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물은 예로부터 제주에서 물이 좋기로 이름 높았다. 물이 좋다는 것은 맑고 시원한 용천수가 사계절 마르지 않고 용출되는 '수원(水源)이 좋다'는 뜻이다. 서림물은 한림읍 옹포리, 제주시 산지물과 더불어 제주도 3대 수원지 중 하나로 꼽는다.
서림은 속칭 '날외(日果)'에 속한 마을로 '큰동네'라고 부를 만큼 세가 큰 지역이었는데, 모슬봉 북쪽의 '웃날외(上日果)'는 철종 15년(1864)에 분리돼 지금의 신평리(新坪里)가 되었고, 고종 37년(1900)에는 동쪽의 마을인 동일리가, 끈다리라고 부르는 명달동(明達洞)은 일제강점기에 일과 2구로 불리다가 해방 후 일과2리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대정읍의 풍수적 지형은 모슬봉을 중심으로 볼 때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한다. '날외'에서 보면 고요한 달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가시오름을 베개 삼아 모슬봉에 누워서 송악산에 발을 뻗고 거문고를 탄다는 그럴듯한 옛사람들의 입담이 전해온다.
서림물 바로 동북쪽에 위치한 가시오름에는 제성리라는 제단이 있었으나 미군 기지 건설 때문에 정상 평탄 작업 중 멸실되었다. 이 제단은 마을 포제를 지냈던 곳으로 마을의 평안과 풍년, 풍어를 기원했다. 가시오름과 관련된 전설과도 같은 풍문에는 해방 후 미군이 가시오름 정상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오름 정상까지 진입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큰 구렁이가 미군차량을 뒤엎어버리자 가시오름에 기지건설을 포기하고 모슬봉으로 옮겨 레이더 기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나 인근의 민중들이 가시오름을 신성시하기 때문에 만들어낸 마을 수호적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 서림물 남서쪽 해안에는 빈번하게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기 위해 '서림연대'가 설치돼 있다.
서림수원은 1962년 건설부의 주관으로 급수에 대한 계획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당시 국비 1021만2000원을 들여 취수시설, 모슬봉 배수지, 송·배수관 등의 시설공사가 이루어졌고, 일과1·2리에 공동수도가 설치되었다. 1968년에는 가시오름에 배수지가 시설되고 그후 계속 시설을 보강하여 일일 급수량을 늘리는데 주력하였다.
서림수원 2차 확장사업은 1995년도부터 4개년 사업으로 전체 사업비 101억7100만원을 투자하여 1일 1만5000㎥으로 급수량을 늘리는 사업을 마무리하여 대정읍 21개리와 안덕면 9개리 등 8800여 가구 3만여명에게 맑고 깨끗한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2002년도에는 5억원을 들여 집중호우 시 용천수에서 흙탕물이 나오는 것을 여과시키는 급속침전여과기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서림물은 일과리 주민들의 대표적인 식수이자 생활수가 되었고, 여름철이면 인근 모슬포, 영락리, 동일리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거나 걸어서 목욕을 하러 오기도 했다. 물의 양이 풍부하고 시원하여 남녀노소가 애용하던 추억의 물로 기억 속에 생생하다.
서림물은 모슬포 미군기지에 급수를 공급하는 시설이었다. 다른 급수시설에 비해 철조망을 두를 정도로 경계가 두드러지기도 했다. 원래 모슬포 군 기지에는 해군, 해병, 공군,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면서 10만 군인의 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하여 서림물은 모슬포 군기지의 대표적인 급수시설이 되었고, 모슬봉 서쪽 기슭에 배수장을 만들어 군 기지에 식수를 제공하고 있다.
미군기지는 일명 맥나브 기지라고도 불렀다. 모슬봉 남쪽 기슭 약 1만평 가까이 한국 공군기지 옆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 맥나브 기지의 공식 이름은 미8군 2지원단 사령부 및 34지원단 소속으로 미군 유격훈련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맥나브 기지는 알뜨르 비행장에 주둔했던 맥나브 대령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맥나브 컴파운드(MACNAB Compound)라 명명했다. 이 맥나브 부대의 임무는 미 8군과 미 2사단 장교와 사병을 중심으로 일주일간 유격훈련을 담당했으며, 유격훈련 장소는 산방산 암벽과 화순해수욕장인데 3일간 훈련받고 3일은 제주도 관광을 즐겼다. 후에 맥나브 기지는 유격훈련소 기능보다는 휴양소 기능이 강화된 레크레이션 에리어였다. 그러다가 2006년 7월15일 마침내 도내 유일한 주한미군기지인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봉 소재 '맥나브 캠프'가 설치된지 50여년만에 우리나라 정부에 반환됐다. 맥나브 캠프 반환으로 제주도는 1910년 일제강점기 시작부터 한국전쟁 당시인 1953년 '맥나브촌(村)'의 이름으로 설치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굴곡져온 외국 군대의 제주섬 점령·주둔 역사를 청산하게 됐다.
▲ 신영물
일본 공군도 길어다 먹었던 신영물
신영물(神靈水)은 대정읍 하모리 938번지에 위치한다. 한때 창랑(滄浪)한 물길을 자랑하던 모슬포의 대표적인 젖줄이었다. 복개공사 전의 1일 평균 용천수 유출량은 4500㎥이었고, 평균 수온은 섭씨 15.3도다. 신영물은 오늘날 무자비한 개발로 시들해져 형해(形骸)만 남아 과거 유서 깊은 물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모슬포 대표적 젖줄 신영물,
다른 평범한 용천수와 달리
한반도 역사 중심에 있던 물
신영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인근 대정읍 하모리 주민들이 물허벅을 이용하여 물때를 맞춰 이용했으며, 이웃한 상모리 주민들도 달구지를 끌고 와 물을 길어갔다. 모슬포 항 동쪽 구역이 매립 후 신도로가 개설되면서 신영물은 도로 밑에 갇히는 신세가 돼 제 기능을 잃어버렸고 지금은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죽은 물이 되었다.
신영물의 이름은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모리가 설촌할 당시 어떤 유명한 풍수가가 지나가다가 이 용천수에 이르러 물을 떠먹고는 "물맛이 참 좋아 마치 신령수(神靈水) 같다"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물 이름이 지어진 연대는 하모리 설촌과 관련해서 문헌에 나오는 시기가 영조 25년(1749)이니 약 264년은 더 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영물은 모슬진 가까이에 있어서 수자리를 서는 옛 군인들도 식수로 썼을 것이다. 모슬진은 본래 수전소(水戰所)가 있었던 곳으로 숙종 1년(1675)에 어사 이선(李選)의 건의에 따라 제주목사 윤창형(尹昌亨)이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현재 회수동)를 옮겨 진성을 쌓았다. 모슬진성은 둘레 355척, 높이는 12척이고 동문(탐라순력도에는 남문)만을 만들었다고 한다. 병력은 지휘관 격인 조방장 1인, 치총(雉摠) 2인, 성정군 177인, 봉수, 연대 별장 12인, 봉군 24인이 있었다.
신영물은 현대사와도 관련이 깊었다. 여느 평범한 용천수와 달리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물이다. 이 신영물의 위치는 모슬진의 길목이면서 모슬포 안쪽 해안에 있어 썰물이 되면 갯가 바닥이 보이지만 밀물 때는 모슬포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만(灣)과 같아 가파도에 숨었던 왜구들이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침범할 수 있는 지형을 이룬다. 실제로 이 신영물은 조선 말기에 왜구의 침입과 직접 관련이 있는데 오좌수 사건이 그것이다. 고종 24년(1887)에 왜 어선이 모슬포에 내박하여 돼지와 닭을 잡아가고 신영물에서 물을 긷던 여자들을 폭행, 희롱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대정 지역민인 이만송, 이흥복, 김성만, 정종무, 김성익 5인이 격분하여 몽둥이를 들고 돈지동 거리에서 큰 싸움을 벌였는데 왜구의 환도에 이만송은 목이 잘려 전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급기야 왜인들은 도망을 갔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크게 다루어 일본 통상아문으로 하여금 항의를 했고, 이들 5인에게는 좌수 벼슬을 하사하여 그들의 의기를 기렸다. 오좌수 의거비는 신영물에 있었으나 새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알뜨르비행장에 주둔한 일본 공군들이 구루마(마차)를 끌고 와 드럼통과 나무통에 물을 담아갔다. 돈이 귀하던 시절 하모리 상동과 서상동 아이들은 고구마를 삶아 상착(사각형의 작은 대바구니)에 담아 기다렸다가 물 길러 온 일본 공군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고구마는 어머니가 삶아주어 팔아오라고 시켰다고 한다. 고구마 1개 값은 10~20전 정도였다고 한다(김성용 증언, 1935년생).
한국 전쟁기에는 신영물 인근 동남쪽에 절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제1훈련소 사고 사망자를 위령하는 절집이었고, 당시 주지 스님은 장리석 화백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국전쟁 후에 미군이 주둔하던 1970년대까지 신영물 남쪽 100여m 해안에는 모슬포 미군부대 쓰레기장이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다 멈춘 잔뜩 쌓인 미군부대 쓰레기는 당시 아이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미군 쓰레기차가 왔다 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쓰레기장을 뒤져 양주병, 병뚜껑, 찢어진 잡지, 1센트 짜리 동전, 구리선, C 레이션 깡통, 라디오 부속, 작은 스피커에 붙은 동그란 자석 등 실로 다양한 미제 고물 전리품을 얻고 즐거워했다. 쓰다버린 보급품에서 맡기 싫은 미국인 특유의 노린내가 났지만 그래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줍는데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냄새는 바닷물로 여러번 씻으면 다소 누그러지기 때문이다.
또 신영물 주변 모슬포 거리에는 다방, 여인숙, 목욕탕이 있었고, 미군들이 드나드는 핑크빛 싸롱(살롱)도 여럿 있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미군들이 모슬포 시내를 배회하며 왼손에 4홉 짜리 소주와 오른 손에 코카콜라를 들고 그것을 안주 삼아 마셨는데 미군들은 소주를 일명 '코리안 위스키' 라고 불렀다. 어떤 때는 물약 감기약을 여러 병 먹고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다 길거리에 쓰러지면 미군 헌병대 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한국 전쟁기에는 신영물에서 북서쪽 100여m 지점에 2층짜리 일본식 건물에 남인수, 문예봉 등이 속한 문예대가 있었으나 최근 철거돼 멸실되었다. 지금 신영물 입구는 방어 축제장의 입구가 돼 사람들이 분빈다. 원래 오좌수 기념비도 신영물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가까운 곳에 옮겨졌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