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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어둠의 확보!>의 줄거리:
인공조명의 남용으로 인해 인체와 자연환경에 해를 끼치는 현상을 빛공해라고 합니다.100년 전에 비해 지구의 어둠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석유를 찾고 물을 찾듯이 이제는 어둠을 찾아야 할 떄가 되었습니다. 신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입니다. 영적인 인공조명을 끄고 어둠을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 드리워진 그 어둠을 내 것으로 삼지 않는 한 신앙과 구원은 성립 되지 않습니다.
어둠의 확보!
(막15:33-41)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어둠의 확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석유를 찾고 또, 이제는 물을 찾듯이 그렇게 어둠을 찾아야만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00년 전에 비해서 지구 전체 위의 어두움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물이 없어서 지구의 초목지가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두움이 지구 위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어두운 시간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어두운 면적이 100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는데, 이것이 큰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빛 공해라는 말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이제 빛 공해에 대한 법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빛 공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공조명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서 인체가 해를 입게 되고 자연현상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식물들은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성장과정이 파괴되어버리고, 호숫가에 건물들이 들어서고 조명이 많아지면서 홍조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있는 미생물들을 잡아먹는 일이 없어지게 되고, 철새들은 원래 밤에 날아갈 때 달빛과 별빛을 보면서 방향을 정해서 날아가는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발광체가 되면서 달빛과 별빛이 눈에서 사라져버리고 공중에 날던 새들이 도시 근처로 날아들게 됩니다.
이렇게 도시 속으로 들어오면서 건물에 부딪히고 탑에 부딪히고 하면서 철새가 길을 잃게 됩니다.
야행성동물들은 사냥에 문제가 생기고 짝짓기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생태계 전체에 교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체는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습니다.
멜라토닌은 눈으로 시신경 망막에 빛이 차단될 때 인체에서 밤인 줄 알고 내보내는 호르몬인데, 이 멜라토닌이 수면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잠자는 동안에 인체에 들어오는 모든 균들을 이겨내는 저항력을 발휘하면서 암세포까지도 잡아먹는 게 멜라토닌입니다.
그래서 조사해본 결과, 늘 인공조명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이 인공조명에 노출되는 시간이 적은 여성들에 비해서 무려 73%나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멜라토닌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을 때 우울증이 생기게 되고, 여러 가지 생체리듬이 깨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가장 민감하게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천문학입니다.
천문대는 도시로부터 주변에 50~100km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지 않으면 천체를 관측할 수가 없습니다.
도시에 있는 주황색 가로등 빛이 아주 결정타를 준다는 거예요.
아무리 예민한 관측 망원경을 갖다 대도, 도시 불빛이 한 3,40km 내에서 뿜어 나오고 있으면 별이 관측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빛 공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두움을 찾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의식이 깨어있는 나라 정부의 노력의 일환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을 찾아야 됩니다, 어두움을 확보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200년 전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시간이 여섯 시간 동안이었는데, 6시부터 9시까지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달려계신 여섯 시간 중에 하반부 3시간 동안 어두움이 임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여기서 6시부터 9시라는 것은 유대시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정오 열두시부터 세시까지입니다.
열두시부터 세시까지라고 하는 시간대는 적도에 가까운 근동지방에서 태양이 가장 강렬하게 빛을 발할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온 유대 땅 위에 어둠이 가득 차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요즘 의식이 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빛 공해문제의 대책, 어둠을 확보하기 위한 이 노력을 2000년 전에 어둠을 확보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사건이라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십자가 위에 세 시간 동안 드리워져 있는 이 어두움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어두움을 회복하는 것이고, 어두움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어둠이 확보되지 않으면 천문대에서 도시의 불빛이 조금이라도 침입해 들어올 때 천체를 관측할 수 없듯이, 이 주님의 십자가 위에 드리워진 어둠이 내 마음에 확보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관측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입으로 하나님을 불러도 마음에 하나님이 관측되지 않습니다.
실제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 관측되지 않을 때 신앙은 성립되지 않고, 구원은 성립되지 않고, 기독교는 존립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측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 어둠이 필요하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순간에 모든 영적인 의미에서의 인공조명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얘기를 의미합니다.
인공조명이 사라지고 어둠이 마음에 들어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마음에 어둠이 들어차면서라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관측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인공조명을 사라지게 하는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었다는 얘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인공조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속의 인공조명, 이게 사라지는 사건이 십자가인데…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 우리 삶의 자리, 이것의 특성이 뭡니까?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까?
바로 저주 받은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주의 특성은 어두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아버지가 빛의 원류이시기 때문에, 빛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저주이고, 저주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둠을 말합니다.
이 어둠인 저주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지가 멀쩡하고, 공부 잘하고, 대통령이 되었어도 저주 속에 있는 대통령이고, 왕이 되었어도 저주의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 왕인 것입니다.
그 어떤 성공이라도, 그 어떤 성취라도 모두가 다 저주의 흑암 속에서 이루어져 있는 그런 성공이고 그런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 위에 인간들이 또 하나의 저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저주가 뭔지 아십니까?
쉽게 말하면, 희망이라는 것이에요, 희망.
희망이 바로 인간이 저주의 어둠 속에서 만들어낸 빛입니다, 인공조명이에요.
어두움이 싫어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조명이 바로 희망이라는 겁니다.
희망과 소원과 비전이라는 겁니다, 비전이 뭐예요? 눈으로 본다는 것이에요, 빛이 있어야 보는 것 아닙니까?
그 비전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주어진 인공조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죄 값으로 내리신 이 저주의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을 이기겠다고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희망인데, 그 희망의 내용은 이 세상 안에서의 희망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희망하고 꿈꾸고 소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인공조명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 희망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좋은 것, 좋다고 하는 것을 향한 희망입니다.
이 좋은 것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설정이에요, 설정.
이 세상 안에서 설정된 것입니다.
‘자, 돈이 좋다고 하자!’ 설정된 것이에요.
원래 돈은 그 자체로 좋은 게 아닙니다.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내 마음 안으로 빨아들여야 될 좋은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 그 자체가 좋은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낸 설정이에요, 설정.
설정이 뭔지 아시지요?
예를 들어서, ‘드라마를 설정한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여자는 백혈병에 걸려서 이제 죽어가게 된다’라고 설정을 해놓고 그 뼈대 위에 살을 채워가는 겁니다.
이렇게 설정된 것이에요.
이 설정이 뭐냐 하면 인공조명이라는 겁니다.
저주의 어두움과 싸우려고 인간이 스스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조명이 설정된 좋은 것들, 건강과 돈, 성공, 권력, 이런 모든 것들이 ‘이게 있으면 좋은 것이라고 하자! 이게 있으면 행복한 것이라고 하자!’ 하고 설정된 것이고, 그 설정에 태어나는 세대 모든 후손들이 다 세뇌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전까지는 만족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빛은 하나님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빛과 관계되어서 희망이라고 하는 말을 송대관 씨가 노래로 불렀어요.
‘쨍하고 볕들 날 돌아온단다, 하고 또 하고 노력하면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노력하면 쨍하고 볕들 날이 온다, 이 빛이 희망입니다.
이게 인공조명이에요.
나도 언젠가는 돈 많이 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큰 집에서 살고 좋은 차 타고 다닐 것이라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백마 타고 온 기사와 결혼할 것이라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건강을 회복해서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살 것이라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서울대에 들어간 자식을 갖게 되는 부모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크루즈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로운 노년이 주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전부 이 세상에 갇혀있는 희망을 인공조명으로 밝히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저주의 어두움을 저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어요.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저주라면 그 저주도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는데, 어디로 버리신 겁니까?
저주 속으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거라면,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셨다면 저주까지도 받아들여야 되는 거죠.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면…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해서 저주의 어두움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하나님이 관측되면서, 멀리 있는 별이 관측되듯이 내가 하나님과 지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괴로워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를 자기들이 극복하겠다고 인공조명을 만들어낸 거예요.
빛이신 하나님, 그분만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만족하게 할 수 있고,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이 지음을 받았는데, 그 마음 안에다가 세상에서 좋다고 설정된 것들을 품고, 그것들을 희망하면서 인공조명을 쐬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인공조명의 방해를 받아서 인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전혀 관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처럼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이에요.
설정 속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고, 저주의 어둠 속에서 우리들이 스스로 설정한 것들에 대한 희망의 인공조명을 뿜어내면서 살아가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창조의 의도에 따르면 삶이라는 것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게 아닙니다.
삶에 임하기 이전에 인간은 행복해야 하는 것이고, 행복한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 삶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 삶이 되는 것이지, 삶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에요.
삶에 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마음으로 만나서 마음에 하나님을 채우고 행복했어야 되는 것인데, 이 하나님과 결별된 저주의 상태를 저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의 힘으로 극복해야 될 과제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좋은 것들을 설정하고, ‘돈이 좋다, 건강이 좋다, 성공이 좋다, 형통이 좋다’ 이런 것을 정해놓고 그 좋은 것들을 향해 희망인 인공조명을 뿜어내면서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의 어두움을 극복하려 했다는 것이 저주에 저주를 더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한 날이 없으니까.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행복한 날이 없으니까.
쨍 하고 볕들 날을 기다리면서 불만에 차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결별된 저주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반응을 하신 인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단 3일 동안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라는데도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십니다.
이게 그렇게 괴로운 것이에요.
그리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나와 같이 되라’는 얘기는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연합해서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아그립바 왕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설정된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갖게 된 뒤로 바라보니까 배설물이더라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설정된 좋은 것들을 갖고, 돈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명예라든지 인기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잔뜩 갖고 으스댈 때, 우리의 그 모습을 보면 똥을 한 가득 금고에 넣어놓고 좋아하는 것과 같더라 이겁니다.
왜 이렇게 비유가 됩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내 마음에서 돈이 들어와 있고, 성공이 들어와 있고, 이 세상 안에서 건강이 들어와 있고, 이 세상 안에서 명예가 들어와 있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똥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그것은 부러운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도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것은 저주 중에 저주입니다.
똥을 품고 좋아하는 것과 같다는 얘깁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 안에서 설정되어진 좋은 것들을 향한 모든 인공조명으로서의 희망을 제거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과 함께 나는 이 세상 안에서는 더 이상 희망하는 것이 없어지는 절망하는 상태가 찾아옵니다.
이 인공조명이 꺼진 어두움의 상태가 이 세상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소원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희망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꿈꾸지 않는 어둠의 상태가 마음으로 몰려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죽음이에요, 이 세상에 대해 죽은 거예요.
이렇게 세상에 대해 죽은 어두움, 세상에서 만들어진 모든 인공조명이 꺼진 어두움이 내 마음에 몰려올 때에 내 마음은 드디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관측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아버지를 관측하게 될 때, 멀리 계신 하나님아버지를 소망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연합해서 내가 죽는 것이 믿음이라면, 내가 그 믿음을 가질 때 주어지는 세상에 대한 어둠,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끊어짐, 인공조명의 사라짐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관측하고, 그 아버지와의 거리를 느끼면서 아버지께로 가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소망이고,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이 거리를 없애주시면서 내 마음이 보좌에 계신 아버지를 느끼게 하고 보좌에 계신 아버지와 연합되게 해주시는 이 사건이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 세상에서의 좋은 것들을 향한 소원과 희망과 꿈의 인공조명이 십자가로 꺼져서 세상을 향한 어두움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관측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어두움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돈이라는 인공조명, 출세라는 인공조명, 인기라는 인공조명, 아름다운 결혼이라는 인공조명, 건강이라는 인공조명을 켜놓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관측하지 못하고 하나님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공조명이 사라지고 십자가 위에 임했던 어두움이 내 마음을 차지하면서 그 어둠 속에서 하늘에 빛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관측해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관측된 하나님과 연합되는 복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주님! 놀라운 은혜의 말씀앞에 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