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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앵무새 죽이기-보론補論】「삼류매식소굴三流賣植巢窟」
의 글...반론[2]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216
글: 대수맥
【삼류매식소굴】의 주장
Ⅲ. 일제의 삼국유사 개작설 -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이것 또한, 문정창이 역사 날조의 증거라며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내세운 후
<단군조선사기연구>로 부연한 것이다.
문정창은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p.59>를 가지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인데, <이마니시 류
(今西龍)>이 昔有桓國을 昔有桓因으로 조작해놓은 것을 최남선이 발견하여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꽤나 영웅적인 이야기로 변조가 된다.)
해당 회의에서의 발언내용과 문정창의 인용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其の三は原典の引用や考勘には實に當事の方の御苦辛の程が忍ばれて感佩に堪へませぬが、
尙一層の御配慮を願ひたい節もあるやうに存じます。例へば高句麗東明王のところの引いた
[三國遺事の檀君古記の中の「昔有桓國」とあるべきところを、後の淺人の妄筆にか
る「桓因」に從ひたるが如きが其の一つであります] 御承知の通り [檀君古記なるものはもと
相當纏つてきた筈の古い記錄を極めてあつさりと縮約致しましたものである故に、其の片言隻
字にも間間非常に重大なる意味が含まれて居りますが]、殊に此の桓國卽ち桓の國と桓因とする
間には全文の解釋上古來容易ならざる因緣が附いて居りますから、[假令一字の誤りであるとは
いへ其の影響は隨分大きいものがあるのであります。此の文は京都大學の影印本によつたとして
ありますが、其の原書の桓因の因の字が國の字を上塗りして因としたるものたるは一見よく認
められるところであります] 古典引用の上に於きまして、假令極めて明白なる誤謬なりと雖も、
これを妄りに改竄するの不當なるは今更申す迄もなく、現に此の書の上にもこの點に對する敬
虔銳敏なる御用意が十分窺はれます。<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p.59>
檀君古記는, 廣範한 古記錄을 至極히 簡短하게 要約한 것이므로, 그 記錄의 片言·隻字에도 至極히
重大한 意味가 包含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一字의 誤라 하여도 全文의 解釋上 그 影響하는
바 至極히 크다.……三國遺事의 檀君古記中에 「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昔有桓因」
이라고 고친 淺人의 妄筆을 引用한 것은....高句麗 東明王의 條에서 引用한 이 文은, 京都帝國大學
이 發刊한 影印本에 依據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原書의 桓因이라는 「因」자가 「國」자를
上塗하여 因字로 만든 것을, 一見하여 明白히 認定할 수 있는 바이다.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中 p.463>
이후의 그의 수법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문정창은 독자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인용문에서 고의적인 단장취의와 뒤섞기를 수시로 활용한다. (나중에는 인용문도
날조를 한다.) 인용문만을 본다면 일반적인 독자들은 원래 「환국」이라고 되어있어야 할 것이,
「환인」으로 고쳐진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에 관련된 내용인가를 알게 해줄 발언의 전단부는 삭제를 해놓았고, 이전부터
「환인」,「환국」이 해석상 문제가 되었던 것, 즉 전부터 병존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주는 문장
<殊に此の桓國卽ち桓の國と桓因とする間には全文の解釋上古來容易ならざる因緣が附いて居り
ますから>은 빼버렸다. (이것은 이후 최남선과 관련해서 보도록 하자.)
즉, 환국, 환인 중에서 환인을 택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내용이, 환국을 환인으로 날조한 것으로
인용된 것이다.
【반론】
이 부분에서는 더 이야기해보았자 내 입만 아프니 거두절미하고 <삼류매식소굴>이 예시로
든 일본어 原文(왜 이 원문을 그대로 해석도 않고 자랑스럽게 적었는지? 역시 일본 색깔은 여기
에서도 여실히 나타나는 듯하다...)을 우리말로 해석해 보기로 한다.
원전(原典)의 인용과 고감(考勘)에 있어서는 실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는
바가 없지 않으니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의 부분을 인용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인 것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
[석유환인(昔有桓因)-옛적에 환인이 있었다.]으로 고쳐졌음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古記錄)을 종합한 것을 극히 확실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구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桓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용이하지 않는
인연이 붙어있는 것이다.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그 전문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 글은 경도대학(京都大學) 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지만 그 원서(原書)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덧씌워져 인(因)자로 한 것을 일견하여 바로 인정받는 것이다.
고전을 인용함에 있어서 가령 매우 명백한 오진일지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輕妄)스럽게 개서
(改鼠-쥐가 무엇을 뜯어먹은 것처럼 고침)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엿보여야 될 줄 안다.
되도록 원문(原文)에 충실하게 번역했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그야말로 <최남선>의 울분과
구구절절한 심정과 단호한 결의가 감지되고 있다.
또한 이 해석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다른 서책(書冊)에서도 인용한 文句와 거의 다르지 않은
점도 발견할 수 있다. 헌데 이 사람은 여기에서는 트집 잡을 것이 없는지 난데없이 【殊に此の
桓國卽ち桓の國と桓因とする間には全文の解釋上古來容易ならざる因緣が附いて居りますから은
빼버렸다】는 이유를 들고 나온다. 과연 그랬을까? 원래 이 文句의 해석은 이렇다.
▶ 더욱이 환국(桓國) 즉 桓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용이(容易)하지
않는 인연(因緣)이 붙어있는 것이다.
즉 그동안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경로로 전해오는 서책(書冊)에 대한
가필*윤색*폄훼*삭제 등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儒家的인 축소해석과 道家(여기서는 민족 史書를
말한다.)적인 기술(記述) 차이 때문에 지금 떠도는 삼국유사 판본(板本)에 대한 불일치로 말미암아
全文의 해석상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다시 말해 옛부터 수상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
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최남선> 선생의 강변 태도를 보면 이 句節은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대전제(大前提)의
성격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언급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석유환인昔有桓因-옛적에 환인이 있었다]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라고 뚜렷이 못을 박는 입장을 확고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언급은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모든 문헌에 그대로 삭제되지 않고 수록된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후에 나타나는 [삼류매식소굴]의 수법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오히려 독자들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인용문에서 고의적인 단장취의와 뒤섞기를
수시로 활용한다는 점을 여러분들은 필자(筆者)의 반론이 아니더라도 쉽게 짐작하게
될 것이다.
[덧붙임]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昔有桓國을 昔有桓因으로 조작해놓은 것을 최남선이 발견하여
지적했다는 것이다】는 사실을 아주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왜곡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렇다면 다음의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근거에 의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1)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위원회 개최 때마다 입장을 피력한 부분이나 이 사건이 일어난
위원회 기록의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왜 그런 말을 하였는지가 명백하게 감지된다.
즉 [일제의 상고사 왜곡에 대한 수차례 지적 - 그 시기 어느 땐가 어느 인물의 변개變改 의혹
- 그를 천박한 인물로 매도하는 단호한 입장 - 그런 사실을 적시摘示하는 기록 내용들]이라는
문맥의 흐름이 잡힌다.
2) 설령 백보百步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原文의 의미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사람이
말했듯이 [그렇게 헷갈리게 만들어 놓아 본 뜻을 흐리고 어지럽힌다]는 선생의 탄식과 변개에
대한 강한 의혹감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桓國-桓因의 망필(妄筆) 부분에 대한 시기적절한 표현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삼류매식소굴】의 주장
[위 문장 계속] 전단부를 빼버리면, 淺人의 妄筆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버린다.
(물론, 전단부가 있었더라도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웠겠지만.)
천인의 망필이 무엇일까? 우선 문정창의 해석을 보도록 하자.
二. 崔南善은 「國」字를 「因」字로 고친 것을, 어떠한 淺人의 妄筆이라고 하였다.
그러한바 「國」자를 「因」자로 改竄한 데에는, 반드시 改竄할만한 理由와 目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目的과 理由를 가진 者는 檀君朝鮮을 削除하려고 一0餘年間 그처럼 애쓰고 努力해
온 今西龍·黑板勝美·內藤虎次郞 等 日本人 御用學者들과 朝鮮總督府 當局者들이었으니, 그러므로
筆者는 그 「國」자를 「因」자로 改竄한 者를, 今西龍等 日本人御用學者들과 朝鮮總督府 當局者
들이라고 推斷하고 調査한 結果 그 모든 證據가 들어났다.
(詳細 拙者 「領君朝鮮의 史記에 關한 小硏究」 參照)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中 p.464>
소위 재야사학의 한심한 방법론 -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근거를 어거지로 끼워맞추고, 가설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는 - 이 이때부터도 튀어나오는 것은 일소에 붙이고 넘어가자.
그는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종종 그가 악의적으로 우리 역사를 훼손한 것인지, 아니면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늘 혼란
스러운데, 이 부분에서도 그렇다. 만약 전단부를 삭제하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그의 글을 보고
「淺人의 妄筆」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전단부가 삭제된 상태에서 그의 논의를
접하게 되면,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직접 찾아볼 열의와 그의 논의에 의구를 품은 사람이
아닌 한 논지를 긍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과연 무지일까. 아니면 고의일까. 「淺人의 妄筆」 통상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이것이 考勘에 관한 대화라는 것을 알면 쉽게 풀린다. 정말 흔히 쓰는 표현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어딘가(...)의 25사를 검색해보자.
九一七頁一0行 已封曹參後曹湛爲平陽侯 校補引錢大昭說,謂和帝紀永元三年,
詔以曹相國後容城侯無嗣,求近親紹封,則參後之紹封非平陽,乃容城也.按:校補謂錢說是,
此或竟出 淺人妄改./新校本後漢書 卷二十六 校勘記
二二七一頁 八行 並獻帝子 按:校補謂以融所對聖恩敦睦及同産昆弟之說證之,
實皆獻帝之諸弟,而靈帝子耳.疑此注本作「並靈帝子」,淺人妄改 爲「獻」.
/新校本後漢書 卷七十 校勘記
二七五八頁 八行 桀卒於鳴條 按:校補謂「桀」當作「舜」.注引書專辯鳴條地所在,
不妨及舜事,此淺人妄改耳. /新校本後漢書 卷八十三 校勘記
(후략)
대략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제딴에는 맞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고쳐놓는 것」이 바로
「淺人의 妄筆」이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가 나올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삼국유사에 손을 대놓은 것은 일제였을까.
이것 역시 아래에서 최남선과 관련하여 다루도록 하자.
【반론】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억측을 남발하고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추측과 이를 억지로 증명하기 위해 지나(支那)의 史書 기록까지
급급하게 끌어다가 선생의 심오한 의미가 담긴 일갈(一喝)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다.
마치 이번 장(章)에서는 대단한 발견을 한 <컬럼버스>처럼 [천인의 망필]까지 언급하면서 명성이
자자했던 한 분의 석학(碩學)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뛰어나며
모든 것에 통달한 한학자(漢學者)인양 거들먹거린다.
과연 이 사람의 말대로 그랬을까? 하지만 의문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건 어쩌나???
1) 최남선 선생은 <삼류매식소굴>의 주장처럼 정말로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 뜻하는
의미를 무식한 소치로서 전혀 모르고 잘못 인용하였을까?
- 그런데 가만히 읽다보면 이 사람이 오히려 [천인의 망필]에 대한 대목에서 [천인망개
淺人妄改]라는 다른 기록의 구문(句文)을 발견하였거나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여 찾아본 뒤
호들갑을 떨며 입에 거품을 무는 듯한 인상이 더 짙다.
2) [천인의 망필]이란 말을 직접 인용한 최남선 선생이 또한 총독부에서 역점을 두어
진행하고 있던 <조선사편수>작업의 논의를 위한 중차대한 위원회 석상席上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헌데 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처럼 언급했다는 말인가?
- <삼류매식자>가 예를 든 句文을 살펴보면 분명히 [천인망개淺人妄改]는 <소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판단하여 즉 판단이 흐려 망령되이 어떤 문구나 구절의 해석이나 글자를
바꾸다(改)>를 의미한다.
하지만 최남선 선생이 적시하는 부분은 한 문자(文字)를 그대로 두고 어떤 목적의식에 따라 변개
(變改)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깊이 있는 한문학자적(漢文學者的) 소양으로 [천인淺人의 망필妄筆
-소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이 망령되이 덧보태어 쓰다(筆)]라고 명확히 구분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갑자기 25史까지 들먹이면서 [천인망개]가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필자(筆者)도 소위 [부일망상사학]의 한심한 방법론인 가설을 세우고 - 가설에 근거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 가설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는 익숙한 논리 전개가 여기에서도 튀어나오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의혹은 일소에 붙이고 넘어가겠다.
3) 문맥을 살펴보면 선생이 주장하는 핵심 논제를 가장 알맞게 가리키는 비유로 이런 문구
(文句)를 선택해 사용했음이 여실한데 그가 <삼류매식소굴>보다 학문의 깊이가 그렇게 낮아서
잘못 인용하였을까?
- 선생이 강변하였던 기록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이런 사실들이 아래의 흐름처럼 어색함이
없이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헌데 문장의 전후를 잘 살펴야 한다면서 떠들던 이 사람이
오히려 이런 구절 가운데 몇 군데를 의도적으로 [예시문]에서 삭제해 버려 마치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독자의 이목耳目을 호도시키고 만다.
[대전제]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古記錄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구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全文의 해석상 옛부터 수상
(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그 全文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다.
[문제의 제기]
이 글은 경도대학京都大學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原書의 환인(桓因)
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인(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一見)하여 바로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사유 설명]
고전古典을 인용 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라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輕妄)스럽게
개찬(改竄)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천인의 망필 단정]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석유환인昔有桓因-옛적에
환인이 있었다]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 아무튼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아도 <양주동>과 쌍벽을 이루며 문명(文名)을 떨칠
만큼 박학하고 한학(漢學)은 물론 다방면에 조예가 많다고 우인(友人)들이 모두 인정하던 학자
(學者)를 그렇게 일개 무식쟁이로 매도하면 되는가?
이 사람의 말대로라면 <최남선>선생이야 말로 [삼류매식소굴]의 발끝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어리버리한 사람이 되겠다.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일반인 수준보다 못한 <무지랭이>로 만들어
버리는 궤변치고는 그 정도를 넘은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덧붙임]
[삼류매식소굴]은 위에 든 [예시문]가운데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
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수상(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를 들어 쓸데없는
트집을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구문은 곧바로 나오는 구절인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전문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명백
하게 수식하고 있는 필수 전제 구문으로서 더 이상의 확대해석이 필요치 않다.
더구나 글의 문맥으로 보아 최남선 선생은 분명히 [환국을 환인으로 변개하였던 걸 천인의 망필]이
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이 느껴지니 桓國이 원래 글자라는 걸 인정하고 있음이 뚜렷하다.
누가 읽어보아도 같은 결론이 맞는데 왜 저렇게 엉뚱한 억지 주장을 하는가?
따라서 <문정창> 선생이 든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中 p.464]의 내용은 어느 모로 보나 이에
대한 해석을 비틀지 않는 한 뚜렷한 하자(瑕疵)가 없다.
원래 색안경을 쓰고 보면 그 세상이 맞는 줄 알고 설치다가 제 풀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삼류매식소굴】의 주장
문정창은 최남선이 일제의 협잡을 발각했는데, 그는 정작 정덕본의 '정본'을 보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崔南善의 博識慧眼은 日本人들이 「國」字를 「因」자로 詐改해 놓은 그 挾雜을 發覺해 내었다.
그러나 崔南善 역시 「三國遺事 正德本」의 正本을 보지 못한 關係上(同氏 新訂 三國遺事 五七面),
그가 編한 모든 史書에 揭載한 古朝鮮記에, 그 正本대로「囗안에 王」字를 사용하지 못하고 假想의
「囗안에 土」字를 使用하였다. 그러나 「囗안에 土」字는 康熙字典과 國內 모든 玉篇에 없는
글字이다. <단군조선사기연구 p.76>
이쯤이면 감이 잡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덕본의 오각 「國」을 석남본을 통해「因」의
이체자로 바로잡은 사람이 다름아닌 바로 최남선 본인이었던 것이다.
문정창이 언급한 최남선의 <신정 삼국유사>중 해제를 보도록 하자. 여기엔 이 내용이 아주 상세히
나온다.
(전략)
가) 三國遺事의 今本에는 序跋目次가 다 업고 撰者의 署名조차 卷五의 首에만 載在하니 書中에
字劃의 譌誤와 行葉의 錯亂과 本文與註脚의 混糅를 幷하야 그 板式의 어즈러워젓슴을 알 것이오
그러나 오히려 字樣과 刀法이 古整하고 또 高麗板式에 잘 符合하는 自를 보니 이것은 古刻의
風貌를 傳하는 것으로 麗當時의 刻板이 잇섯슴을 여긔 想察할가 하노라.
그러나 古刻本은 이제 도모지 볼 수 업고 鳳毛가 티겨오 殘存한 者는 다 李朝 中宗 壬申(正德七年,
西紀一五一二年)의 近板本이니 이것을 혹 再刊으로 닐커르나 그 幾回의 重刻임은 徵할 수 업스며
그 刊刻緣起는 重刊者인 李繼福의 跋에 잇스매 여긔는 架疊할 것이 업슬가 하노라.
나) 다만 李氏는 完本을 어더서 全部 改刊함을 적엇스되 今本의 板式이 巧拙과 刓銳로 만히 一致
하지 아니 하고 그 理由는 니른바 列邑에 分刊하여 匠手가 다른 것 만에 말미암지 아니한듯하니
대개 改刻時에 舊板子의 完整한 者는 오히려 仍用한 것도 잇섯고 또 그中에는 依然이 缺殘한 채
塡補되지 아니한 것이 잇스니 니른바 完本이라함도 比較上의 말인가 하노라.
末記를 據하건데 校正으로 崔李兩人의 名을 擧하얏스니 이네가 애도 만히 ?스려니와 니른바
校正때문에 新生瘡도 작지 아니 하얏슴을 設想하리니 이 點도 本文 批評上에 반드시 看過치 못할
것인가 하노라.
李氏重刻의 板子는 언제까지 傳存하얏는지 憲宗 乙巳(西紀一八四五年)改刊, 東京雜記(卷之三書籍)
의 「府藏冊板」下에도 三國史와 한 가지 三國遺事의 名이 들어 잇고 아마 百年을 出치 못 할 듯한
光文會所藏「八道冊板目錄」에도 慶州下에 또한 三國遺事를 出하얏스니 꼭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개 韓末까지도 遺傳되얏다가 他處 許多의 例와 가치 時變前後에 流亡하얏슬가 하노라.
다) 現行하는 本에도 異板이 더러 잇슴은 朝鮮光文會藏本第一號에는 卷第三第二葉第五行의
「墨胡子見之」로 終하얏거늘 安鼎福舊藏本에는 「墨胡子見」으로 終하고 之字는 次行의 首에
入하얏슴 가틈으로 알 것이며 또 光本會第二號本에는 卷第四第四葉이 完整한데 安氏本에는 後面
의上部가 析破하야 그 破隙이 마치 缺字된 것처럼 보임과 安本에는 卷第四第九葉後面第九行注가
或云金時祖라 하얏거늘 光文會第一號第二號本이 다 或金時祖라 하야 云字를 缺함 가틈으로써
보건대 印出의 先後를 依하야 字行의 差違가 잇슴을 알지니라.
十六, 流布
라) 三國遺事는 古에 잇서서는 流布도 자못 넓고 信用도 그리 엷지 아니하야 高麗史輿地勝覽以下
로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 其他가 다 이것을 引用하얏스며 뒤에 儒學者間에 자못 荒誕不經으로써
指彈되나 오히려 稽考의 一要文을 지으니라. 憲宗朝 李奎景撰의 「五洲衍文長箋」卷五十七,
史籍類辨證說中에 「三國遺事五卷, 曰 紀異二卷, 曰興法, 曰義解, 曰神呪, 曰感通幷三卷, 第五卷之
首曰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冲照大禪師一然撰, 其說荒誕」이라 한 것과 最近 安鍾和의
東史節要가 此書를 引用辨析한 것은 予의 아는 바로 此書를 實覩한 記錄의 最後라 할 것이로다.
自後로는 俗間에 流傳한 形迹이 거의 업서 朝鮮光文會當時에 널리 사람을 노하서 차젓스나 겨오
四方僧藏의 中에서 第三卷以下佛敎的記事를 실흔 下卷을 무릇 三本을 어덧슬 뿐이니 대개 僧史로
이것만을 珍襲하얏든 것일지니라.
마)【뒤에 順庵 安氏의 手澤本이란 것이 나와서 愛知,今西氏의 手로 드러 가니 대개 中宗 七年
(正德壬申)의 改刊本으로서 五卷이 具存하야 大正十年에는 京都帝國大學文學部叢書第六으로
玻璃板에 影하야 縮印되고 昭和七年에는 京城의 古典刊行會에서 原形大로 다시 影印되고 일변
昭和三年에는 朝鮮史學會의名으로써 今西氏의 校訂에 말미암는 活字本이 刊行되니라】
日本에는 처음 언제 流入하얏든지 모르거니와 壬辰亂에 取得한 者가 시방 尾張의 德川氏와 東京
의 神田氏에게 各一本이 전하는데 王曆의 首二葉과 其他 數處에 落張과 缺字가 잇는 것을 他書로
써 약간 補入하야 明治三十七年에(東京)文科大學史誌叢書의 一書로 活印하니 京都本이 잇기까지
學者의 依據가된것이로대 缺落以外에도 句讀其他의 紕謬가 만흐며 侯에 改訂을 더하야 日本續藏
經에 너헛스나 脫은 毋論이오 句讀도 오히려 得宜하다 할 수 업나니라.
神田氏本에는 養安院藏書印이 잇스니 養安院이란 것은 德川幕府의 醫員인 曲直瀨正琳의 堂號-라
正琳이 性이 恬靜하고 書籍을 愛하더니 일즉 壬辰의 저 一將이든 浮田秀家妻의 難疾을 다스려주매
秀家가 大喜하야 일즉 亂中에 取歸한 朝鮮書數千卷으로써 그 勞를 酬하니 이 때문에 朝鮮書籍의
富藏으로 國中에 돌린자-니라. 대개 三國遺事도 秀家所贈의 一일지니라. 이러케 三國遺事의
傳本은 잇섯스나 日本에서도 그 流行이 넓지 못하야 佛乘으로도 有力한 此書로대 다른 것가티 翻刻
된 일도 업고 또 여러 書目中에도 거의 보임이 업스며 伊藤東涯의 三韓紀略文籍彙中에 三國史記·
東國通鑑의 次로 三國遺事의 名을 擧하얏스나 帝王韻紀와 한 가지 若干卷이라 하얏슬 뿐이오 아모
注記가 업슴을 보면 일흠만 듯고 實物은 보지 못하얏는가 하노라. (昌平志에 載한 林氏所藏朝鮮著
述目錄 六十二種二百三十二本中에와 桂山義樹의 東韓事略에도 다 三國遺事에는 言及하지 아니하
니라). 東京帝國大學의 刊本에는 句讀의 失當한 以外에도 왕왕 不注意의 誤解를 먹음엇스니 니를
테면 卷五感通篇「金現感虎」條中의 申屠澄을 또한 新羅人으로 認하야 漢州의 下에 今廣州임을
注하고 다시 頭注에 輿地勝覽의 文을 引한 것 가틈이니라.
바) 順庵手澤本의 出現은 三國遺事의 考稽上에 一大 便宜를 提供하얏슴이 事實이로대 또한
訛字와 刓處가 만하서 오히려 全眞한 面目을 어들 수 업스며 그뿐 아니라 後人의 塗改를 더한
것이 處處에 잇는데 그 影印本들에서는 墨色이 混同하야 原刻인지 改劃인지를 辨析하기 어려운
곳이 만흠은 진실로 遺憾이얏도다.
그런데 最近에 이르러 卷第一만의 零本이 嶺南의 某地로서 出現하야 京城, 宋錫夏氏의 收藏한바
-되니 그 板式이 光文會藏本의一에 合하는 것으로서 從來 諸本에 迷晦한 部分을 여긔 就正할 것
이 만흐며 더욱 䵝昧의 嘆이 尤甚한 王曆에 잇서서 宋本의 寄與-큼을 깨다를지니라.(다만 宋本의
王曆에도 第十葉과第十一葉 前半이 缺落하니라).
順庵手澤의 足本에 대하야 光文會本과 宋本과를 가지면 三國遺事 卷一,三,四,五의 對校가 얼만콤
可能하거니와 第二는오히려 別本의 出現에 기다릴밧게 업나니라.
<신정 삼국유사> 삼국유사해제
위의 내용과 어느 정도 중복되겠지만, 삼국유사의 판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삼국유사가 처음 간행된 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고려말,조선초에 여러차례 간행이 되었는데
이를 고판본이라 한다. 위의 ‘삼국유사 해제’에 인용된 송석하본, 즉 「석남본」은 바로 조선초에
간행된 고판본 중 하나이다.
그러다가 판각이 유실되어 중종 년간(1512)에 이계복이 옛 판각을 모아 이 판각에다 다시 전문을
새기거나 또는 새로 새기거나 하여 재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덕본, 또는 임신본으로 불리
는 판본이다.
이 판본은 몇 부의 발행본이 아직 남아있는데, 잘 알려진 완본으로 본문에 나오는「순암수택본」,
즉 안순암의 소장본으로 훗날 「이마니시본(현재 텐리대 소장본으로 당시 경도대학영인본의 원본)」
으로 더 알려진 것과, 서울대 황의돈교수 소장본이었던「황의돈본(바로 문정창이 정덕본의 正本이
라고 우긴 그것이다.)」, 그리고 고려대에 소장된 「만송문고본」 등이 있다.
그런데 위에 최남선이 기술한 바와 같이 정덕본은 <순암수택본>이나 <황의돈본>처럼 가필된 것이
아니더라도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문정창이 정본이라 우긴 황의돈본에도 역시 가필이
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회의 당시에는 가필본인 순암수택본의 해당 구절, ‘昔有桓因’에 대해
이전부터 환인과 환국으로 된 것들이 혼재하였던 까닭에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가필된 판본(정확히는 위의 해제에 쓰여있듯이 원문과 가필된 것을 구분할 수 없게
영인한 영인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때쯤에는 환국이라 쓰여진 판본이 환인
이라 쓰여진 판본보다 많았던 듯 하다. 석남본의 출현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숨을 거둔 단재의
착오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석남본과 광문회본, 순암수택본 등 여러 판본을 교감한 결과 해당 글자가 ‘因’의
이체자임을 확인하였고, 자신의 <신정 삼국유사>부터는 명확히 ‘因’의 이체자를 기재해놓았다.
이러한 것은 대를 거쳐 전해지는 동안 생기는 와전으로, 육당에게 있어 이러한 오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즉 원래는 因이었으나 임신본의 오각으로 인해 이후의 판본에 因과 國이 병존하게 되었던 것인데,
최남선에 이르러 이것이 바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문정창은 이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고(아마
순암수택본이 이마니시본인것도 몰랐던 것 같다.), 저게 무슨 글자인지도 몰랐으므로, 최남선을
팔아「최남선이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개작해놓은 것을 발견했으며, 최남선은 이마니시본을
제외한 삼국유사를 보지못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퍼뜨린 것이다. (이 거짓말을 최태영은
그대로 믿었다.)
최남선은 이미 1940년대 - 문정창이 거짓말을 하기 20여년전 - 에 정덕본보다 훨씬 고본(古本)을
확인하고, 해당 글자를 因의 이체자로 정정해놓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적어도 일제가 이마니시본에 덧칠을 해놓은 것은 사실일까?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마니시본은 순암수택본, 즉 안순암의 소장본이었다.
안순암이 누굴까? 바로 <동사강목>의 저자 순암 안정복이다.
그가 동사강목에서 삼국유사를 인용한 것을 보도록 하자.
동방의 고기(古記) 등에 적힌 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군이 맨 먼저 났으니, 그 사람에게는 신성한 덕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좇아서 군으로 삼았을
것이다.
예전에 신성한 이가 날 적에는 워낙 뭇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었으나, 어찌 이처럼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었으랴!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
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異敎]를 숭상하였으므
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방이 병화(兵火)를 여러 번 겪어서 비장(秘藏)된 국사(國史)가 죄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나,
승려가 적어 둔 것은 암혈(岩穴) 가운데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를 짓는
이들이 적을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끝에 이를 정사(正史)에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
세대가 오래 내려갈수록 그 이야기가 굳어져서, 한 인현(仁賢)의 고장으로 하여금 말이 괴이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으랴!
내가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일체 취하지 않는 것을 그릇된 것을 답습하여 온 고루한
버릇을 씻어 버리고자 하는 까닭이다.
대저 선왕(先王)의 제례(制禮)는 사전(祀典 제사에 관한 법전)이 가장 엄한 것이다. 이제 문화현(文
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승국(勝國 전대의 왕조)부터 본조(本朝)까지 환인
(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을 제사하는데, 단군을 제사하는 것은 워낙 마땅하거니와, 환인ㆍ환웅은
망설이지 말고 빨리 제거하여야 한다.
‘올바른 귀신이 아닌 것을 제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동사강목 제1상, 민족문화추진위원회 譯>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이마니시본을 갖고, 200여년전에 「환인」이라고
하고 있다. 적어도 이미 그때 가필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 글자를 '因'으로 읽는게 맞았다는 거다.
즉,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걸 발견했다는 유일한 증인이 그게 「환인」이
맞다고 하고 있으며,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바로 그 책의 이전 소유자가 그게
「환인」이 맞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위대한 고발자는, 그가 늘상 그랬듯이 무지와 악의로 점철된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론】
도대체 이 사람은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아예 한쪽 머리가 빈 것인가? 아니면 그쪽의 인대가
움직이지 않을 만큼 엉뚱한 착각에 붙잡혀 있는가?
이제부터 <문정창>씨가 언급한 <최남선> 선생의 <신정 삼국유사>중 해제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엔 [삼류매식소굴]이 주장한 내용이 아주 상세히 나온다 하였으니 말이다.
설명의 편의상 이 사람이 자신 있게 예시한 최남선 선생의 <신정 삼국유사>중 해제를 단락별로
구분하였음을 미리 말해둔다.
[단락 가]
1) 삼국유사 금본(三國遺事 今本)에 대한 불신 - 그러나 문자의 형상과 각인刻印한 기법과
판본板本의 형태로 볼진대 분명히 원본原本은 존재하였음을 확신
2) 중종中宗 때 근래 판본板本만 잔존 - 이계복(李繼福)의 발문(跋文)으로서 數回의 중각
(重刻)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단락 나]
1) 古판본(석남본)과 今本(정덕본*임신본)은 일치하지 않음 - 복각본(復刻本)들이 여러
지방에서 만들어져 장인(匠人)들이 다르며 구판(舊版)이라는 것도 많이 결락缺落된 데다가
교정자校訂字의 새로운 훼손도 있어 이 부분에 대한 비평은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여기에서 최남선의 견해가 나타나는데 그가 본 <정덕본>이 原本과 다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末記를 據하건데 校正으로 崔李兩人의 名을 擧하얏스니 이네가 애도 만히 ?스려니와
니른바 校正때문에 新生瘡도 작지 아니 하얏슴을 設想하리니...>라는 말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2) 이 정덕본은 헌종시 개간*광문회 소장(光文會所藏)「8도책판목록八道冊板目錄」에도 보여
한말(韓末)까지는 유전(遺傳)되었음을 추정
[단락 다]
현존 안정복의 <순암본>은 이판(異板) - 광문회 소장본과 동일 추정하나 뒤에 중간(重刊)하여
자행(字行)의 차이가 있음
[단락 라]
三國遺事의 실전(失傳) 이유 설명 - 유학자들이 황탄(荒誕-거칠고 허망하다)하다는 인식
때문에 사라져 <조선광문회>가 겨우 제3권 이하 불교적 기사(第三卷以下 佛敎的 記事)만을 실은
下卷인 三本을 찾았을 뿐이다.
[단락 마]
1) 금서 룡의 소장본은 순암본(順庵 安氏의 수택본手澤本)으로 두 번에 걸쳐 축인縮印*영인影印
되다가 마침내 금서룡에 의해 교정(校訂)되어 간행되었다.
※ 순암본이 금서룡의 손을 거쳐 교정되었음을 정확히 언급하는 대목이 심상치 않다.
2) 일본 유입의 경로를 설명 - 임진란壬辰亂에 취득取得한 덕천씨德川氏와 신전씨神田氏 본本이
있지만 비유(紕謬-잘못되고 그르치다)와 결락이 많다.
3)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간본刊本에도 구절이 끊어져 해독이 어려운 부분과 잘못된
주석이 많다.
[단락 바]
1)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은 많은 편의便宜를 주었으나 와자(訛字-그릇되다)와 완처(刓處
-깎거나 닳아 없어진 곳)가 많아 오히려 진실眞實한 面目을 얻을 수 없는데다가 후인(後人)의
도개(塗改-덧칠하여 바꾸다)가 곳곳에 있어 영인본(影印本)들도 묵색(墨色)이 어지러워 원각
(原刻)인지 개획(改劃)인지를 판석(辨析-판가름하여 나누다)하기 어려운 곳이 많아 진실로
유감遺憾이다.
※ 우리는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분명히 [금서 룡]의 소장본이었던 <순암본>의 조작과
변개變改 의혹을 강하게 언급한다.
2) 最近 영남嶺南에서 [송석하본宋錫夏本]이 출현하였다 - 판식板式이 광문회장본光文會藏本과
같고 종래從來 저본諸本에 미회(迷晦-혼란스럽고 어둡다)한 部分을 고칠 것이 많다.
더욱이 왕력(王曆) 해독에 기여寄與가 크다. 순암본順庵本과 광문회본光文會本과 송본宋本으로
서 三國遺事 卷一,三,四,五의 對校가 어느정도는 可能하다.
원문을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고판본-석남본 2) 정덕본-이계복본과
이본異本인 순암본 3) 이본異本-송석하본 그런데 분명하게 [금서 룡] 소장(所藏)의
<정덕본>에 많은 오류와 착오가 있음을 최남선 선생은 누차에 걸쳐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선생이 해제에서 적시한 부분이 바로 [후인(後人)의 도개(塗改-덧칠하여 바꾸다)
가 곳곳에 있어 영인影印本)들도 묵색墨色이 어지러워 원각原刻인지 개획改劃인지를 변석(辨析
-분명히 하여 나누다)하기 어려운 곳이 많아 진실로 유감遺憾이다]라는 구절로서 유의해야 한다.
[환국-환인]의 변개(變改) 부분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의혹의 한 가운데에 금서룡이 소장한 [순암본]이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그런데 갑자기 왜 여기에다가 비밀리에 소장했다가 해방 후 기증한 [황의돈본-정덕본으로
추정]이 불쑥 끼어들어 초점을 흐리고 [최남선이 기술한 바와 같이 정덕본은 <순암수택본>이나
<황의돈본>처럼 가필된 것이 아니더라도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문정창이 정본이라
우긴 황의돈본에도 역시 가필이 있다.)]라는 허언(虛言)으로서 핵심을 어지럽히는가?(잘 알다
시피 황의돈본에는 명확하게 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엔 <황의돈본>은 출현하지도 않았으며 물론 <최남선>선생도 알지 못했다.
또한 최남선 선생의 <조선사편수회> 석상(席上)의 발언에서도 알다시피 [桓國을 桓因으로 망개
妄改하다.]는 의미가 확실해진 이상 [석남본과 광문회본, 순암수택본 등 여러 판본을 교감한 결과
해당 글자가 ‘因’의 이체자임을 확인하였고, 자신의 <신정 삼국유사>부터는 명확히 ‘因’의 이체자를
기재해놓았다]는 황당한 왜곡은 고인(故人)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망함에 다름이 아니다.
이제 이쯤이면 감이 잡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덕본의 오각(誤刻)을 [천인淺人의 망필
妄筆]로 보아 「國안에 王」임을 깨닫고「國」의 이체자로 단정하여 어느 자전(字典)에도 나타나지
않은 [國안에 土]로 만들어 바로잡은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최남선 본인이었다.
그러니 [즉 원래는 因이었으나 임신본의 오각으로 인해 이후의 판본에 因과 國이 병존하게 되었던
것인데, 최남선에 이르러 이것이 바로잡힌 것이다]는 망상은 一考의 가치도 없다.
※ [삼류매식소굴]은 여기에서도 <임신본의 오각誤刻 云云>하면서 筆者가 요약한 그 어느 부분
에도 명시한바 없는(최남선 선생은 다만 “序跋目次가 다 업고 撰者의 署名조차 卷五의 首에만
載在하니 書中에 字劃의 譌誤와 行葉의 錯亂과 本文與註脚의 混糅를 幷하야 그 板式의 어즈러워
젓슴을 알 것이오”라는 전체적인 조망眺望을 피력했을 뿐이다) 國과 因의 문제만을 핵심 의제로
거론한 양 논지(論旨)를 좁히고 나와 마치 그것이 사실이고 전부인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는 듯하다.
이어 [삼류매식소굴]은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이마니시본을 갖고,
200여년 전에 「환인」이라고 하고 있다. 적어도 이미 그때 가필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 글자를 '因'으로 읽는
게 맞았다는 거다. 즉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걸 발견했다는 유일한 증인이 그게「환인」
이 맞다고 하고 있으며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바로 그 책의 이전 소유자가 그게 「환인」
이 맞다】고 하고 있다. 논제(論題)의 핵심인 다음 구절을 가지고 그러는 모양인데 전문(全文)은 이렇다.
▶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異敎]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부분에서 근본적으로 주장의 근거가 빗나갔다. 인용한 기록의 문맥
상 누가 보아도 그 구절에 환국(桓國)이라는 말이 언급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안정복>이 거론한 주(主) 논제는 삼성사(三聖祠)라는 진정한 의미 해석과 제의(祭儀)를 받는 인물들에 대한
의견에 덧붙여 檀君이라는 개국조(開國祖)의 존재여부에 대한 언급이며 그러므로 그 이전의 세계(世系)를
설명하는 것(그래서 桓因-桓雄이라는 명칭이 거론되고 있다)이지 처음부터 桓國이나 檀國의 존재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고려조의 경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
年代>에서 “초유개국계풍운석제지손명단군 初誰開國啓風雲釋帝之孫名檀君”이라 하고 신라*고구려*
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을 모두 檀君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로 보아 13C 무렵의 고려조(高麗朝)까지는 고구려를 이어 계승한 天帝(上帝) 桓因之國-天孫 桓雄神市國
-神人 檀君之國이라는 배경 아래에서 檀君을 國祖로 인식하고 있음이 추정되는 대목이다.
- 고구려에서 숭배한 가한신(可汗神)에 대한 새로운 사고(思考) 전환(한영우韓永愚 1983)
- 동천왕의 평양천도 條의 <선인왕검지택仙人王儉之宅>
- 고려 목종(穆宗)의 황해도 九月山 삼성사(三聖祠-환인*환웅*단군)*仁宗 때 평양 임원궁에서 지낸
팔성제(八聖祭) <서영대徐永大 1992>
- 공민왕 무렵 요동정벌 명분으로 삼은 단군조선의 후예로 요동 印이 원래 조선 땅이며 고려의
영토라는 영유권 주장
2) 조선 초기까지 桓國-檀君朝를 인정하는 바탕으로 檀君에 대해 <동방시수명지주 東方始受命之主*
단군실오동방시조 檀君實吾東方始祖>로 인식하여 평양에 단군사당을 건립하면서 개국시조인 실존
인물로서 공식적인 제의(祭儀)를 행하였다.
3) 그러나 유교(儒敎)가 國敎로 부상하면서 成宗 때까지 유교적인 사유(思惟)에 反하는 부분을 <불어괴력
난신不語怪力亂神>이라 하여 부정하면서 제의祭儀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일정한 유교적 존화사상(尊華
思想)의 범주 안에서만 서술토록 묶어 놓았다(韓永愚).
4) 하지만 16C 이후 민족적 자각에 눈을 뜬 일부 학자들에 의해 단군을 중심으로 한 上古史 연구가 발아
하였고 그 결실이 17C 중엽의 허목(許穆)과 18C 홍만종(洪萬宗)과 이익(李瀷)의 단군조선에 대한 재평가와
한민족의 본류로서 단군 이전 시대(桓因氏-神市氏 시대)에 대한 인식영역의 확장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이 사람이 예시로 든 여러 유학자(儒學者)들의 논쟁에 대한 핵심쟁점은 筆者가 언급한
고려-조선에 이르는 역사적인 인식의 흐름에서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게보(系譜)에 대한 논쟁을 주요 핵심으로 삼고 있는 까닭에 환국-신시국-단국
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고 다만 인물에 대한 언급들 가운데 함축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위 기록들을 자세히 훑어보면 환인-환웅-단군을 신화적 존재로 보느냐? 개국조(開國祖)로서의
역사성을 부여하느냐? 가 처음부터 논지(論旨)의 핵심이므로 人物의 성격에 대한 언급이 문맥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桓國이란 영역적 의미를 가진 단어가 기록 속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桓國은 없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짚은 판단이다.
다음으로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이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 논제나 이후 나타나는 문맥의 흐름을 볼진대
환인-환웅-단군의 세계(世系) 논쟁에서 백번을 양보하여 단군은 인정하더라도 환인-환웅은 그렇지 않다는
단호한 입장으로 보아 주장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佛家의 승담僧談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삼국유사>의 桓國부분은 고기(古記)를 그대로 옮겼다고는 하나 桓因은 불가서(佛家書-범어梵語인 석가제
환인타라釋迦提桓因陀羅 혹은 석가제파인타라釋迦提婆因陀羅)에 나오는 이름(약자略字인 석제환인釋帝
桓因)이고 주해(註解)로 쓴 제석(帝釋)도 역시 불가서(佛家書)에 나타나므로 망개(妄改)의 의혹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이다.
그는 이를 보았으며 [고기] 부분의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주목하여 그 무렵 널리 민간전승과 도가사거류
(道家史書類)에서 나타나는 桓因과의 일치를 간과하지 않고 두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불가적(佛家的)인
괴담(怪談)으로 치부하는 [환인제석]으로 주장의 논거를 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백번을 고쳐 생각해보아도 이런 논쟁의 가운데에 엉뚱한 桓國이 끼어들 소지는 없다.
참고로 조선조의 관찬사서(官撰正史)나 사찬 유가사서(私撰 儒家史書)들의 서술체계를 자세히 보면 한결
같이 [단군조선]-[기자조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단군조선기의 내용도 앞서 말했듯이 <존명사대
尊明事大>의 편찬 원칙에 충실하게 그 무렵에도 동시적으로 출현한 우리 민족사서의 내용을 따르되 환국
(桓國)부분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환인-환웅-단군의 행적을 백안시(白眼視)할 수는 없어 수록하기는
하면서 지극히 소략(疏略)한 설명을 바탕으로 신화적*불교적으로 윤색한 의미만을 취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또한 각 史書들의 기술형식이나 내용이 조선왕조의 저술원칙인 일정한 틀과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史書類(제왕운기*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上帝환인-神人환웅]의 입장을 기술하면
서 우리 도가사서(道家史書)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한 天帝 환인-天王 환웅-神人 왕검의 흐름을 무시하지
않는 자세도 함께 보인다.
<이승휴>는 그와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儒家的 사고에 젖어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후반기에는 태도를 달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제왕운기]의 단군의 일을 읊은 대목의 본문과 주석에서 古記라 하지 않고 근호국사방채각본기여
부수이전취재 謹○國史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취載라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본기(本紀)를 인용하여
<상제환인-本紀曰上帝桓因有庶子曰 雄云...본기왈상제환인유서자왈 웅운>으로 표기함으로서 儒家學者들
이 佛家的 승담(僧談)으로 유도하여 폄훼하는 부분과는 다른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사람의 주장을 볼진대 【위대한 고발자는, 그가 늘상 그랬듯이 무지와 악의로 점철된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폄훼도 모자라 아예 모욕을 주고 있는데 마치 일제관학자(日帝官學者)
들의 단군이전시대 부정(否定)이라는 논리를 문헌고증이라는 미명아래 조선조 유학자들이 [사대존화주의]
를 기반으로 기록한 단군에 대한 문헌만을 골라 그것도 부분적인 비판적 인식만을 확대하여 그걸 단군이전
시대 인멸의 주요 방증자료로 삼았던 일면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참으로 우리 고대사를 왜곡시킬 때 흔히 활용하였던 잘못된 문헌고증을 다시 보는 것 같이 내 입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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