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원래 이곳에는 고종의 비(妃)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이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운명하여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로 천장(遷葬: 묘를 옮김)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아직도 "홍릉"이라고 불리고 있다.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의 사친(私親)인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의 "원소"(園所: 왕가 산소의 다른 이름)이다.
"순헌귀비"(純獻貴妃)는 증찬성 진삼(鎭三)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나
1859년에 입궁해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하자
"아관파천"(俄館播遷 : 23번 중명전과 구 러시아공사관터 참조)때 고종을 시봉(侍奉)하였으며,
1897년 영왕(英王)을 낳고 1903년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엄귀비"는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7월에 사망했다.
같은 해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永徽)라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경복궁 서북 측에 있는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되었다.
"영휘원"(永徽園)의 특이한 것은 신도(神道)와 어도(御道)가 구분돠어 있는데 홍살문 옆의 판위(版位)는 없다.
다른 왕릉의 비석과는 달리 간단하게 "순헌귀비 영휘원"(純獻貴妃 永徽園)이라고만 썼다.
원래 표석에는 "조선국"(朝鮮國) 혹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기재해야 하나
"순헌황귀비"가 사망한 이후 영휘원이 조성된 시점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적지 못했다.
후면에는 글자를 깍은 자리가 있는데 아마도 日本 年號를 지운듯하다.
"순헌황귀비"가 아닌 "순헌귀비"라고만 적혀있는 것은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호칭 역시 전부 제후국의 것으로 바뀌며 빠진 것이다.
정자각과 봉분사이의 신도(神道),그리고 산신석이 보인다.
그런데 반대쪽에 있어야 할 축문을 소지(燒紙)하는 "예감"(瘞坎)은 찾지 못했다.
아래에서 조금 보이는 영휘원의 릉(陵).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낮게 둘렀다.
영휘원의 장명등.
"숭인원"(崇仁園)
"숭인원"(崇仁園)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장남 "이진"(李晋)이 안장된 원(園)으로
1922년 부모와 함께 순종을 뵈러 조선에 온 "이진"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순종이 크게 슬퍼하며 특별히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원래 조선의 풍습으로는 어린아이의 장례식은 없었다고 한다.
진(晋)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 사이에서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죽었다.
사망 원인은 돌도 안 된 어린 아기가 장거리 여행을 하여 생긴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알려져 있으나 독살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독살 주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는 일본 강경파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왜놈의 피가 섞인 아이를 대한제국 황실의 후계자로 둘 수 없다.'라는
황실 내부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후 할머니의 묘소인 "영휘원" 동쪽 언덕에 장지를 마련하고 "숭인원"(崇仁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특이한 것은 정자각 앞에까지만 향로가 마련되어 있고 어로(御路)는 없다.
그렇치만 이곳에는 홍살문 옆에 "판위"(版位)는 있다.
비각안 비석에는 "원손 숭인원"(元孫 崇仁園)이라고만 음각되어 있다.
뒷면의 글자는 몇자 안되지만 그나마 지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도 일본 연호를 지운듯하다.
숭인원 정자각 뒤는 영휘원과 비슷하다.
묘의 위치는 높아 아래에서는 거의 확인할 수가 없다.
묘에는 호석(護石)이 없고 양(羊)도 없는듯하다.
영휘원과 숭인원사이에 있는 영천(靈泉)
재실(齋室)
원래 陵의 제실은 능앞에 있는데 이곳은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재실 뒤에 있는 돌절구.
재실 뒤 화계(花階)에는 할미꽃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