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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왜 쓰는가?
글을 쓴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브랑쇼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죽음의 확인이며,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연기이다. 그러나, 스탕달에게 있어서는 자기 노출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행동의 전제조전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말을 바꾸면, 개성적인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개성적인 작업이라는 명제는 19세기 부르즈와 문화의 소산인데, 그 문화가 형성시킨 소설이라는 대장르를 선택한 자들에게는 거의 전부에게 은밀하게 침윤되어 있다. 그것은 개인이 주석자로서만 저술에 관계하게 되어 있던 중세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이건 부정적인 외미에서이건, 부르즈와 문화의 유산을 어느 정도는 받아 보존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글을 쓴다는 행위는 매우 개성적인 행위이다. 이 개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고독한 행위라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가 더욱 두드러질지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 실린 여러 명제들을 적당히 변주시켜 부르즈와 문화는 세 가지 규범을 만들어낸다. '객관성', '섬세한 취미', '명료성' 등이 그것이다. 이 세 규범은 부르즈와 문화의 형성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밀접하게 대응한다. 자신의 삶을 누가 보더라도 부끄럼 없이 내보일 수 있는 객관적 삶, 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섬세한 칠향, 그리고 그 삶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신의 심판의 명료성, 다시 말하자면, 낭비와 사치를 자신이 스스로 금하여 남에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해줌으로써 돈을 버느냐, 벌지 못하는가 하는 명백한 신의 심판을 확인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그 대응물로서 부르즈와 문화의 세 규범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규범은 부르즈와들이 내 건 자유, 평등, 박애 등의 이상이 점차 퇴색해가면서 마찬가지로 퇴색해간다. 명백하고 객관적이 아닌 것은 부르즈와 문화가 아니라는 극단적인 표현은 점차로 그 강도를 잃게 된다. 그래서 규범 대신에 점차 개성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명료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가 행해진다. 규범이 있다면, 양식을 통해 사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령, 영국 소설의 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 가정심리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약혼이나 청혼에 대한 풍속이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는 세련되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만이 문제된다. 그 때의 청혼은 풍속이라는 그 시대의 양식을 통해 사고하는 한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 규범이 gms들린다면? 어떻게 청혼하는 것이 풍속인가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면? 아니, 있는 풍속이 고정화되어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 규범이나 풍속에 대한 고구考究가 행해질 수밖에 없다. 규범, 풍속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하우저가 밝힌 내용과 형식의 악순환을 그대로 나타낸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분위기에 알맞은 하나의 풍속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그 시대의 한 상징적 기호이며 성감대이다. 그러나, 그 기호를 산출한 시대가 그것을 감당할 만한 내적 충일성을 잃었거나 박탈당했을 때 그 기호의 성감은 약해지고, 결국은 아무런 성감도 느낄 수 없는 추한 사물로 남게 된다. 그때 그 사물에 대한 고구를 행하는 시대가 다시 생겨나는데, 그 시대는 그것을 통해 자기 시대의 상징적 기호를 새로이 발견한다. 19세기의 세 규범의 충실한 반영이었던 소설이라는 양식도 그 규범의 퇴색과 함께 점차로 회의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1827년대에 벌써 회화가 끝이 났듯이, 1900년대의 시에 뒤이어 소설이 끝이 나려 하고 있다. 규범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아 그 형식을 복습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쟈코메티 식으로 말한다면 현대의 문학은 문학사에 대한 비평과 변주곡으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상징적 기호가 그 힘을 잃고 형식만을 남기게 될 때, 그 형식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은 그 형식을 차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글을 왜 쓰는가. 하는 문제는 그래서 생겨난다. 그것은 상징적 기호, 문화의 성감대를 못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개성을, 말을 바꾸면, 문화의 무질서를 드러내게 한다. 믿을 만한 규범이 없다면 자신의 판단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준수해야 할 풍속이 없다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행위는 현대에 와서는 개성적인 작업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 개성적인 작업은 자기 앞뒤로 규범의 부재를 느껴야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고독한 작업이다. 이때의 고독이란 릴케의 '혼자 있음'이 아니다. 릴케는 그의 편지의 한 구절에서 "여러 주일 동안, 두 번의 짧은 중단을 제외하고는, 나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네, 나의 고독은 완전히 형성되었고, 나는 과일 속의 씨처럼 나의 작업속에 박혀 있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의 고독이란 '혼자 있음'에 지나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內省을 의미한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행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런 혼자 있는 고독 속에서 발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고독, 자신의 발판, 즉 정신적 지주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고독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앞에 있는 규범은 이미 그 충일감을 상실하여, 상징적 기호 역할을 맡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이 뒤에 올 상징적 기호를 '주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확인할 수 없는 알리바이이다.
그렇다면 글은 왜 쓰는가?
무엇에 의지하여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나의 개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기록할 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어려운 문제는 한국의 현대문화 속에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은 전통의 단절이라고 불리는 문화적 현상 때문에 기인한다. 한국의 문화는 近朝 초기와 개화기에 전통의 단절을 감수한다. 처음의 것은 사대부가 갑자기 발흥하면서 유교적 이념이 불교적 규범을 대치하기 시작한 근조 초기에 일어났는데 결국은長歌와 時調를 통해 극복된다. 두 번째 것은 유교적 규범이 서구적 합리주의, 혹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관에 의해 대치되려 할 때 형성된다. 유교적 이념을 내부에서 극복하려는 대담한 노력을 보여 준 판소리가 급작스럽게 강압적으로 신소설에 의해 대치된 후에 전통의 계승은 새로운 이념에 의해 과감하게 지양된다. 李光洙의 신세대론은 그 대표적인 문학론이다. 이 두번째 일어난 전통의 단절은 맹목적인 민족사관에 의거한 사람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회피되는 경향이 있는데, 정확을 기해야 할 것은 기하는 것이 작가의 정당한 태도이다. 새로운 이념을 강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갑오경장'으로 상징될 수 있는데, 하여튼 그 강압을 통해 경험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으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기괴한 사태가 일어난다. 이미 있던 유교적 규범, 그것이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형성된 도참사상, 혹은 巫俗은 이미 현대의 한국사회에는 맞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고 사실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로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항을 들 수 있다. 후진 사회가 갖는 새 것 컴플렉스의 확대가 동시에 행해진다. 과거의 것은 좋지 않고 새 것은 좋다는 생각이 고정관념화한다. 그래서 새로운 이념이 한국사회의 현실에 상관없이 무차별 수입되고 전파되고 소멸된다. 외국에서는, 그 사회의 한 병폐로서 혹은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드러나는 풍속이, 한국사회에는 그것만이 옳다는 식으로 무조건 수입된다. 새로운 이념을 한국사회의 자연적인 형성 과정에서 유출하여 논리화시켜 한국사회의 상징적 기호로 만드는 어려운 노력은 모두 포기한 채, 선험적인 이념만이 주어진다. 그것은 한국사회를 샤머니즘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신에, 외국에서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로 얻어진 성과가 한국에 급속히 이식되어, 믿느냐 안 믿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이 경우, 따르든 안 따르든, 심리적 취향은 동등하다. 따르는 경우는 새로운 것에 빨리 접촉했다는 우월감이, 안 따르는 경우는 한국의 전통적인 것(그것이 무엇일까?)을 붙잡고 있다는 자부심이 가슴 깊숙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사고의 미망화는 더욱 심해진다. 외국의 경우, 규범의 상실로 인해 생긴 "글은 왜 쓰는가?"하는 고독한 질문의 제기는, 한국의 경우에는 "이렇게 써야 된다"는 당위성, 그것도 완강한 당위성으로 바뀌고 만다. 한국의 경우에, 글을 왜 쓰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글은 왜 쓰는가?
남북이 분단되고, 빈부의 격차가 지나치게 심하고, 도시와 농촌의 그것 역시 엄청난 한국 땅에서, 그렇다면 글은 왜 쓰는가? 새 것 컴플렉스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써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생겨나는 지적 우월감 때문에?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얻어지는 심적 자부심 때문에?
도대체 글은 왜 쓰는가?
외국의 경우에는, 고독한 질문제기는 새로운 상징 기호의 발견에 밑거름을 이를 수 있다. 가령 50년대에 행해진 소설에 대한 질문-신소설(nouveau roman)이 그렇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새 것 컴플렉스를 긍정적으로든지 부정적으로든지 남에게 강요시키는 것은 시체에 향수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냄새는 여전히, 아니 더욱 더 심하게 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되풀이 묻는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답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할 작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였겠지만, 열 일곱, 여덟 살 때쯤 해서는 소위 '회의'라는 것이 의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그 회의가 오는 과정은 지극히 순간적이어서, 대부분 그 시작의 흔적을 찾지 못할 정도이다. 나의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김붕구 교수의(佛文學散考)와 말로의 소설 몇 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책들 속에서, 나는 나의 연약한 정신이 너무 쉽게 마취되어 버린 몇 개의 섬뜩하도록 쇼킹한 어휘들, 가령 절망, 부조리, 불안, 기분, 구원 등등에 부딪치게 되었고, 나는 그 어휘들이 갖고 있는 정확한 내포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의 의식 속에 그들을 병치시키고 결합시켜, 그 결합된 상태를 즐기게 되었다. 가령 '절망'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나는 그 말에 거의 맹목적인 감동을 느꼈던 것인데,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나는 그때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막연히 어떤 위대한 것이 몰락해 가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거의 아름다음마저 느끼곤 했었다. 그것이 그 책들을 쓴 사람들의 마술적인 능력 때문이었는지, 나의 정신상태가 최면을 당할 준비 태세를 갖고 있었는지, 그 어느 것인지 지금 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여하튼 20세기 초기에 얻어진 유럽대륙의 불온한 공기를 나는 내 자신의 내부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불안이라든가 절망같은 것은 도처에 있었고 특히 내 마음 속에 있었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있었다. 나의 오랜 주저와 혼돈은 바로 이 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럽 문학, 특히 내가 도취되어 있었던 프랑스 문학을 나는 나의 정신의 선험적 상태로 받아들였고, 그 상태 속에서 모든 것은 피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에 쓰여진 이 센티멘털한 고백한 그러나 나의 진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나 자신의 경우에만 한정한다면, 나의 컴플렉스는 프랑스 문학과 한국문학을 그저 문학으로만 파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태도는 차원을 혼동시킨다. 추상抽象의 사다리의 계단이 다른 개념을 같은 계단에 속한 것으로 착각시킨다는 말이다. 프랑스 문학도 문학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문학이 곧 문학은 아니다. 그것은 논리학의 첫 페이지에서 배우는 삼단논법의 오류와 비슷하다. 고무신도 신이고, 구두도 신이라고 해서, 고무신이 곧 구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 오류는 상당히 오랫 동안 나를 사로잡고, 나를 떠나지 않아, '한국 문학도 프랑스 문학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 만든다. 한국 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 오류의 정정을 위한 모색이었다고 말해도 괜찮다.
이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성찰한 끝에 나는 문화의 고고학이라는 나 나름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외국 문학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면,(왜냐하면, 프랑스문학과 한국문학이 같은 문학이라면, 현대문학의 맥락이 정연한 프랑스문학을 한국문학은 따라 갈 도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노력이 급선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은 근대화의 초기에 왜 판소리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시조 부흥론은 왜 자주 거론되는가?
한국어로서 시와 산문을 과연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아니 유럽식의 시, 유럽식의 소설이 한국문학에서는 가능할까?
새 것 컴플렉스에서 기인하는 외국作詩法의 암송과 적용은 과연 바람직한가?
이 모든 질문은 외국의 문학 사조를 선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는 태도를 나는 문학의 고고학이라고 부른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는 한, 한국문학은 계속 혼돈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개성적인 행위는 글을 쓰는 자의 자리에 대한 탐구가 없는 한, 도로徒勞에 그쳐 버릴 우려가 많다. 자기 문화의 특수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자기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문화의 고고학은, 그러므로 자기가 서 있는 상황을 투철히 인식하고, 그것을 고려하여 극복해 나가려는 태도를 말함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현실 파악이 아니라, 글은 왜 쓰는가 하는 근본적인 명제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각성의 필요성이다. 글은 왜 쓰는가? 한국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고고학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글은 왜 쓰는가 하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을 회피하게 만들고, 우스꽝스럽게 희화화시켜 버리는 악질적인 현상이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대립이라는 현상이다. 1969년에 행해진 年評의 거의 대부분이 문학을 순수파와 참여파로 대별하고 있을 정도로, 이 구별은 최근의 한국문학의 두드러진 현상이다. 심지어 문학연파軟派와 문학경파硬派의 대립이라는 해괴망칙한 용어를 만들어 낸 용감한 비평가도 있다. 이 두 파는 문학의 이중성, 정서적 측면과 행동적 측면이라는 두 성격 중의 하나를 강조하는 데 급급하여, 그것들이 상호보족적相互補足的인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순수문학의 주장은 이렇다. 문학은 써 먹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문학은 개인의 정서적 반응을 언어로 표상화시키는 능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주장은 원칙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 주장이 그 가치를 보편적 차원에서 획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서적 반응은 그 개인이 속한 사회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혹은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현장이 그 개인의 문학이라는 것을 전제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전제가 없다면, 순수 문학은 치졸한 정치성 배제의 문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회 속에 있는 개인보다 자아의 환상적 규범 속에 칩거함으로써 사회와 자아를 격리시키는 개인이 추앙되는 문학이란, 샤머니즘적인 세계,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비논리적으로 순간적으로 해소시키는 세계의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세계에는 불화마저도 화해의 형태로서 존재한다. 영원한 불화의 세계인 정치란 그 문학에는 끼여들 자리를 얻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 개인이 로도스 섬을 벗어날 도리란 전혀 없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속해 있는 것이며, 그 사회의 긴장 관계를 통해 자기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전제 조건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에, 정서적 반응의 언어적 표현이란 순수문학의 구호는, 샤머니즘, 토속주의, 정숙주의로 귀착하고 만다.
반면에 참여문학의 주장은 이렇다. 문학은 한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고려하고 성찰하여, 그것을 시정하는 노력을 말함이다. 문학은 결국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는 수단이다. 이 주장 역시 원칙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 주장도 마치 순수문학의 주장이 그러했듯이 하나의 전제 조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란 개인의 관찰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모순, 현실의 모순이란 그 개인의 모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라는 점이다. 한 사회의 모순이 그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개인의 모순으로 압축되지 않는다면, 사회 자체의 모순이 없거나, 개인의 모순이 없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정은 다 불가능하다. 모순은 사회나 개인의 실존주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인 표현을 빌면, 사회의 모순은 그 사회를 대표하는 최소 단위의 사회인 가족, 특히 부모를 통해 한 개인에게 전달된다. 그 모순은 물론 개인의 의식의 편향에 따라 (성격이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리학자 들에게 맡기기로하자 ) 여러 형태의 변주를 일으키며, 개인의 모순으로 정착된다. 한 개인은 사회의 모순의 한 축도이다. 문학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항상 개인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쥘리앙 소렐을 통해서 밖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 문학의 한 측면인 것이다. 이 전제 조건을 무시할 때, 문학은 프로파간다로 떨어지고 만다. 문학을 사회 모순의 축소판으로 파악하려면, 문학= 부르즈와 문학의 개념이 바뀌어지거나 작가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란 자기의 개성적인 정서적 반응에 편집광적인 집착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문학의 주장도,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음은 그 어느 문학도 본래의 이중성을 상호보족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못한 덕분이다.
그러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구별이 이런 논리적 결함 때문에 한국작가들에게 '왜 글을 쓰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시킨 것은 아니다. 그 구별을 통해 알아내야 할 중요한 키이 포인트는 한국작가의 타락(올바르게 질문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작가는 하이데거가 쓰는 의미로 완전히 타락해 있다 )이 어느 한 파에 속하면 출세는 보장된다는 생각 때문에 사고의 상투화를 스스로 권장하고 있는 데서 얻어지는 점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고정화란 문학의 기능을 이분화시켜 그 하나하나를 절대화시킴으로써 얻어진다. 이 현상은 소설보다는 시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순수시파에 속하는 시인들은 내면의 탐구라는 미명 밑에 내란, 내부, 의식, 달빛‥‥‥ 등의 몇 십 개의 어휘를 조립하여 환상적인 세계를 꾸며 내는 데 주력한다.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의 세계를 고정화시킴으로써 치졸한 서정시로 떨어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시파는 개인의 내부를, 말라르메의 표현을 빌면 '권태의 응고'로 파악하여, 내부의 율동감, 외부와의 접촉에서 생기는 긴장감을 고정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순수시파의 세계에서는, 위대한 예술가라면 반드시 벗어나려고 애를 쓸, 내부의 경직화 현상이 고조된다.
반면에 참여시파에 속하는 시인들은 현실에 대한 탐구라는 미명 밑에, '독한' 언어를 되는 대로 나열한다. 자유, 현실, 저항‥‥‥등의 개념들이 참여시파의 목을 졸라맨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그것이 상상력의 자유로운 연상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차용되지 않으면 문학의 소멸에 기여하기 쉽다. 문학은 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글은 최소 단위로 이미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적인 문제 외에도 참여시파의 세계에서는, 저항의 제스처가 고정화된다는 문제점을 순수시파의 세계에서도 그러했듯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참여시파의 저항은 순수시파의 내면의 탐구가 그러했듯이, 내부와의 끊임없는 충돌,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제스처로서 패턴화된 저항은 패턴화된 언어를, 상투적인 독한(!)언어를 부른다. 결국 제스처만 떠오르고 시인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두 파의 구별은 소설에서도 미묘하게 확산되어 있다. 순수문학에서는, 인정담, 신변잡담, 무속의 세계를 주된 소재로 차용한다. 참여 문학파에서는 부패한 현실과 그것을 극복한 위대한 순간으로서의 4 ·19가 강조된다. 그 두 소재의 삼투현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들이 얻는 이점은 무엇일까? 派만 선택하면, 소재도 표현 방식도, 말하자면 작가의 세계도 밖에서 주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왜 글은 쓰는가? 라는 어려운 질문에 부딪침이 얼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순수문학은 참여문학에 대립함으로써, 자기 문학의 세계를 한정시킨다.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 있으며, 작가들은 그 어느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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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작가란 순수문학파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가? 아니면 참여문학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가? 글은 왜 쓰는가?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문학의 고고학이 더욱 귀중해 보이는 것은 이런 문제를 앞에 놓아두었을 때다. 보들레르를 빌어 말한다면, '위선자 작가들이여 !
'그대들은 왜 글을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