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계 연예인들의 활약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과거, 그들은 울분을 토할 분출구는 오직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당당하게 한국계라는 밝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었고, 무엇보다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이 문제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는 연예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스포츠맨, 정치인, 예술가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곳에서 활약을 했다.
재일교포로서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오고, 또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다 해도 일본 사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현실에서 어쨌든 일단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연예계와 스포츠계, 문화계 등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일본의 연예계은 연예계 입문시 철저히 소속사의 지시에 따라야 했던 것은 당연했던 일이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완화된(?) 편견으로, 각양각층에서 재일동포 혹은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한국인 스타들이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스스로 당당히 한국계라고 커밍아웃한 니키시노 아키라, 와다 아키코 같은 인물도 있지만, 그들 모두가 한국계라고 밝힌 것은 아니다. 자료라고 해봐야 신문기사라든가 Wikipedia 등 일부자료들을 근거로 제시해 두었지만, 공식적인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동안의 자료들과 문헌들을 토대로 볼 때 타당성이 있는 사람들만 수록하였음을 밝혀둔다.
[좌로부터 프랑크 나가이, 미소라 히바리, 후세 아키라, 이츠키 히로시, 니키시노 아키라, 미야코 하루미]
프랑크 나가이 (フランク永井, 본명 永井淸人, 1932년~) 1957년 소고백화점 도쿄점이 오픈하며, 캠페인 송으로 사용한 유라쿠초에서 만납시다(有樂町で逢いましょう)가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프랑크 나가이로 인하여 일본에서 저음 붐을 야기해, 1961년 [君戀し]로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한 바 있다. 1985년 동경 메구로구 자택에서 목을 메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까지도 재활훈련을 받고 있다고 한다. 1960년말 일본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첫 내한공연을 한 바 있다. 세계적인 매혹의 저음을 뽐내던 나가이도 내한공연 땐 일본 대중문화가 금지되던 시절이라 대부분 팝송을 부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미소라 히바리 (美空ひばり, 본명 加藤和枝, 1937-1989) 1946년 9살의 나이로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생애 1,500곡을 남겼다. 미소라 히바리는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여배우로 활약했다. 아직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가수중의 한명으로 남아있는 전설적인 가수이다. 그녀의 사후인 1989년 FNS 가요제 특별상, 1990년 제27회 골든아로상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 한국에는 이미자가 있고, 일본에는 미조라 히바리가 있다고 할 정도이니 그 인기를 가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후세 아키라 (布施 明, 1947년~) 1965년 싱글 앨범 Tears and Smiles to You 로 일본 가요계에 데뷔했다. 로미오와 쥴리엣의 올리비아 핫세와의 결혼으로 더 유명해진 후세 아키라. 18세의 나이에 데뷔했다. 이후 가창력과 뛰어난 외모로 젊은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특히 1970년 NHK의 홍백가요대전에서 마치 새를 연상시키듯 팔을 넓게 벌리고 열창하던 모습은 가히 일품이었다는... 1987년 한중일 대표가수가 한자리에 모였던 [팍스 뮤지카]에서 조용필, 알란탐 등과 함께 했던 공연이 아직도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츠키 히로시 (五木ひろし, 1948년~) 일본 남자 엔카가수의 대표주자 이츠키 히로시. 1964년 제15회 컬럼비아 전국가요콩쿨에서 우승하여 가수의 길로 접어든 일본엔카의 대부. 1970년 전일본가요선수권에서 10주 동안이나 Top에 랭크되기도 했다. NHK 홍백가합전 통산 출장횟수가 37회로 전체 3위에 올라있다.
니키시노 아키라 (錦野旦, 본명 錦野明, 한국명 김명식, 1948년~) 엔카의 흑기사,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에 엔카를 열창하는 미키시노 아키라는 70년대 일본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1970년 데뷔곡 [이미사랑하나 봐, もう愛なのか]로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거머쥐었으며, 일기절정기에 스스로 한국계임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0년대, 당시 한국의 인기가수 정수라와 함께 [Viva Korea]를 취입하기도 했다. 1993년, 당시 45세였던 니키시노는 누드 앨범집을 발표하면서 일본을 충격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 본명 北村春美, 한국명 이춘미, 1948년~) NHK 홍백전에 25회나 출연한 관록의 미야코 하루미. 1963년 제14회 컬럼비아 전국 가요 콩쿨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4년 싱글 앨범 [困るのことョ]로 데뷔, 그해 제6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타고난 목소리와 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라이벌(같은 한국계) 미소라 히바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현재 일본 엔카(演歌)계의 명실상부한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좌로부터 와다 아키코, 야시로 아키, 사이죠 히데키, 고야나기 루미코, 야마구치 모모에, 나카모리 아키나]
와다 아키코 (和田アキ子, 한국명 김복자, 1949년~) 일본에서 조차 존경하는 거물급 가수 와다 아키코, 그녀의 한국이름은 김복자였다. 신이 내린 목소리, 폴발적 가창력으로 전 일본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데뷔 30년 만에 한국계임을 밝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가 한국계라는 것은 공공연히 알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조차 그녀의 존재는 차별속에서의 예외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지금도 일본연예계의 대모, 일본가요계의 시어어니 격으로 방송인 겸 가수로 활약중이다.
야시로 아키 (八代亞紀, 1950년~) 중학졸업 후, 버스 안내원을 거쳐 고향인 구마모토현의 클럽가수로 출발한다. 1966년 동경으로 상경하여 신바시와 긴자 등지에의 클럽에서 노래를 하다 1971년 가요계에 데뷔한다. 이츠키 히로시와 마찬가지로 NTV 전일본가요선수권에 출전, 10주 동안 우승하여 챔피온이 되기도 하였다. 1997년 오사카 신가부키초에서 1개월간 공연을 개최하는 등 엔카의 여왕으로서 아직도 맹활약중이다.
사이죠 히데키 (西城秀樹, 본명 木本龍雄,1955년~) 1972년 1집 앨범 [Koisurukisetsu]로 데뷔했고 가수 겸 배우로 활약중이다. 1998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일본전통 복장을 입고 폐막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1년 15살 연하의 회사원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으며, 대담하게 [H45]라는 세미누드집을 발매하기도 했다. 200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많은 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야나기 루미코 (小柳ルミ子, 본명 小柳留美子, 1952년~) 1971년 싱글 앨범 わたしの城下町 로 가요계에 데뷔한 고야나기 루미코. 고야나기 루미코가 55세이던 지난 2007년 27살 연하의 이시바시 마사다카(당시 28세)와의 결혼 발표로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13살 연하의 오오스미 켄야와 2000년 이혼한 전력이 있는 그녀라 더욱 놀랐다는 후문이... 현재 가수 겸 배우로 활약중이며, 대표작으로는 강아지의 왈츠, 김전일소년의 사건부, 특명계장 타다노 히토시 리턴즈 등이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 (山口百惠, 1959년~) 가수 겸 배우였던 야마구치 모모에는 1970 년대 당시 일본 아이돌 1세로 대표되던 인물이다. 최초의 데뷔는 1972년 니혼TV [스타탄생] 이었고,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년간 맹활약했다. 1973년 영화 [としごろ]에 출연, 동명의 곡으로 가수로도 데뷔하게 되었으며, 1976년 브로마이드 연간 매출액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1980년 은퇴 이후, 현재는 두 아들을 둔 평범한 주부로 동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카모리 아키나 (中森明菜, 1965년~)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나카모리 아키나. 1983년부터 5년 연속 유선방송의 최다 리퀘스트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고, 1987년 제1회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일본은 나카모리 아키나를 가질 자격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이 있는 음색을 자랑했다. 나카모리 아키나, 곤도 마사히코, 마쓰다 세이코가 연결된 스캔들로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좌로부터 전월선, 게이코 리, 버발, 소닌, 이토 유나]
전월선 (田月仙, 1959년~) 해협을 넘나드는 가희(歌姬)로 동경 출신의 성악가(소프라노)이다. 1985년 오페라 [スペインの時]로 데뷔했고, 1985년 평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오페라 [카르멘] 주연으로 공연했고, 2002년 일본 고이즈미 총리 주최 김대중대통령 환영 공연 독창을 했다. 2004년 NHK에서 90분 특집프로 [해협을 넘나드는 가희 재일 한국인 성악가의 20년] 방송하기도 했다. 북한국적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1994년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꿨다고 한다.
게이코 리 (ケイコ リ, 일본명 山本敬子, 한국명 이경자, 1965년~) 일본의 여성 재즈보컬리스트 겸 피아니스트로 한국인 3세로 대한민국 국적, 1995년 1집 앨범 [Imagine] 으로 데뷔했다. 1998년 스윙저널 재즈 디스크 어워드 베스트 뉴스타상, 1999년 스윙저널 재즈 디스크 어워드 베스트 보컬리스트상을 수상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재즈뮤지션 게이코 리는 일본 음악의 정서를 담은 몇 안 되는 재즈 뮤지션중 한명으로 우뚝 자리매김했다. 90년대 이후 재즈의 소울적인 분위기를 노래했으며, 백인 재즈계열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보컬의 맥을 잇는 보컬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버발 (ヴァ-バル, 한국명 류영기, 1975년~) 1999년 M-Flo 싱글 앨범 [The tripode. p.] 로 데뷔했다. 일본의 힙합그룹 M-Flo, MIC Banditz, Teriyaki Boyz의 멤버이며, 힙합 랩퍼이다 MC 로 활약중이다. 동경 출신이며 재일한국인 3세,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부친은 戰前부터 와있던 한인2세이며, 모친은 戰後 渡日했다. 버발의 모친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인간호사로 戰地로 가는 등 국위선양에도 큰 공을 세운 바 있다.
소닌 (ソニン, 한국명 성선임, 1983년~) 가수 겸 배우로 활동중이며, 2000년 싱글 Love is Enegy 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2000년 혼성 그룹 EE JUMP 멤버로 활약했으며, 일본 고치 현 출신으로 재일교포 3세 출신이며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다. 2003년 제36회 일본TV드라마아카데미 신인배우상, 2003년 제40회 골든애로우상 음악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닌은 자신이 재일교포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연예활동을 시작한 당찬 한국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토 유나 (伊藤由奈, 1983년~)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 겸 배우, 하와이 출신이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국적이다. 한국계 어머니를 둔 일본의 댄스가수로 데뷔앨범 [Heart] 가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최근 2집 [Wish]를 발매, 어쿠스틱 사운드가 깔린 Wish, Urban Mermaid, I'm Here 등으로 인기몰이 중이라고... 한국어, 영어, 일본어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로 활약중이다.
[그외] 1995년 1집 앨범 [Future Listening]을 발표했던 일본 유명 DJ 토와테이(정동화), 크리스탈케이(Crystal Kay Williams) 등도 빼놓을 수 없겠다.
가수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활약했거나 활동중인 일본에서 출생한 한국 국적의 가수들과 한국계 일본인, 그리고 한국계 타국적인들을 알아 보았다. 과거에는 시대적, 환경적 사정으로 일본으로 귀화한 가수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한류열풍을 타고 당당히 한국계임을 밝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본 글에서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건 그들의 국적이 아니라, 바로 치열하게 노력했던 과거와 현재의 또렷한 흔적들이다.
[자료출처] 1. 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60813175406181&cp=starnews 2.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 : 이츠키히로시, 와다아키코, 야시로아키, 나카모리아키나, 마치, 야스다나리미, 미야코하루미, 미조라 히바리 등 3. 김인덕의 [우리는 조센징이 아니다] : 프랑크나가이, 니시키노아키라, 고야나기루미코, 후세아키라, 사이조히데키 등 (전여옥의 자료와 중복되는 인물은 제외) 4. 중국에서 인기있는 일본인기가수, 실은 한국인 :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78840&servcode=700§code=710 |
출처: My Shock`s 잡음(雜音) 원문보기 글쓴이: My Sh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