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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1일 - 세일러들의 무덤에서 행복하고 바쁜 하루
새벽부터 비가 온다. 그런데 이비가 다른 날과 좀 다르다. 가볍게 오다 멈추는 수준이 아니다. 폭우 로 보인다. 빗소리에 잠이 깨어 시원스레 쏟아 붓는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 마리나를 내다본다. 잠시 후 카톡이 온다. 임대균 선장 일행이 비행기를 타고 보낸 사진이다. 오늘 저녁 8시면 마리나 도착이다. 나더러 미리 호텔가서 쉬고 있으란다. 근 3달여를 요트에서만 머무는 나를 위한 배려 일거다. 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요트가 세상 어느 곳보다 편해진 사람이다.
Hi Kim. Just received the notice from Phuket Marine Department. See attached weather warning circulated by the marina. Cheers. Liam. 아일랜드 선장 리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푸켓 마리나에서 악천후 경보 메시지가 왔다는 거다. 급히 윈디를 보니 랑카위는 큰 문제없다. 어쨌든 리암은 참 친절한 신사다.
감사인사와 함께 랑카위의 윈디 정보를 보낸다. 친절에는 친절로, 선의에는 미소로 답한다. 친절이나 선의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배려를 눈치 챌 정도의 지능이 안 되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읽었다. 나는 머리 나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세일러 친구들이 생겨났다.
3명의 크루가 더 오니 선실을 좀 정리한다. 하지만 진전은 없다. 먼저 말했다시피 머리가 좋지 않으니 공간 감각도 떨어지나 보다. 임대균 선장은 S대 출신이니, 오면 짐 정리를 좀 부탁해야겠다. 앞 물탱크에 물을 받는다. 이번에 알게 됐는데, 물탱크 게이지가 좀 이상하다. 1/4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0로 바늘이 뚝 떨어진다. 그러니 물은 3/4만 사용해야 하는가 보다. 앞 탱크에 물을 가득 받고, 뒤 탱크 물만 사용한다. 스리랑카에서 받아 둔 물을 최대한 다 사용하고 랑카위에서 새로운 물을 받아가기 위해서다.
오전 9시에 엔지니어가 오기로 했으니, 서둘러 연료 필터를 교환하고 다시 짐정리 모드로 돌입한다.
오전 8시 30분. 김석중 선장님의 배, 리치 파라다이스로 가 김선장님과 커피를 마신다. 스텐 밴드와, 비상용 빌지 펌프에 사용할 전선과 클립 등을 얻는다. 리치 파라다이스는 완전 철물점이다. 없는 게 없다. 이렇게 대부분의 소모품을 준비하고 직접 수리해 가면서 세일링 하는 거다.
김석중 선장님은 정석으로 세계일주, 아니 세계 방랑 항해를 하고 계신다. 정말 청년 같은 노년을 알차게 보내고 계신다. 아마 김선장님처럼 70대 중반 나이라면, 비슷한 재력을 가진 분들이 대한민국에 많으실 거다. 그러나 막걸리 잔을 들고 파고다 공원을 전전하거나, 피 같은 재산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다고 여전히 노동의 끈을 잡고 애면글면 하고 계시거나, 장기판에 앉아 세월을 보내시거나, 돌아가시거나, 치매에 걸려 무간의 세상을 방황하는 분들이 많을 거다. 선택이다. 어떻게 살면 되는지 선택하면 되는 일이다. 중장년 이후의 분들이시라면, 바다와 세일링이라는 항목을, 노년기의 버킷 리스트에 꼭 넣어 두길 바란다. 전 세계의 바다에서, 나이 따위 따지지 않는 전 세계의 멋진 세일러 친구들을 만나며, 대양의 석양처럼 마지막까지 붉게 타오르며 나이 들어가는 일. 왜 한국인만 안하는 건가.
이 글귀에 대한 통영 이준희 선장님의 답글이다.
[대한민국의 세일러, 특히 큰 바다를 건너려는 젊은이를 많이 만드는 것을 저는 큰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우리의 관념, 법과 제도, 그리고 소소한 이유까지 너무도 많은 것들을 해결해야합니다.
일단, 지금 저는 요트 안전검사를 받고 있는데, 평수에서 연해로 바꾸는 것조차, 엄청 힘이 드네요. 합법적인 범위에서 모든 것을 진행하려니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즉 안 되는 법제도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배들은 안전하지 않은 안전검사를 받게 됩니다. 모두가 지나가도록 길을 만들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날 갈 수 있는데, 위험하다고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팻말을 세우고 못 지나가는 법을 만들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큰 바다로 나가는 꿈을 못 꾸게 합니다. 요즘 차차 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있고, 또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할 생각입니다.] 너무 공감이 가는 답글 이다. 나 역시 같은 불합리한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
아래 글은 김석중 선장님의 질문에 대한 이중식 교수님의 답글이다.
[나가사키에는 마리나가 두 개 있습니다. 시내에 가까이 있는 '데지마 워프'와 조금 떨어진 '선셋 마리나'입니다. [데지마는 비지터와 연간 계류로 나뉘어져 있고 1개월에 40피트 기준으로 7만9천엔, 80만원 정도 합니다. 연간계류하면 48.4만엔 500만원쯤 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데지마 비지터는 무료였습니다. 해외 요티들에게 1주일간 무료로 빌려주었죠. 지금은 비지터도 유료입니다. 코로나 사라지고 빈자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점점 많은 방문객들이 오고 있어 미리 예약하셔야 합니다. 아마 max 3개월까지 받아주지 않을까 합니다.
선셋마리나는 선석도 많고 크레인도 있고 샵도 있어 좋은데, 시내 나오려면 버스를 30분 정도 타야 합니다. 비용은 비슷한 편입니다. 저는, 데지마에 먼저 연락하는 것 추천합니다. info@dejima-h.com 로 연락하고 다나카상에게 한국 요티 Joon Lee 추천으로 왔다고 하면 알 듯합니다.
큐슈의 마리나들은 '사사키 그룹'에서 만들고 관리합니다. 이 홈페이지에 보시면 계류 거가능한 마리나들이 있습니다. https://sasaki-corp.jp/offices/marine/ ] 이렇게 한국 세일러들끼리의 도움과 정보 교환도 세계 어느 나라 세일러들 못지않게 활발하고 친절하게 진행 중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세일들이 정보와 교류에 목말라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중식 교수님께서 말레이시아 인근 해역에서 1인 해적이 네덜란드 국적 요트에 총격을 가해 기관 고장이 난, 사건 정보를 보내 주신다. 그러면 말라카 해협 전역이 해적 위험지구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지혜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한다. 무의미한 시도다. 주된 해적 출몰지역인 싱가포르 남단 위험 지역 통과에 132Km 72해리, 13~14시간 예상하고 있다. 일출 후 들어가서 일몰 전 빠져 나오려고 한다. 바람과 조류가 도와주어야 한다. 결국 하늘의 뜻이다. 기도 외엔 답이 없다.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은 장기 계류 세일러들이 많다. 그만큼 여러 가지 환경이 좋다는 의미다. 서울대학교 이중식 교수님은 ‘그런 데가 바로 세일러들의 무덤이죠’ 라고 하신다. 한번 정박하고 떠나고 싶지 않은 마리나, 적확한 표현이시다. 전에 프랑스 청년들도 남태평양에 가면, 그곳에 도착한 세일러들이 여기가 파라다이스야! 하고 요트를 팔아 치우고 그곳에 정착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엄청나게 저렴하게 나오는 세일요트가 많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 곳이 바로 세일러들의 무덤이로구나. 나는 더 나이 들어 세일러답게 세일러들의 무덤에 갇힐 수 있을까? 또 소망이 새로 돋아나네.
오전 10시. 엔지니어 릭이 왔다. 첫째 화장실 물 막힘. 둘째 빌지 물 막힘. 세 번째 발전기 임펠라 예비품 1개 구매를 말했다. 그리고 전체 수리비용도 알려 달라고 했다. 너무 비싸면 수리 못한다고 못 박았다. 일단 항해엔 지장 없는 고장들이다. 적당한 비용이면 수리하고 비싸면 한국 가서 할 거다.
일단 수리 시작하면 하루 종일 걸린다고 한다. 오늘 약속했던 디젤연료 바지선에 연락한다. 배 수리 때문에 내일 오후 2시 이후로 미루자고 문자했다. Okay! 라고 하니 내일 오후 2시 이후에 가면 된다.
열수축 튜브를 얻으러 리치 파라다이스에 가니, 김석중 선장님이 폰툰에 아예 공업사를 차리셨다. 열심히 수리와 설치 작업 중이시다. 나는 절대로 저 정도로는 못한다. 존경스럽다. 강호에는 뛰어난 분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발전기 임펠라 확인이 너무 힘들다. 어디 이래서야 스스로 교환이나 가능할까? 너무 좁은 곳에 손도 안 들어가게 임펠라가 있다. 이번에 발전기 모델이라도 확실하게 알아 두어야겠다. Fischer Panda 제품인데 모델은 아직 모른다.
잠시 후 영국 기술자 매트가 오더니, 오늘은 자기들이 너무 바쁘다고 내일 오전 9시에 다시 온다고 한다. 나는 내일 오후에 기름 약속을 했다고 하니, 내일 오전에 서두른다고 한다. 오케이! 내일 꼭 고쳐줘라. 나는 6월 4일(일) 떠나야 한다. 굳게 약속하고 기술자들은 갔다.
오후 12시 15분. 내가 만든 카레와 오이 양상추 된장을 가지고 김석중 선장님 배로 간다. 김선장님 밥과 내가 만든 반찬으로 간단히 점심을 한다. 두 사람이 반찬을 모으니 제법 푸짐하다. 임대균 선장은 오늘 오후 8시에 온다니 그 사이 어지간한 일은 다 해놓자.
오후 1시. 디젤연료 바지선에 다시 문자한다. 오늘 오후 2시에 급유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한다. 오후 1시 30분에 바지선으로 출항한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초록색 대형 선박이다. 가고 있는데,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에서 전화가 온다. 슬그머니 사라진 줄 아나? 30분 후에 돌아갈 거라고 하니 알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바지선 접안은 상당히 험하다. 오늘은 파도가 크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파도가 크다면 타이어 자국과 세이프티 라인에 위험하다. 디젤이 리터당 3.28링깃 (941원) 이니 가격이 싸지만, 혹시 파도가 크거나 바람이 센 날은 배에 상처가 날 가능성이 크다. 절대로 파도 30센티 이하, 바람 9노트 이하 일 때만 바지선 주유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Fuel barge salamah + 60 19 449 8997
김석중 선장님도 제리캔 16개에 디젤 304 리터를 사신다. 함께 Miri Marina : Miri, Sarawak 04° 23.05' N 113° 58.39' E 마리나 까지 가시려는 거다. 제네시스와 리치 파라다이스, 두 배가 8일간 정답게 항해할 작정이다. 우리는 Miri Marina에서 2~3일 보급만 하고 바로 팔라완으로 간다. 김석중 선장님의 일정은 한 번 더 여쭤봐야겠다.
오후 3시 30분. 김석중 선장님과 다시 시내 MULTIQUIP TRADING ( LANGKAWI ) SDN BHD 로 갔다. 나는 바이스 플라이어 3개. 김선장님은 모터 수리 및 소형 모터를 사셨다. MULTIQUIP TRADING에 세이프티 라인도 작업 가능한가 물으니, 하루면 작업 가능하다고 한다. 내일 오전 8시에 끊어진 세이프티 라인을 들고, 다시 MULTIQUIP TRADING ( LANGKAWI ) SDN BHD 에 와야겠다. 말레이시아는 금요일 토요일이 휴무다. 일요일은 일하는 날이다. 그러니 내일 목요일에 수리 작업을 마쳐야 한다. 출국수속도 6월 3일 일요일 오전에 해야 하니 출항도 어쩔 수 없이 하루 늦춘다.
오후 5시. 다시 제네시스로 돌아와 우현 앞부분의 세이프티 라인을 제거 한다. 부품을 잃어 버리지 않게 잘 챙겨서 보관한다. 내일 오전 8시에 MULTIQUIP TRADING ( LANGKAWI ) SDN BHD 에 가야 한다. 가서 세이프티 라인, 커터칼, 김석중 선장님의 레이더 리플렉터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리치 파라다이스의 새 오토파일럿도 설치해야 한다. 출항 전 마지막 날까지 아주 바쁘다.
오후 6시. 김선장님과 함께 라마다 호텔 수영장으로 갔다. 해지는 로얄 랑카위 요트 클럽의 수영장. 세일 요트 마스트들이 석양을 배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수영을 즐긴다. 멋진 시간을 보낸 뒤, 샤워를 하고 찰리스 플레이스로 가서 저녁식사. 이래서 여기가 세일러들의 무덤이다. 연세 많으신 서양 세일러 부부들도 우리 곁에서 저녁식사 중이다.
오후 8시. 드디어 임대균 선장과 안희원, 조상욱 크루가 도착했다. 함께 감자튀김과 생맥주 한잔씩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
오후 10시. 먼저 제네시스를 구경하고, 리치 파라다이스로 가서 김선장님의 환대와 캔맥주, 천연 망고를 대접받고, 김선장님의 7년에 걸친 요트 수리 개조 보완 작업의 역사를 듣는다. 진짜 역사다. He’s story 가 History다.
오후 10시 40분. 내일 오전 8시부터 바쁜 일정이라, 호텔로 돌아와 휴식하고 잠을 청한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다. 세계일주 항해 중, 가까운 아우들을 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만나 함께 필리핀까지 3주 동안 장거리 항해 하는 일. 이런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는 일일까? 지난 20년을 함께 했지만, 아름다운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은 현실이다.
말레이시아는 금, 토일이 휴일 이라, 우리는 일요일 4일 오전에 출항해야 한다.
라마다 호텔은 정말 근사하다. 복도에는 오래된 항해도를 액자에 넣어 전시되어 있다. 복도 끝에는 딩기 보트가 걸려있고, 구명부이로 데코레이션 되어있다.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 세일러 들의 무덤에서 꿈만 같은 나날들이다. 행복하다.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