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한 가수 홍민씨의 노래는 듣는 사람들의 감성을 충분히 만족 시킵니다..그렇다고 저음이 매력이 없냐 하면 그 것 또한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 하지요..
그는 아주 중후한 저음으로 우리들 가슴을 충분히 적셨습니다..
1947년 경기도 화성시에서 교수였던 아버지와 성악가 출신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홍민 씨는 4살이 되던 1951년, 가족들을 남겨두고 홀로 북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1951년 9월 28일 당시 서울대 농대 교수였던 아버지 홍희유씨는 소설가 이문열 씨의
아버지인 이원철 씨 등과 함께 월북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홍민 씨가 네 살, 누나가 여섯 살 남동생은 겨우 두 살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어머님은 홍민 씨의 누나와 함께 아버지를 찾으러 집을 나섰지만 행방불명 됐고, 홍민 씨와 남동생은 외가집으로 보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역시 사망했다고 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있었던 일이라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 역시 없었고 홍민 씨는 오히려 담담하게 살아왔다고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없기 때문에 그리움이란 감정 역시 막연했다고 하는데요.
홍민 씨는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이 딱하나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홍민 씨를 보고 '네가 홍민이구나. 난 네 어머니의 친구야'라고 했다는 건데요. 이를 들은 홍민 씨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마음이 뭉클해져 한참을 그 아주머니를 따라갔었다고 하네요.
당시 홍민 씨의 외가집에서는 아버지의 월북 사실에 대해 아무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고, 그렇게 비밀로 묻어둔 채 조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홍민 씨와 친척들은 아버지의 월북 사실을 숨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홍민 씨는 해외여행은 물론이며 여권 신청 또한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음악을 전공해 군악대에 들어간 아들이 신원조회에 걸려 문제가 될까 가슴을 졸였던 경험도 있다고 하네요.
한편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홍민 씨의 아버지 홍희유 씨는 북한에서 학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확인 가능한 저서만 해도 수십 권이라고 하는데요. 홍민 씨는 아버지에 대해 그저 저서를 통해 199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악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노래를 일찍 접한 홍민은 1968년 서울 명동으로 진출,
1971년 살롱 아마존에서 열린 주간경향컵 뉴스타팝 그랑프리 출전해 2위를 차지하면서
서울 명동의 쉘부르 무대에 진출하여 라이브로 실력을 검증받았습니다.
그의 히트곡으로는 <고별>, <석별>, <고향초> <나는 가야지> 등이 있습니다.
제천시에 청풍호와 금수산 등 수려한 경관에 매혹돼 청풍면 소재지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놓고 통기타를 치며 70~80년대 유행했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답니다.
2008년 문을 연 이 카페는 본인의 이름을 따 '홍민의 집'으로 지었답니다.
그의 대표곡 '고별' '석별'을 비롯해 인기를 얻은 대부분의 노래들은 아픔과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것이 그 특징이었는데요. 사실 홍민 씨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가수입니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홍민은 절친한 가수 이용복이 살고 있는 태안으로 떠나 마리포 앞바다에서 펼쳐진 두 사람만의 작은 콘서트 현장도 공개될 예정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추억속에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가수 홍민씨를 기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홍민 (석별/사랑을 넘치게 하리) 제조회사:76.오아시스 OL 1493.
음음음 음음음 음음음 음음음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우는 마음 아프지만 내 마음도 아프다오 고개를 들어요 한숨을 거두어요 어차피 우리는 이제 헤어져야 할 것을 사랑은 그런 것 후회는 말아요 기쁘게 만나 슬프게 헤어져 그런 줄 알면서 우리 사랑 한 것을 운다고 사랑이 다시 찾아줄까요 *그런 줄 알면서 우리 사랑 한 것을 운다고 사랑이 다시 찾아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