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바람의 딸” - 꿩의바람꽃(竹節香附)
학명: Anemone raddeana Regel
쌍떡잎식물강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다년초
꿩의바람꽃의 속명 아네모네(Anemone)는 지중해가 원산인 아네모네의 그리스 이름으로 ‘바람의 딸’이라는 뜻이며 종소명 라데아나(raddeana)는 시베리아 식물연구가인 라데(Radde)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바람꽃은 줄기가 가늘지만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인데 ‘꿩’은 뿌리줄기에서 갓 올라온 잎과 화경엽의 모양이 꿩의 발을 닮은 데서 유래한다. 특히 어린잎이 아직 활짝 펴지 못한 채 또르르 말려 있는 모양은 영축 없는 꿩의 발가락이다. 그밖에도 여러 추측들이 있는데, 어린잎이 아래로 젖혀져 꿩의 목깃을 닮았다고도 하고, 줄기가 꿩의 굽은 모가지나 다리를 연상케 한다고도 하며, 화려하게 펼쳐진 꽃에서 장끼의 꽁지깃을 보았다고도 한다. 더러는 이 꽃이 필 때쯤 꿩이 발정하여 바람을 피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꿩의바람꽃의 어원인 아네모스(anemos, 바람)가 암시하듯 볕이 드는 숲가의 바람골을 좋아한다. 영명도 바람을 뜻하는 ‘윈드플라워(Windflower)’이다. 이른 봄에 피어 바람을 흔드는 가녀린 꽃모습의 이미지와 잘 통한다. 꽃의 형태나 사는 지역이 다양해서 이름 앞에 붙는 접두사가 다양하다. 한국에는 꽃대가 하나인 홀아비바람꽃, 둘인 쌍둥이바람꽃을 비롯하여 외대바람꽃, 회리바람꽃, 국화바람꽃, 숲바람꽃,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등 14종이 분포한다. 대개 3~4월에 꽃을 피우는데, 이 중 가장 일찍 시작하는 변산바람꽃은 에르(er, 봄)와 안토스(anthos, 꽃)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에란티스(Eranthis)속 식물이다. 그런데 바람꽃들의 대표 격인 ‘바람꽃’은 정작 한여름에 꽃을 피운다. 한자명으로는 흰 꽃을 표현한 은련화(銀蓮花), 다피은련화(多被銀蓮花) 위에 향기를 강조한 은련향부(銀蓮香附), 죽절향부(竹節香附)도 있다. ‘향부’는 이 식물의 뿌리가 사초과 방동사니속의 작은 뿌리줄기인 향부자(香附子, 생약명)와 흡사한 데서 온 것이다.
한국 자생식물인 꿩의바람꽃은 표토 층이 깊은 낙엽수림 속이나 산기슭에서 자란다. 이른 봄 머플러 잎을 날리는 희고 자그마한 꽃송이는 상기된 소녀의 얼굴처럼 여간 가엾지 않다. 바람꽃은 해 뜨기 전이나 날이 궂을 때 그리고 저물녘엔 피었던 화피를 닫아버려 아쉬움을 남긴다. 새봄으로 일찍 왔다가 무심히 사라지는 이 식물의 꽃말은 ‘덧없는 사랑’이다. 수줍은 듯 고개 숙이다가 차차 푸른 하늘을 향해 떳떳이 우러르는 모습에선 ‘사랑의 괴로움’이 그럴듯하고 또 ‘비밀스러운 사랑’에선 파르르한 추위 속에서 보일 듯 말듯 홀로 고개 숙인 짝사랑 같은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다사로운 것이 다사로웠는지 묻소 평생을 하루 같이 그리운 것이 그리웠는지 묻소 밤이 그 밤을 보듬고 낮이 그 낮에 안기어 사랑스러운 것이 끝내 사랑스러웠는지 묻소 그대는 진작에 봄이 되었는지 묻소 바람이 어제 다르고 꽃이 오늘 모른다한들 이승에 필 것이 기필코 피었는지 묻소 - 졸시 「바람꽃」
식물 스트레스 1위는 저온이라 한다. 첫봄으로 피기 시작하는 복수초 같은 작은 친구는 다발성의 수염뿌리를 땅속에 틀어쥐고 있으며 이것은 깽깽이, 처녀치마, 노루귀들도 마찬가지다. 현호색은 땅속 깊이 은행만한 동그란 괴경(塊莖)을 감추고 있어 이 힘으로 에인 숲속에서도 여린 꽃모가지들을 싱그럽게 흔들어댈 수 있다. 이처럼 키가 작은 식물들은 곧 무성해질 큰 식물들에 앞서 일찌감치 자신의 우주적 소임을 끝내는 생존전략을 택했다. 자기 존재의 특성을 살려 힘든 경쟁에서 살아남는 역사는 인간이나 자연이 매한가지. 바람받이에서 한해의 꼭두새벽을 피우고 사라지는 여린 바람꽃의 사랑이 못내 아쉽다.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