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민간정부의 군 통제권 회복
[50] YS의 '하나회 해체'
유석재 기자
- ▲ 전격적인 육군참모 총장·기무사령관 경질을 보도한 1993년 3월 9일자 조선일보.
1990년 1월 22일 민정(노태우), 민주(김영삼), 공화(김종필)의 '3당 합당'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일시에 뒤집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오랜 야당 생활을 청산한 김영삼은 그해 4월 17일 노태우·김종필·박태준을 만나 "나 대통령 안 해! 이 군바리 부스러기들아"라며 자신에 대한 공작정치를 항의해 대통령의 사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노태우는 YS가 그런 적 없었다고 함). 김영삼은 1992년 12월의 대선에서 당선됐고, 193만표 차로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0여 년 만에 군(軍) 출신이 아닌 대통령의 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렀다. 3월 5일 육사 졸업식 때 대통령이 "올바른 길을 걸어온 군인에게 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은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고 할 때만 해도, 그가 그렇게 빨리 칼을 빼 들 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3월 8일, 김영삼은 군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경질했다. 군 최강의 인맥이자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배출한 군내(軍內) 사조직 '하나회'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다음날 김영삼은 청와대 회의에서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씩 웃었다. 비서관들은 "각하, 국민들이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숙정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스스로를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로부터 벌어진 대대적인 군내 물갈이로 취임 석 달 만에 무려 42개의 '별'이 떨어졌다. 12·12 관련 장성들을 예편시켜 하나회 해체의 절정을 이룬 5·24 숙군(肅軍) 때는, 대통령이 달아 줄 '별 계급장'이 모자라 국방부 간부들 옷에서 잠시 떼내 썼다고 한다. - ▲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뒷자리에 앉아 있다. /조선일보 DB
김영삼의 군 개혁은 오랜 세월 동안 '절대 성역'으로 간주됐던 군부가 민간 정부에 의해 확실한 통제를 받게 된 대전환이었다. 당시 한양대 교수 리영희는 "DJ가 집권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무사(옛 보안사)의 대통령 독대와 대민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하는 등의 제도적 조치도 뒤따라 '군인의 정치화'가 차단됐다. 이후 군내 새로운 사조직 형성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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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의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과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다룬 대한뉴스 영상물.
출처: http://hanksqwe.tistory.com/15629 [쉬어가는집]
첫댓글 하나회는 박정희 정권 초창기 때부터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다 보니 일단 하나회에 들어가기만 하면 출셋길이 고속도로로 열렸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국가보안사령부나 육군특전사령부 등 주요 요직을 대물림하면서 군대 내 핵심 권력을 쥘 수 있었습니다.
하나회의 회원이 되면 초급장교 시절부터 인사특혜를 받으며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 보안사 등 핵심 보직 옮겨 다녔다고 하는데요. 1980년부터 1993년까지 주요 보직은 모두 하나회 출신들이 역임했을 정도로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회 멤버들은 제 식구 감싸기에 특화된 모습을 보였었는데요. 하나회 회원들이 지휘관으로 있던 부대에서 총기사고, 훈련 중 사망사건, 월북사건 등 지금이라면 당장 옷을 벗어야 할 대형 사건이 터져도 하나회 회원들의 진급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합니다.
케네디도 군 경험이 전무한 포드 사장 맥나마라를 국방장관에 앉혔다.
군 출신이 아닌 국방장관 우리도 함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맥나마라에 대한 평가를 호불호가 갈리리
군 출신이 아닌 분을 국방장관에 임영하는 것은 어쩌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할 사안 같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은 하나회 관련 군(軍) 수뇌부에 칼을 댄 것을 필두로,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해 군내에 남아 있던 12·12 가담 인사들을 모두 제거했고, 1974년 이래 20조원 이상을 쏟아부은 군 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에 대해서도 수사토록 했다. 이와 함께 육군이 독점하다시피 해 온 합참의장에 공군대장(李養鎬)을 임명하고, 기무사 창설 이래 처음으로 ROTC 출신(林載文)을 기무사령관에 앉혔다.
1993년 초 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나뉘어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사태는 양측이 한 선술집에서 맥주병이 깨지고 바닥에 뒹굴며 난투극까지 치르는 소동을 벌인 뒤에야 다소 진정되었으나, 이미 동기생들 간의 앙금은 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1993년 4월 2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하나회 명단’이 살포됐다. 하나회 명단 살포는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가 대대적인 숙군 작업을 하는 계기가 됐다.
1993년 4월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바쁜 출근길에 나섰던 일부 장교들은 우편함과 승용차 윈도브러시에 꽂혀 있는 이상한 유인물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사 하나회 회원’이란 제목의 A4용지 크기 유인물 10여 장이었다.
유인물에는 현역 중장급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36기까지 각 기대표를 비롯해 기별로 7~11명씩 모두 142명의 이름을 타자기로 찍어 복사한 것이었다. 문서는 출근하는 장교들이 가져와 국방부와 합참에 즉각 퍼졌으며, 다시 복사돼 곧 육군본부와 전후방 부대에까지 전달돼 파문이 확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