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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16) - 2023 .11. 30(목) |
이번 성지순례 코스는 고 요셉 형제와 함께한 지난 12차 문경지역 순례 때 계획되었다. 당시 문경 지역 순례를 하면서, 문경 교우촌 성지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보은의 멍에목 성지와 상주 지역을 따로 일정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직 현업을 가지고 있는 요셉 형제와 매번 함께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러 참여하면서 운전 봉사까지 흔쾌히 맡아주는 형제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에 따라 이번 순례지는 상주 신앙 고백비와 상주 옥터, 그리고 멍에목 성지만을 기본 코스로 넣다 보니 일정이 쉬운 것 같아 요셉 형제와 의논하여 대전교구 금산에 있는 진산 성지를 포함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쉽다는 것은 중요한 성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어느 성지든 거룩하지 않은 곳은 없지만 소요되는 시간은 성지마다 매우 다르다. 별다른 시설이 없는 간단한 성지가 있는가 하면 여러 시설에 전시관 까지 갖춘 성지도 있다. 이를 고려하여 순례 계획을 짜야 하는데 처음 가보는 곳들이 대부분이라서 시간 계획에 차질이 나기도 한다.
일정을 좀더 여유있게 하기 위해서 출발 시간을 좀 앞당겨 아침 07시 30분으로 잡았다. 매번 그렇지만 출발 전에는 걱정 반, 기대 반이다. 새로운 순례지를 찾는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이런 기대가 늘 걱정을 잠재운다. 따라서 출발 전 성모상 앞에서 바치는 기도가 걱정을 기대로 반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자비로우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진산 성지 - 순교의 영광 그 서막이 열리다. |
진산 성지의 주소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335-2 (도로명 주소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성지가 속한 진산(珍山) 지역은 백제시대에는 진동현(珍同縣)이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현의 만인산(萬刃山 일명 胎峰)에 이태조의 태(胎)를 모신 후 진주군(珍州郡)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충청도 공주부 속군으로 내려오다가 한말 1896년 전국 8도를13도로 개편할 때에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이웃 금산군에 통합되었고 1963년 행정구역 개편 시 충청남도 소속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교구가 전주교구 소속에서 대전교구 소속으로 바뀐 것은 1980년이었다.
진산 지역 - 일찍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되다
진산성지 일대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거룩한 곳이다. 이런한 정황은 최양업 신부가 사목 방문을 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최양업 신부의 서간문에 진밭들 교우촌이 나오는데 진밭들은 현재 진산성지에서 약 2.2km 떨어진 진산면 두지리이다. 최양업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쓴 1756년 9월 13일자 서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하루는 전라도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아기 세례에 이어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 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왔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그러니 전국적으로 공식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도 많은 교우들이 교우촌을 이루어 왕성한 신앙생활을 했던 지역임을 알 수가 있다.
진산 사건 -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나오다
외국 선교사의 입국 전교 없이 스스로 천주교에 대해 학문으로 연구한 끝에 신앙으로 신봉하고 전파한 초기 남인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런 태도는 당시 지식층을 이론적으로 설복, 입교시키는 데 주효하였다.
그런데 초기 교회에서 가장 민감하게 제기된 문제는 유교식 제사였다. 천주교 교리로 보아서는 폐하는 것이 옳은 듯하지만 수백 년 내려오는 전통을 없앤다는 것은 사회통념으로 볼 때 수용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초기 지도적 신자들은 1790년 윤유일 바오로를 통해 이 문제를 북경 교구에 질의했다. 그런데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의 답변은 제사는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진산의 교우이면서 내외종간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 지시를 따르기로 하고 집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은 어머니인 권씨(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페제분주(廢祭焚主)는 당시 사회에서는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먼저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충불효자로 관청에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로 인해 관청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령을 듣고 일단 피신했다. 하지만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숙부를 감금하자 두 사람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아에서 진산 군수는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그들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전주 감영으로 이송했다.
감영에서는 더욱 혹독한 문초를 가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더욱이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결국 그해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이것이 이른바 진산 사건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벌을 받아 군(郡)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 윤지충 바오로 (1759-1791)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진산에 거주하던 이름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스스로 교회 서적을 읽고, 3년 동안 교리를 받은 후에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사형을 받고 전주 풍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순교의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권상연 야고보 (1751-1791)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역시 1751년 진산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종 사촌 동생인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이후 권상연은 다른 학문을 접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북경교구에서 1790년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결국 윤지충과 같이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진산 사건은 비단 이 지역에서 국한 되지 않고 그 여파는 널리 미쳤다.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 등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1791년 신해박해다.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 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이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실제 많은 교우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교회를 떠났다.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 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신해박해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박해 과정 진산 지역이 순교자들
진산의 지방리 공소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신자들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다 피난 온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김영삼과 김영오 아오스딩이, 1877년에는 김영삼의 동생인 김 요한이, 1878년에는 김춘삼 사도 요한이 순교하였다.
진산 성당 자료에는 이 지역 출신으로 박해로 순교하거나 희생된 사람이 1791년 신해박해 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베드로로부터 최후의 박해였던 병인박해 이후 1880년까지 약 30여명의 순교자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지충 바오로, 전주 남문 밖(1791)
권상연 야고보, 전주 남문 밖(1791)
윤지헌 프란치스코, 전주 남문 밖(1801)
원씨, 전주(1801)
김 토마스, 진안 병사(1801)
이씨(이여삼의 형), 유배 중 사망(1804)
이여삼 바오로, 홍주(1812)
장대원 마티아, 공주솔티(1813)
강씨, 압송 중 자살(1827)
이성화(태권) 베드로, 전주 숲정이(1839)
오종례 야고보, 전주(1839)
임 베드로 전주 감옥(1839)
이소사 막달레나, 전주(1840)
김영오 아오스딩, 공주(1866)
김영삼, 전주(1866)
김베드로, 공주(1866)
최덕겸, 공주(1866)
김공우, 공주(1866)
최첨지, 공주(1867)
전춘서 안드레아, 한양(1867)
전루시아, 여산(1867)
이택경의 아들, 전주 감옥(1867)
손 막달레나, 여산(1868)
박운겸, 여산(1868)
한경영(정률), 여산(1868)
송루시아 사약으로 살해(1868)
전성백 야고보, 공주(1868)
현 프란치스코, 공주(1868)
장아나 스타시아, 공주(1868)
김 사도요한, 서울(1877)
장정선, 서울(1880)
(이름 뒤의 지역은 순교하거나 죽은 곳, 괄호 안은 죽은 해)
진산 성당의 역사
최양업 신부의 서간문만 보더라도 박해시대 175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병인박해의 여진이 여전히 남아 있던 1876년에도 이곳에 신부가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선교사 조스(Jean B. Josse, 1851-1886) 신부가 방문하여 몇몇 공소가 설립된 1885년 무렵을 진산 성당의 출발시기로 볼 수 있다. 특히 1886년에 설립되었던 지방리 가새벌 공소가 그 기원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가세벌 공소(현 지방 2리 새 성당과 사제관이 있는 곳)는 1909년, 이 지역 여러 공소를 통합하였으며, 1912년 드망즈 주교가 이곳에 사목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가세벌 공소는 1916년, 처음 공소 건물을 지었고, 1922년 이곳에 대구대목구 돼재 본당(현재의 고산성당) 소속 지방리 공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후 신자의 증가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이의규 회장은 자신의 땅을 공소 부지로 희사하였다. 1926년 드디어 이 땅에 공소 건물을 신축하여 이듬해 봉헌을 했다. 공소 건물이 완성된 후 이의규 회장과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9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이성만 이냐시오 주임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1931년 대구대목구로부터 현재의 전주교구가 분리됨에 따라 1931년 전주교구가 설립되고 군청 소재지인 금산에 성당이 세워지자 성직자가 부족하여 이성만 신부가 금산 성당으로 떠나고 지방리 성당은 다시 공소로 격하되었다. 당시 공소였음에도 금산 본당보다 신자가 많고 기존의 성당과 사제관을 가지고 있던 지방리 공소는 금산 본당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지방리에 신부를 파견할 것이 검토되었으나 금산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2009년에 와서야 진산 공소에서 진산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새 성당의 건립
1927년에 지은 성전 건물은 오래되어 낡은데다가 좁아서 최초의 순교지라는 진산 성지의 위상에 따라 전국적으로 모여든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좁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성전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위치는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57-10 옛 가새벌 마을, 사제관이 있는 뒤쪽 언덕이었다. 옛 진산 성당과 지방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2022 4월 성전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시작으로 약 70억 원을 들여 1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지하 1층·지상 1층, 건물면적 1373㎡ 규모로 2023년 5월 완공했다. 진산 성당 주임 김용덕 야고보 신부의 노고가 컸다. 그리하여 지금은 새 성당에서 미사들 드리며 구 성당은 작년부터 보수 중이다.
7시 30분 본당을 출발한 지 약 3시간 만인 10시 30분 도착. 새로 지은 진산성지 성당이다. 네비게이션은 굉장히 넓은 터에 와서 도착음을 알렸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새로 조성한 성당의 주차장이었다. 차에 내려 성당 쪽을 바라보니 시내에 걸쳐진 다리 건너 높은 언덕에 새 성당이 있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쪽 편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는 넓은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그 들머리 산발치에 특이한 피에타 상이 있다. 가시관을 쓰고 팔이 묶여 고통스러워 하는 예수님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는 성모님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높이가 3.5m, 대좌는 높이 6m에 무게가 17톤이라고 한다.
성당 앞쪽으로는 사제관이 몇 동 있고 그 뒤로 성당에 오르니 왼쪽 성전과 오른쪽 다목적홀 사이의 축대 위에 어린 세 자녀의 손은 잡고 있는 어머니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이를 순교자 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 성지의 수호자이며 중심 인물인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동생 윤지헌 프란치스코, 그리고 권상연 야고보이며 그리고 어머니는 이 복자들과 함께하는 성모님이라고 할 것이다.
성전 안에 들어가니 성전 내부 역시 새로 짓는 성지 입구 피에타 상처럼 기본 틀을 깨고 있다. 곧 제대 뒤에는 일반적인 십자고상 대신 스테인드글라스로 승천하는 예수님의 동적인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마치 마산교구 정찬문 성지의 승천하는 성모님 상과도 같다.
제단 오른쪽 코너에 성모상이 있고 그 앞에 참으로 귀중한 진산 성지의 세 순교복자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의 순교자 첫 순교복자들이여
님들은 세상에서의 욕구와 삶을 ‘내려놓음’으로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여 순교하였으니
저희도 현세에서 그 치명의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이끌어 주소서
원래 세 복자의 묘는 밝혀져 있지 않았는데 2021년 3월 11일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가족 묘원이 있는 전북 완주 초남이 성지의 바우배기의 묘역을 정리하던 중 무명자 묘역에서 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가 함께 묻힌 백자사발 묘지석이 발굴된 것이다. 순교 후 230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시 순교한 윤지충의 동생 복자 윤지헌의 유해도 동시에 발굴이 되었다.
윤지충 묘지석 기록 -成均生員 尹公之墓 俗名 持忠 聖名保祿 字禹庸 己卯生 本海南
권상연 묘지석 기록 -學生 權公之墓 諱尙然 字景參 辛未生 本安東
당시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2021년 9월 1일, 교령을 통해 이를 공표하였다. 전주교구는 발견된 순교자들의 유해의 보존과 공경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여 동년 9월 16일에 완주 초남이 성지 교리당에 봉헌했다.
그리고 세 복자의 유해는 2022년 12월 8일 전주 전동성당에 나누어 봉헌하고, 2023년 5월27일 새 진산 성당 준공식이 있던 날, 순교자의 고향 진산성지에도 나누어 봉안되었다. 제단 위의 유해 성광이 바로 그것이다.
11시. 구 성당으로 출발. 새 진산 성당은 기본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부대시설이나 환경 정비는 아직 미완이어서 마무리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것 같다.
비록 보수 중이라 하더라도 진산 성지의 구성당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첫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로서 높은 위상을 가진 성당은 바로 구 진산 성당이기 때문이다. 멀리 강 건너 바라보니 구성당과 종탑이 조그맣게 보인다. 바로 밑에는 사제관이다.
구 진산 성당
새 성당과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기에 구 진산 성당 가는 데는 시간이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성당 경내 들어가니 가림막이 쳐진 성전 앞 잔디밭에 세 순교자 비가 가지런히 서 있다. 그리고 가까이 성전 가림막을 배경으로 성모상이 맞아 주신다.
성모상 아래에는 고 이 모니카(순례)가 기증했으며 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모니카 씨를 기억하자는 안내문이 약간은 조잡하게 쓰여 있는데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히 기증자라면 꼭 이런 안내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진산 성당의 성전은 1927년 프랑스 선교사 박 파르트네 신부가 지은 소규모 목조 건물이다. 절충식 한식 목구조로, 2열의 내부 고주에 의해 가운데의 본당과 좌우 측량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삼량식 공간으로 되어 있다. 직사각형 맞배지붕으로 제단부, 지붕 구조, 내외부 기둥은 원형이다. 1960년대 초 외벽체 하부에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벽채를 보강한 공법은 그 당시 독특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목조 종탑은 안전 문제로 철거됐고, 2004년 현재의 시멘트 벽돌조의 종탑으로 재보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017년 5월29일자로 국가등록문화재 682호로 지정이 되었다. 사적 등록 사유는 변형된 종탑 정면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축 원형이 유지되고, 절충식 한옥 성당의 건축적 특성과 가치. 지역적 종교적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구 성당 앞에 충연관(忠然館)이라는 다용도 건물이 있다. 충연관(忠然館)이라는 이름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의 끝 글자를 따온 것은 물론이다. 지금은 관계자라곤 한 사람도 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새 성당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성당 뒤에는 원래 초등학교였는데 폐교가 되고 그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성당 부속 건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 반대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 진산역사문화관이다. 상시 개관되어 관람할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충연관(忠然館) 앞 출입문에는 성당 보수 중 찾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쪽지형 알림 내용이 빼곡이 붙어 있다. 7월1일부터 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는 내용도 있고 순례객들도 새 성당으로 가라고 한다. 충연관 앞에는 십자가를 들고 가는 순교자상과 못 박힌 손, 거꾸로 매달린 상이 있다.
진산 역사문화관에는 신해박해의 진원지임을 말해주는 교회의 자료와 일반적인 진산 지역의 자연, 지리, 역사, 문화 등을 주로 패널로 소개하고 있는데 실질적인 유물은 거의 없다. 예수교 선교사 판토하가 지은 수덕서 칠극(七克), 역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지은 교리서 천주실의 복제품이 있을 뿐이다
진산 사건을 테마로 한 성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림 속에 적혀 있는 화제(畵題)를 옮겨 본다.
大怒한 宗親들
尹持忠 바오로 1959年 生 1791년 殉 22歲
殉敎者 忠南 珍山 出身이다. 丁若鍾(外四寸)에 依人敎하였다.
1791年 辛亥年에 母親喪을 當하여 天主敎會法으로 神主를 모시지 않고 從來 喪禮를 無視하면서 葬禮를 치르다가 宗親들과 親知의 反撥로 官에 告發을 당했다. 朝廷은 珍山軍需 申史源에게 命하여 位牌 消却與否를 確認코저 搜索을 하자 그는 權尙然과 함께 光州로 逃避하였다.
1991年 6月
竹亭 卓熙盛 비오
임진왜란 때 권율 도원수와 의병이 힘을 합해 이곳에서 왜군을 물리침으로 전라도 곡창을 지킨 이치대첩을 소개한 패널이 있다. 몰랐었는데 새롭게 안 사실이다.
일반 사적 자료 중 특히 주목이 가는 것은 진산 지역이 각종 종교의 중심지로 소개되어 있다. 이의 근거로 천주교는 물론 진산 사건이 유발된 곳이고, 불교는 대둔산 원효대사가 지은 태고사가 있으며, 유교는 진산향교가 있고, 이곳이 동학 농민군의 최후의 결전지였으며, 개신교는 일찍이 사립기독교육영학교가 설립된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역사문화관을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도 대화하는 중에 그도 이 지역이 자고로 종교의 세가 강한 곳이라고 하면서 기존 종교는 물론 종교의 이름으로 여신도를 성폭행하여 지금 재판 중인 사이비 종교 기독교복음선교회의 정명석 교주(일명 JMS)도 진산초등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사실 인근 금산의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발원지이고 민족종교도 성한 지역이라 수긍이 가기도 한다.
폐교 시설을 돌아보며 진산 성지 일정은 마친다. 운동장이나 교사를 보면 초등학교도 상당히 큰 학교로 짐작되는데 일면일교(一面一校)도 어려운 오늘날의 위기의 취학문제를 생각한다.
시간이 벌써 12시를 훌쩍 넘겨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다음 멍에목 교우촌에는 식당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관리자에게 물어 보니 청국장을 잘하는 집을 소개해 준다. 원조 토속청국장집이라고 붙은 식당에 가서 느긋하게 식사를 한 후 멍에목 교우촌으로 이동. 1시간 정도 소요한 오후 2시 10분 멍에목 성지 도착.
멍에목 성지 - 순교복자들의 교우촌, 최양업 신부 방문하다 |
성지의 주소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 298. 도로명 주소는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6. 경상도 상주목과 가까워 일반적으로 상주 멍에목이라고 불렀다.
전란을 피할 수 있는 구병산 촌락
한자로는 가항리(駕項里). 멍에 가 字, 목 항 字이다.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따온 이름이다. 윗멍에목(속리산면 구병리)과 아랫멍에목(속리산면 삼가리)으로 나뉜다. 19세기에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윗멍에목이다. 윗멍에목 마을은 2001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메밀꽃 축제를 여는 ‘구병 아름마을’로 조성되었으며, 마을 뒤편의 구병산(876m) 중턱에는 진안군 대둔산과 울릉도 도동과 함께 한국의 3대 풍혈(얼음골) 가운데 하나인 ‘구병산 풍혈’이 있다. 전하는 말로 전란을 피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로도 알려지고 있어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시 교우들이 많이 모여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한다.
인근의 교우 촌으로는 이윤일(요한) 성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갈골과 앵무당(경북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이 있다. 아울러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편지를 쓰고 여름휴가를 보낸 동관음사가 있던 절골(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1리)이 인접해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사목 순방지
최양업 신부의 8번째의 편지(1851년 10월 15일자)에 따르면 “이 해에 멍에목 교우촌의 집들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모든 아픔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고, 함께 힘을 모아 교우촌을 재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화재 소식을 들은 최양업 신부는 전국 교우촌 순방 도중에 특히 멍에목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양반인 조 바오로와 멍에목 교우촌의 회장인 최용운 암브로시아와 최용운의 처남인 맹인 전 야고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조 바오로에게 세례를 주자 그의 동생이 와서 형을 배교시키기 위해 많은 행패를 부렸다. 관가에 고발까지 한다고 하여 부득이 어렵게 지은 공소집을 허물고 애써 가꾼 농토를 잠시 버려야만 하였다. 당시까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교우가 약 2,500명 정도 된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멍에목 교우촌의 3명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멍에목의 순교자들
천주교 신자들이 구병산 산자락의 첩첩 산중인 이 지역에 살기 시작한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멍에목, 앵무당, 갈골, 절골 등에 이주하여 정착한 때로 보인다. 1815년 을해박해 때는 김사건 안드레아의 백부인 김강이 시몬이 원주에서 순교하고, 부친 김 다태오는 귀양을 가고, 나이가 어려 석방된 김사건(안드레아)은 앵무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교회사의 기록에 ‘멍에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1827년의 정해박해 때였다. 이 박해 때 상주 포교들이 앵무당(현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의 앵무동) 교우촌에 살던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와 김사건 안드레아, 멍에목 교우촌에 살던 복자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먼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상주와 대구 감영에서의 형벌은 혹독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이후 박경화 바오로는 형벌로 인한 장독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안군심 리카르도도 1835년에 옥사하였다. 그리고 김사건 안드레아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오랫동안의 옥살이 끝에 1839년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다시 멍에목에 모여 살게 된 것은 박해의 위협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땅에 살던 복자 김종륜 루카가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생활하다가 울산 죽령리(현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로 이주하여 1866년 순교하였다. 박경화 박사의 부자와 김종륜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 아래 시복되었다.
1867년 10월에는 청주 포교들이 금봉(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월용리) 마을을 습격하여 멍에목 회장 최용운 암브로시오의 처남인 맹인 전 야고보를 체포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서울 포교들이 멍에목 교우촌을 급습하여 여 요한과 최조이 부부, 안 루카, 여규신, 최운흥 등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상주 장재동(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장자동)에 피신해 있던 멍에목의 최용운 회장마저 체포하였다.
1867년 청주에서 순교한 전 야고보는 맹인이라고 해서 석방해 주려고 하자, “제가 비록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지만, 마음으로는 한결같이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고 있습니다.”라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1868년의 순교자 최용운 회장은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교우들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권면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과 처남 전 야고보는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순교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는 유일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순교복자 3명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 복자 박경화 바오로 (1757~1827)
박경화 바오로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노령에다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옥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이다.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 교육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 그의 가족들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사의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경상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시에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 복자 김종륜 루카(1819~1868년)
김종륜(金宗倫) 루가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루카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 경주 진목정 범굴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 9월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체포되어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청주교구는 2016년 8월 12일 멍에목 교우촌의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하여 성지로 반포하고 담당 신부를 임명했다. 지금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세례성당이 새롭게 조성되고 있다.
산골 교우촌이기에 산골길을 달려 오후 2시 20분 도착. 먼저 성전을 찾았는데 건물 2층 정면 발코니에 예수님이 팔을 벌려 환영해 주시는 모습이 없었으면 그 건물이 성전이라는 생각은 못할 정도로 특이했다. 처음부터 성당으로 지은 건물이 아님은 틀림없는 것 같다. 요즈음 많이 들어서는 펜션 건물 같았다. 들은 바로는 마을 회관을 고쳐 지은 것이라도 한다.
그런데 출입문이 열리지 않아 잠긴 것으로 알고 바깥 창문 하나를 열어 내부를 들여다보고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데 성당에 들른 연세 드신 주민 한 분을 만나서 성당이 잠겼다고 하니 힘주어 열면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가서 정말 힘껏 당기니 문이 열렸다.
성전 내부는 천장과 벽, 그리고 마루가 모두 목재로 이루어졌는데 은은한 송향이 풍기는 것 같다. 정면 벽에 십자고상이 붙어 있고 그 앞에 나지막한 제대가 마룻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어 제단이 따로 없다. 그리고 마룻바닥에는 방석이 가지런히 놓였고 그리고 교우석 한쪽 옆에 장의자 5개가 놓여 몸이 불편하거나 연세 드신 교우들을 위해 배려를 하고 있다.
성전 제대의 오른쪽 앞에는 성경 구절을 쓴 병풍이 펼쳐지고 그 앞에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는 감실이 있다. 그냥 이뿐이다. 그 흔한 성모상도 십사처도 없다. 성경구절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산상수훈을 한역(韓譯)한 것이다.
산상수훈 진복팔단(8가지 참행복)
.1.安貧樂道乃眞福 (안빈락도내진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巍巍天國若輩屬 (외외천국약배속)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 哀悼痛哭乃眞福 (애도통곡내진복)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若輩終當承溫燠 (약배종당승온욱)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3 溫恭克己乃眞福 (온공극기내진복)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大地應由彼嗣續 (대지응유피사속)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4 饑渴慕義乃眞福 (기갈모의내진복)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心期靡有不飫足 (심기미유불요족)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5 慈惠得人乃眞福 (자혜득인내진복)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自身必見慈惠渥 (자신필견자혜악)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6 心地光明乃眞福 (심지광명내진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主必賜以承顔樂 (주필사이승안락)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될 것이다.
7 以和致和乃眞福 (이화치화내진복)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天主之子名稱卓 (천주지자명칭탁)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8 爲義受辱乃眞福 (위의수욕내진복)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天國已在彼掌握 (천국이재피장악)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깥에는 정자 하나가 있고 그 안에 성모자상이 있다. 마치 분만실에서 막 태어난 유아를 살뜰히 안고 있는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다.
좁은 계곡 사이에 걸쳐진 홍교(虹橋, 무지개 다리)를 건너 옛 교우촌 터와 거기에 짓고 있는 성전을 찾았다. 주변 산세는 ‘충북의 알프스’라고 불리울 만큼 아름다운 사세를 가지고 있다.
약간의 오르막길로 언덕에 올라보니 언덕 아래에 짓고 있는 팔각원추 모양의 성전이 나타났다. 이 성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세례성당’ 으로 이름이 매우 길다.
‘세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게 된 건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최양업 신부는 박해시대 당시 12년간 전국 각지 교우촌을 순회하며 1850년에 275명, 1851년에 251명, 1855년에 240명, 1857년에 188명 등 해마다 200명 안팎 신자들에게 세례를 줬지만, 당시 영세자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다. 다만 앞에서 소개했듯 최 신부의 8번째 서한과 ‘병인 치명 사적(丙寅致命史蹟)’에 기적적으로 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3명의 이름이 남았는데, 그 3명은 조 바오로와 최용운, 그리고 전 야고보로 모두 멍에목 신자들이었다. 이에 교구에서는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멍에목 성지에 최 신부가 행한 세례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례성당’을 짓게 됐다.
그리고 또 하나, 멍에목성지 세례성당은 2020년 5월 멍에목 성지에 성당을 지어달라며 10억 원을 봉헌한 황간 본당 이 로사리아 할머니의 지향이 토대가 됐다고 한다.
짓고 있는 성당의 주소는 구병리 310번지. 대지는 5필지 약 900편, 건축 면적은 약 135평 규모이며. 팔각형의 동판 지붕으로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이 성전은 지하 1층, 지상 1층(약 87평), 세례동굴 20평, 사무실 15평, 화장실 14평 크기로 짓는다.
멍에목 성지를 떠나 마지막 순례지 상주 옥터와 고백비 성지로 출발했다.
신앙 고백비 - 돌에 마음을 새겨 신앙을 고백하다 |
상주 멍에목이라고 불러온 것을 하면 멍에목 성지에서 상주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깊은 산골길 포장도로를 40-50분 동안 달려서 상주에 올 수 있었다. 충청도와 경상도 간의 거리가 현실적으로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1번지. 신앙고백비 성지는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성지에 이르면 맨 앞에 검은 오석에 새긴 신앙고백비 안내비가 서 있고 성지는 그 안쪽 나지막한 산을 좌우로 한 속칭 안골짝이라는 작은 골에 터를 잡고 있었다.
신앙고백비 안내비 왼쪽 바위 위에 신앙고백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대희년 기념조형물이 신앙고백비와 대칭을 이루며 서 있다.
신앙고백비 바로 뒤에 커다란 돌 제대가 자리하고 있고 그 안쪽에 조성된 잔디밭 좌우에는 성지를 조성할 때 심은 듯한 30-40년 생 나무가 열을 지어 서있고 나무 밑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맨 안쪽에는 성지 주인의 위엄을 드러내주듯 대형십자고상이 있었다. 이것이 이 성지의 전모다.
신앙고백비의 내력과 내용
예부터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오래도록 보존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구성이 강한 돌에 그 마음을 새겼다. 선사시대 암각화나 각석, 그리고 이후의 각종 비석들이 다들 그 결과물이다. 우리 지역의 문화 유적이나 유물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각석, 신라시대의 남산의 마애불이나 신라 고비, 그리고 조선 시대의 각종 비석은 다 이런 사례다.
신앙고백비도 이런 이유에서 제작되었다. 천주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돌에 새겨 드러낸 것이다. 이름 그대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비석이다.
이 곳 상주에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이곳 상주시 청리면을 비롯하여 부근의 내서면과 공성면 일대에는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가까운 청리면 덕산리(德山里)의 서산 중턱에는 신자들을 처형한 ‘화형바위’가 있는데 이는 당시 박해 실태를 말해주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석단산 아래 삼괴리에 김해(金海) 김씨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그 중 차남인 김삼록 도미니코(1843-1935년)는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으면서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1880년대에 들어 다행히 심한 박해가 끝나자 그는 1894년부터 1900년 초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근처 바위 위에 비석을 새 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신앙 고백비이다.
신앙 고백비는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의 직사각형의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돌로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형태이다. 마치 선비가 의젓하게 갓을 쓰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비석에는 상단의 십자형 안에 天主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가로로 天主聖敎會, 聖號十字架라는 구절을 새기고, 그 아래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를 다섯 조목으로 새로로 새겼다. 그리고 맨 밑에는 자신의 본명과 출생년도와 본관을 가로로 썼다.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 천주 성교회 성호 십자가 (十字嘉는 十字架의 오자)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모심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모심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모심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모심 (神夫는 神父의 오자)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을 모심 (敎于는 敎友의 오자)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癸卯生本盆城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지금 김해) 金氏이다.
‘十字架’, ‘神父’, ‘交友’를 ‘十字嘉’, ‘神夫’, ‘敎于’로 쓴 것은 오기(誤記)라고 볼 수 있으나 이는 당시에 한자를 뜻을 배제한 채 음이 같은 글자를 그냥 혼용하는 이두식 표기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신라시대 사찰 영묘사도 靈廟寺, 靈妙寺, 零妙寺 등의 글자로 같이 사서(史書)나 명문기와에 혼용된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이 글에서 ‘恐衛咸’에서 ‘咸’이란 글자가 뜻으로 쓰이지 않고 단순히 ‘-함’이라는 음으로 쓰인 것도 이두식 표기이다.
이 신앙 고백비가 교회사적으로 공식적으로 고증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었다. 신앙 고백비를 건립한 김삼록은 비를 세운 뒤 비록 박해는 끝났다 하더라도 아직도 완전히 천주교를 드러내기 어려운 시기라서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으로 숲을 조성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가 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 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안동교구와 남성동 성당을 중심으로 교회 사적지 개발을 위해 신앙 고백비 주변 부지 매입이 시작되었고, 1999년 당시 옥산 성당 신기룡 신부와 회장단 그리고 청리 공소회장의 봉헌으로 성역화를 추진하여 대형 십자가와 제대, 십자가의 길 14처, 2000년 대희년 상징 조형물 등을 설치하였다. 2009년 12월 22일 상주 신앙고백비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2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에는 비좁았던 진입로에 대한 확장 포장공사가 이루어지고 주차장도 마련되었다.
신앙 고백비는 박해시대 직후 세인의 비난과 좋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이렇듯 담대하게 고백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도신경을 미사 때마다 외우면서도 과연 이만큼 절실하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3시 40분 마지막 목적지 상주 옥터로 향했다.
상주 옥터 - 안동교구 첫 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순교지 |
상주 지방은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도 감영이 있었던 곳으로 유서 깊은 고을이며 소백산맥 동편에 위치하고 낙동강이 이 지방의 동남쪽으로 흐르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예로부터 많은 인재가 배출된 인물의 고장이기도 하다. 고려 때 전국 8목의 하나로 상주목이 설치된 이래 조선 땐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할 정도로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천주교가 상주 지방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아마 1780년 전후 후반 남인 학자들에 의해 천주교가 연구되고 교회가 창설되던 시기로 추정된다. 1785년 3월 명례방의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신앙집회가 있을 때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에 의해서 문중 박해로 문중에서 파적을 당한 서광수의 가족들이 상주 지방의 이안면 배모기로 은거해 옴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씨가 뿌려졌다. 그 후 1791년 신해박해 후인 1798년 황사영이 상주의 이복운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무렵부터 복음전파의 노력이 이 지방에 활발했던 것 같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광수의 아들인 서유도 가정은 문경 한실로 이사를 가고 그 집안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된 것으로 생각되는 경주 이씨 이응동의 선대 가정도 이곳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하였다. 김 아가다 막달레나 가정은 청송 노래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 박해(1801) 때 충청도 사람인 김만업이 상주로 귀양을 왔다.
그후 이안의 배모기뿐 아니라 부근의 사실과 저음리와 멍에목, 앵무당, 삼막터, 오두재, 보문, 서산 화형터와 그 부근의 마을인 율리(밤밭) 등 여러 곳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는 경북 상주 멍에목, 앵무당 등에서 체포된 박보록 바오로,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안군심 리카르도 등 31명의 신자들이 모두 상주 진영으로 잡혀 와서 문초를 받은 후에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문경의 여우목과 한실 공소와 모전 등 여러 곳에서 체포된 박상근 마티아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문초를 받고 순교했으며, 성 이윤일 요한과 한실공소 김 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 및 청리면 질리 사람인 송 아기는 여기서 문초를 받고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가서 순교했다.
특히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상주 갈골,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처럼 목사(牧使)의 아문이 있었던 상주 관아의 감옥은 1801년 신유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상주는 물론, 문경, 보은, 영동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많은 신자들이 관아에서 문초를 받다가 사망을 하거나 감옥에서 옥사를 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2014년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곳에서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 전주로 이수(移囚)되어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 최조이 바르바라, 그리고 대구로 이수되어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등을 시복하였다. 이윤일 사도 요한은 이전인 1984년 요한 바오로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상주 진영의 옥터는 현재 상주시 성동동 남문시장 옛 소전걸(현 상주 청과물시장)이다. 박해시대 때 이곳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왕산 남쪽 아래에 있는 상주 관아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았다. 당시 형장은 옥 터 바로 옆인 성동동의 소전<현 대구여인숙 부근〉과 서문 밖 병정들이 주둔해 있던 병영은〈소방서에서 서문동 천주교회 부근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2014년 8월24일 이곳 상주 옥 터를 성지로 선포하였다.
오후 5시가 거의 다 되어 상주 옥터 성지에 도착. 성지의 주소는 상주시 성동동 633-2. 도로명 주소는 상주시 남문 2길 89-15.
담벽에 붙은 안내문을 따라 가니 좁은 골목 안에 있었다. 박해 당시 상주 감옥은 조선 태종 때 경상감영이 상주에 있을 당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니 지금은 터만 남았을 뿐 흔적도 없다. 바로 체포되어 오거나 아니면 하부 관아에서 체포되어 이곳에 온 교우들은 모두 이곳에서 갇혔으며 일부는 대구나 전주 감영 등으로 이감되어 순교하였다. 하지만 더 많은 이름 모르는 교우들이 이곳에서 전시 군법(戰時軍法)인 선참후계(先斬後啓)에 따라 속전속결로 순교했다.
정문 밖에는 성지 안내판이 나란히 두 개가 서있다. 왼쪽은 복자 박 마티아의 생애와 순교 내력을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오른쪽은 상주 옥터의 역사와 천주교 박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상주 옥터는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성첩과 문루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좁은 성지 안에 들어가면 아담한 경당 건물이 문이 잠긴 채 있고 마당 한쪽에는 키로가 새겨진 십자가가 나지막하게 서 있다. 받침석에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신앙고백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쪽 코너에 성모동산이 소박하게 조성이 되어 있고 가운데 성모님 한복에 쪽머리를 한 성모님 모자상이 서 계시고, 나무 울타리를 따라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
하루의 순례일정을 마치면서 모쪼록 오늘 만난 많은 순교자들이 하루빨리 시복 시성을 받기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 신앙의 선조인 순교자에게
사랑과 성덕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자애로운신 주님!간절히 청하오니,
저희 신앙의 선조인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게
시성의 영예를 허락하시고,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에게는
시복의 영광을 허락하시어,
후손인 저희들이 그들을 본받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시간 여유도 있고 하여 전통시장에 들렀는데 퍽 썰렁한 편이었다. 한 바퀴 둘러보고 상주 곶감이랑 간식거리 좀 구입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