리산은 大脈이 이어져 흘러오다(頭流)가 끝나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 글에서 우리는 이중환이 내세운 2개의 주장을 알 수 있다. 첫째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단절 없이 태백산에 이르는 大脈嶺이라는 점, 둘째 백두산-태백산-소백산-지리산 連脈은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2 개의 줄기로 갈라져 그중 하나가 지리산에까지 뻗친 것이라는 점이다.
위와 같은 인용문과 그들 인용문에 대한 필자의 분석결과를 가지고 볼 때, 이중환은 그의 著作物상에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백두대간을 2개의 지맥까지 고려하여 제시하였고 백두대간을 의미하는 '大幹'이라는 용어를 國內 최초로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 유념해 둘만 하다.
이익은 조선 18세기 중반에 非體系的 잡문집이면서도 天文 地理에 상당한 비중을 둔 그의 [성호사설](1760년경) 白頭正幹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두(산)는 동방(조선) 산맥의 祖宗이다. 철령에서 大小白山에 이르러 하늘에 닿도록 아주 높이 솟았으니 이것이 正幹이고 거기서 나온 여러 갈래는 모두 西쪽으로 갈려 달려나갔으니 술가(풍수가)가 말하는 소위 楊柳枝(버들가지)이다. (정간) 좌방으로는 동해를 끼어 있어 마치 하나의 큰 호수와 같이 되어 白頭大幹과 더불어 그 始終이 같다. 밖으로는 日本을 두른채 대간이 남과 서로 뻗어 水口를 포위하고 右幹은 頭流(지리산)에 멈추었으니 그 모습이 웅장하고 기운차서 그 기상이 가히 외경스럽다."
또한 이익은 同上書 水根木幹論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풍수가 도선의 한국산세觀에 동의하면서 수근목간적 관점의 백두대간을 말하였다.
위와 같이 이익은 '백두대간'과 '백두정간'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백두산은 우리 나라의 조종산이며 大幹의 시작山으로 보았다. 그리고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右幹의 웅장한 終山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수근목간의 지세라는 도선의 지론에 동의한 것은, 이익보다 전 시대인 16세기 중반 [패관잡기]의 저자 어숙권이 고려말 우필흥의 지론을 인용하면서 수근목간觀에 동의한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분명한 用語를 기준으로 말할 때는 백두대간을 최초로 거론한 사람은 바로 성호 李瀷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분명하게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썼고, 그 산맥상황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는 점을 유의해두는 것이 좋겠다.
조선 후기 한국지리론자 신경준은 [산경표](1770년경)(이 책의 편찬자와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음, '잦은 질문/대답'의 산경표에 대해 참고: 운영자)에서 조선의 大山脈이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았고, 백두산-지리산 연맥을 '白頭大幹'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連結의 상태 관계 순서를 알아보기 쉽게 30여 페이지에 걸친 다수의 表로 제시하였다. 그 表 內容을 약간 풀어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무산 서북쪽, 갑산 북쪽에 있는 백두산은 남으로 연지봉에 이어진다.
연지봉은 남으로 허항령에 이어지며 허항령은 연지봉서 二分岐된 것 중의 하나로 백두대간의 본줄기에 있다. (이런 식의 연결 분기 관계가 태백산에까지 계속됨)
삼척 서남에 있는 태백산에서 二分岐된 것 중의 하나가 수다산-백병산-소백산-속리산-삼도봉-덕유산-유치-지리산에까지 이어져, 이 지리산에서 끝난다.
곤양 북쪽, 사천 서쪽에 있는 취령부터 그 이하는 洛南正脈(취령-여항산-김해 남쪽의 盆山 연결 맥)을 이룬다.
[산경표]內의 表들과 바로 위 필자가 풀어 소개한 내용을 바탕으로 백두대간 중심의 우리나라의 大산맥을 地圖上에 나타내 보면 그림 1과 같이 된다. 이 그림을 보면 백두대간의 正體와 槪念은 더욱 명백해지는데 그것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白頭大幹은 한반도의 方向즉 대체로 北-南 방향의 큰 산맥줄기이다. 글자 그대로 北邊의 백두산에서 남으로 남해 가까이의 지리산에까지 길게 이어진 大幹산맥이다.
백두대간은 하나의 단절 없는 大連脈이어서 곧 大분수령이 된다.
백두대간은 한반도內 북-남 走行의 大山脈軸이다.
이처럼 신경준은 백두대간에 대해서 그 用語뿐만 아니라, 일목요연하게 表까지 제시하였다. 그런데 [산경표]의 表化작업은 일부 관련문헌의 출간연대가 확실치 않아 명확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몇몇 解題 글과 관계서적들의 출간 전후관계로 보아 신경준의 [旅菴全書](1770년경) 山水考와 [輿地考](1770) 山川論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그들 저술과 거의 同時期에 이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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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전서] 산수고(一)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위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뉜 것이 수많은 山들이요 수많은 특수한 것들이 하나로 모인 것이 물(강)이다. 국내의 山水는 12개로 나타낼 수 있다. 백두산에서 나뉘어 12개의 산이 되었고 12산이 나뉘어 八路(八道)의 산들이 되었다. 팔로의 여러 물이 합해서 12개의 물(강)이 되었다. 12 개의 산은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산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치 지리산이다.
"백두산은 남으로 연지봉과 허항령에 이르고 圓山에 이른다." (바로 이와 같은 식의 山連結 표현 중략)
"육십치가 남으로 장안산에 이르고 箕峙, 유치, 여원치가 되고 지리산에 이른다."
"지리산은 우리 나라의 남쪽 끝에 있고 아주 높고 크다. 백두산의 영숙한 氣가 이 산에 유축된 고로 頭流山이라고 말한다 "
[여지고] 산천론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도 위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다.
"백두산은 남으로 연지봉과 허항령에 이르고 원산에 이른다." (바로 이와 같은 식의 산연결 표현 중략)
"장안산이 남으로 箕峙, 유치, 여원치에 이르고 또한 지리산에 이른다 "
"지리산은 우리 나라의 남쪽 끝에 있고 아주 높고 크다. 백두산의 영숙한 기가 이 산에 유축된 고로 두류산이라고도 말한다 "
이상이 백두대간 산줄기 내용 및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명백히 들어난 시기>까지의 필자의 추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백두대간'이라는 바로 그 용어를 고려치 않을 때는 그 大幹의 <실질적> 내용은 水根木幹觀點의 시각에서 고려 초기(10세기 초반)에 유명한 風水家 겸 승려인 道詵에 의해서 최초로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백두대간을 의미하는 '大幹'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李重煥의 [택리지](1751)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白頭大幹'이라는 완전구비된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경우보다 약 10년 뒤인 1760년경 李瀷의 [성호사설]에 의해서였다. 또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황을 보다 상세화하고 표로써 제시한 사람은 [산경표](1770년경)의 저자 申景濬이었는 바 그에 의해서 '백두대간' 용어는 當代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대간의 구체적 내용도 알기 쉽게 體系化되었던 것이다. 바로 위처럼 된 것은 [성호사설]이 나온 뒤 약 10년 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大實學者 겸 地理論者인 다산 丁若鏞이 그의 [大東水經](1814)에서 白頭大幹(그의 표현으로는 '白山大幹')을 언급하였고, 그 대간은 풍수지리상의 龍에 해당된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2) 표기특징
백두대간 식 산맥 표기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묶어서 말할 수 있다.
첫째, 신경준 때까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어미산(根, 母, 始)으로 보고 거기서 뻗어 지리산까지 南走한 큰 산줄기(즉 백두대간)를 몸체(幹, 身)로 표기하였다. 백두산과 백두대간의 관계를 人間의 母-體 관계와 나무의 根-幹 관계로 표현하였다.(水根木幹) (도선, 우필흥, 어숙권, 이익, 이중환, 신경준)
둘째, 신경준의 [山經表]를 위주로 백두대간식 표기의 특징을 말해보면 아래와 같다.
백두대간은 백두산-태백산-지리산 大連脈으로서 그 연맥의 기복은 있되 斷切은 없는 큰 산줄기로 표기되어 있다.(大連山脈)
백두대간을 大分水嶺으로 나타냈다.(大分水嶺 산맥)
백두대간을 한반도 北-南 주향의 大山脈軸으로 나타냈다.(大軸山脈)
총 15개 산맥 중 백두대간을 제 1급의 산맥(大幹)으로, 북부의 장백正幹과 남부의 洛南正脈을 제 2급의 산맥(正幹)으로, 나머지 12개의 산맥을 제 3급, 즉 最下級 산맥(正脈)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그들 산맥에 각기 대간, 정간, 정맥 3가지 용어를 붙였다. 이는 산맥들의 근원(시작), 한반도 전체 내 中央 종주 여부, 연맥의 규모 등을 근거로 하여 계급화 한 것이다. 결국 理解 및 表記의 體系化와 용이화를 실현해낸 것이다.
제 1급 산맥이면서 大連山脈이요, 대분수령 산맥 및 大軸山脈인 白頭大幹과 제 2급 산맥이지만 北東部와 南東部에서 각기 분수령 구실을 하는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정간 구실)을 제외한 分岐性 내지 分枝性의 나머지 산맥들은 주로 主要 河川들의 本流方向을 기준으로 해서 그 하천의 남 북 중 어디에 있느냐를 가지고 산맥名을 붙였다(예; 낙동강 본류 동쪽 소재면 낙동정맥). 이렇게 산맥이름을 붙이면 이름붙여진 산맥들 사이는 表記上 의당 河川의 분명한 유역이 되므로 하천유역 판정-이해에 도움을 주게 된다.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分岐가 이루어진 곳에, 그리고 다른 산줄기 중에서도 갈라져 나가는 곳에는 주요 산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들 주요산을 明示하였고, 많은 산의 경우 分岐關係나 분기數를 병기하였다.
남부소재 지리산은 백두산의 영숙한 氣가 흘러(頭流)와 축적된 것이어서 頭流山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산은 아주 높고 크다고 표현하였다. 물론 백두대간이 끝나는 산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셋째, 이상의 것들을 보건데 산맥 表記 방식이 地表下 地球內部的 構造, 가령 地體構造나 地質구조, 構造線 방향 등과 같은 상태들을 고려하여 표현-표기한 것이 아니고 지표상에 나타나 보이는 山川의 모양과 그 달리는 방향을 보고 知覺-認知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표현-표기한 것이다. 필자가 몇 년 전에 韓國地理 공부에 있어서 우리 나라地形을 이해하는 데에는 地體構造的으로 이해하는 것, 知覺-認知的으로 이해하는 것, 景觀-利用的으로 이해하는 것의 3가지 이해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한 바 있거니와, 백두대간식 표기는 주로 지각-인지적으로 이해한 바(경관적 이해 포함되는)에 기초를 두고 표현-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과 글, 그리고 表로써는 위와 같이 하였는데, 그러면 多衆에게 地圖化해서알리는 데는 어떻게 하였는지를 보기로 하자. 필자가 갖고 있거나 찾아본 관계古地圖들을 근거로 할 때 地圖上에 백두산을 조종산(母,根)으로 삼고, [산경표]에 나타난 식의 백두대간 中間無斷切 등을 나타내는 이른바 백두대간식 산맥표기(그리기)는 16세기 초반의 '混一歷代國都강理地圖'(작자 미상)에서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지도와 지도이름이 아주 비슷하고 지도內에 담을 내용에 관한 생각도 비슷하지만 제작시기는 약 150년 이상 앞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근, 김사형등 4人作; 1402)를 보면 백두산이 그려져 있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산맥줄기의 경우 백두산-원산-황초령 연맥상이 혼란스러우며 황초령서 계속 南으로 이어져야할 大幹의 줄기가 황초령 直南에서는 끊어지도록 그려져 있다.
16세기 중반(1557)의 '朝鮮方域之圖'는 안정된 조선前期 시대(임란 前)의 국토에 八道, 산맥, 하천, 주요 地名 등을 넣어 비교적 잘 그린 지도이지만 거기에도 大幹은 황초령 直南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출간 後 다시 백두대간식 그리기가 나타난 것은 18세기 초(1706)의 '요계관방地圖' 조선북부 부분(이이명 작)과 그와 거의 동시대의 '朝鮮全圖'(작자 미상)에서였다. 특히 '조선전도'에는 산맥을 나무줄기 모양과 같게 그려 넣어 전술한 水根木幹觀을 아주 잘 보여준다.
위 지도들 다음으로는 한참 후인 18세기 말 '東國地圖'(작자 미상)에 백두대간식 표기가 다시 보인다. 이어서 거의 같은 시기에 '朝鮮八道地圖'(작자 미상)와 [輿地圖]첩(작자 미상) 내의 아국총도 및 조선-일본-유구圖 부분에도 보인다. 특히 후자 내의 조선 부분(그림 2)에는 단순 명료하게 백두대간식 표기가 실려 있다. 계속해서 19세기 초기의 작자미상 '東國地圖', 작자미상 '조선국팔도통합도', 작자미상 '海左全圖', 작자미상 [해동여지도]첩 중의 조선전도 등에도 그려져 있는데 특히 '조선국팔도통합도'의 국토 윤곽 및 산맥주향은 바로 앞에서 소개한 18세기초 발간 '조선전도' 상의 국토 윤곽 및 산맥주향과 같다.
다만 '조선전도'의 수근목간 모양의 산-산맥 모양을 ^^^式으로 표기한 것만 다를 뿐이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인 1861년의 걸작 '大東輿地圖'(김정호 작)와 그 직후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대동여지전도'(대동여지도 축소판; 김정호작 추정)에 백두대간식 그리기(그림 3)가 다시 보이는데, 그들 두 지도상의 산맥표기는 필자가 보기로는 백두대간식 표기를 가장 잘한 것이다. 산맥들의 연결 분기 관계와 상세정도가 [산경표]의 내용에 아주 가깝다.
名稱上 朝鮮國이 끝나고 1897년 (고종 34년) 大韓帝國 시대로 들어서고 나서 2년후(1899)에 정부 學部편집국이 작성한 '大韓全圖'를 보면, 산맥들이 우모를 넣은 타원들의 列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쉽게 들어나 있지 아니하며, 산맥들에는 이름도 붙어 있지 않고 山名도 백두산 외에는 기입되어있지 아니하다. 물론 그와 거의 동시대 작품으로 볼 수 있는 학부편집국 작성의 '大韓輿地圖'도 非백두대간식 표기의 지도이다. 그 지도는 하나의 산맥을 二列 평행의 우모로 그렸고 역시 산맥들도 알아보기 쉽게 드러나 있지 아니하며 산맥이름도 없으나 山名들은 기입되어 있다.
한편 日帝의 소위 보호정치하에 들어가고(1905) 나서 3년 후인 1908년 個人(玄公廉)이 작성 인쇄한 '大韓帝國地圖'를 보면 거기에는 산맥표기가 우모-음영식을 사용해 이루어 졌고 일부 산맥들에 대해서만 산맥명이 붙여져 있으니 무산산맥, 분수산맥(현 낭림산맥), 금강산맥(현 태백산맥), 소백산산맥(현 소백산맥 및 일부 태백산맥) 등이 그것이다.
3) 사용기간
제 1절에서 논한 최초출현 시기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 대간을 말하고 그 脈狀도 최초로 제시한 것은 고려 초(10세기 초반) 풍수지리가 겸 승려 道詵이었다. 그 후 [택리지] 저자 李重煥의 '대간' 용어 사용, [성호사설] 저자 李瀷의 '백두대간' 용어 및 '백두正幹' 용어 사용, 그리고 전게 [산경표] 저자 申景濬의 '백두대간' 용어 사용과 여러 산맥들의 연결상태 및 연결관계의 구체적 제시로까지 이어졌다. [산경표]에 의한 백두대간 제시(1770년경) 후 그 대간의 다른 표현이 '白山大幹'이라는 말로 정약용에 의해서 그의 山川誌인 「大東水經」에 제시된 바도 있다.
조선의 改革이라고 할 수 있는 甲午更張(1894)을 거치고 大韓帝國(선언 1897) 시절에 들어와서도 著作을 통한 백두대간식 견해나 표기는 계속되었다. 玄采의 「大韓地誌」(1899) 지세 지질론 부분에는 '백두정간' 및 '백두西幹' 용어가 쓰인 가운데 백두대간식의 산맥소개가 실려 있고, 소위 보호정치 기간 중 地理공부를 통한 애국심을 크게 강조한 바 있는 張志淵은 [大韓新地誌(乾)](1907)에 위치론, 해안론, 반도국론 등은 日本人의 조선지리저서를 참고해 전개했으면서도 산맥론의 경우는 전통적 표기방식인 '山經'이라는 말을 썼고 게다가 백두산을 조종산으로, 백두산-지리산 연맥을 頭流의 연맥으로 보았다. 그의 [大韓新地誌(坤)] 전라북도론에도 위와 같은 두류의 연맥과 백두 조종산을 소개하였다.
日帝시기의 경우, 南宮濬의 [新朝鮮地誌(上 )](1914) 지세 지질론을 보면 백두산과 백두대간식 논의전개에 있어서 장지연의 위 저서를 그대로 원용하였고, '山經'論에서도 장지연의 논리를 그대로 따랐다. 그의 [신조선지지(하)] 전북 산악론에서도 역시 장지연의 논리를 따랐다.
위처럼 古文獻들을 근거로 하여 볼 때 실질적인 백두대간식 표기는 일찍이 고려 초기(10세기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 18세기 중반-19세기 초반에 많이 사용되었고, 대한제국 시절을 거쳐 日帝 시절에도 최소한 1914년까지는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용기간은 근 1000년이나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추가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19세기 종반 日本陸軍 참모부조차 同기관이 펴낸 [朝鮮地誌略(2)](1888)에서 한국의 山勢를 논하면서 백두산 산맥이 지리산에까지 連流 한다는 점과 그리하여 지리산이 頭流山이라고 불린다는 점, 그리고 백두산의 남쪽으로 뻗은 가지가 태백산에 이르는데, 그 형상이 마치 누운 龍과 같다고 표현한 점이다. 이에 우리는 일본인들도 20세기에 들어와 小藤이나 矢津의 논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의 전통적 산맥표기 방식을 크게 원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료를 달리하여 앞서 제시한 古地圖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그 사정은 다음과 같이 된다. 백두대간식 표기의 최초등장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가 나온 16세기 초반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지도상에 <백두대간식 그리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8세기 초 (1706)의 '요계관방지도'와 '조선전도', 18세기 말의 '동국지도'와 '조선팔도지도', [여지도]첩 내의 '아국총도' 및 '조선-일본-유구도', 19세기 초의 '동국지도', '조선팔도통합도', '해좌전도', [해동여지도]첩 내의 '조선전도', 그리고 19세기 중반인 1861년의 유명한 '대동여지도'와 그 직후의 '대동여지전도'에 백두대간식 그리기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지도 근거의 경우는 저서 근거의 경우와는 달리 대한제국 시절에 들어서고 나서는 얼마 안가서 곧 백두대간식 그리기가 公式的으로 끊어졌던 바, 그 일은 우선 대한제국 학부가 작성해 내놓은 '大韓全圖'(1899) 상의 산맥 그리기에서 알 수 있다. 그 지도에는 기존의 백두대간식 그리기가 전혀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거의 비스한 시기의 學部 작품인 '大韓輿地圖'에서도 非백두대간식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日帝의 소위 보호정치 시기에 들어와서도 個人이 작성한 '大韓帝國地圖'(1908)에도 백두대간식이 쓰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그 지도에 있는 산맥 그리기가 <근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우모-음영식으로 되어있는 것이 완연하게 보인다. 그리고 산맥 名들은 오늘날 식 표현에 가까운 '무산산맥', '금강산맥', '소백산 산맥' 등으로 쓰여져 있다.
이처럼 고지도들을 가지고 보면, 백두대간식 표기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가 만들어진 16세기 초반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빈번히 사용되었고, 그것이 대한제국의 最初期까지는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地圖上에서 볼 때는 그 사용 기간이 약 400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地圖上의 백두대간식 표기가 사라져 버린 것은 저작상에서 사라진 것보다 약 20년 먼저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와 같은 형편들을 근거로 하면 대략 대한제국 초기-보호정치 시대가 <전통적>인 백두대간 식 표기로부터 근대적이라 할 수 있는 <오늘날식> 표기로 넘어가는 過渡期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오늘날式 표기의 출현
여기에서는 근대식 내지 오늘날식 산맥표기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를 알아봄으로써 백두대간식 표기의 사용기간 종말을 제시코자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著作상의 백두대간식 표기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은 필자가 아는 한 1914년에 출간된 非敎科書인 [신조선전지(상)](남궁준)에서였다. 그렇다면 1914 년을 前後해서 오늘날식의 표기가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그 사정은 남궁준 저서보다 6년 앞인 1908년에 한국서 나온 大同書觀 편집의 [大韓地誌敎科書]([고등소학 대한지지]) 서두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아래 구절이 그것이다.
"本國의 山誌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하지 못하여 산맥의 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함으로, 이 책은 일본 전문대가 矢津昌永씨의 地理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이렇게 말하고 오늘날의 명칭인 '차령산맥'과 '마식(마식령)산맥' 등을 거론함과 아울러 그들 산맥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중등 교과서를 가지고 말해보면, 그 前에 1899년 현재의 [대한지지]와 1907년 장지연의 [대한신지지]에서도 전통적인 백두대간식 산맥표기가 행해졌던 것이 1908년의 [대한지지교과서](대동서관 편저)로 넘어오면서 10년 미만 동안에 新式(당시 기준) 表記로 돌아선 것이다. 그 돌아선 이유를 위 인용문에서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 표기가 정확한 산지구조 검사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그리하여 산맥론에 틀린 것이 많으므로 잘된 것으로 보이는, 산지구조 검사에 기초한 日本人 저술가 矢津의 저서에 의존해서 산맥 소개를 고쳐 제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矢津昌永이 어떤 저서에 위 지적처럼 정확하다고 여긴 한국 산맥론을 써 놓았는가를 잠시 알아보자. 대동서관의 전게책이 나오기 4년 전인 1904년에, 그러니까 일제의 보호정치 시기에 들어서기 직전 해에 矢津은 훗날 重刷를 거듭한 바 있는 [韓國地理]를 東京에서 출간하였다. 그 책에서 그는 같은 日本人 학자 "小藤文次郞 박사가 1900년부터 약 15개월에 걸친 탐험 여행에 의거하여 한국의 山岳系統과 지체구조를 밝혀냈으므로" 矢津 자신의 위 [한국지리] 책에서는 小藤의 持論槪要를 적절히 소개하면서 한국의 산악계통을 제시하겠다고 明記한 바 있다
그렇게 해서 矢津은 한국의 산악-산맥 계통을 小藤처럼 3 系統 즉 제 1기 2기 3기의 산맥으로 나누어 기술하였고 山系地圖(산맥지도)도 그려 넣었다(그림 4). 그 같은 기술 내용을 참고로 하여 대동서관은 [대한지지교과서]([고등소학 대한지지]; 1908)에 <신식> 표기를 집어 넣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과 과정을 보건데 韓國人 저서상 오늘날식 표기의 첫 출현은 현재로서는 1908년 대동서관의 [대한지지교과서]에 의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1908년의 新式 표기의 근거는 따지고 보면 矢津(1904)을 거쳐 小藤(1900-1903)에게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산맥표기가 신식화된 것은 분명히 20세기에 들어와서 행해진 日本人의 한국 현장탐사 사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矢津 저서의 산맥기술 부분은 1924 년 東京서 출간된 한국문화에 관한 村田懋려의 저서 [朝鮮の生活と文化] 중 한국의 산맥론 전개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村田은 矢津의 한국산맥 3계통을 비롯한 산세-산맥 부분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矢津의 [한국지리] 중 산맥론은 당시 국내발간 한국지리책 및 日本人 村田의 한국문화책 산지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후 1930년에 일본서 간행된 한국지리에 관한 집중적 논의書요 당시 한국 지식인들 손에 비교적 많이 들어간 [日本地理大系 朝鮮篇] 內 中村新太郞(지리학자; 한국지리 전문적)이 집필한 지질-지체구조선 기초의 3방향 산맥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지모 부분, 1933년 香川幹一의 명저 [日本の地形] 內 조선부분(지체구조에 의거한 3방향 산맥들 위주), 그리고 1935 년의 佐佐木淸治의 [圖說日本地理(下)]의 조선지방 부분 중 역시 3방향 산맥들 위주로 쓰여진 지형론(전게 小藤의 논리 추종)은 모두 출간 이후 한국의 地理人들에게 한국의 산맥관계 지식을 넣어주었는데, 특히 당시 지식인들에게 지질-지체구조선에 의거한 3방향 산맥들의 위치, 즉 조선(한국) 방향, 중국 방향, 요동 방향의 3방향 산맥들의 위치, 그들 산맥이름, 기타 산세 등에 관한 지식을 강하게 주입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위와 같은 저서출간이나 지식전파에 힘입어 1930년대 초에 初版이 출간된 조선총독부 간행의 [初等地理(1)]의 총설 및 각 지방론과 [初等地理附圖]의 조선全圖 및 부분도들, 그리고 위 [초등지리]의 해설집인 [初等地理書解說]의 총설 및 각 지방론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함경, 태백, 소백, 노령 등 다수 산맥名이 표기되어 있다.
위처럼 1908년 이후 신식표기가 日帝기간(1910-1945) 동안 계속 쓰였고 해방을 맞이하자 그 표기는 日帝時 공부한 大韓民國 第一世代 지리인들(교수, 교사 등)에 의해 국내 중등학교 지리 교과서들과 1957 년에 발간된 大學用 韓國地理책에 자연스럽게 도입 사용된 것이다.
그러한 예를 몇 개 들면 다음과 같다. 1950년에 나온 당시 국내 중등지리교육계에 큰 영향을 끼친 최복현 이지호 김상호 공저 중등학교용 [최신 우리 나라지리](해방 후 軍政의 교수요목 의거) 내의 지질과 지형 부분에는 앞에서 언급한 3개의 산맥주향과 그들에 속하는 오늘날 쓰이는 이름의 산맥들이 제시되었다(산맥지도는 실리지 않음). 일제 때 日人들의 표현과 다른 것은 조선 방향을 '반도 방향'으로, 요동 방향을 '서서남주'로, 중국 방향을 '서남주'로 표기한 점이었다. 그리고 구조선과 산맥방향과의 관계도 존재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해방 후 한국인 地理學者에 의해 최초로 출간된 대학용 姜錫午저 [槪觀韓國地理](1957) 내 산지의 융기상태 부분에는 전게 [일본지리대계 조선편]에 들어있는 中村의 지질구조선 圖가 인용 제시되었고 中村과 전게 佐佐木가 논의한 바 있는 式의 3방향 산맥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위 3방향에 해당되는 산맥들이 예시되어 있다.
3. 백두대간식 표기의 장 단점
물론 어느 방식이나 장 단점을 각기 지니게 마련이다. 어느 부분이 좋으면 다른 어느 부분은 문제점일 수가 있는 것이다. 객관적이고도 학문적 입장에서 두 방식의 장단점을 제시할 것인데, 우선 오랫동안 쓰였던 古 한국식인 백두대간식의 장단점을 먼저 논의키로 한다.
백두대간식 산맥표기는 장점으로서
첫째, 경관상 잘 보여지는 無斷切의 分水嶺들을 잘 표기했기 때문에 하천流域들을 파악하기가 아주 쉽다. 그리고 보이는 것 위주의 知覺-認知的 表記法을 사용했기 때문에 生活과 地形과의 관계파악 및 생활이용에 편리함을 준다.
둘째, 무단절 분수령들을 잘 나타내어서 산 및 산맥 줄기의 파악이 쉽고, 산맥들의 分岐 관계 파악도 용이하다. 그러므로 山地利用 계획이나 그 실천에 편리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백두산을 祖宗山으로 지각한 외에, 백두산과 백두산-지리산 연맥과의 관계를 水根-木幹 관계로 보았으므로 風水地理와 관련해서 한국지형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편리하다. 풍수지리관은 묘지(음택)풍수 시각을 제외하고는 건전한 한국전래-전통적인 土地觀이요 나아가 世界觀의 일부이어서 風水地理的으로 한국지형을 파악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뜻 있는 일이다.
반면 단점 내지 문제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國際的 表記관행과 어긋나는 점이다. 백두대간식 표기에서는 '漢北(한강 북쪽)正脈' 등처럼 주로 江에 연유해서 산맥이름을 붙였거니와, 국제적 관행은 산맥 내 어느 한 산에 연유해서 산맥名을 붙이거나, 江과는 무관한 산맥名을 따로 지어서 쓰는 것이다. 백두대간식 표기를 쓰게 되면 세계적 普遍性에서 멀어지고 불편해지며, 국제화-세계화 추세에 미루어 보아도 이익될 것이 없겠다.
둘째, 地域地理學的 차원의 地形理解에는 좋지만 成因과 관련된 산맥이해에는 약점이 드러난다. 成因관련 이해에는 地體構造 바탕의 이해가 따라야 편리하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산맥들을 인식 내지 이해하려고 할 때 지역지리로서의 <한국지리>를 알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구 내부관계 지형학 내지 지구과학적 차원에서 成因위주로 산맥들을 알고자 하는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두어야 한다. 後者의 경우라면 백두대간식 표기는 약점을 크게 지니게 된다.
4. 결론 및 향후 과제
그러면 向後 우리 지리학자들의 課題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 과제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싶다.
첫째는 적어도 국내 지리학자들이 地域地理로서의 韓國地理를 교육하거나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지질-지체구조式 산맥이해가 좋은 것인가, 아니면 지각-경관식 산맥이해가 좋은 것인가에 대한 깊은 검토를 해야한다. 지질-지체구조 바탕의 오늘날식 표기를 사용해야 한다면 일부 산맥들의 分岐點 시정만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광주산맥과 노령산맥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中部地方에 맥상을 보이고 있는 산줄기들을 예의 관찰해서 새로운 산맥명칭을 부여하는 일도 적극 검토해야할 것이다(가령 용문산맥).
이러한 산맥 재검토 명명 작업을 북한 당국(국가과학원 지리학부분 심의위원회)은 이미 1996년 1월에 완료하였는바, 북한은 기존의 오늘날식 표기를 전면 재검토하면서 일부 산맥들의 줄기를 재조정하였고, 또한 일부 산맥들은 폐기(가령 강남산맥)하였는가하면 몇몇 산맥은 새로이 설정 명명(가령 무등산 줄기)하였으며 기존의 ' 산맥'은 ' 산줄기'로 바꾸어 쓰기로 하였다. '산맥'을 '산줄기'로 바꾸는 작업을 제외하고는 남한 학계도 주목 검토해야 할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는 개인 레벨에서 이미 그 같은 작업을 필자의 저서 [우리국토 전체와 각 지역(I)](1992)에서 일부 수행한 바 있다.
둘째는 백두대간식의 전통적인 산맥표기가 <한국지리>교육에서는 소개되어야할 것인지 여부를 심도 깊게 검토하는 일이다. 속단키 어려운 문제이므로 가까운 장래에 이에 대한 집중적인 학문적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와 권혁재는 일단 先人들의 관점을 알려줄 필요는 있다고 보았다. 필자의 경우, [우리국토 전체와 각 지역(II)](1992)에 백두대간의 시작 산과 백두대간을 언급했고, 조금은 자유롭게 써도 괜찮은 교양지리서 [읽고 떠나는 국토순례](1994)에는 앞의 경우보다 많은 분량으로 백두대간과 이 말을 쓰게 된 意識上의 배경을 소개한 바 있다. 권혁재의 경우, 최근의 [한국지리(총론)] 제 2판과 同書지방편(둘다 1996)에서 '이른바 백두대간'이라는 표현방식을 동원하여 이 대간과 태백산맥-소백산맥의 관계를 약간씩 소개하였다. 그의 1987년의 [한국지리(총론)] 초판본에는 없었던 것이 금번의 개정판과 同書지방편에는 소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