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흘째/ 따가이따이
호텔에서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9시에 따가이따이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마닐라 남쪽으로 향한다. 길거리에는 이 나라의 특색인 지푸니 차가 오고간다. 지푸니는 유리도 없는 차라 매연이 그대로 차 안에 들어간다.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군은 인심 좋게 군용트럭을 필리핀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필리핀인들은 이 차를 개조해서 지금까지 대중의 교통수단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버스도 있지만 장거리용으로 사용되고, 단거리는 값싼 지푸니를 이용하니 지푸니의 나라라고 부를 만 하다. 재미있는 것은 지푸니 앞 범퍼에 말 모형을 상징적으로 달아 놓았는데 말의 마리수가 부인 수를 나타내는 표시라는 것이다. 요즘은 말 대신 백조를 다는 추세라고 했다. 우스갯말로 지푸니 기사가 여성들의 1등 신랑감인데 이유는 우선 25만 원의 많은 월급, 그리고 매연을 많이 마신 관계로 일찍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란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따가이따이란 ‘잔 속의 잔’이란 뜻으로 이중 화산지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닐라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하며 산정에 있는 따알호수는 직경이 18km, 둘레가 40km가 넘고, 깊이가 300m나 되어 백두산의 천지보다 60배로 넓단다. 호수라기보다는 파도가 이는 바다와 같이 끝도 보이지 않은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다. 거기에다가 더욱 신비스러운 것은 이 호수 안에서 다시 화산이 폭발하여 따알산이 생성되고, 그 꼭대기에 또 작은 호수가 있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이중화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루터 인근까지 관광버스로 온 일행은 그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는 벙커를 타고 따알호수를 건넜다. 그리고 말 타기 전에 주의 말씀을 들었다. 마부들이 우리의 간단한 말을 다 알아 들으니 빠르다고 느끼면 ‘살살’, 느리다고 생각하면 ‘빨리’를 말하라는 것이다. 올라갈 때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내려올 때는 허리를 뒤로 젖혀 균형감각을 잡으라고 했다. 이 나라 말안장은 가죽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 딱딱하니 앞으로 붙여 앉고, 몸이 흐트러져 기울면 조금만 엉덩이를 올렸다가 살풋 앉으면 자세가 바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말을 보니 두려움과 기대로 심장이 갑자기 요동친다. 해발 700m 정상까지 흙먼지 날리며 40분 소요되는 비탈길을 따라 말을 타고 오르는 일은 큰 모험이다. 남자들이 용감하게 먼저 말에 오른다. 나도 용기를 내어 4번째 말에 올랐다. 말은 잿빛이 감도는 백마다. 마부가 다른 마부와는 달리 곧 내 뒤에 타고 오르더니 말을 빨리 몰아 앞서서 천천히 걸어가던 3마리의 말을 순식간에 떨쳐내고 앞질러 달린다. 천천히 안전하게 가려던 처음의 마음과 달리 빨리 달리는 말 위에서 어느덧 쾌감을 느낀다. 전생에 내가 말 타고 과거보러 가는 선비였을까 상상을 해 봤다. 말은 두 사람을 태우고도 딱깍딱깍 힘차게 정상을 향해 오른다.
해내었다!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그런 기쁨이 벅차오른다. 섬 속의 호수와 바깥 호수를 번갈아 보며 정상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쉬었다.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 가니 바위 사이에 흰 연기가 뭉게뭉게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활화산이란 말이 맞는 모양이다.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좁은 진흙 길을 다시 말을 타고 내려간다. 원래 등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를 조심하라고 했다. 자꾸 앞으로 숙으려지는 몸을 뒤로 젖히며 나름대로 늠름한 자세를 유지하느라 애를 썼다. 그러는 사이 눈에 익숙한 곳이 보이고 스릴 있던 말 타기가 빨리 끝나버린다.
가이드의 지시대로 나는 정확하게 팁을 2천 원만 주고, 말 팁을 따로 주라는 걸 약속에 그런 말이 없다며 매정하게 딱 끊고 돌아섰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가이드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천 원을 더 준 것은 일반이고, 어떤 이는 그보다 많이 주고, 머플러까지 목에 감아주었다는 말을 듣고, 역시 한국 사람들은 인정에 약하여 규정 같은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객의 이런 인정스러움으로 다음 여행객들이 고초를 겪는다는 가이드의 주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 나 혼자라도 지시사항을 위반 안 한 것을 잘 했다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면서 자꾸 후회가 인다. 마부가 뒤에 앉아서 모자가 벗겨지면 올려주고, 마스크도 씌워주며 다정하게 대해 주던 일들, 더구나 내려올 때는 가장 먼저 내려온 영광의 배려까지 해주었는데 나만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니!
저녁을 먹고는 우리 방에서 같이 온 일행들이 모여 과일시장에서 사온 망고, 파인애플, 레몬, 멜론, 망고스틴, 바나나 등의 과일들을 먹으며 남국의 밤을 즐겼다. 주로 말 탄 이야기들, 누구는 몸이 뚱뚱하여 그 말이 고생했느니, 누구는 말에서 내리다가 넘어졌느니, 누구는 엉덩이 살갗이 벗겨졌느니 웃는 소리로 떠들썩하다. 몇 잔의 술로 얼굴이 불콰해진 곽씨는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 멤버로 내년에 한 번 더 오자. 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