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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經]소아 홍안지계 학명(鶴鳴)
공자께서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란함을 겪고 있을 때, 삼경을 자리로 칠일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쌀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명아주 국만을 마시고, 제자들은 굶주렸으나, 글을 읽고 례를 익히는 것을 쉬질 않았다. 이에 자로가 나서 간하여 이르기를 “ 선善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 갚고, 선하지 않는 자는 하늘이 해치는 것으로 갚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덕을 쌓고 어짊을 거듭 베풀어 선을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건대, 마땅하게 보내고 행하지 않아야겠습니까? 어찌 이리 치우치게 살수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이르기를 “유야 이리와 보렴. 작은 놈이로다. 아직 사리를 익히지 못했구나. 앉거라. 내 너에게 말해 주마.
지혜로운 사람으로 죄 없는 것으로 되더냐? 그렇다면, 왕자비간은 어찌 심장이 도려내지고 죽었느냐?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리를 다 들어 주더냐? 그렇다면, 오자서는 어찌 눈을 도려내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달라고 하였겠냐?
청렴한 사람이라고 등용하여 주더냐?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는 어찌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충성스런 사람이라고 다 등용되더냐? 그렇다면, 포숙은 어찌 등용되지 못했고, 섭공 자고는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못하였고, 포초는 나무를 껴안고 울었고, 개자추는 산에 올라 불타죽겠는가.
그래 군자는 배움이 넓고 꾀가 깊어도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 많으니라. 어찌 나 혼자뿐이겠느냐? 어질고 불초한 것은 재질이고,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때이니라. 지금 때를 만나지 못하면, 어진들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 우순이 력산의 양지에서 밭을 갈다 천자에 자리 한 것은 그 요임금을 만난 것이니라.
부열이 흙을 짊어지고 성을 쌓다가 대부가 된 것은 그 무정을 만났기 때문이니라.
이윤은 옛날 유신씨의 하인 이였다. 솥을 짊어지고 도마를 쓰며 음식을 조리하다 재상이 되어 자리한 것은 탕湯을 만났기 때문이니라.
려망(태공망. 강태공)은 나이 50에 극진이라는 곳에서 밥장사를 하다가, 나이 70에 조가라는 곳에서 푸줏간을 하였고, 90에 천자의 스승이 된 것은 문왕을 만났기 때문이라.
관이오가 죄인의 수레에 속박을 당하여 있다가 중부가 된 것은 제나라 환공을 만났기 때문이며, 백리해가 스스로 5마리 양가죽에 팔려가 진백의 소를 키우다 대부로 뽑힌 것은 진의 목공을 만났기 때문이니라.
우구는 천하에 벼슬아치 우두머리를 하다가, 손숙오에게 양보한 것은 초나라 장왕을 만났기 때문인 것이니라.
오자서는 전에 공이 많았으나 뒷날 죽음을 당한 것은 성쇠가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니라. 전에는 합려를 만났고 뒷날에 부차를 만나 것이니라.
무릇 천리마가 소금 수레나 끌다 그만두는 것은 천리마의 모습과 자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 것이니라. 천리마를 부리는 백락을 없다면 어찌 천리를 달리겠는가. 조물주 또한 천리를 이르는 재주는 없느니라.
무릇 난초는 무성한 숲에서 나서 깊은 산속에 사람이 보지 못한 곳이라도 향기를 내지 않는 것이 없다.
무릇 배우는 것은 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색해도 곤란해 하지 않고 근심으로 뜻을 약하게 하지 않으며, 먼저 화복의 시작을 알고 유혹됨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니라.
그래 성인은 은거하여 생각을 깊게 하고, 홀로 듣고 홀로 보니라.
무릇 순 역시 어진 성인이요 앞면을 대하고 천하를 다스린 것은 오직 요임금을 만난 것이니라. 순이 걸주시대에 살았으면, 죽음의 형벌을 면하는 것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선을 행하고 또 무슨 자리를 갖을 수 있었겠는가? 걸은 관룡봉을 죽이고, 주는 왕자비간을 죽이고, 그 당시에 어찌 관룡봉이 무지하고, 왕자비간이 슬기롭지 못했을 것인가!
이 모두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니라.
그래 군자는 배움에 힘쓰고 몸 닦고 행동을 단정히 하여 모름지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너는 미혹됨이 없게 하라.”
시에 이르기를
鶴鳴于九皐/학명우구고
聲聞于天/성문우천
소아 홍안지계 학명 /小雅 鴻鴈之什 鶴鳴
鶴鳴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蘀.
它山之石, 可以爲錯.
학이 깊은 못에서 우니
소리가 들에 들리우고
물고기는 깊은 못에 잠겨 있으나
혹 물가에 있기도 하니
화락한 저 동산은
박달나무가 있어
그 아래 낙엽이 쌓이는 구려
다른 산에 돌도
숫돌로 쓸 수 있구려
鶴鳴于九皐, 聲聞于天.
魚在于渚, 或潛在淵.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穀.
它山之石, 可以攻玉.
학이 깊은 못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리우네
물고기는 물가에 있기도
혹 연못에 잠겨 있으니
화락한 저 동산에
박달나무가 있고
그 아래 곡(닥나무)이 자라구려
다른 산에 돌로
옥을 갈 수 있느니라
* 皐(물가 고) : 九曲 , 錯(숫돌 착)
孔子困於陳蔡之間,卽三經之席,七日不食,藜羹不糝,弟子有飢色,讀書習禮樂不休。子路進諫曰:「爲善者、天報之以福,爲不善者、天報之以賊。今夫子積德累仁,爲善久矣,意者、當遣行乎?奚居之隱也?」
孔子曰:「由來!汝小人也,未講於論也。居,吾語汝:子以知者爲無罪乎?則王子比干何爲刳心而死;子以義者爲聽乎?則伍子胥何爲抉目而懸吳東門;子以廉者爲用乎?則伯夷叔齊何爲餓於首陽之山;子以忠者爲用乎?則鮑叔何爲而不用,葉公子高終身不仕,鮑焦抱木而泣,子推登山而燔。
故君子博學深謀,不遇時者衆矣,豈獨丘哉!賢不肖者、材也,遇不遇者、時也,今無有時,賢安所用哉!故虞舜耕於歷山之陽,立爲天子,其遇堯也;傅說負土而版築,以爲大夫,其遇武丁也;伊尹故有莘氏僮也,負鼎操俎,調五味,而立爲相,其遇湯也;呂望行年五十,賣食棘津,年七十,屠於朝歌,九十乃爲天子師,則遇文王也;管夷吾束縛自檻車,以爲仲父,則遇齊桓公也;百里奚自賣五羊之皮,爲秦伯牧牛,擧爲大夫,則遇秦繆公也;
虞丘於天下以爲令尹,讓於孫叔敖,則遇楚莊王也;伍子胥前功多,後戮死,非知有盛衰也,前遇闔閭,後遇夫差也。夫驥罷鹽車,此非無形容也,莫知之也,使驥不得伯樂, 安得千里之足,造父亦無千里之手矣。
夫蘭茝生於茂林之中,深山之間,人莫見之故不芬;夫學者非爲通也,爲窮而不困,憂而志不衰,先知禍福之始,而心無惑焉,故聖人隱居深念,獨聞獨見。夫舜亦賢聖矣,南面而治天下,惟其遇堯也,使舜居桀紂之世,能自免於刑戮之中,則爲善矣,亦何位之有?桀殺關龍逢,紂殺王子比干,當此之時,豈關龍逢無知,而王子比干不慧哉!此皆不遇時也。故君子務學脩身端行而須其時者也,子無惑焉。」詩曰:「鶴鳴于九皐,聲聞于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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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 [陳]
중국 주(周)나라 때의 제후국(BC 1027∼BC 478).
순(舜)나라의 후예가 주나라 무왕(武王)에 의하여 진(陳)에 책봉된 나라이다. 진은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으므로 춘추시대에는 북방의 제(齊) ·진(晉), 남방의 초(楚) ·오(吳) 등 열강의 사이에 끼어서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 특히 북진(北進)을 지향한 초나라의 압박을 부단히 받아서 거의 멸망에 이른 때도 두 번 있었다. 결국 오나라와 초나라의 쟁탈장이 되어 마침내 BC 478년 초나라에 멸망되었다.
2)삼경三經
①군주가 나라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대강大綱. 천식(天植;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우風雨가 골고루 오듯이 공평무사하게 베풀며, 원근고하遠近高下로 하여금 각각 업業을 계승하게 하여 생활을 보장함.
②《시경》‧《서경》‧《주역》의 세 경서를 통틀어 이르는 말.
3)려갱藜羹
명아주의 잎을 넣어 끊인 국. 보잘 것 없는 음식.
4)비간比干 ( 地火明夷(지화명이) 卦辭 )
은나라 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폭군 주왕紂王은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이 종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5)오자서伍子胥
오자서<BC 559(?)~BC 484>는 이름이 원(員)이고, 자서(子胥)는 그의 자이다. 춘추 말기 초(楚)나라 대부 오사(伍奢)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성이 건(乾)이고 이름이 황(荒)이었는데, 주(周)나라에 공을 세워 오철공(伍哲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오(伍)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오자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아버지인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부(太傅) 지위에 있었으나, BC 522년 태자 옹립의 내분에 말려들어 장자인 상(尙: 오자서의 형)과 함께 평왕에게 처형당했다. 오자서는 녕(寧: 지금의 하남성 商毆 일대), 정(鄭: 지금의 하남성 新鄭) 등의 나라를 거쳐 아슬아슬하게 오(吳: 지금의 강소성 소주)나라로 달아나, 오나라의 힘을 빌어 아버지와 형을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한 이후 공자광(公子光)을 보좌하였다. BC 515년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를 탈취하여 오자서를 재상에 임명했다. BC 50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 즉 공자광)는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6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 사당>
오자서와 손무는 군대를 이끌고 회수(淮水) 유역에서 한수(漢水)로 들어가 5전 전승을 거두고 초나라의 수도 영(郢: 지금의 江陵)을 함락시켰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은 이미 죽고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다.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 왕실을 점령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갚았다. 초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그는 신(申: 지금의 黃浦江 하류 일대)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그를 신서(申胥)라고도 한다.
BC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월(越)나라 구천(勾踐)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었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아들 부차(夫差)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에, 대부 백비(伯噽)를 태재(太宰)에 임명하였다. 2년 후 오나라 왕 부차는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 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격파하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오자서는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부차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나, 부차는 그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해주었다.
당시 월나라에서는 구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비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부차를 설득토록 하고, 부차에게는 많은 미인들을 바쳐 그의 환심을 사두었었다. 여기에서 바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자서는 이러한 월나라의 계책을 간파하고 누차 부차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오자서는 부차의 무능으로 오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임을 예감하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두 아들을 제나라의 친척 포목(飽牧)과 유명(維明)의 집에 맡겨두고 왔다. BC 484년 부차는 제후의 패주(覇主)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는 다시 그것을 반대하고 월나라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부차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백비 등이 오자서가 제나라와 결탁하였다고 모함하자, 부차는 그들의 참언을 믿고 오자서에게 속루(屬鏤)의 검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부차에게 말하였다.
"그 옛날 선왕들께는 대대손손 보좌를 해온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제에 부닥쳐도 그 득실을 잘 헤아려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을 버리고, 우매한 간신배들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전횡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왕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부하들에게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강소성 소주)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차는 크게 분노하며 오자서의 시신을 찢어 전당강(錢塘江)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BC 473년 마침내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자결하면서,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오자서의 병서인 ≪오자서(伍子胥)≫ 10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고 있다.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臨利縣)에는 "오상사(伍相祀)"와 "오자서묘(伍子胥廟)", "오자서수부(伍子胥帥府)" 등의 건물을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6)백이 숙제 伯夷 叔齊
형 백이와 동생 숙제는 성(姓)이 묵태(墨胎), 중국 은나라의 처사(處士) 고죽군 (孤竹君)의 두 아들. 역성혁명 (易姓革命)에 반대하는 사상을 투영시킨 인물. 주(周)나라의 무왕 이 은(殷)나라 를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으므로, 주나라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죽음.
저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네
무왕은 포악한 방법으로 주왕의 포악함에 대신했지만
슬프다 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
신농씨, 우순, 하우의 道가
홀연히 사라지니
내 어디로 가서 몸을 의지할 것인가.
아,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네.
-의를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함
▲<사기> 백이열전 中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가 아우인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자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사양하였다. 백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달아났다. 숙제도 역시 왕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고 달아났다. 나라 사람들이 중자(백이와 숙제 사이의 형제)를 군주로 세웠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주나라 문왕)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가서 의지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르러 보니 서백은 죽고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아버지의 목주(위패)를 수레에 싣고, 서백창을 문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은나라의 주왕을 정벌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을 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했는데 장례를 지내지 않고 곧 전쟁을 일으키니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니 인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이들을 해치려고 하였다. 태백(무왕의 군사인 여상)이 말하기를 "이는 의인이다"라고 하고 부축하여 떠나게 하였다. 무왕이 주왕의 난폭함을 평정하니 천하가 모두 주나라를 받들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도의상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서 먹었다. 굶어서 죽게 되었을 때에 노래를 지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저 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포악한 신하로 포악한 군주를 바꿈이여. 그것이 그릇된 것임을 모르는구나. 신농우하의 태평성세가 홀연히 사라지는구나. 우리는 어디로 가서 귀숙할가? 아! 죽음의 길로 갈지니 운명이 쇠잔되었구나!"라고 하고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로써 보면 그들은 원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가 "천도는 사사로이 친한 사람이 없고 항상 착한 사람과 같이 한다"라고 말했으니 저 백이, 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인덕을 쌓고 고결한 행실이 이러한데도 굶어 죽었다.
또 공자의 칠십 제자의 무리 가운데 중니(공자)는 오직 안연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천하였으나, 그러나 회(안연)는 자주 궁핍하여 지게미나 쌀겨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천하가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도척(극악무도한 도적)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어 먹었으며 포악 방자하였고 무리 수천명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으나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이것은 어떠한 도덕을 따른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매우 크고 현저한 것이다.
만약 근세에 이르면 행동이 정도를 벗어나고 오로지 금지된 일만을 범하였으되 평생토록 편안하고 즐거워하며 부유함이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는가 하면, 정당한 땅을 골라서 밟고 적당한 기회가 온 이후에 말을 하며 길을 걸을 때 작은 지름길을 통하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발분하여 하지않는데도 오히려 재화를 만나는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는 매우 의문을 가지니 만약 이른바 천도가 있다면
이것은 천도인가 아닌가?
7) 포초鮑焦
주나라 때의 은사隱士
8) 개자추 [介子推, ?~?]
중국 춘추시대의 은사(隱士).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헌공(獻公)에게 추방되었을 때, 19년 동안 그를 모시며 같이 망명생활하였다. 뒤에 문공이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고 많은 현신(賢臣)을 등용하였으나, 개자추에게는 봉록을 주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면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문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를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다. 그러나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그대로 타 죽었다.
한식(寒食)은 개자추가 타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하여 행사로 기념한 날로서, 이때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9) 부열 傅說
열(說)이는 처음에 죄인으로서 부암(傅巖)에서 길을 닦는 인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고종 무정이 꿈에 현인을 보고 그 모습을 그려 전국을 찾아서 마침내 열을 얻었음. 열이는 뒤에 부암이라는 지명에서 성을 따 부열이라고 불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