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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음의 경지에 오른 야곱
창 47:1-12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47장 이 귀한 말씀 중심으로 해서 ‘득음의 경지에 오른 야곱’이다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득음의 경지에 오른 야곱.
비유적으로 판소리나 창 하는 분들의 이야기 속의 득음의 경지를 그대로 오늘 바로 왕 앞에 서 있는 야곱의 모습에 한번 적용해봅니다.
득음의 경지라는 것은 한자말 그대로 소리를 얻는다 소리를 획득했다 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창을 하는 분들에게 있어서 소리를 얻는다 라는 것은 무슨 뜻의 말이냐? 그들이 득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폭포 근처나 폭포 밑에서 소리를 수련한다고 합니다. 그 수련의 상태가 어떤 상태를 목적하고 그런 수련을 하느냐? 폭포 밑에서 폭포수를 맞고 있거나 하면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가 굉장히 고압적이지 않습니까? 쏴아 하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겠습니까?
여러분, 득음의 경지란 어떤 것입니까?
그 폭포 소리를 창하는 사람의 소리가 더 크게 나와서 제압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포 소리보다 내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저는 그 득음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해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소개한 글들을 자세히 읽다 보니까 득음이 폭포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폭포소리가 고압적으로 귓전을 굉굉거리고 울리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내는 소리를 내가 분명히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상태 그게 득음의 경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목소리를 주변의 아무리 어떠한 현란하고 아주 높은 소리들이 들려올지라도 내 소리를 분명히 구별해서 또렷하게 들을 수 있고 분별해낼 수 있는 그러한 경지가 득음의 경지이고, 이럴 때 자기의 소리를 드디어 찾아내는 것입니다. 창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가가 되는 전문가가 되는 그러한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선생으로부터 배운 아니면 자기가 들으면서 좋아했던 선배의 창을 흉내내고 모방하는 그런 단계에 지나지 않다가, 이제 드디어 폭포와 같은 엄청난 소리 가운데서도 자기의 소리를 자기가 분별해서 들을 수 있을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될 때에 다시 말하면 사실은 소리를 내는 목, 목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는 상태 이럴 때 창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찾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득음의 경지를 오늘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진정한 자기를 찾게 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선민으로서의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 그런 상태가 오늘 바로 왕 앞에서 있는 야곱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자, 어떤 면에서 이렇게 야곱이 득음의 경지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제 야곱의 가족들이 바로 왕의 호의와 배려를 따라서 기름진 곳 고센 땅 라암셋 성에 머물면서 살게 되고, 이제 430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출애굽 전까지 살게 되는 대역사의 시작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춰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왕 앞에서 서 있는 야곱의 말 속에서 야곱의 득음의 경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 그런 상태를 보려고 하는데, 야곱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8절.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9절.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만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참고) 아브라함 175세 이삭 180세
10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이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봅니다.
험악한 세월이라고 자기의 130년 세월을 돌아보고 있는 야곱의 어휘 사용, 자기의 생애를 험악한 세월이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었을까.
이 험악한 세월이라고 하는 이 말과 바로 왕을 축복했다고 하는 이 두 가지를 들어서 야곱이 득음의 경지에 이른, 믿음의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자기를 찾는 득음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한 번 보자는 것이지요.
여러분, 험악한 세월이라고 하는 것, 왜 이런 단어를 사용했을까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인지상정으로서의 심리상태가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런 게 있어요.
지금 현재가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너무나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모든 환란, 잘못된 것, 후회스러움에 대한 기억이 정말 봄 바람에 눈 녹듯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과거의 모든 잘못까지도 미화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환란이 다 필연적으로 오늘의 영광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될 것으로 나 스스로 그 순간 설득해버립니다. 그 환란을 당하고 있을 때는 너무나 원망과 불평과 짜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좋으면 모든 과거가 다 미화되고 모든 과거가 다 정당화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총리된 자리에 있는 그 상황에서 지금 야곱이 그의 아버지로 왔고, 바로가 특별대우를 하고 있는 상황이고 바야흐로 고센 땅에서 기름진 땅을 소유하면서 이제 가문이 번성하게 될 수 있는 그런 테두리를 얻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130년 동안 있었던 야곱의 험난한 일들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해도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 험난한 일들이 다 미화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130년동안 고생을 했는데 참 이런 영화가 있었구나! 그러므로 130년의 세월은 오늘이 있기 위해서 준비 되어진 꼭 있어야만 했던 그런 과정이었다.”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는데, 오늘의 뉘앙스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라고 하는 이 말 속에는 그런 것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확신이 듭니다.
이게 왜 득음의 경지일까요? 여러분.
130년 세월 야곱은 복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속였습니다. 속인 만큼 속았습니다. 삼촌 라반에게 속았고, 자기 아들들에게 속았습니다.
자기가 속였을 때는 금방 탄로가 났는데 자기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속고 있었습니다. 그 속은 것 때문에 두 아내를 얻기 위하여 노동을 14년이나 하게 됩니다. 그리고 르우벤의 동생 다말이 강간을 당하게 되면서 온 집안과 동네 세겜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그런 일도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록된 것이 그렇지 오죽 많았겠습니까? 요셉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아내가 먼저 죽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모아 놓았던 모든 재산이 다 zero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복을 좇아왔던 모든 인생들 그러나 이제 바로 왕 앞에 서 있으면서 총리의 아버지로서 이 애굽 대제국의 부를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이 상태에서도, 지금 바로 왕궁의 현란함과 자기가 갖게 되는 영광스러운 빛의 산란함에 의해서 자기를 잃지 아니하고 분명히 야곱이 깨닫는 것은 복을 쫓아다녔던 130년 조상과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비교를 하였고 이삭과도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험악한 세월이라고 얘기합니다.
무엇에 차이가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복이 아닌 하나님을 쫓아다닌 사람이었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셨지 아브라함이 좇아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도 그런 신앙의 면모를 보이고 살았습니다.
비교합니다. 자기는 복을 좇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험악한 세월이었노라고...
지금의 이 영광스러운 시간을 생각하면 험악한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근면과 나의 성실이 하나님께 통해서 오늘의 이 영화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폭포 소리 가운데서도 자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좇아가는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을 좇아갔던 그 세월이 헛된 생이었고 험악한 생이었고 속인 만큼 내가 속임을 당했던 비참한 세월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고백하고 과거를 전혀 지금의 영광을 통해 미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뚜렷한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어떤 기준?
진정한 나, 그것을 복에 대한 관계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너가 있어야 내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모습을 찾으려고 해요. 야곱은 자기의 모습을 복을 잔뜩 가지고 있는 그런 환경을 너의 자리에 두고 그런 환경에 의해서 복 받은 나로 자기를 찾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조상과 비교를 해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찾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 비해 자기의 생은 아무 것도 쥔 것이 없는 그런 험악한 세월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깨달음이 곧바로 이어지면서 바로 왕 앞에서 바로를 축복합니다. 대단한 사건이에요. 여러분.
바로를 축복하는 개 대왕폐하 만세! 황제폐하 만세! 라고 하는 식의 환호성의 기원이 아닙니다. 여기서 축복을 했다는 것은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교하는 가운데 이 바로 왕을 축복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어떤 면에서 대단한 일이냐?
자기를 찾은 상태인데 어떤 자기를 찾았느냐?
지금 130년 동안 좇아온 그 복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바로 왕처럼 복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대왕폐하 만세와 같은 환호성의 기원이 아닌 다음에는 선지자의 입장으로서 그 사람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것이 복을 아직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자기가 선호하고 있는 그런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 줄 입장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나에게 복을 빌어 주거나 복을 나눠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 원 갖고 있는 사람이 천억 갖고 있는 사람에게 돈 많이 벌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그럴 수는 있겠지만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득음의 경지가 어떤 경지로 표현되고 있습니까?
바로 왕궁의 물질적인 그런 대단함 화려함 zero로 보이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자기 가정과 가문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 앞에서 찾은 나가 아닌 다음에는, 그 하나님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로는 이 대제국의 왕인 바로의 모든 물질과 모든 복을 가지고도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디어 야곱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축복해줍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당신들이 모든 물질적 풍요를 가지고 있고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고 모든 영화를 다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이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 라고 말하는 바울의 이 경지가 바로 득음의 경지 아니겠습니까?
야곱에게도 이 경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왜 그랬습니까? 이 세상 좋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좆아 갔던 세월을 배설물을 좆아 다녔다고 자기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그 경지, 마음에서 그것을 실감하고 있는 경지, 그냥 이 설교를 듣고 아, 목사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이 늘 그렇게 말하고 있구나 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 마음이 하나님 한 분 알고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결여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너로 해서 나를 찾는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실감하는 득음의 경지.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험악한 세월이라고 규정합니다.
지금에 주어져 있는 현란한 영광의 빛 때문에 빛의 산란 현상 때문에 하나님 없이 복을 추구해왔던 자기의 과거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에를 들면 고진감래(苦盡甘來) 이런거.
또 야곱은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근면의 결과다. 인내의 결과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쫓아다닌 것 말고 하나님이 주실 복을 쫓아다녔던 130년 전체를 지금의 영광의 빛에 산란하여 상실하고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 대신에 복을 쫓아다녔던 세월은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분명히 규정하고 대별해냅니다.
어떤 대별?
아브라함 이삭의 삶에 대비해서 차아기 있었음을 자기가 솔직히 인정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습니다. 아주 중요한 태도에요.
언제나 기준을 지금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 모습을 얼마나 견지하고 살았느냐 이것이 곧 내가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느냐 참된 믿음의 고수가 되었느냐 라는 것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에 어떠한 기준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바이어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바이어를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의 열망은 뭐냐? 그 바이어를 설득시킨 나를 찾기를 원하는 겁니다. 사업에 성공한 나를 찾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사업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더 궁극적으로 깊이 있는 열망의 내용을 찾아보면 성공한 사업을 너로 두고 있는 나를 찾겠다는 것에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교육시키고 공부를 잘하게 하는 자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아닌 다음에는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엄마나 아빠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잘하는 자식 앞에서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이지 아무리 자식을 위한 사랑이라고 말해봐야 자식을 위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망나니 같은 자식의 엄마가 도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하나님이 시켜서 십자가를 통과함을 통하여 내 열망이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다음에 그 시점을 통과한 뒤에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공부를 어느 학원을 보내서 해라 라고 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그 학원을 보내려고 하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그 동기를 파고들고 파고들고 파고들면 결국은 나를 찾으려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를 찾은 주의 백성들, 득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절대로 공부 잘하는 자식 앞에서의 엄마로서의 나 아빠로서의 나, 사업 잘되는 성공하는 사업을 너로 해서 사업에 성공한 그런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불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가 될 경우에 더 이상의 나를 찾을 필요가 없고 참된 나를 찾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과정들은 다 험악한 세월이 되고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 여러분 좋습니까? 아무리 좋아도 야곱보다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았던 모든 과거가 잘못 되었던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지금이 너무너무 좋은 것이라고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모든 과거가 다 미화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바로 왕을 축복하는 야곱.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서도 그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보면 마땅이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하나님을 찾는 복을 꼭 그 사람에게 전달해주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득음의 경지가 있습니까?
이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 오늘도 이 세상 것들 앞에서 나를 찾으려고 하는, 공부 잘하는 자식 앞에서 나를 찾고 잘 되어져 가는 사업의 성공 앞에서 나를 찾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찾고 하려고 하는 모든 나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중단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겁니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그 앞에서 나를 찾지 않으려는 마음의 관계성을 완전히 십자가에서 제로로 만들고 오직 십자가에서 제로 되었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 기근 앞에서 제로가 된 뒤에 완전히 인생이 근면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복을 쫓아갔던 인생이 밑바닥으로 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야곱처럼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득음하기 위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실제로 느끼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를 부여잡고 이 세상에 대해 제로가 되어 죽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믿음의 세계에서 야곱이 드디어 득음의 경지에 오르며 진정한 고수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만이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부여잡고 지금 주어지는 영광 가운데서도 과거의 생을 미화하지 않고 하나님 없던 생이 험악한 세월임을 인정하며 모든 것을 갖고 있는 바로 왕 앞에서 하나님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복을 빌어주는 이 야곱의 모습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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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