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2. 창마석굴, 문수산 석굴, 곽거병
문화 혁명 때 파손된 문수산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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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문수산 석굴 주천 동남 15㎞ 지점에 위치한 문수산 석굴은 파손이 심했다. 석굴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석굴 안 벽화들은 대부분 훼손돼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
2002년 9월28일 토요일. 2시간 정도 유림굴을 취재하고, 창마(昌馬)석굴로 출발했다.창마석굴 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지르는가 하면 어느새 깊은 협곡이 나오고, 한번 나온 협곡은 끝 없이 이어졌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차는 달렸다. 계곡엔 맑은 물이 흐르고, 산 위엔 나무 한 그루 없는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운전사도 잘 모르는 듯 길을 물어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거대한 댐 공사 현장을 만났다. ‘창마수고(昌馬水庫)’라는 큰 글씨가 제방에 적혀있었다. ‘창마석굴’이 근방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수지 둑 위에서 다시 석굴 위치를 물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한적한 시골에 있는 석굴을 보러 온 외국인이 신기했나 보다. 옥문진(玉門鎭)을 지나 길을 헤맨 지 5시간 만에 창마석굴에 도착했다. 오후 5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옥문진 동남 90km 지점에 창마석굴이 있었다. 석굴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고, 많지도 않았다.
절벽에 개착된 석굴 수는 모두 6개. 중국문물출판사가 펴낸〈하서석굴(河西石窟)〉(1987년)에 의하면 창마석굴 중 제2굴과 제4굴이 예술성과 완성도에 있어 중요한 석굴이다. 그러나 입구엔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져 있다. 먼 시골에 있어 관리상 그렇게 해놓은 것 같았다. 돈황 막고굴과 안서 유림굴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온 터라, 창마석굴의 단촐한 모습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굴은 비록 소박했지만, 석굴 앞 풍경은 정말 일품이었다. 초가을을 맞은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논둑의 나무들도 아래 위로 온통 단풍이 들어, 서로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그 사이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지는 태양이 아쉬운 듯 농부들은 바삐 일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을을 맞은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별 차이가 없었다. 드넓은 평야엔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흉노족들이 한 때 이 넓은 들판의 주인이었는데…. 이곳을 잃고, 고비사막 이북으로 쫓겨난 흉노족은 옛날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지 못한 채, 한족(漢族)에 동화돼 사라지고 말았다.
단촐한 창마석굴…입구는 자물쇠로 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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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만리장성 서쪽 끝 관문 가욕관. |
1시간 정도 석굴과 주변 풍광을 살펴본 뒤 가욕관 시(市)로 출발했다. 만리장성 동쪽 끝 관문이 산해관이고, 서쪽 끝이 가욕관이다. 중국인들은 산해관을 ‘천하제일관’, 가욕관을 ‘천하제일웅관’으로 부른다. 중국 민족보다 더 ‘천하(天下)’ ‘영웅(英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민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중국에 들어온 이래, 특히 본격적인 중국 내지로 평가되는 감숙성에 들어온 이래, 가는 곳마다 만나는 글자가 ‘천하’와 ‘웅’자였다.
다음날(2002년 9월29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 곧바로 가욕관으로 달려갔다. 40원(圓)의 입장료를 내고 입구에 있는 갑문(閘門)에 들어서니, 작고한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이 쓴, ‘천하제일웅관’이라 적힌 현판이 보였다. 성채는 의외로 단순했다. 입구에 해당되는 갑문(閘門), 갑문을 지나면 나오는 광화문(光化門), 멀리서 광화문과 마주보고 있는 유원문(柔元門), 광화문과 유원문이 만드는 성채(내성)를 밖에서 호위하는 성벽(외성벽)에 있는 가욕관문, 그리고 가욕관문 좌우에 서있는 누각(樓閣) 등이 전부였다. 건물은 단순하지만 성채는 대단히 넓었다. 가욕관이 세워진 것은 명나라 때인 1372년. 당시 상승장군 풍승(馮勝)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설계했다. 1개 대대, 약 200명에서 300명의 병사가 상주하고 있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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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창마석굴 전경. |
가욕관을 둘러보고 문수산(文殊山) 석굴로 달렸다. 주천(酒泉) 동남 1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는 길을 그런대로 좋았다. 한 참을 달리니 멀리 사찰인 듯한 건물이 보였다. 군부대가 있는 건물을 끼고 좌회전해 들어가니 바로 문수산이고, 그곳에 문수산 석굴이 있었다. 눈부신 듯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나오던 늙은 관리인이 우리를 향해 합장했다. 오랜만에 합장을 주고받으니 참으로 기분 좋았다. “석굴은 사찰을 중심으로 앞산과 뒷산 곳곳에 개착돼 있습니다. 앞산에는 천불동·만불동·태자사가 있고, 뒷산엔 고불동(古佛洞)·천불동·관음동 등이 있습니다”며 늙은 관리인이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산으로 올라갔다.
많은 석굴들이 거의 대부분 심하게 파손돼 보기 안타까웠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석굴 안 벽화들은 심하게 벗겨지고, 대소변 냄새가 진동하는 석굴도 있었다. 그래도 부지런히 이 석굴 저 석굴을 돌아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한 석굴엔 그나마 벽화가 남아있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천정엔 꽃그림이 가득하고, 좌우벽면에 시왕과 판관들이 줄지어 서 있다. 누군가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됐다”고 설명했다. 심히 안타까웠다. 내리쬐는 햇볕에 머리가 따가웠다. 차 세워둔 곳에 가 늙은 안내인과 말을 나눴다. 멀리서 온 손님이라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전각에 들어가 부처님께 다시 한번 더 참배하고 나와 차를 마셨다. 마침 늙은 관리인이 책을 보고 있었다. 제목을 보니 〈모택동선집〉이었다. 늙은 관리인과 인사하고 주천 시내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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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곽거병 장군 전설이 깃든 주천공원 내의 주천샘. |
주천에 다 온 듯 시내 가운데 서있는 종루가 보였다. 가까이 가니 입구에 편액이 붙어있다. “동영화악(東迎華嶽), 남망기련(南望祁連), 서달이오(西達伊吾), 북통사막(北通砂漠)” “동쪽으로 화악(서안에 있는 산)을 맞고, 남쪽으로 기련산을 바라보며, 서쪽엔 이오에 도달하고, 북쪽으론 사막으로 통한다”는 뜻. 주천의 위치를 절묘하게 잘 묘사한 현판이라 생각됐다. 점심을 먹고 ‘주천’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샘을 찾았다. 종루 바로 옆 주천공원 안에 있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서한주천승적(西漢酒泉勝跡)’이라 적힌 돌비석이 보였다. ‘주천 샘’과 관련 있는 인물이 바로 곽거병 장군.
주천은 흉노 토벌한 곽거병과 큰 인연
한(漢)무제 아내 위황후 언니(위소아)의 아들인 곽거병은 무제의 총애를 받아 불과 18세의 나이에 시중(侍中)이 되고, 아저씨인 위청(위황후의 동생)을 따라 자주 출진하여 흉노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기원전 121년. 갓 스물을 넘긴 곽거병은 표기장군에 임명돼,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두 번에 걸쳐 하서회랑을 공략했다. 광대한 목초지가 있는 언지산(焉支山. 현재 감숙성 산단현)을 - 얼굴에 바르는 연지가 생산되는 산으로, 흉노족들은 여기서 생산되는 연지를 얼굴에 발랐다 - 공격하고, 다음에는 기련산 넘어 흉노를 추격해 도합 40,000명 이상의 흉노를 사로잡았다.
기원전 121년 가을. 한나라로서는 거국적으로 기뻐해야 할 일이 생겼다. 흉노왕 선우가 서부지방을 통괄하고 있던 혼야왕이 자주 곽거병에 패하자, 그를 불러 죽이려 했다. 눈치 챈 혼야왕이 한에 항복해 온 것이다. 항복한 흉노의 군병을 이끌고 도성 장안(서안)에 개선했는데, 수가 10만이나 됐다고 〈사기〉에 적혀있다. 이후 동으로 금성(난주)에서 서로는 염택(타클라마칸 사막 내에 있는 놉로르 호수)에 걸쳐, 흉노의 자취가 사라졌다. 한무제는 황하 서쪽에 처음으로 하서4군이라는 직할군을 두게 됐다. 그것이 무위(양주)·장액(감주)·주천(숙주)·돈황(사주)으로, 이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감숙성이라는 이름도 감주의 ‘감’, 숙주의 ‘숙’을 따 지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곽거병 덕분에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주천은 특히 곽거병과 인연이 깊다. 한무제가 흉노와의 싸움으로 고생하는 곽거병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한 병의 술을 보냈다. 한 병의 술로는 도저히 부하들 입에 고루 돌아갈 수 없었다. 곽거병은 술을 샘에 붓고 양을 늘려, 병사들과 나누어 마셨다. 그 샘이 바로 주천공원 안에 있는 샘이며, 주천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흉노와의 전쟁 영웅 곽거병은 24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너무나 슬퍼한 한무제는 곽거병을 자신의 무덤(무릉) 부근에 묻었다. 곽거병의 무덤 앞에는 지금도 흉노를 밟고 서있는 석조마(石造馬) 조각이 있다.
주천엔 물론 광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곽거병의 영광 뒤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唐詩)들을 모아놓은 ‘당시선(唐詩選)’에 나오는 아래의 시는 ‘화려함 뒤의 슬픔’을 잘 보여준다.
葡萄美酒夜光杯(포도미주야광배)
포도의 미주, 야광의 잔
欲飮琵琶馬上催(욕음비파마상최)
말 위서 뜯는 비파 잔 비우기 재촉하네.
醉臥沙場君莫笑(취와사장군막소)
취해 모래에 쓰러져도 그대 웃지를 마오.
古來征戰幾人回(고래정전기인회)
고래로 싸움터서 돌아온 이 몇이나 되리.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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