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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화요일) 맑음
모처럼 잠을 잘 잔 것 같다. 눈을 뜨니 느낌이 산뜻하다. 전등을 켜니 새벽을 밝히는 여명이 스며든다. 얼른 옷을 주워입고 새벽 산책에 나선다. 현관문을 나서자 금방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뼈 속까지 파고 든다. 오랫동안, 정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새벽 공기 속의 싱그러움이다. 서울에서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지냈으면서도 좀처럼 느껴 보지 못했던 싱그러움이다.
밤새도록 켜 있는 가로등이 서서히 몰려오는 새벽빛에 이제는 희미하게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잔디밭 사이로 곧게 뻗은 차도를 따라 걸어 나간다. 갑자기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
차도가 알맞게 어우러져 있다.
나이 알아 맞히기와 서양사람의 동양사람 나이 알아 맞히기이다. 서양 사람에게는 동양사람의 작은 체구 때문에 나이가 어려 보이고, 동양 사람에게는 서양사람의 그 큰 체구 때문에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 퍼즐 게임은 가끔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한다. 바로 오늘 아침 식당에서 일어난 해프닝은 고소함마저 느끼게 한다. 현란한 유니폼을 입은 여학생들로 오늘아침 식당은 유난히 붐볐다. 몇 그룹이 더 추가 된 모양이다. 반대편 쪽 여학생들이 많이 모인 쪽으로 가려던 필자는 입구에서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뚱뚱이 늙은 이로부터 제지를 당했다. (젊은 양반)”이란 단어가 순간적으로 머리를 자극한다. 필자의 나이가 20살이 젊어 보이고 필자의 눈에는 그의 나이가 15년이 더 들어 보였다. 그의 나이 47세.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
오늘은 이변이 계속 일어날 모양이다. 오늘 아침 대국 상대는 6살의 중국계 미국 유치원생이다. 목에 걸린 이름표에, 캘리포니아 주, 칼빈 리. 아마6단으로 되어 있다. 5단진에 6단이 합세한 것도 이변이지만, 양쪽 볼에 아직 젖살이 선명한 어린 아이와 대국을 하게 된 것도 이변이라면 이변일 수 있다. 잉 마스터즈의 챔피언이 된 장밍주 프로7단의 도장에서 수련하는 유망 기사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기원 원생인 셈이다.
너무 어려서 쑥스러운 면도 있었으나 호흡을 가다듬고 신중하게 두어 나갔다. 필자의 집흑으로 시작된 대국은 우세한 판세로 진행되었으나, 칼빈 리의 대국자세가 자꾸 신경을 거스른다. 앉은자세가 낮아 목에까지 차 온 테이블 위로 한쪽 손을 턱에 고이고 비스듬히 누워서 바둑돌로 구슬치기를 하곤 한다.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와서 자세를 바로 잡아 주지만 몇 분만 지나면 원 상태로 되돌아간다. 대등하게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속 깊은 중국 사람들의 심리전인가? 결국 반면 7집승을 하였으나 덤 7호반에 걸려 반 집 패가 되었다. 5단과 6단의 대국에서 덤이 적용되는지 여부를 본부에 조회하려고 하였으나, 다음 스케줄에 밀려 그대로 스치고 말았다.
세심한 배려는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프로기사는 모두 18명. 중국계가 10명, 일본계가 6명, 한국인 1명, 그리고 미국인이 1명.
미국계뿐이다. 미국인 1명은 제임스 커윈(James Kerwin) 프로 초단으로 1978년도에 일본기원에서 입단하였으며, 비 아시아계 최초의 유단자가 되었다. 1982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전 미주지역과 캐나다를 순회하며 바둑 보급에 전력 투구했다. 현재도 그는 미국 바둑협회에서 발간하는 전자 신문사에서 바둑 보급에 공헌하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 프로들이 공식 기전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는 기전 상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최측은 모든 프로들에게 알맞게 역할을 분담시켰다. 즉, 바둑강의, 기전 해설, 8인 상대의 다면기, 3인 상대의 지도기, 유료 지도기 등. 6인조 그룹 2시간짜리는 1인당 35불씩,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무료한 시간을 갖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셈이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프로들 쌍방에 유익한 윈-윈 작전인 셈이다.
뿐만이 아니다, 17세 이하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교실을 별도 마련하여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주 경기장 아래 층에 준비된 어린이 교실에는 정규 바둑판은 물론 미니 바둑판(9 x 9, 13 x 13), 간이 매점, 바둑과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컴퓨터 7대, 미니 당구대, TV 등. 이 곳에서도 매일 어린이 기전, 기보해설, 바둑강의, 다면기 등이 이루어져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질서는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동안 느낀 점은, 기초부터 철저하게 다진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한결 같다. 또 하나는 질서를 지키고 상대방에게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춘다는 느낌이다. 공식시합이나 비공식 시합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은 깍듯이 대하고 끝 날 때면 감사하다는 말을 놓치지 않는다.
1. 시작할 때, 프로기사가 귀하의 바둑판 앞에 오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2. 프로기사가 귀하 앞에 오면 즉시 착점한다. 3. 프로기사가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 착점하면 안 된다. 프로기사가 귀하의 착점을 찾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4. 대국 중 주위 사람과 상의하거나 잡담을 해서는 안 된다. 대국에 열중 하는것은 프로에 대한 예의다. 5. 판세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면 즉시 포기하라. 6. 판이 끝나면, 프로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떠나기 전에 바둑판을 깨끗이 정리하라.
( 7편에 계속됩니다.) |