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38)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미국불교사 밖의 있던 사람들 (2)
A) 토마스 윌리엄 리스 데이비스와 그의 부인 케롤린 리스 데이비스
토마스 윌리엄 리스 데이비스 (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 는 Pāli의 영어 학자이며 Pāli Text Society의 설립자이다. 그는 영국 아카데미와 런던 오리엔탈 리서치 스쿨을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토마스 윌리엄 리스는 영국 콜체스터Colchester에서 태어났고, 37 세에 사망 한 그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 교회에서 주일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공무원 경력을 결정하기 위해 리즈 데이비스는 Breslau 대학의 저명한 학자 인 A.F. Stenzler 밑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그는 Breslau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다.
1863년 리스 데이비스가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면서 스리랑카(당시 실론)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가 갈레 총독으로 있으면서 교회법에 관한 의문점이 있는 사건을 맡게 되었을 때, 팔리어로 된 문서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는 그때 팔리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1871년 그는 누와라칼라비야의 정부 보조 요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행정 중심지는 아누라다푸라였으며 그곳의 주지사는 1868년 고고학 위원회를 창설한 헤라클레스 로빈슨 경이었다. 리스 데이비스는 CE 993년 침공 후 폐허가 되었던 고대 신할리스 도시 아누라다푸라의 발굴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비문과 원고를 모으기 시작했고, 1870년부터 1872년까지 왕립 아시아 협회 저널의 실론 지사에 이에 대한 기사를 연재했다. 그는 지역 언어를 배우고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리스 데이비스의 공무원 생활과 스리랑카의 거주는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의 상관인 C. W. 트윈햄과의 개인적인 차이로 인해 그는 공식적인 조사를 받게 되었고, 재판이 진행되었고, 리스 데이비스가 위법행위를 했다는 고발은 기각되었다. 리스 데이비스 관할지역 주민과 그의 직원들에게 부적절하게 벌금을 추징했다는 것과 그 외 많은 위법행위들이 드러났다.
영국 식민지였던 실론(현재의 스리랑카)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리스 데이비스가 팔리어 성전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귀국 후 협회를 창설하였다. 팔리성전협회(The Pali Text Society, 약칭 PTS)는 1881년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가 창립한 단체로, 팔리어 성전 보급과 영어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팔리성전협회에서 출간한 로마자화한 팔리어 성전은 PTS본(또는 PTS판)이라 불리며, 팔리어 성전 연구의 기준이 되었다. 이 협회는 팔리 대장경과 주석서의 번역 이외에 《팔리어-영어사전》《영어-팔리어사전》 《팔리어 용어색인》 《팔리어 입문》 등 부수적인 문헌들도 다수 펴냈다.
리스 데이비스는 불교에 관한 Buddhist India 등 몇 권의 불교관련 저서가 있다.
토마스 윌리엄 리스 데이비스와 케롤린 리스 데이비스는 한국어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리스 데이비스는 몰라도 이 팔리성전협회라는 이름을 아는 불교인들은 많다. 한국에도 팔리성전협회가 있다. 팔리성전협회의 자매단체로, 철학박사 전재성의 주도로 1997년 광주에서 창립되었다.(1999년 서울로 옮김)
그의 부인인 케롤린 리스 데이비스(C.A.F. Rhys Davids1857-1942)는초기 불교 분야 연구에 가장 광범위한 공헌을 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1907년부터 팔리성전협회의honorary secretary였고, 1923년부터 1942년까지 회장으로 있었다. She was honorary secretary of the Pāli Text Society from 1907, and its president from 1923 to 1942.
그녀는 < Buddhist Psychology> 등 불교에 관한 수 많은 저서가 있는데 ‘Vishwanath Prasad Varma’ 저서를 김형준씨가 번역한 <불교와 인도사상> 181페이지에도 케롤린 리스 데이비스 저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래의 글은 본지에서 약 5년간에 걸쳐 번역한 릭필즈(Rick Fields) 가 쓴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 나오는 글이다. 한글에서 한창호 번역으로 이야기 미국불교사 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179-181쪽에서 옮김.
리즈-데이비스와 팔리어 경전
당시 유럽학자들은 실론이야말로 아시아에서 가장 순수한 불교(붓다의 원래 교의 및 초기 승가의 전통과 가장 가까운 곳이란 의미에서)의 고향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견해에 가장 많은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윌리엄 존스 경처럼 영국 공무원으로서 원주민의 법전을 해석하기 위해 실론의 고전언어에 정통하게 되었던 토머스 리즈-데이비스Thomas Rhys-Davids였다. 리즈-데이비스는 한 비구승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해결하도록 요청받았다. 문제는 그 승려의 보좌승려가 자리를 이을지, 아니면 다른 승려가 자리를 이을지를 판가름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 해답은 오로지 팔리어로만 읽을 수 있을 비나야Vinaya라 불리는 율장律藏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 팔리어를 가르쳤던 비구승인 우난세 야트라물레Unnanse Yatramulle는 이 젊은 행정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년 뒤 리즈-데이비스는 “…… 그는 고통스럽고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의 영향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을 향해 가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에게 찬사를 보내며 이렇게 썼다.
나는 팔리어 학자로서 그의 학식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방인을 가르치기 위해 처소를 떠나온다는 점에 무척 감사했다. 움푹 들어간 그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났고, 그는 팔리어 자체에 대한 토론에서 자꾸만 불교에 관한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나는 그가 경전의 모든 게송과 윤리학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이야기하는 걸 듣길 좋아했다. 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에게는 나를 존경심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소박함이 있었다.
스승에게서 영감을 받은 리즈-데이비스는 종려나무 잎으로 된 원고로 존재하던 대장경의 모든 판본을 수집했다. 당시 그의 말로 “파묻힌 채 출판되지 않은” 경전들에 그는 특별히 주목했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 1881년, 그는 ‘초기영어불전연구회(Early English Text Society)’의 본을 따서 ‘팔리어불전연구회(Pali Text Society)’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 팔리어불전연구회에서는 종려나무 잎으로 된 팔리어 경전들을 찾아 유럽과 실론의 모든 도서관들을 돌아다녔고, 이어 팔리어 경전을 로마자로 음역音譯했다. 데이비스의 아내 캐롤린 리즈-데이비스는 이렇게 썼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불교가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므로, 하나의 경전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즈-데이비스의 노력은 팔리어불전연구회와 막스 뮐러가 편집한 ‘동양의 성스러운 책들(Sacred Books of the East)’ 시리즈를 통해 출판되었다.
리즈-데이비스와 팔리어불전연구회 입장에서 보면 실론, 미얀마, 태국에서 발견된 팔리어 경전이야말로 인도에서 붓다의 ‘원래’ 가르침의 본질을 담고 있는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을 대표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북부의 소위 대승학파들은 미신과 승려들의 책략으로 오염되어 타락해 버렸다고 한다. 일부의 대승불교 역시 남방불교에 몰래 들어와 있었지만, 그러나 대체로 전체 팔리어 대장경은 붓다의 원래 가르침을 제시했다. 리즈-데이비스는 북방불교는 의식과 성인(보살)들에 의지하는 경우가 압도적이고, 승려들의 책략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에서 ‘로마가톨릭 불교’와 흡사한 반면에, 남방불교는 과학적․합리적․이성적인 ‘개신교 불교’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이 불교에 접근하는 합리적인 방법은 고타마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실존해 있는 가장 초기의 경전을 발견해내는 일이었다. 당시의 거의 모든 학자들은 이런 초기 경전은 팔리어로 되어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B) 시카고 종교회의의 힌두교 대표 비베카난다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and Zoroastrianism were six religions originating in South Asia and the Far East: Taoism,
Confucianism, Shintoism, Hinduism, Buddhism, and Jainism.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에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유교, 도교, 일본 신도,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조로아스트교(배화교)등 세계 10대 주요 종교 대표자들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 인도에서 힌두교인 대표로 비베카난다가 참석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불교인은 아니지만 이 사람의 이름이 미국불교사에 언급된다.
비베카난다(Vivekananda, 1862년~1902년)는 인도의 종교가이다.
벵골 사람으로, 라마크리슈나의 애제자(愛弟子)였다. 처음 이름은 나렌드라나트 다타(Narendranath Dutta)였고, 캘커타 대학에서 수학한 수재이며 설득력이 풍부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뒤에 스승 라마크리슈나를 만나 그로부터 결정적인 감화를 받고 세속을 떠나 6년간 히말라야 산중에서 수도하여 이미 지니고 있던 서구적 교양과 지성 위에 열렬한 힌두교 신앙을 전개시켰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서 행한 연설은 동양과 서양의 정신적 융합을 강조하여 네오 힌두이즘(Neo Hinduism)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에 다시 미국에 건너가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하여 베단타 사상의 보급에 힘쓰고 <각성(覺醒) 인도(Prabuddha Bharata)>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의 사상의 특색은 종래의 힌두교 개혁자들이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자칫하면 우상숭배를 금지하였던 것에 반대하여 예로부터 내려오는 본래의 힌두교를 보전하자는 것을 강조했던 점에 있다. 또한 그는 일체의 종교는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 선(善)이라 보고 종교적 보편성과 관용성을 주장하는 한편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문명에 경종을 울리고, 인도의 정신문명 특히 베단타 철학의 불이일원사상(不二一元思想)이야말로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점에 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실정은 빈곤과 질병·기근 등의 사회적 문제가 산적해 있었는데 이런 비참한 현실은 서양의 교육과 기술 도입에 의한 새로운 생활양식에 따라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나의 스승(My Master)> 등이 있다.
1893년 비베칸난다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회의에서 그는 힌두교 대표로 자신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된다. 기독교인은 힌두교도, 불교도가 될 수 없고, 힌두교도 또는 불교도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각자는 다른 이들에 정신을 동화 시켜야하고 자신의 개성을 보존하고 성장 법칙에 따라 성장 해야한다.
라마크리슈나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년~1886년)는 인도의 신비주의적 종교가이다. 캘커타 교외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사원(寺院)의 간부 승이 되어 칼리 여신을 숭배하였다. 너무 열심히 순수하게 숭배했기 때문에 때때로 기도에 열중할 때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가 있었는데 후에 숲 속에 들어가 12년 동안의 고행을 하여 신비적 체험을 쌓았다. 명상·고행을 중시하는 열렬한 비슈누파 교도였으나 이슬람교·기독교 등 각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으며 종교 진리는 결국 각 종교의 구별을 초월한 곳에 귀결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끝내 모든 세속적 생활을 이탈한 학문과 덕이 함께 높다고 하는 파라마한사의 존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에 통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샹카라의 베단타 사상에 입각하여 합리주의의 지적 태도로서가 아니라 내발적(內發的)인 열정으로써 설법했기 때문에 많은 공명자를 얻기에 이르렀다.
|
첫댓글 모른던 역사 이야기
잘 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