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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788-1021
제4장 종교철학 - La philosophie religieuse 830
19세기 전반부 시기에서, 종교철학은 두 방향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철학은 하나는 실재적인 것에 관한 광범위한 독단을 공고하게 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막연한 종교성 속에서 길을 잃듯이 상실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역사 철학의 전체에 재해석하는 경향이다.우리가 저 앞에서 서술했던 신앙 운동은 변화를 예고했다. 종교 사상은 더욱 독단적이고 동시에 더욱 내적이 된다. 독단의 수용은 종교적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내재적 신앙에 관한 반성을 동반한다. 거기에도 또한 실증정신이 지배적이다.
제1절 뉴먼과 영국에서 종교적 사유 Newman et la pensee religieuse en Angleterre 830
밴담주의는 순수하게 합리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 자신의 정신상, 건조하고 감동없는 권위적 종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 세기의 중반에 권위적 종교의 전형적인 대표자가 퍼지(Edward Pusey 1800-1882)였다. 공리주의가 시들해지는 시기에, 종교적 형식주의는 옥스퍼드 신학운동(Le Mouvement d’Oxford, fr. Oxford Movement)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 신학운동의 방향을 잡고 있었던 성공회 신부는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이었다. 뉴먼의 학설은 크리스트교의 변호론이었으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로만 카톨릭 교회의 변호였다. 그는 개종 후에 로만 카톨릭의 추기경이 되었다. 이 변호론의 토대는 비합리주의였다. 이 비합리주의는 그 당시 영국시인인 콜러리지(Coleridge 1772–1834)와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에게서, 프랑스에서는 적어도 르누비에(Renouvier, 1815-1903))에게서 수많은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출발점은 순수 논리적 추론에서는 실재적 승인(real assent, l'assentimet)을 생산한다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이었다. 동의에 의해 그는 어떤 의심의 혼란이 없는 승낙(acquiescement 복종)의 상태를, 즉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실재성의 승낙의 상태를 이해한다. 이 상태가 우리를 살게하고 감동하게 하고 또 행동하게 하며, 게다가 진리에 모자라지 않은 아름다움과 영웅주의에 가깝게 가게 한다. 합리적 추론은 다소 커다란 개연성에 도달하지만, 명증한 승인이란 스토아학파에서처럼, 더 높은 정도에서 내포적 표상이다. 이유있는 추론은 규정된 조건들을 갖고 전환될 수 있지만, 반면에 승인은 비조건적이고 매우 인격적이며, 자아 전체가 참여하는 작동이다. 파스칼이 수학적 정신의 소유자와 섬세의 정신의 소유자를 대립 시켰듯이, 뉴먼은 논리학자에 대립하는 진실한 이성론자(raisonneur)를 대립시킨다. 이 후자는 삶의 총체적 경험을 전제들로서 간주한다.
이렇게 서술된 승인이 종교적 믿음(la croyance)에서 실현된다는 점, 승인을 끌어내는 유일한 종교적 믿음이 카톨릭의 믿음이라는 점, 이것은 뉴면 작품의 변신론적 부분이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학설을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학설은 진실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앙(la foi)은 행동의 원리이다. 이 행동은 세밀한 탐구를 행할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이성은 명증함에 근거하는 반면에 신앙은 추정(la présomption)에 영향을 입는다. [한편으로] 복종과 종속 속에서 찾는 행복, 종속관계에 있지 않은 원죄의 본질, 전통적 관습에 매인 확신의 힘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이것들에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다른 한편] 승인을 가져오는 특징들과 같은 속죄의 필연성에 대한 직접적 감정도 있다. 이것은 카톨릭의 믿음에서 만 온전한 힘을 갖는다. 참조 동의 문법(An Essay in Aid of a Grammar of Assent (1870).
사람들은 와드(William George Ward, 1812-1882)의 크리스트교회의 이상(Ideal of a Christian Church, 1844에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저항하는 동일한 정신을 발견한다. 즉 “프로테스탄트는 정신성도 없고, 원동력도 없으며, 평범하지만 짓누르는 것이다.” 신학적 시론들(Theological Essays, 1853), 사회도덕성 강독(Lectures of Social Morality, 1870) 등을 쓴 영국 신학자인 마우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 1805-1872)도 또한 종교 속에서 인식보다 더 많은 삶을 보았다. 그는 이런 사실을 신학의 학자풍 토론들에 대립시킴과 동시에, “정의(定義)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위해서 행했던 성서적 텍스트들에 대해 비판적 연구에도 대립시켰다. 게다가 이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매우 큰 역할을 하는 성서비판과 복음서 비판이 영국에서는 종교적 관념들의 발전을 그렇게 많이 영향을 주지 못했다. 1860년에 한 권의 책, 시론과 논평(Essays and Reviews, 1860)가 나타난다. 이 책에 글 쓴 7명 중에서 3명, 즉 영국 신학자이며 플라톤 번역자인 조비트(Benjamin Jowett 1817–1893)는 영국 목사이면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기하학 교수인 포웰(Baden Powell, 1796–1860), 영국 국교회 목사인 파티슨(Mark Pattison 1813–1884) 등은 비판적 탐구 결과물들을 알렸다. 살아있는 종교에 대한 동일한 요구가, 영국 수필가이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66)를 쓴 실리(John Robert Seeley, 1834–1895)를 순수 복음주의에 나가게 했다. 순수복음주의는 예수의 인격성[신성]에까지 올라가기 위하여 모든 매개적인 전통을 팽개쳤다.
독창성과 정력을 가졌던 시인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신과 성서(God and the Bible. A Review of Objections to „Literature and Dogma“, 1875)를 썼는데, 그는 역사적 크리스트교로부터 종교의 개념을 전적으로 분리했다. 종교란 직접적으로 얻은 질료, 즉 진실한 경험이어야 한다. 그런데 크리스트교 신앙은 묵시록의 물질적 상상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 거의 무든 사람들에게 인식가능한 형이상학적 추론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매개적 종교적 경험, 그것은, 우리 존재의 법칙인 정의가 동시에 세계의 법칙으로 확신인 것같은 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스토아학파와 같은 이런 정식은 도덕성에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스토아학자는 인간 행복으로부터 추론된 탐구 만을 주목한다. 예수와 사도 바울은 여기에다 신적 임무의 감정을 첨가하였다. (46LMJ)
제2절 삐에르 르루 Pierre Leroux 832
삐에르 르루(Pierre-Henri Leroux, 1797-1871)는 철학이 절충주의라고 확고하게 판단했다. 그 철학은 부동성과 무감동의 철학이며, 사실과 현상(le statu quo)의 철학이며, “전통과 함께 이상을 빼버린 인간”의 철학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현학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현학자들은 철학적 질료들에만 전념했다. 절충주의는 나폴레옹시대의 고등사범학교의 산물이다. 그 시대 고등사범학교에서는 “수사학자와 변증론자들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프랑스 기자이면서 새로운 백과사전을 편찬했던 레르미니에(Eugène Lerminier, 1803-1857)가 베를린 사람에게 보낸 철학적 편지들(Lettres philosophiques adressées à un Berlinois, 1832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꽁디약(Condillac, 1715-1780)과 덧붙여서 한사람을 포함하면 리드(Reid 1710-1796) 이외에 18세기를 전혀 몰랐다. 르루(Leroux)는 반박과 절충주의(Réfutation de l'éclectisme, 1839)(p.51, 71-72)에서 이렇게 썼다. “그 특성은 철학적 실재성을 그 자체로 발견하지도 느낄 수도 없다. 거기에는 번역된 실재성, 발견된 실재성, 체계화된 실재성을 필요로 한다.” 그가 철충주의를 비난한 것은 그것의 학설과 방법이라기보다 그것의 정신적 태도였다. 철학은 사회적 삶과에 등지고 있는 특수 지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고등 사범학교 학생들에게는 심리학을 가르치고,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에게 미분계산을 가르친다. 이러한 태도는 주프롸(Théodore Simon Jouffroy, 1796-1842)속에 반영되었다. 그의 학설은 생명을 재통합하는 모든 것을, 즉 우주로부터 신을, 자연으로부터 인류성을, 인류성로부터 인간을, 사회로부터 개인들을 분리하고, 결국에는 인간 속에서 감정들로부터 관념들을 분리했다.
반대로 르루에 따르면, 철학은 인류성의 흐름을 따라야 하며, 각 시대에 인류성의 삶을 표현해야 한다. “철학은 생명의 과학이며 ... 철학은 생명에 대해 정의들과 진술들을 부여해야 한다. 이런 정의들과 진술들은 각 시대에서 예술, 정치, 과학, 산업의 진솔한 드러냄과 일치한다.” 철학은 기하학이 지닐 수 있는 결정적 특성을 결코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하학은 추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은 인류가 진보함에 따라 점점 젊어진다. 왜냐하면, “인류성(인류애) 속에 있는 다른 능력들(les autres puissance)도 사유와 동일한 자격으로 창조적이고 풍부하다.” 순수 사유는 최고의 천상계(un empyrée)에서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유는 실재성과 접촉하여 형성되고, 그리고 다음 차례에서 연속적인 작용과 반작용에 실재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와적 자연 세계의 인식에서든지, 집단적 인간 삶의 조직화에서든지 모든 진보(le progrès)는 형이상학 안에서 진보를 필수적이게 한다.” 따라서 철학은, 종교에서 진보적인 것을 인정하는 조건에서 보면,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차이가 나는 유일한 것은 철학적 사유의 기원에서 때로는 집단적 사유인지 때로는 개인적 사유인지 일 뿐이다. 집단적 사유란, 인류성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 “말하자면 그 사유가 개인들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개인적 사유란 체계적 사유에 영감을 주어서, 아미도 미래에 인류성에서 실현할 것이라는 것이다. 메시아들의 위상도 집단적 평가에서 예약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들로부터 사람들은 생시몽주의자의 기원과 동시에 헤겔주의자의 기원을 보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루는 비판적 또는 부정적 시대와 조직적 시대 사이에 생시몽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부정을 긍정적 경향으로 나가고, 또 잠재적으로는 긍정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성(인류애)은 여전히 구축 중에 있고, 결코 파괴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철학과 18세기 철학으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철학은 오직 인식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만, 소위 말해서 비판의 문제에만 전념했었다. 삐에르 르루는 이 점에 관해서 특수한 이론을 가졌다. 이 일탈의 발전은 크리스트교 종교가 취했던 형식으로부터 온다. 이 종교는 변화되지 않고 있었고, 여러 단죄 방식에 의해, 이미 결정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모든 논의를 질식시켰다. 그 결과로 철학은 “심리학적”인 문제에 집중하기 위하여 종교로부터 멀어졌다.
사람들은 시대의 정신을 족쇄들로부터 해방된 환희 속에서 표현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족쇄들이 정신에게 인식의 기원과 가치를 주의 깊게 조사하기를 강요했다. 르루의 철학은 변화되지 않은 것과 배제하는 것에 대한 단죄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또 실재물의 부분들에 대한 상호 내재성의 매우 일반적인 주장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당신들은 영혼을 지성에 국한 시키는가? 그러면 당신들은 플라톤주의에 빠져있고, 그것과 함께 과학의 전제주의에 빠져있다. 당신들은 철학을 감각(la sensation)과 정념에 국한 시키는가? 그러면 홉스의 체계에 빠진다. 그 체계는 국가의 전제주의에 의해서만 정념에 빠진 난폭함[야만인]을 제어할 수 있다. 루소처럼 당신은 영혼을 감정(le sentiment)에 제한하는가? 여기에 개인의 무화시키는 사회계약의 필연성이 있다. 진실은 이러하다. 실재물의 모든 조각[부분]은 전체와 연관에서만 설명되고 정당화 된다. 모든 존재의 “상호연대”는 그에게 있어서 그에게 있어서 단어에 의해 암시된 순수 외적 관계라기보다 오히려 “교단”(une communion, 영성체)을 지칭한다.
이리하여 사회적 제도들, 소유[재산], 조국과 가정은 정당화된다. 매개에 의해서만, 인간은, 자신을 만든 온전체(Le Tout)와 하나의 교단[통일체]을 이룰 수 있다. 재산이 노동수단이라는 정도에서, 그 재산에 의해서, 인간은 자연과 통일된다. 조국에 의해서, 보다 넓은 의미의 역사, 즉 인류의 역사의 일부를 이루면서 인간은 어떤 역사적 전통 속에 들어간다. 가정에 의해서, 인간은 이름, 성격 인격성을 갖는다. 이 제도들이 개인과 무한자 사이에서 단순한 매개이기를 끝내게 되면, 또 이 제도들이 제도 자체를 위해서나 자기 이기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그러면 재산은 노동을 위협하는 자본이 된다. 그리고 가족은 탄생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조국은 전재과 지배의 도구가 된다. 르루의 모든 활동은 이러한 남용을 교정하는데, 이 제도들은 인류의 삶에 다시 자리잡게 하는데 있다. 그의 사회주의는 재산 덕분에 갖는 자비로운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수단이다. 그는 1848년 6월 15일 국민의회 의원으로서 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알제리가 사회주의를 경험하는 지역이 되기를 요청했다. “그 인민이 시도하기를 내버려 두라. 왜냐하면 그 인민이 그 권리를 가졌다. 달리 말하면, 당신들은 벌통 속에 벌떼를 가두고자 강요하러 가는데, 그러면 꿀벌 속에서 관찰되는 것이 인간 사회 속에서도 관찰되리라. 전쟁, 피할수 없는 전쟁... 즉 신법이 원하는 것은 누군가 나가려는 것인데, 나가고자 원하는 것을 어떻게 안으로 안는가?” 이렇게 제도들이 지닌 정신에 맞게 이 제도들을 개혁하면서, 사람들은 이 제도들을 가지고서 해방의 수단으로 만든다.
제도들에 연관해서, 개인은 인류와 연결된다. 그러나 이 연결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자비(la charité) 즉 사랑(un amour)에 의해 연결되기보다 오히려 연대(la solidarité)에 의해 연결되어있다. 사랑은 인간 자신에게 향하기 보다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신에게 진실로 향한다는 점이고, 연대는 인류없이는 자신을 살게해 주지도 자신을 지탱해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개인에게 느끼게 해준다. 아주 다른 성격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르루는 이런 관점에서 오귀스뜨 꽁트의 생각들에 매우 이웃하는 생각들을 표현한다. “문명화된 오만한 자는 자기자신에 의해 알고 느낀다고 믿는다. 미친 녀석(Insensé)! 그는 인류에 의해서 인류를 위해서만 인식과 감정을 가질 뿐이다.” 인류(성)은 우리들 각각 속에 계속되고, 우리는 후손의 인류성 속에서 계속한다. 인류성의 연속은, 사실상, 개인의 삶의 연속성과 매우 다른 것이 아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 기억은 세부적인 것은 내버려두고 본질적인 것만을 간직한다. 신체적, 지적, 도덕적 유전은 인류의 기억이다.
제3절 장 헤노 Jean Reynaud 835
장 헤노(Jean Ernest Reynaud, 1806-1863)는 1854년에 땅과 하늘(Terre et ciel, 1854)을 썼으며, 그 이전에 이미 그는 백과전서지(Revue encyclopédique)에서 「무한한 하늘들(Infinité des cieux)」등의 다양한 논문들을 썼으며, 또한 데, 그는 신 백과사전(Encyclopédie nouvelle)에서 많은 항목들을 썼다. 1838년에 삐에르 르루와 함께 작업한 이 책은 디드로의 기획을 새롭게 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보네(Bonnet)」, 「뀌비에(Cuvier)」, 「고생물학(Paléontologie)」, 「땅의 이론(Théorie de la Terre)」, 「꽁도르세(Condorcet)」, 「빠스깔(Pascal)」, 「바울(Saint Paul)」, 「조로아스터(Zoroastre)」, 「오리게네스(Origene)」, 「드루드교(Druidisme)」 등의 항목을 썼다.
헤노는 1806년 리용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에꼴폴리테크니끄 학생이었으며, 꼬르시카에서 기술자로 지냈고, 생시몽주의 종교로 개종했으며, [생시몽(Saint-Simon 1760-1825)] 1830년에 파리에서 앙팡땅(le Père Enfantin, 1796-1864)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1년 후에 떨어져 나왔다. 그는 그 학설이 인류의 자유와 존엄성를 폐기한다고 비난하고 또 이 이론의 비도덕성이 여성의 운수를 악화시킨다고 비난하였다.
그의 고민은 적어도 오랫동안에 생시몽주의자의 고민이었고 심지어는 르루의 고민이었다. 그는 발랑쉬(Ballanche, 1776-1847)의 계시주의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가 알고가 원했던 것은, 덩어리로서 인류의 숙명이 아니라, 각 영혼의 개인적 숙명이다. 게다가 그는 생시몽주의의 또는 푸리에주의의 만병통치약을 망을 믿지 않았다. 초지상적 숙명에서 각각의 영혼이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 그 자체는 이전 삶의 잘못을 속죄하는 삶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삶은 또 다른 삶을 준비한다. 이 다른 삶은 어느 정도로는 나중에 무한한 천상의 영역에서 일어날 것이다. 헤노는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와 보네(Bonnet, 1720-1793)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신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믿었던 것처럼, 점점 더 전체화되는 영혼은, 결코 육체와 분리될 수 없고 영속적으로 시련에 시련을 거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할 지라도, 완전성으로 향하고 있다. 단어의 신학적 의미에서 지옥도 천국도 없다. 용서받지 못하고 영혼의 벌을 받는 사람들도 없고. 또 임무가 완수되었다고 지복 받는 자들도 없다. 그러나 영혼이 영속적으로 행하고 나가야 할 연속적으로 무한정한 체류가 있다.
그가 거부했던 크리스트교의 해결방식, 즉 영혼들의 창조의 해결방식은 그에게 혁명적인 생각들을 생겨나게 한 것 같다. 그가 신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불평등의 이론은 공공질서의 필연성에 의해서 가차 없이 요구된다. ... 그러나 당신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지 못하는가? 만일 평등주의자들의 유토피아가 퍼져나가서 점점 더 위협적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들의 신앙이 그 유토피아를 태어나게 하고 또 그 유토피아를 살찌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46MKD)
제4절 세크레땅 Secrétan 836
스위스 로잔에서 대학 교수인 샤를 세크르땅(Charles Gabriel Rodolphe Secrétan, 1815-1895)는 두 가지 과도함에 동시에 반대하였다. 하나는 합리주의적 신학의 과도함과 권위적 학설들의 과도함이다. 다시 말하면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설교자들”의 낙관주의에 대해서도, 순수 권위에 입각한 신앙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이 두 개념 사이에서, “크리스트교적 이성”의 개념을 구성했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관념운동의 정신 상태를 대표한다. 이 운동을 스위스에서 사람들은 각성운동((le Réveil)라 불렀다.
따라서 그의 자유의 철학(La philosophie de la liberté: Cours de philosophie morale fait à Lausanne, 1848)(1권: 역사, 2권; 관념)은 크리스트교의 철학적 전도서이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크리스트교의 이성을 이교도의 이성과 구별해야 한다. ... 한편으로 이교도의 이성은 크리스트교의 자체의 영향과 덕성을 통하지 않는다면 크리스트교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크리스트교의 지성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복원(여기서는 타락이후의 인간의 회복)이라는 작업의 일부이라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크리스트교의 주요한 학설들에 관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학설들을 우리는 역사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소위말해서 학설들이 역사철학의 중심과 실체를 형성한다. 우리는 자연적 이성이 사건에 앞서서 사정들(타락과 속죄)을 설명했다고 결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사건과 사건의 선언 후에, 크리스트교의 이성이 이 사정들을 이해하고자 애써야 하고 그리고 나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적어도 크리스트교 교리의 해석인 형이상학이 만들어진 것은 도덕론의 입문으로 쓰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외적으로 부여된 어떠한 독단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운명 자체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인간 자유를 정당화하고, 또 자유에게 규칙으로 알맞은 상위원리의 존재를 정당화함이 마땅하다.
세크레땅은 범신론의 이름으로, 유한한 존재 안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된 절대 자체의 필연적 귀결을 보는 모든 학설을 이해한다. [스피노자 범신론 연구자인] 야코비(Jacobi, 1743-1819)처럼 세크레땅도 범신론을 존재의 통일성 합리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그는 이로부터 많은 신학자들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신 속에서 내생적으로 필연적인 존재를 보는 모든 철학자들은 그 존재에게 똑 같이 필연적인 행동을 할당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이 필연으로부터 출발할 때, 결코 우연성에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이 범심론에서 벗어날려면, 신이 절대적 자유라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 만이다. 자유의 철학(2권, 16쪽)에서 세크레땅이 말하기를 “[그 신은] 자신의 자유 자체에 마주해서 자유이다. 플로티누스의 정식들을 상기하게 하는 정식들에서, 그는[신은] 존재이기를 원하는 것[무엇]일 뿐이고, 그는 존재이길 원하는 것 모두이고, 그는 존재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존재이길 원하는 것 모두이다. .. 자연적으로(naturellement) 완전한 존재라는 관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완전한 존재는 자유롭게(librement) 완전함을 얻게 될 것이라는 존재보다 덜 모순적일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절대적 자유의 우연적 작용들의 역사일 뿐일 수 있다. 처음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생산인 창조는 생산을 제시하는 신적 의지이외 다른 실체를 갖지 않는다. 신이 그 원하는 것 속에서 스스로를 구현하지 않고, 또 거기서 이중화를 되지 않은 것, 그것은 피조물의 독립을 허락하는 “기적”이다. 신은 영광의 욕망에 의해서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욕망에 의해서도, 필연적인 창조를 이루어야할 어떤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물 자체를 위하여 피조물을 원한다.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매우 스피노자의 자연 즉 신이다] 신은 피조물을 목표로서 원하고 따라서 그는 피조물이 자유롭기를 원한다. “신은 자기 스스로 생산되는 존재를 생산한다. 바로 이것이 이해해야할 바의 것이다.” 그 존재[인간 또는 생물종]는 생산되며, 다시 말하면 원초적으로 비결정적인 그 존재는 마치 천사처럼 신 안에서 구성될 수 있으며, 또는 악마처럼 신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구성하고자 시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만들었고, 소위 말하는 이런 점에서 낙원의 추방(la chute, 인류의 타락, 추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범신론 바깥에서 이루어진 타락이라는 세계의 현실적 상태와 사랑하는 신의 존재 사이에 유일 가능한 화해이다. 그러나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인간들에게 짓누르는 악 속에서도 연대가 있기 때문에, 인류성은 하나이며 단호한 결단(une seule décision)에 의해서 원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그것은 타락을 증거하는 도덕적 악의 현존이 아니라, 따로의지로부터 강요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독립되기를 원하면서, 피조물은 자신의 고유한 무화(l'anéantissement)를 원한다[무로부터 시작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 소원(바램)에서 피조물을 원하기 때문이다. [신은 물질(대상)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했다.] 피조물[인간]은 회복하는 권능(une puissance restauratrice)의 효과 덕분에 이 모순과 고통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원초적 통일성과 신의 사랑으로 자기회복의 역사이다. [크리스트교 역사관이다]
인류가 구별된 개별자들로 분해되는 것은 타락(추방)의 결과이며 동시에 회복의 수단이다.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세대들은 실제로는 유일한 존재만을 구성한다. 이 통일성(l'unité, 단일성)은 우리를 타인과 동일시하는 자비의 법칙(la loi de charité) 속에 단호한 증거를 갖는다. 그러나 개별자들로 분리는 점진적 생성을 허용하고, 그 생성은 치유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개별화의 원리는 신적 은총이며, 이 신적 은총은 구별된 개별자들의 창조라는 인류교(l'Humanité)의 서원에 일치 한다. 말하자면 개별자들의 각각은 존재들의 등급이며, 즉 인류의 측면이고, 따라서 진보의 수단이다. 이처럼 개별자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며, 불멸이다. 온자유(la Liberté)의 중심적 용어에서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치료적 생성의 관념 속에서 인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세크레땅에게 끼친 셸링(Schelling, 1775-1854)의 교육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진보는 “완전한 개별자”에, 즉 “크리스트”에 도달한다. 그에게서 회복하는 권능는 인류에 통합된다. 그 속에서 그와의 통합에 의해, 인간 본성은 변형된다. 이러한 변형이 구원이다. 크리스트의 죽음은 속죄(une expiation)가 아니다. 속죄에서 그는 인류성 대신에 자신을 대체한 것이다. 인류성이 표본(un exemple)이다.
세크레땅은 여기서 개인적 구원의 관념과 인류의 총체적 구원의 관념 사이에 대조를 만났다. 그에게 있어서 이 둘의 통합(l'union)은 온교회의 개념 덕분에 이루어진다. 온 교회란 “절대적 조직체”와 같다. 거기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는 자기 방식으로 동일한 목표에 협력한다. 개인은 집단과 더불어 그리고 집단 속에서 구출된다.
세크레땅은 형이상학을 위해 어떤 초연함(détachement)을 제시했다. 그가 이렇게 썼다. “나는 체계들을 세웠으며, 나는 이 체계들을 아주 무차별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의 형이상학도 단지 도덕론의 입문일 뿐이다. 이 도덕론은 사회적 행동과 더불어 나중에 나오게 되어, 그의 중요한 고민거리가 된다. 그는 도덕을 자유의 실현으로 간주했다. 그 도덕론은 자연의 정복을 수단으로 삼았다. 자연은 정치경제학의 대상이고 또한 국가들의 형성이 도덕론의 수단이다. 국가들은 전제주의에서 태어나서, 활동의 자유로운 실행의 보증자이다. 게다가 그는 자유의 실현을 칸트주의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책무(l'obligation)의 재료(la matière, 질료)는 책무의 형식(la forme)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칸트는 사변과 실천을 완전히 구별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사실상, “의지는 지성의 심층에 있다. 그런데 의지와 분리된 이성은 항상 형식적이다.” 따라서 이 이성은 필연적 연관들의 지각이며, 이 이성은 도덕적 질서를 기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성(la raison effective)은 의지와 지성의 종합이다. “이 동일한 이성이 이성의 영역에서는 믿는다는 필연성에 의해 표현되며, 이론의 영역에서는 행위하는 의무에 의해 표현된다.” 경험은 개인과 종 사이에 연대성의 연관들을 부여하고, 이 연대성의 연관들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수렴되는 의무(le devoir)가 나온다. 그 의무는 전체를 실현하는 의무, 즉 자비(la charité, 사랑)이다. (46NLF)
제5절 질 르끼에 Jules Lequier 839
결정론이 지배적인 학설이자 과학적인 학설인 이와 같은 이 시대에, 또한 결정론이 다윈(Darwin), 스펜서(Spencer), 뗀느(Taine)의 영향으로 주목받을 만한 방식이라 주장되는 시대에, 고독한 브르타뉴 사람인 쥘 르끼에(Jules Lequier, ou Lequyer, 1814-1862)도 있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끄에서 르누비에(Renouvier, 1815-1903)의 친구였다. 르끼에 어떤 작품도 완성된 채 남기지 않았지만, 르누비에는 친구가 미완성으로 남긴 글들 중에 몇 가지를 편집했다.르끼에는 이렇게 썼다. “필연성의 소름끼치는 독단은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장 속에 절대적 의심을 품고 있는 괴물(une chimère)이다. 그 독단은 신중하고 주의깊은 검토 앞에서 무화된다. 마치 빛과 그림자의 섞임으로 형성된 환영들(fantômes)처럼. 그런데 그 환영들은 두려움에 질리게 하지만, 손으로 그것을 건드리면 사라지는 것이다.” - 제일 진리의 탐구(La recherche d’une première vérité)(뒤가 판, 1925, 134쪽). 결정론자들은 사색적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바깥의 것만이 현존한다. 그들은 사물들만에 대해서, 마치 기계에 작용하는 것처럼, 행위를 생각한다. 그들에 마주하는 정신주의자들은 내적 경험을 통해서 자유를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행(l'acte) 속에서 억제가 없음을 파악하는 감정은 증거가 아니다. 경험은 단지 자아가 동일한 상황들 속에 두 번 또는 여러 번 있으면서 만일 그 자아의 행위가 매번 달랐다는 경우만을 원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경험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게다가 명증함에 근거하는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착각의 명증성함들이 있기 때문이다.
르끼에 작품의 근본적 새로움은 자유를 진리탐구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서 도입했다는 것이고 즉 “실증적조건, 다시 말하면 인식의 수단”(위책 141쪽)으로서 도입했다는 것이다. 자유는 제일 진리를 탐구하는 성찰(méditation)의 내부에 만 있다. 그 진리는 그 자체로 충분하고, 모든 의심의 대피처이다. 르끼에는 우선 자신의 성찰을 데카르트적 방식으로 이끌면서, 모든 긍정이 비어있는 완전한 의심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아주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강화된 의심! 자연에 반대하는 의심, 폭력적이고 상상적 상태, 아무것도 만족하지 못하는 요청적이고 무감각해진 정신의 격노(l’exaspération 격분)”(위책 104쪽) [플라톤의 초기 저작으로 인식에 관한 물음이 있는] 메논(Ménon)편의 고대 난문제를 다시 불러와서 그가 서술했을 때, “학문자체에 의한 것과 달리 학문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함”(106쪽)을 포기하는 것에 가깝다. [학적 가능성에 대하여] 그리고 갑작스런 급변(le revirement, 방향 전환)에 의해서, 그는 탐구의 가장 심오한 조건을 파악했다. 즉 이 조건은 자유였다. “어떻게 탐구에서 한 발작을 나아갈 것, 즉 오직 더듬기(le tâtonnement, 암중모색)만을 할 것인가? 만일 나의 사유의 자유로운 운동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그리고 어떻게 탐구의 기획을 만들고, 어떻게 나의 목표를 고정하고, 습관과 편견을 중단하고 독립적이고 신중한 조건들 속에 나를 자리 잡게 시도 했겠는가 .... 만일 나의 생각들이, 내가 주인이 될 수 없는 어떤 질서 속에, 서로 서로 준비되고, 생산되고, 연속되었다면. 그것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나의 생각들 각각이 매 순간에 그 생각이 정확하게 현재 있는 것이 되기 앞서서, 그러한 것으로 현재 있지 않는 것으로 있을 수 없는[현재 있을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s.p.) 자유란 따라서 우리 생각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힘(le pouvoir, 능력)이고, 또 그 여러 생각들에게 자연적 필연성이 아닌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탐구에 이르는 응답이 있다. 즉 제일원리인데, 그것이 자유이다. 이 자유는 르끼에 자신이 대수학적 분석과 비교하는 절차를 통해서 발견했다. (제일 진리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교정되면서, 과학이 된다. 이 과학은 스스로 찾아 나서며 대답을 생산하는, 다시 말하면, 스스로 만들어지는 과학이다.(위 책 107쪽). 오류는 어떤 것을, 예를 들어, 명증성과 같은 것을 탐구하고자 원하는 데 있다. [자족적 원리의 탐구는 오류에 귀착하기보다 역설에 귀착한다] 이 명증성은 진리를 주장하게 강요한다. “그런데 그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자유의 작용(l’acte)이며, 탐구자체이다.”
르끼에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르누비에(Renouvier)의 도덕론과 아주 다른 도덕적 분위기를 간단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런 도덕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자유 관념이 소개되었다. 카톨릭에 열중하는 자이며, 성경과 교부들의 책에 대해 열렬한 독자이며, 특히 사도 바울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독자인 그에게서, 사람들은 변함없이 긴장된 그의 성찰을 본다. 이 성찰에서는 창조의 독단, 신의 전능, 특히 신의 예정의 전능 등이 자유와 대치되어 있게 된다. 이 성찰은 정확한 학설의 어떤 부분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열렬하게 신학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불러오지만, 이 주제들이 일치하는 점을 보지 못한다. 한편으로 우리의 자유는 마치 우리 자신의 창조처럼 있다. 자유롭다는 것, 그것은 “행하는 것, 즉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 스스로 만들면서 만드는 것”(위 책 143쪽)이다. 그러나 어떻게 자유롭다는 것에서 신의 권능과 일치하는가. “자기와 독립적인 한 존재를 창조하는 것, 용어의 엄격함의 의미에서, 실재적으로 자유로운 한 존재, 한 인격, 즉 어떤 시도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전 기술(tout son art)이 거기서 사용되고, 사람들은 어떤 힘의 차례가 되어서 이 걸작이 완성될지 사람들은 모르지! .... 인간적 인격, 어떤 존재는 신 없이 어떤 것일 수 있다! 엄청난 기적! 인간은 숙고하고 신이 기다린다.”만일 자유가 이처럼 실재적이라면, 지속 또한 영원성과 구별되는 실재성을, 즉 “연속적인 실재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르끼에가 노트에서 쓰고 주석을 달기를, “사물들의 존재에 관해서 고려한다면, 제반 사물들은 실재적으로 이 사물들 다음에 저 사물들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은 “사물들을 존재에 계속적으로 도달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본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존재는 신 속에 도입되어, 계속과 닮은 어떤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르끼에는 자유의 개념 주위에 신의 이론을 조직화하는 경향을 가졌다. 그것은 나중에 마치 그의 영향 아래 르누비에와 제임스(James)가 그렇게 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의 독단론이 남는다. [구원이] 예정됨(le prédestiné)과 신에게 배척 받음(le rréprouvé) 사이에서 놀라운 대화는 아직 밝혀야 할 것이 있는데, 르끼에가 인간적 행동들의 실재적 자유를 독단과 조화시켰다고 이해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많이 밝혀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에서 의식 자체를 떼어 내고, 특히 행위의 결과물들을 떼어 냈는데, 이것은 인간을 신의 [최후의] 심판에 더 잘 복종시키기 위해서이다. “신은 자기 자신보다 인간의 심장(coeur) 속에서 더 잘 읽는다. ... 만일 사람들이 그런 저런 작용(acte)이 자유롭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존에서 무지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겸손(l’humilité, 비천함)하게 있어 왔다. 자신들의 자유로운 작용에 의해, 각 인간은 세계의 역사 속에 어떤 것, 이제부터 그것의 일부를 이루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을 도입한다. 이 행위의 주인으로서 인간은 이것을 잊고 있지만 ... 신은 그것을 보았다 ... 우리는, 우리들 작용들 각각에게 미래 속에 열려있는 것과 닫혀있는 것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그리고 나 조차도 최소한의 것들에 대해 말할 뿐이다. ... 우리자신의 존재가 우리를 회피하기 때문에, 특히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존재는 더욱더 펼쳐지지!”(148쪽, 298쪽) 따라서 르끼에에 있어서 자유는 피히테(Fichte)와는 아주 다르게,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우리자신의 숙명(destinée)에 대해서도 깊은 무지함 속에 남겨 놓는다. (842) (46O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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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 영국국교회에서 카톨릭으로 개종(1845) 추기경이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 국교회 신부. 옥스퍼드 신학운동(Le Mouvement d’Oxford, fr. Oxford Movement)의 주창자.
1814 쥘 르끼에(Jules Lequier, ou Lequyer, 1814-1862) (48살), 프랑스 철학자. 철학, 신학, 특히 도덕학에서 인간기원에 관한 사유를 하였다.
1845 부트루(Émile Boutroux, 1845-1921)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865 브레몽 (Henri Bremond, Brémond, 1865-1933) 프랑스 문학비평가, 역사가, 철학자. 카톨릭 신부이며 제수이트.
1905 네동셀(Maurice Nédoncelle, 1905-1976) 프랑스 신부, 인격주의 철학자.
1901 기똥(Jean Guitton, 1901-1999), 프랑스 철학자, 작가. 카톨릭 신앙자.
1913 부이에(Louis Bouyer, 1913-2004), 프랑스 오라트와르 신부, 카톨릭 신학자.
1890 고르스(Denys Gorce, 1890-1984), 프랑스 의사. 교부 신학(철학) 전문가. [신부는 아닌 것 같은데, 특히 베네딕트파 연구자.];
1898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1971) 프랑스 철학자, 작가.
1921 띠에뜨(Xavier Tilliette, 1921–2018),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신학자. 제수이트 신부.
?-? 베르투(Samuel Berthoud, s.d.) - [베르투(Samuel Berthoud 1804-1891), 프랑스 작가, 기자, 젊은이를 위한 통속화 작업을 하였다.] 이인물이 아니라 동명이인이 있을 것이다. Trois doctrines, Secrétan, Gourd, Brunschvicg, 1940)
(11:07, 57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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