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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3권
17. 통찰지의 토양
17.1. 연기란 무엇인가
1. 무더기(khandha, 蘊), 장소(āyatana,處), 요소(dhātu, 界), 기능(indriya, 根), 진리(sacca, 諦), 연기(paṭiccasamuppā, 緣起) 등으로 분류 되는 법들이 토양(bhūmi,地)이라고 설했다.(ⅩⅣ.§32)
이 통찰지의 토대가 되는 법들 가운데서 연기(緣起)와 ‘등(ādi)’ 이라는 단어로 포함되는 연기된(緣而生) 법들이 아직 [설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이제 이들을 설명할 차례가 되었다.
2. 이 가운데서 무명 등의 법들을 연기라고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行)들이 있다.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老死)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
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3. 늙음·죽음 등은 연기된 법들(paṭiccasamuppannā dhammā,緣而生法)이라고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연기된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늙음·죽음은 무상한 것이고, 형성된 것이고, 연기된 것이고, 파괴되는 법이고, 무너지는 법이고, 빛바래는 법이고, 소멸하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태어남은 ··· 존재는 ··· 취착은 ··· 갈애는 ··· 느낌은 ··· 감각접촉은 ··· 여섯 감각장소는 ··· 정신·물질은 ··· 알음알이는 ··· 상카라들은 ··· 무명은 무상한 것이고, 형성된 것이고, 연기된 것이고, 파괴되는 법이고, 무너지는 법이고, 빛바래는 법이고, 소멸하는 법이다.(S.ii.26)”
4. 여기서 이것이 그 요점이다.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nna-dhmma, 緣而生法)들이란 이 조건따라 생긴(nibbatta) 법들이다.’
5.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라고 만약 한다면,
세존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는 연기와 연기된 법들에 대한 가르침의 경에서 연기를 가르치시면서 진실 등의 동의어로 오직 조건짓는 법들을 연기라 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법의 확립된 성질이고, 법의 결정된 성질이며, 이것에게 조건됨이다.
여래는 이것을 투철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abhisameti), 투철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이것을 천명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설명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 ···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법의 확립된 성질이고, 법의 결정된 성질이며, 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이다.
여래는 이것을 투철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투철하게 깨닫고 관통하시고는 이것을 천명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설명하고,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 이것을 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성질, 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S.ii.25-26)”
그러므로 연기는 늙음·죽음 등의 법들에게 조건이 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괴로움을 뒤따르는 것이 역할이며 나쁜 길로서 나타난다고 알아야 한다.
6.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각각의 조건들에 따라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tathatā, 如如)이라고 했다.
조건들이 모일 때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조건]으로부터 법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니다(avitathatā)라고 했다.
다른 조건으로부터 이 법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anaññathatā)라고 했다.
앞서 말한 이 늙음·죽음의 조건이기 때문에 혹은 조건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것에게 조건됨(idappaccayatā)이라 했다.
7. 이제 이것이 문법적인 뜻이다.
‘이다빳짜야((idappaccaya)’는 ‘이들의 조건’이란 뜻이다.
이다빳짜야가 바로 이다빳짜야따이다.
혹은 이다빳짜야들의 모임이 이다빳짜야따(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이다.
여기서 이 규칙은 문법적으로 찾아야 한다.
8. 어떤 이들은 외도들이 가정하는 자연(pakati)과 진인(眞人, purisa)등의 원인을 무시함으로써 조건을 의지하여 의지하여(paṭicca) 바르게(sammā) 일어나는 것(uppāda)이 바로 연기(paṭicca-samuppāda, 빠띳짜사뭅빠다)라고 하면서 이와 같이 오직 일어나는 것(uppāda)만을 연기라고 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
무슨 이유인가?
① 그런 경전이 없기 때문이고
② 경전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③ 심오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고
④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9.
① 단지 일어남만을 연기라고 한 경은 없다.
② [단지 일어남만을] 연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빠데사 위하라 경」(Padesavihāra Sutta, 部分住經)과 반대가 되고 만다.
어떻게?
“그때 세존께서는 초경에 연기를 순·역순으로 마음에 잡도리하셨다.(Vin.i.1)”라는 등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처음 정각을 이루신 세존께서는 연기를 마음에 잡도리하시면서 머무셨기 때문이다.
빠데사 위하라(padesa-vihāra)란 ‘한 부분에 머묾’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내가 최초로 정각을 루었을 때 머물렀던 그 한 부분에 머물렀다.(S.v.12)”
그때 그분께서는 조건의 구성을 보면서 머무셨다.
단순히 일어나는 것만을 보면서 머물지 않으셨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그런 나는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긴 느낌을 잘 알았고,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생긴 느낌, 삿된 사유를 조건으로 생긴 느낌을 잘 알았고 ··· (S.v.12)”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단지 일어남만을 연기라고 주장하는 자는 「빠데사위하라 경」과 어긋나고 만다.
10. 마찬가지로 「깟짜나 경」(Kaccāna Sutta, 가전연경)과도 어긋난다.
「깟짜나 경」에서도
“깟짜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S.ii.17)”라면서,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을 뿌리 뽑기 위해 순서대로(順觀) 연기를 밝히셨다.
왜냐하면 세상을 조건으로 세상의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어나는 것만을 [밝히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일어나는 것만을 보는 것으로는 단견이 뿌리 뽑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조건이 그치지 않음을 봄으로써만 가능하다.
조건이 그치지 않을 때 결과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단지 일어남만을 연기라 주장하는 자는 「깟짜나 경」 과도 반대가 된다.
11.
③ 심오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여, 이 연기는 심오하고, 또한 심오하게 드러난다.(S.ii.92)”
심오함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304이하)
단지 일어남에는 이런 것이 없다.
그들은 이 연기를 네 가지 [심오한] 방법으로 장식하여 설명한다.(§309이하)
그 네 가지 방법도 이 단지 일어남에는 없다.
이와 같이 심오한 방법이 없기 때문에도 단지 일어남만은 연기가 아니다.
12.
④ 문법에 맞지 않는다.
이 paṭicca(조건, 緣)라는 단어는 주어가 같을 때 과거시제에 적용되어 뜻을 이룬다. 즉,
“눈과 형상을 조건하여(paṭicca)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S.ii.72 등)”라고.
그러나[uppādamattaṁ paṭiccasamuppādo(단지 일어남만이 연기다)라는 문장에 서는 paṭicca라는 단어가] 동명사인 일어남(uppāda)에 적용되어 [두 동사가] 공유하는 주어(kata)가 없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일어남만을 연기라고 하는 것은 문법에 맞지 않다.
13.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조건을 의지하여(paṭicca) 일어남(samuppāda)이 있다.(hoti)라고 hoti(있다)라는 동사를 적용시켜 보자’라고.
그것은 옳지 않다.
무슨 이유인가?
왜냐하면 그런 경우는 없기 때문이고, 또 일어남의 일어남이라는 모순을 법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연기를 설하리라 ···어떤 것이 연기인가? ···
비구들이여, 이것이 연기이다.(S.ii.1)”라고 한 이 말씀에서,
‘hoti(있다)’라는 단어는 어느 한 경우에도 더해지지 않았다.
‘uppādo hoti(일어남이 있다)’라는 말도 없다.
만약에 있다면 일어남을 얻은 것이 될 것이다.
14.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다빳짜야(ida-ppaccaya, 이 조건)들의 상태가 이다빳빠야따(idappaccayatā, 이것에게 조건됨)이다.
그 ‘상태(bhāva)’는 무명 등의 [특별한] 양상(ākāra)인데 상카라들 등이 나타날 때 원인이 되고, 상카라들이 변화(vikāra)를 겪을 때 연기라고 이름한다.’라고.
그들의 생각은 옳지 않다.
무슨 이유인가? 무명 등의 원인(hetu)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늙음·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어남이다. ···
이것이 상카라들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무명이다.(D.ii.57-63)”라고,
이와 같이 무명 등이 원인이라고 말씀하셨지,
그들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기란 조건짓는 법이다’(§4)라고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말한 것은 바르게 말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15. ‘연기라는 용어의 그늘에 가렸을 뿐이지 그것은 단지 일어남(uppāda)을 말한 것일 뿐이다’라는 산냐(인식)가 일어나면,
다음 [게송의] 뜻을 이해하여 가라앉혀야 한다. 세존께서는,
[조건 따라] 생긴 법의 모임에
이 [연기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연결된다]
그것에게 조건됨은 은유법을 사용하여
결과로서 설하신 것이다.
16. 조건 따라 생긴 법의 모임(dhamma-samūha)이 연기라고 한 것은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에 도달하면(patīyamāna) 이것은 이익과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그것에 도달할(pacetuṁ) 가치가 있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빠띳짜(paṭicca, 緣, 조건하여)라 한다. 일어날 때 함께(saha) 바르게(sammā) 일어난다(uppajjati). 제각각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뭅빠다(samuppāda, 起, 함께 일어남)라 한다.
더욱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사뭅빠다(함께 일어남, 起)이고, 조건의 화합을 조건해서(빠띳짜, 緣) [일어나는 것이지] 그것을 거절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조건하여(緣) 일어나는(起) 것을 연기(緣起, 조건하여 함께 일어남)라 한다.
그리고 ‘이 원인의 모임이 조건이다’라고 해서, ‘그것에게 조건됨(tappaccayattā)’이다.
이처럼 연기(paṭiccasamuppāda)를 결과를 나타내는 일상적 표현으로 사용했다고 알아야 한다.
마치 세간에서 당밀을 조건으로 가래가 일어나는 것을 가래[를 일으키는] 당밀이라고 하고,
마치 부처님 교법에서도 부처님의 출현을 조건으로 [중생들이] 행복해 지는 것을 “행복[을 가져오는]의 부처님의 출현(DHS.194)”이라고 하듯이.
17. 혹은,
향하여(paṭimukham) 가기(ito) 때문에
원인의 모임을 빠띳짜(緣, paṭicco)라 한다.
모일 때(sahite) 일으키기(uppādeti) 때문에
사뭅빠다(起, sanuppādo)라 한다.
18. 원인의 모임(hetu-samūha)은 상카라(行)들 등을 나타나게 하는 무명 등 각각의 원인이라는 표제아래 설명되었다.
그것은 공통된 결과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모자라지 않다는 뜻에서 원인의 화합의 구성요소를 서로서로 향해서 가기 때문에 빠띳짜(緣)라 한다.
이것은 함께 모일 때 서로서로 분리할 수 없는 법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뭅빠다(起)라 한다.
이와 같이 조건하여(緣) 일어나는(起) 것을 연기(緣起, 조건하여 함께 일어남)라 한다.
19. 다른 방법으로,
조건의 모임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조화롭게 함께 법들을
생기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0. 무명 등의 표제로 설명한 조건들 중에서 상카라들 등의 법을 생기게 하는 조건들은 그들이 서로서로 의지하지 않고 서로서로 모자랄 때는 그런 법을 생기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조건들은 하나씩 차례대로가 아니라 의지해서 조화롭게 함께 법들을 생기게 한다.
듯에 맞게 단어를 사용하는 데 능숙한 성인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즉, 분명하게 빠띳짜사뭅빠다(緣起)라고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21. 이와 같이 말씀하시면서,
① 앞의 단어(즉, 緣)로 영원함(常見) 등이 없음을
② 뒤의 단어(즉, 起)로 단멸(斷見) 등의 논파를
③ 두 단어를 [합쳐서] 바른 방법(ñāya)을 밝혔다.
22.
① 앞의 단어로:
빠띳짜(緣)라는 단어는 조건의 화합(sāmaggi)을 가리킨다.
생기는 법들은 조건의 화합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그 빠띳짜(緣)라는 단어는 영원하다거나(sassata),
원인 없이(ahetu) [생긴다거나], [신이나 창조주 등] 거짓 원인(visama-hetu)으로부터 [생긴다거나], 지배자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학설(vasavatti-vāda)등으로 분류되는 영원함(常見)등의 없음을 보여준다.
영원하다거나 원인 없이 생긴다는 [견해] 등에게 이 조건의 화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3.
② 뒤의 단어로:
사뭅빠다(起)라는 단어는 법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조건이 화합할 때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이라거나(uccheda) 허무하다거나(nattika) 지음이 없다(도덕적 행위의 과보가 없다,
akiriya)는 견해가 논파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뭅빠다라는 단어는 단멸이라는 등이 논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조건에 따라 계속해서 법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단멸하고, 허무하고 지음이 없는 견해가 발붙일 수 있겠는가?
24.
③ 두 단어를 [합쳐서]:
각 조건이 화합하여 상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전체 단어인 빠띳짜사뭅빠다(緣起)는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 그가 짓고 제3자가 경험한다(S.ii.20)”라는 견해를 버린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언어를 고집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넘어서지 않는다(M.iii.234) 이와 같이 전체 단어인 빠땃짜사뭅빠다(緣起)는 바른 방법을 보여준다.
이것이 빠띳짜사뭅빠다라는 단어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