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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구산 리사다임 /사사기 3장 1-11절
요약 = 연 단 론
하나님께서 열국들을 남겨 놓으심은 자기 백성에 대한 연단용이며, 남겨 두신 열국들은 우리를 시험하는 각종 요소들이다. 즉 블레셋은 육체를 인질로 한 정치 경제 가정 국가 집단 등의 조직적인 박해를, 가나안인은 세속을, 시돈은 교만과 사단을, 레바논산에 사는 히위족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바리새주의나 이단 혹은 그럴듯한 이방종교를 상징한다. 그리고 구산 리사다임에는 하나님의 연단의 비밀이 담겨있다. 그것은 연단을 나와 동일한 것을 사용하셔서, 나보다 더 강한 것을 사용하셔서, 나보다 더 악한 자를 통하여 하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갈렙과 하나된 옷니엘을 통하여 연단을 끝내심은 신자가 악함을 회개하고 성령으로 변화받아 예수를 닮을 때 연단이 끝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강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구산 리사다임"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이 구산 리사다임 왕을 통해 8년간이나 징계하셨다가 구원하신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오면 왜 하나님께서 시험의 원인들을 다 제거해 주시지 그렇지 않으시는가 하는 질문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먼저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열국에 대한 복음적인 의미를 설명해 드리고, 징계의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은 과연 무엇을 예표하는지 그리고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왜 열국을 남겨두셨을까요?
그것은, 택하신 자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1-2절 하반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이라 했습니다.
여기 보면 열국을 남겨 놓으신 이유가 두 가지로, 하나는 시험하시려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알게 하시려고입니다. 여기 시험은 원문에 '나사'로서 '연단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가나안 전쟁을 알게 하기 위함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승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에"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라 했습니다. 역시 교육용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환경은 대단히 악합니다. 죄와 사단과 악의 환경과 연약한 육체 등 이리 돌아보나 저리 돌아보나 악의 환경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의 믿음을 정금같이 연단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남겨 두신 열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본문 3절에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했습니다.
1.블레셋 다섯 방백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여기 블레셋 다섯 방백은 육신적인 시험들을 상징합니다. 오각을 가진 우리 육신 혹은 정치 경제 조직 집단 가정 국가 등 물리적인 시험들입니다. 블레셋이 병기가 발달했듯이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박해할 때는 그 피해가 큽니다. 초대교회가 이 박해를 받아 연단을 받았습니다.
2.가나안 모든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여기 가나안 모든 사람이란 세속적인 죄를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인을 개라고 했습니다. 벧전2:10과 12절을 보면 이성 없는 짐승은 육체의 더러운 정욕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또 벧후2:22에 개는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인은 세속적인 죄의 상징입니다.
3.시돈 사람을 남기셨습니다.
성경에는 공식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돔하면 고모라이고, 두로하면 시돈입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이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의 유명한 무역항으로서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그 결과 사치와 교만이 하늘까지 다다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11장에서 두로와 시돈을 소돔과 나란히 놓으실 만큼 악한 도시였습니다. 겔28장에서도 두로는 사단에 비유되었고 시돈도 두로처럼 동일한 멸망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돈은 교만과 사단과 이단 등의 영적인 죄에 해당합니다.
이런 것들을 남겨 두심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정신 차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과 사단의 역사로 상상치 못할 피해가 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다 신자들의 연단용 교육용입니다. 지금 한국에 이단에 빠진 인원이 약 200만으로 추산됩니다. 200만의 이단들을 대처하려면 최소한 천 명에 한 명꼴로 치더라도 2000명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단대책은 미흡하고 활동 중인 대책기구라 하여도 전문적인 지식 부족과 각종 실수의 연발로 범교회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이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에베소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단에 대한 강력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단을 근본적으로 방비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바른 신앙에 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바로 설 때 하나님께서는 연단하는 악의 이단 세력들은 대부분 처리하여 주실 것입니다.
4.바알 헤르몬산에서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입니다.
여기 '레바논'은 '하얀산'이란 뜻입니다. 또 '헤르몬'은 '성별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들은 거짓으로 가장하여 여호수아를 속인 기브온 족과 동일한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헤르몬이면 헤르몬이지 바알 헤르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이름이 바알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라는 이름을 성경에나 기록했지 아예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 바알이란 '주'라는 뜻으로 어떤 주의로 나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하맛 어구란 어구란 어귀 길입구를 뜻하는데 그들이 길 입구까지 내려와 점령하고 살지만 사는 곳은 길과는 상관이 없는 산에서만 삽니다. 특히 하맛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선이요 소아시아와 남방 사이의 주요 무역로로서, 천국의 상징인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고대로부터 얼마나 유명하면 하맛 어구라고 했을까요? 즉 이것들은 대단하고 중요한 길처럼 보이지만 참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만이 영생길인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길입니다.
잠14:12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 길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맞습니다. 그들의 거처들을 멀리서 보면 그렇게 고상하고 거룩한 듯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지대는 고산지대로 썰렁합니다. 냉기가 휙휙 돕니다. 은혜가 없어요. 성령이 없어요. 이것이 무슨 주의인줄 아세요. 율법주의, 외식주의, 경건주의입니다. 완전주의, 바리새주의입니다. 그들의 외형은 경건이 철철 흘러 넘치지만 존경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져 바리새인이 되면 화 밖에는 선언받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 없는 거룩, 그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아십니까? 예수님 없는 거룩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것은 외식과 거짓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얼굴과 양심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세리나 창기보다 바리새인들을 더 악하게 보셨습니다.
혹은 불교의 자비나 이방종교들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그들이 기독교를 본따서 봉사활동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외형만 보고 현혹되면 안됩니다. 최근 참가정운동이다 이런 것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가짜들이 이런 것은 더 들고 나옵니다. 행사를 해도 더 거창하게 하고 옛날 황제 대관식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독버섯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있어야지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리 경건하고,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감동적이고, 아무리 희생적이어도, 그것은 생명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이 히위족속들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것들이 신자가 조심해야 할 하나님께서 열국들의 복음적인 의미입니다.
그럼, 이제는 구산 리사다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산 리사다임은 메소보다미아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자 징계의 방법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채찍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연단의 도구입니다. 이 말씀 속에 놀라운 연단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연단시킬까요?
1.나와 똑 같은 것을 쓰셔서 연단시키십니다.
메소보다미아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세요. 그곳은 아브라함의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는 한 혈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닮은꼴입니다. 성격도 닮았고 얼굴도 닮았고 몸도 닮았고 코도 눈도 입도 다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동일한 사람을 쓰셔서 훈련시키십니다. 말이 많으면 말 많은 사람들을 들어서 연단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말로 인한 온갖 괴로움을 당하게 하십니다. 말 한마디 꺼냈다하면 백마디가 되어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사람이 구설수에 오른다는 것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저하게 언어훈련을 시켜 귀하게 쓰시길 원하십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악한 사람은 포악한 사람을 들어서 연단시키시고, 간사한 사람은 간사한 사람을 들어 연단시키시고, 독선적인 사람은 독선적인 자를 들어 연단시키시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안 해야지' 하며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짐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구산 리사다임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나보다 강한 자를 통해 연단시키십니다.
메소보다미아라고 하면 기원전 약4000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인류문명의 발생지입니다. 또 이 나라는 비옥한 유브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부요하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이렇게 전통과 힘을 가졌으니 누가 그들을 이깁니까? 그 강한 바벨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대적을 붙여 연단시키십니다. 그들과 백 번 싸워봐야 집니다. 이기는 길은 회개밖에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가벼운 인품 때문에 귀히 쓰지 못할 때는 의젓한 인품을 입히시기 위해서 남을 무시 잘하거나 혹은 대대로 인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틈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나의 가벼운 인품 때문에 온갖 무시와 고통과 불이익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씨름하듯 뒤집을 수도 없습니다. 이 훈련 동안에는 사람도 만나기 싫고 말 한마디도 꺼내기 싫고 거의 웃음조차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환경에서 자기의 인격을 다짐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기간에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속히는 거기서 건져내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격이 바꾸어지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은 더 악한 자를 통해 연단시킵니다.
여기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의 뜻은 '죄에 죄를 더한 구산' 혹은 '배나 사악한 구산'입니다. 이것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 먼데서 와서, 그것도 자기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견디다 견디다 못해 아우성을 치며 부르짖을 만큼 그토록 괴롭혔으니 자기 이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8절에 "팔년을 섬겼더니" 자기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다 빼앗아가고 온갖 좋은 것으로 공양을 하게 했습니다.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 완악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겠습니까?
야곱을 보세요. 그 간사한 야곱을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귀히 쓰시려고 연단시키실 때도 밧단 아람의 그 강퍅한 외삼촌 라반을 사용하셨습니다. 연단의 원리가 똑 같습니다. 외삼촌이면어머니의 혈통입니다. 선조들의 혈통도 됩니다. 또 밧단 아람이면 그곳이 메소보다미아입니다. 또 구산 리사다임이 그 먼데서 와서 연단한 것처럼 야곱도 그 먼데까지 가서 동일한 대상에게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또 야곱은 서툴고 작은 사기꾼이지만 라반은 크고 노련한 사기꾼입니다. 야곱은 잠깐 잠깐 혹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잔머리를 썼지만, 라반은 수 십년 동안 아주 야곱의 인생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아주 미쳐서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창31:40을 보면 야곱이가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창31:41을 보면 라반이 삯을 열번이나 변역했고, 창31:39을 보면 양이 도적 맞거나 물어가면 야곱이가 그것을 다 물어내야 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안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괘씸하게도 그것을 다 받았습니다. 이렇게 악한 사람입니다. 은근하게 악한 사람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는 배나 악했습니다.
이렇게 봉사해준 결과 라반의 재산은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라반에게서 삯을 받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삯을 받은 후에도 라반은 야곱을 그저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단지 신고하지 않고 갔다는 얄팍한 이유를 들어 돌아가는 야곱을 추격합니다. 만약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야곱을 죽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사람에게는 분노계의 권위자를 붙여 주시고, 잔소리 잘하는 사람에게는 잔소리의 챔피언을 붙여주시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강력하게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을 붙여 주시고, 마음이 좁은 사람에게는 강력한 옹고집을 붙여 주시고, 염려가 많은 사람에게는 손길을 완전히 끊으셔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며, 약한 자는 강력한 연단 속에서 자생력을 얻게 하시며, 율법적인 사람에게는 그 율법적인 것이 얼마나 살인적인가를 깨닫는 일을 주시며, 마귀 짓을 늘 하는 사람에게는 더 강력한 블레셋 족속을 붙이셔서 자기를 돌아보게 하신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더 강한 사람들을 사용하시어 연단시키시는데 이것이 바로 구산 리사다임입니다.
이제 끝으로 연단을 끝내는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9-1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했습니다.
1.진실로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구산 리사다임에게 고난을 받았으면 섬기던 우상 다 팽개치고 여호와께 부르짖었겠습니까? 주석을 참고하면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음은 자기들이 섬긴 우상들의 무능을 깨달았다는 결과이므로 회개를 암시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회개라기 보다는 다급하기 때문에 드린 회개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우리에게 회개와 기도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단을 마치려면 회개하며 부르짖어야 됩니다.
2.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했습니다.
앞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까 성령이 옷니엘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그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의 깊이 봐야 합니다. 9절에 옷니엘만 소개하지 않고 갈렙과 관련된 그의 이력이 나옵니다. 갈렙이 나오고, 아우가 나오고, 그나스가 나옵니다. 여기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갈렙과 모든 면에서 하나된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 다 그나스족속이었으니 혈통으로도 하나였고, 삼촌과 조카 사이니 한 가족으로도 하나였고, 둘 다 이방인이었으나 함께 이스라엘에 입교하였으니 행동으로 하나였고, 그도 갈렙처럼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었으니 믿음으로도 하나였고, 그 험한 산지의 강한 아낙족속이 사는 기럇 아르바를 정복했으니 그 정신도 갈렙과 같았고, 맨 앞장 서서 나가서 용기있게 싸웠으니 성격도 같았으며, 거기다 갈렙의 사위까지 되고, 기업조차 함께 나누었으니 두 사람은 둘이 아니요 한 몸입니다. 이정도로 하나된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놀라운 비밀입니다.
여기서 갈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사용됩니다. 갈렙과 한 몸이 된 옷니엘이란 우리가 연단 받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사람이 됨을 예표합니다. 즉 말씀으로 회개하고, 부르짖어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나타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화하게 됨을 가리킵니다(고후3:18).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각종 명칭에서 우리는 깊은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랑과 신부, 목자와 양, 자기 백성, 포도나무와 가지, 우리의 구주,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등등 우리와 연관된 수십가지의 명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는 수십가지의 관계로 복합적으로 하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바 되었지만, 또한 이미 얻은 그것을 성령 안에서 적용시켜 나가는 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인데 이 성화의 한 방편으로 연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렙과 옷니엘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중요한 공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공식은 구산을 닮으면 연단은 시작되고 예수님을 닮으면 연단은 끝난다는 것입니다. 또 순종하면 말씀으로 대하시지만 완악하면 연단으로 대하신다는 것 역시 연단의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닮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몇 년간 평안합니까? "그 땅에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얼마 동안 태평하였더라인데 이곳에만 유독 태평한지 사십년에 옷니엘이 죽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문법을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이렇게 연단시키심은 우리의 남은 한 세대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십년은 한 세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광야 이스라엘도 한세대가 바뀌는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한 세대가 40년이라는 숫자 제공의 의미가 아니고 그냥 한 세대의 상징입니다. 즉 우리를 연단시키심은 우리의 일생을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하심이요, 이는 장차 우리의 영원한 내세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구산 리사다임을 통해서 연단시키심에 대한 영적인 의미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참으로 사랑 받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되면 하나님께서는 잔혹한 징계를 통해서라도 연단시켜 온전케 하십니다. 여러분, 징계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이 징계에서 벗어날 길은 변화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회개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나타나 내가 변화됩니다. 내가 변화되면 모든 환경도 다 변합니다. 야곱도 이스라엘로 변화될 때 그의 환경이 변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연단은 끝납니다. 지금 우리는 알게 모르게 크게 작게 모두 하나님의 연단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낙심하지 말고 회개하십시다. 성령받아 변화되십시다. 그러면 옷니엘의 일생이 평안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평생 귀하게 써 주실 것입니다. 변화받아 이 귀한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