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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부처님 `손가락 뼈모양 사리` 한국에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60 14.07.28 01: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처님 '손가락 뼈모양 사리' 한국에   

 

 

11일 한국에 도착한 부처의 손가락뼈 모양 사리, ‘불지사리(佛指舍利)’.

 중국 시안 부근 법문사에 소장된 이 불지사리는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다음달 3일까지 전시된다

 

 

중국 시안(西安) 부근 법문사에 소장된 ‘불지사리(佛指舍利)’가 11일 한국에 왔다.

‘불지사리’는 부처님 열반 후 다비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길이 4㎝ 가량의 손가락뼈 모양 사리.

 

기원전 2세기경 중국으로 옮겨졌으며 당나라 때 법문사의 탑 밑에 봉안됐다가 1987년 홍수로 인해 탑이 무너지면서 발견됐다.

 

11일 새벽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불지사리’는 이날 오전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한국 이운(移運) 법회’ 후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으로 옮겨져 일반 공개에 들어갔다.

‘불지사리’와 법문사 탑 지하에서 함께 발굴된 30여점의 유물은 12월 3일까지 서울에서, 12월 8~20일에는 부산 벡스코(BEXCO) 제1전시장에서 유료(1만원)로 전시된다.

 

 

 

1981년 8월 24일. 중국 시안(西安)의 법문사(法門寺) 주변에는 열흘 이상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사찰 위로 천둥번개가 치더니 13층 팔각 진신보탑(眞身寶塔)이 두 동강 났다. 400여 년간 서 있던 탑이 마치 예리한 칼에 베인 듯 꼭대기부터 반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86년 가을 중국 당국은 탑을 철거했고, 이듬해 봄 유물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어느 날 발굴팀은 바닥에서 조그만 굴을 발견했다. 그걸 파고 내려가니 돌문이 나타났다.

지하궁 입구였다.

그 속에선 전설의 불지(佛指)사리가 보물 3000여 점과 함께 나왔다. 불지사리란 석가모니 다비(기원전 485년)에서 나온 손가락뼈다. 이레 동안 화장(火葬)을 했는데도 재가 되지 않은 길이 4㎝의 진신(眞身.부처의 몸)사리다. 지하궁의 진신지문비(志文碑)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고, 유네스코가 세계 9대 기적으로 지정한 불지사리의 유래를 잘 설명하고 있다.

석가세존이 남긴 사리는 8만4000여 개다. 그것들은 기원전 240년 인도 아소카 왕에 의해 나라 안팎으로 흩어진다. 포교를 위해 쓰인 것이다. 그때 중국으로 간 것이 불지사리다.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이를 궁전에 모셔 놓고 친견했지만 후한(後漢) 때 법문사로 옮겼다. 부처의 영골(靈骨)을 황제 손에 맡기는 건 위험하다고 본 고승 안세고가 그렇게 한 것이다. 당나라 의종은 아예 지하궁을 밀봉, 접근을 막았다. 이후 불지사리는 점차 중국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불지사리가 발견된 날은 음력으로 석가탄신일이다. 그래서 발굴 당시 "부처가 현신(現身)한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걸 한때 물개의 뼈라고 깎아내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 바람에 시뻘겋게 달궈진 쇠그릇 속에서 테스트를 받기도 했지만 영물은 색깔조차 변하지 않았다.

 

 중국엔 불지사리를 보면 한 가지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있다. 불지사리 전시회가 열렸던 태국(94년)에서 200만 명, 대만(2003년)에서 400만 명, 홍콩(2004년)에서 150만 명이 몰린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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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유마갈문삼족은염대

 

 

꽃봉오리 단추 문양문양의 은 숟가락과 세 다리 물받이 은 소금대

 

 

 

45존불조상로정보함

 

 

한변의 길이가 17.5cm 높이 16.6cm 무게 1612g이다. 몸은 입방체이고 뚜껑을 연결하는 열쇠도 경
첩도 없다. 뚜껑과 몸의 네 부분에 합계 5개의 '금강계만다라성시회'가 나타난다. 몸의 정면 왼쪽에는 '봉위황제경조석가모니불진신보함 奉爲皇帝敬造釋迦牟尼佛眞身寶函)이라는 문구가 조각되어 있다. 아랫부분에는 또다른 문구가 있는데 '대당함통십이년시월육일유법제자비구지진경조진신사리보함영위공양(大唐咸通十二年十月六日遺法弟子比丘智眞敬造眞身舍利寶函永爲供養)이라고 조각되어 있다. 정면 주존은 아미타불이고 사방에 금강법(金剛法) 금강리(金剛利) 금강인(金剛因) 금강어(金剛語)의 네 보살을 볼 수 있다. 뒷면에는 아축여래(阿閦如來)와 금강살타(金剛薩埵) 금강옥(金剛玉) 금강애(金剛愛) 금강희(金剛喜)의 네 보살이 조각되어 있고 왼쪽에는 부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를 중심으로 금강업(金剛業) 금강획(金剛謢) 금강아(金剛牙) 금강거(金剛擧)의 네 보살이 각각 나타난다

 

 

유금삼점목문은여가병

 

 

유금삼고저문은알가병(琉金三鈷杵紋銀閼伽甁) 높이 19.8cm 윗지름 7.5cm 몸길이 13cm 무게 
695g. 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로 목은 가늘고 몸통은 구형으로 나팔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새 주둥이처럼 생긴 입이 있다. 몸통 중앙 네 곳에 삼고저(三鈷杵)를 십자형으로 교차시킨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몸통 아랫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연꽃과 연꽃 사이에도 삼고저가 있다. '알가(閼伽)'란 불전에 공양하는 물을 가리키며 알가병(閼伽甁)은 밀교의 관정(灌頂-수도자가 일정한 지위에 오를 때 머리에 향수를 붓는 의식) 으로 준비하는 그릇이다.

 

 

유금쌍봉문은향낭

금박을 한 상아문 은향낭과 소조 운양을 금박을 한 은향낭

 

크기가 다른 한 쌍의 향낭(香囊)이 발굴됐다. 그 간운데 큰 것은 '유금쌍봉단화문누공은향낭(鎏金
雙蜂團花紋鐞孔銀香嚢)'으로 명명됐다. 향낭은 둥근 모양이며 구멍이 뚫려 있다. 위아래로 나뉜 반구체를 경첩으로 연결시키고 갈고리 모양의 쇠붙이로 여닫게 만들어져 있다. 아래 반구체 안에는 두 개의 동심원으로 이뤄진 지평환(持平環:평형을 유지시키는 고리)이 들어 있고 머리의 둥그런 못이 향우(香盂:향을담는 바리)와 본체를 연결하고 있다. 향낭의 머리부분에는 둥근 손잡이가 달려 있는데 위로 U자 형의 은으로 만든 사슬로 연결돼 있으며, 사슬 윗부분에는 마찬가지로 둥근고리가 달려있다. 사슬 아랫부분에는 연꽃 망울이 달려 있다. 이것은 현대 자이로스코프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향낭을 어떻게 놓더라도 안에 있는 향우가 언제나 평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향낭의 위아래 반구체에는 모두 둥근 원 안에 참 방식으로 두마리의 벌을 새긴 무늬 다섯 개를 집어넣었으며 맨 꼭대기 부분에도 네 마리의 벌이 들어 있는 둥근 자수무늬를 집어넣었다. 향낭의 바닥에는 잘린 나뭇가지의 둥근 자수무늬로 장색했다. 전체적으로 넓은 잎사귀 무늬를 하고 있고 구멍이 여러군데에 뚫려 있다. 지름은 128mm, 위에서 향낭을 잡고 있는 은 사슬의 길이는 245mm, 무게는 547g 이다

 

 

유금원앙단화쌍이대은반

 

유금원앙단화문쌍이권족은분(鎏金鴛鴦團花紋雙耳圈足銀盆) 높이 14.5cm 지름 46cm 무게 6265g 
주물로 되었고 문양은 도금되어 있다. 4개의 꽃잎이 붙어있고 테두리를 향해 바깥으로 벌어져 있
다. 낮고 둥근 다리가 붙어 있다. 벽면에는 4장의 꽆잎이 보이고 거기에는 2개의 석류단화문이 조각되었다. 각각의 단화문 중앙에는 연화 위에 날개를 펼친 원앙이 조각되어 있고 그것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단화문의 주위는 구름문양과 나뭇잎 문양으로 채워져 있다.테두리 아래쪽 두 군데에 짐승 얼굴의 고리가 붙어 있고 둥근 다리는 약간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으며 24개의 연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아래 외벽에는 절서(浙西)라는 두 글자가 조각되어 있고 이것은 절강서도(浙江西道)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현존하는 당나라 금은 수공예품가운데 가장 진귀한 보물로 여겨진다

 

 

 

백옥관 (白玉棺)

 

 

 

수정관 (水晶棺)

 

 

 

반구세경첩삭담황색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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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문사는? 

 

기원전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중국 당나라시기의 황실사찰

 

 

법문사(法問寺) 는 후한(後漢) 시대인 147~189년의 환제(桓帝), 영제(靈帝) 시대에 창건되어 이미 1800년이 넘는 역사를지닌 사찰로서 중국 섬서성 부풍현(扶風縣) 법문진에서 북쪽을 약 110km도는 지점에 위치하고있다.
이 지역은 산시성 남부의 관중(關中)분지를 흐르는 웨이허(渭河)의 중류에 해당된다.
웨이허는 간쑤 성 웨이위안 현에서 발원하여 황하(黃河)로 흐르는 강이다. 그 유역은 오래전부터 중국 역사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서주(西周)의 요람이었던 주원(周原)의 호경(鎬京), 진(秦)에 의한 융청(용 成)과 센양(咸陽), 한(漢)이 시작된 장안(長安) 등 이 지역에 경영된 이 같은 역대 국도의 존재는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당의 수도였던 장안은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정치, 문화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또한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이 되고 있어 당시 세계 제일급의 국제도시가 되어 있었다. 법문사의 역사는 바로 그 같은 환경 아래서 시작되었고 불지사리라는 존재와 함께 전개되었다.
법문사는 근대에 들어와 오랫동안 잊혀 졌다가 . 그러나 1987년 법문사 진신보탑의 발굴 작업 중 탑의 지하실, 곧 지궁에서 귀중한 당대의 문물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해 사람들은 법문사의 존재와 역사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하궁은 황제의 능묘를 모방한 석조 건출물이다.
지하궁은 일도(一道), 오문(五門), 사실(四室)로 되어 있다.
7부분으로 설명이 가능한데, 지하계단, 평대, 지하복도, 전실, 중실, 후실, 밀감이다.
총길이는 21.1미터, 총면적은 31.48 평방미터로 전실, 중실, 후실, 밀감에는 불지사리가 각각 1과씩 봉안되어 있다.
지하계단, 평대, 지하복도에서는 고대의 화폐인 동전이 깔려 있었다. 전실에 들어가기 위한 문 앞에는
『진신지문비(眞身志文碑)』와『헌의물장비(獻衣物帳碑)』가 있다.
이 비석은 당 함통14년에 불지사리를 장안에서 영접한 후 마지막으로 다시 법문사에 봉안할 때 새긴 비석이다.
『지문비』는 중국역사상 남북조시대의 북위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역대 제왕들이 법문사에 들러 불지사리를 친견하고 공양물을 바치며 예를 올린 것에 대한 기록이다.
『물장비』는 명나라 의종, 희종 황제와 그 권속, 그리고 고승들이 불지사리에 공양한 공양물 및 정황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지하궁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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